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26, 2014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로마서 14:7-12)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로마서 1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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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정치시대에 사는 신하들은 왕을 그들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오직 왕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의 의견이나 행동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왕을 위하는 것이 아닐 때 충신으로 불리우지 않습니다. 때로는 왕을 위하는 주장이나 행동이라 할지라도 왕의 노여움을 사서 귀향을 가거나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주인의 집관리를 맡은 하인이 주인의 눈을 속이고 자기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물건을 빼돌린다면 그는 충직한 하인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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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14장 4절에서 믿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인과 주인의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한 주인이신 하나님의 하인(servant)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인은 우리의 하는 일에 일일이 간섭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할 일이 무엇인지 지시사항을 알려주신 후에는 한동안 여행을 떠난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돌아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그분에게 돌아갈 때까지 우리를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직무가 끝나는 날이 올 터인데 그때는 그분과 셈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생을 우리의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7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우리는 주인의 집과 그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steward)라고 했습니다. 청지기의 직무를 주시되 재량권을 많이 주셨습니다. 해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맡고 경영하는 재산이, 시간이, 몸이 다 자기 것인줄 착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지만 이는 주인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집사(deacon)란 말이 이조시대와 그 이후에도 사용되어왔는데, 이는 양반집이나 부자집의 재산이나 창고를 관리하는 사람을 일컬음입니다. 이 집사란 사람이 주인을 위하는 삶을 사는 대신에 자기를 위하는 삶을 살 때에 그는 부정하고 악한 사람이라 여김을 받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살지 못하고 죽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하나님께 영광돌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기 전에도 우리는 우리 몸과 생명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에는 이 에상의 주인인 사단이 우리 생명과 사망의 주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고백입니까? 여러분도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시면서 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삶이 우리의 남은 생동안에 계속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백합니다.
또한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우리를 주장하여 달라고 요청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주인되시지만 잠잠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주장을 그분의 생각과 주장에 양보하고자 결단하고 그분께 그리하여 달라고 요청할 때 그분은 비로소 우리안에서 영으로 역사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분의 생각과 주장이 매일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해드리기 위아여 우리는 매순간 우리의 자아를 죽이는 작업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씀하는 매일 죽는 삶이며 십자가를 지고가는 삶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약하고 고집스러운 자아가 다시 살아나 자기를 주장하며 주님의 방법과 길보다는 자신의 방법과 길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9절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어 씻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심은 죄씻음받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기에 인간의 죄가 씻음을 얻고, 예수님의 살으심이 있기에 우리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신 후에 사흘동안 음부에 머무신 것은 그의 권세가 거기에도 미침을 선포하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19절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해서 모든 죽은 자와 산 자에게 미치고, 그리스도를 안믿다가 죽은 자와 잘 믿다가 잠깐동안 잠자는 자, 그리고 지금 육체로 살아서 숨쉬는 모든 인간에게 미치십니다. 이는 인간을 심판하시는 권세가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10-11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앞서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그를 비판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고, 남의 하인을 판단하지 말라고 권면한 바울은 다시 한 번 이를 언급합니다.
이는 남의 하인을 세우는 권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요 10절에 기록된 대로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에 의해서 판단되기 위해서 그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 바울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했고, 히브리서 기자는 9장 27-28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심판에서 우리가 정죄되어지는 것을 면케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심판자로서 또한 동시에 우리의 변론자(Advocate)로서 그를 바라는 우리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체로 살아서 주님을 믿고 주님안에 거하는 삶을 산 사람은 그의 갈 곳을 분명히 압니다. 그는 육체의 삶을 마칠 때 그의 영혼이 낙원에 이름을 경험합니다. 영혼이 낙원에 이른 사람은 최후에 백보좌 심판이 있지만 그가 그 징벌의 심판대에 서지 않을 것을 압니다. 이는 그가 천국에 이른 것이 이미 은혜의 심판(=판정)을 받아 영생을 얻고 낙원에 이르렀기에 징벌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징벌의 심판은 우리가 면하지만 믿는 사람의 은혜의 심판에서는 우리가 행한 것에 따라 상급심판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부끄러운 구원이 아니라 주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는 넉넉한 구원이 여러분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결국 그의 권세를 깨닫게 되고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서 주님을 믿던 자나 믿지 않던 자나 종국에 다 그앞에 무릎을 그가 주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며 자기 마음대로 자기만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결국에 그의 생명을 주관하시며 그에게 징벌의 심판을 가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권능과 보좌 앞에 그를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미 때가 늦은 자백이 될 것입니다.

12절에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直告)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3-5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 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의 전에 잘못된 행동이나 속임의 말에 대해서 적당히 둘러대어도 이것이 통할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정치인들은 한 입으로 다른 말들을 많이 하지만 잊어버리기를 잘하는 국민들은 정치인이 현재 하는 말을 사실인가 보다 믿고 받아들이다가 또 다시 그가 번복하더라도 또 그 말이 맞는가 보다고 별 판단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심판주로 임하시는 주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의 생각까지도 헤아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우리 마음 중심의 계획과 의도까지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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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 이 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장차 우리가 주님을 대면할 때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는대로,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믿지않는 사람에게는 징벌과 그에 따른 영원한 사망의 심판이 있고, 믿는 사람에게는 상급의 심판이 있습니다. 상급심판을 사모하며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우리들은 우리의 욕심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위하는 생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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