Sunday, January 19, 2014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로마서 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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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본은 관심과  애정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싫증내지 말고 주십시오. 상처를 받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십시오.”
이것은 10여년 전 (1997년) 87세를 일기로 심장병으로 소천한 테레사 수녀가 한 말입니다.
5척 단신인 테레사 수녀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고 여기며 가난한 자들의 곁을 자기 자리로 고집했고 이 세상에서 몽당연필의 역할을 다마치고 더 나은 본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는 1910년 8월 27일에 알바니아(마게도냐)의 수도 스코피(Skopje)에서 건축가의 삼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본명은 아그네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ejaxhiu)입니다.
18세때(1928년) 집을 떠나 아일랜드 더블린의 로레토 수도회(Loretto Order)에 들어가 수녀가 되기 위한 신앙생활의 첫발을 내디딥니다. 이때 얻은 세례명이 테레사(Teresa)입니다.
19세때(1929년) 인도 캘커타의 세인트 메리 고등학교 교사로 임명받고 현지에 도착합니다.
27세때(1937년) 수녀가 되기로 최종 서원(誓願)합니다.
36세때(1946년) “가난한 사람들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계시를 받고 일생을 그렇게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38세(1948년)부터 캘커타에서 본격적인 구제활동을 시작하며, 40세때(1950년) 사랑의 선교회(The Order of Missionaries of Charity)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그후 50년을 한결같이 가난한 자 가운데 사랑의 천사로서의 생을 보내고 마감합니다.
1974년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모든 인간에게서 신을 봅니다. 나환자의 상처를 씻을 때는 그리스도를 돌보는 느낌입니다. 어찌 아름다운 경험이 아니겠습니까?”란 말을 남긴 테레사 수녀가 평생 봉사를 통하여 세계를 감동시킨 것은 그의 순수성(純粹性)과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에도 “연회를 열지말고 연회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자신의 활동에 대해 “베푸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작은) 구원”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1996년 8월 그의 심장병이 악화되었을 때 병상에서 그리-스의 미카엘공을 만났을 때, 테레사 수녀는 “어느 날 꿈속에서 내가 천국의 문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내게 ‘지상으로 돌아가라. 여기에는 빈민굴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하며 이 세상 삶에서의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일생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성녀(聖女)의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오적조건이 우리보다 특별히 뛰어나서 그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150cm도 되지 않는 단신이요, 교육도 그리 많은 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의 나라가 강국이라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 하나인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활동무대가 spot-light을 받는 세계의 중심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지가 아닌 인도의 빈민촌에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머물러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에 대해 다른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가  세계에 알려진 것은 긴 세월을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께 대하듯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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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리부분인 1-8장에서 믿음에 대해서 다루고 실천부분인 12장 이하에서 사랑에 대해서 다룹니다. 12장이하에서 자신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무와 변화에 대해서 언급한 바울은 다시 작은 단위(unit)인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앞서 로마서 8장 12절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갚을 길 없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탕감해주셨습니다. 해서, 우리도 우리 형제·자매의 잘못을 사랑으로 탕감해주어야 하며 그들이 굶주리고 목말라할 때 이를 공급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들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채워줄 때, 우리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빚을 갚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우리가 또 부지불식(不知不識) 가운데 형제·자매에게 잘못을 할 때 혹은 우리가 궁핍할 때 그들에게 사랑의 빚을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 12절 황금율에 있는 대로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했습니다. 해서, 사랑의 빚을 질 수 있는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빚을 먼저 탕감해주므로 우리가 또 빚을 지게 될 경우에 탕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적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사랑과 용서를 당연시할 때, 이 사람은 주님의 대속의 사랑에 대해서도 감사함이 전혀 없는 삶을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4절 이하에서 (병행구절: 마가복음 12:28-31) 바리새인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신 6:5, 10:12). 둘째는 그와 같으니 (=And a second is like it; 둘째도 첫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레 19:18)” 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에 대한 구약의 언급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에 있는데, 모세는 신명기 5장에서 십계명을 말씀한 다음에 6장에서 하나님사랑을 말씀하고, 또한 레위기 19장에서는 십계명을 비롯한 주요사항을 설명하는 중에 이웃사랑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둘째 계명이 결국은 첫째 계명과 같다”(And a second is like the first one)고 말씀하셨는데 어찌 그렇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눈에 보이는 일을 먼저 할 수 있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데 있는 쉬운 일, 작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먼 데 있는 어려운 일, 큰 일도 감당합니다. 실천 장에서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일들은 눈에 보이는 우리 주변의 일들입니다: 나, 교회, 믿지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사회와 국가, 그리고 다시 이웃. 이러한 주변의 일들에 충실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한결같고 신실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2장 1절 이하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의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 일이 그리스도인의 실천강령(實踐綱領)으로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일들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일부터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또한, 12장 2절에 말씀한 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두 개의 다른 계명이 아니라, 결국은 사랑이란 한 계명안에 포함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둘째 계명이 첫째 계명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둘째 계명 역시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첫째 계명인 하나님 사랑을 잘 이행하고 있다고 입으로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며--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해서, 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말씀한 것은 바로 이와같은 까닭입니다. 눈에 보이는 남--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이로소 율법의 가장 큰 두 계명을 지키는 자이며 이 가장 큰 두 계명안에 모든 율법의 본질이 포함되어있습니다.

9절에서 바울은 구체적인 율법의 조항들 가운데 일부를 나열해봅니다: “간음하지 말라” 한 것은 십계명중 제 칠계명이요, “살인하지 말라” 한 것은 제 육계명이요,  “도적질하지 말라” 한 것은 제 팔계명이요, “탐내지 말라” 한 것은 제 십계명입니다.
성경에서 율법이라 할 때, 가장 좁은 의미는 십계명이요, 보통의 의미는 흔히 토라(ה■וֹת)라고 불리우는 모세오경(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이고, 넓은 의미로는 창세기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율법서와 선지서를 다 포함합니다. 또 신약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신·구약 전체를 가리키건, 구약 전체를 가리키건, 모세오경만을 가리키건, 아니면 십계명만을 가리키건 이 율법은 사랑이란 한 마디로 요약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율법의 완성이라 말할 때, 이 그리스도는 사랑의 본체란 뜻입니다.

십계명을 살펴보면,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삼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제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육은 “살인하지 말찌니라”; 제칠은 “간음하지 말찌니라”; 제팔은 “도적질하지 말찌니라”; 제구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제십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입니다.
이중, 제일에서 제오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연관되어있습니다. 제육에서 제십계명까지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관되어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살인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여인을 간음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집을 탐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 소유를 탐하지 않을 것입니다.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 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3-14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말씀합니다.
 
사랑은 이웃에 대하여 어떤 악도 행하지 않습니다. 살인하지 아니하며, 간음하지 아니하며, 도덕질하지 아니하며, 거짓증거하지 아니하며, 탐내지 아니합니다.
이웃사랑은 이웃에 대하여 하지 말아야 될 악을 행치 아니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12장 17절에서 바울이 말씀한 대로 이웃사랑은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는 삶”입니다.
이웃사랑은 이웃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할 때에 마실 것을 주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우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迎接)하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갇혔을 때에 찾아가보는” 적극적 행동입니다.
이렇게 할 때 이러한 이웃사랑의 마음은 곧 하나님을 잘 대접하는 하나님사랑의 마음이며 해서 우리의 사랑은 주님이 그러셨듯이 율법을 이루는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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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탐험가로 유명한 사람 가운데 영국인 세클턴이 있습니다.
기자들이 그와 회견하는 중에, 그의 탐험 경험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달라고 요청합니다.그가 탐험대장으로 대원들과 함께 남극을 탐험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조난을 당하여서 생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임시 대피소에 피하기는 하였지만 식량도 다 떨어지고 그날 밤 추위에 어떻게 살아남을지 암담할 따름입니다. 배고품과 추위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마지막 건빵봉지를 나누어줍니다. 오늘방 이 혹한에 누군가 살아남아서 자신들의 조난경위와 운명을 보고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바람뿐입니다.
대원들은 혹심한 추위에도 고단한 나머지 다 곯아 떨어졌는데, 이 세클턴은 대장이라고 하는 책임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대원들 가운데 한명이 조심 조심 일어나더랍니다. 그리고는 자기 전에 나누어준 옆 사람의 건빵 봉지를 슬쩍 합니다. 그 대원은 다름아닌 세클턴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동료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옆에서 자고있는 동료의 생명줄과도 같은 건빵을 훔치다니 가슴이 철렁하고 어이가 없고 배신감으로 분노마저 치밀어 올랐습니다. 당장 일어나서 호통을 쳐주고 싶지만 그렇지 않아도 절망가운데 잠든 대원들을 더 큰 절망과 배신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싶지않아 그대로 누워서 더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대원은 슬쩍한 옆 동료의 건빵봉지를 뜯고나서는 또 자기의 건빵봉지를 뜯더니 자기의 건빵을 한웅큼 꺼내서는 옆 동료의 건빵봉지에 집어넣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을 청하더랍니다. 그때 그는 형제 사랑이 무엇인지 비로소 발견했다고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 위기에 처하여 마지막 생존근거인 건빵을 동료를 위해 몰래 자기 것을 더 덜어줌에서 위대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물론, 그들은 그 조난에서 극적으로 다 구출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믿으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삶을 사심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확증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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