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12, 2014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 (로마서 12:9-13)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 (로마서 1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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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서 출생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루빈슈타인(Arthur Rubinstein, 1887-1982)은, “하루 연습을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을 쉬면 내 친구가 알고, 사흘 연습을 쉬면 온 청중이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에 비유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주 신앙생활을 쉬면 내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두 주 신앙생활을 쉬면 가까이 지내는 교우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세 주 신앙생활을 쉬면 온 교회 교우들이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안다.“

신앙생활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요 훈련이라고 바울은 디모데전서(4: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연습을 게을리했을 때 경기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낼 수 없듯이, 믿는 사람이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하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그 길을 달려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의 연습을 하고 훈련을 쌓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하루를 시작함에 기도로 시작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서 그치면 이는 연습과 훈련의 몸풀기에서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다음 교회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예를 들면 집사는 집사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성가대원은 성가대원으로서 연습과 본분을 잘 감당하고, 교사는 교사로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힘 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나의 도움이 필요한 교우가 있나 돌아봄이 필요합니다.
나아가서, 교회 밖에 내가 전도할 대상자가 있나 살펴야 할 것이며, 내가 선교를 직접 감당하지 못할 때 선교를 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님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생각하고 그들 돕는 일을 실천에 옮김이 필요합니다. 작은 교회에 속하였다고 내게 할 일이 없습니까? 오히려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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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로마서 12장 3-8절에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교회의 변화에 참여하되 주님께서 은혜(恩惠)로서 우리의 믿음의 분량(分量)에 따라 허락(許諾)하신 은혜의 선물인 은사를 지혜롭게 잘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지나친 과욕을 내지말고 마땅히 생각할 것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인 이 은사를 잘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은사를 사용함은 우리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서 서로를 위하고 유익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이 은사에는 사람의 재능과 성격 등에 따라 주님께서 각기 다른 선물들을 주셨는데 이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 받은 은사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한 은사의 활용이라기 보다는, 우리 교인들이 교회와 가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 제시하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지침(指針)을 12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첫째로 한글성경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라고 되어있는데, 명령적인 의미로서 영어성경의 번역이 원래의 뜻에 가깝습니다: “Let love be genuine!"(RSV) “성도의 사랑이 거짓없는 순수한 사랑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반대급부(反對給付)를 바라는 사랑이어서도 안되고,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잘해주는 것이어서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22에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말씀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뜨겁게 사랑함이--체면때문도 아니요 무엇을 바래서도 아닌--거짓없는 사랑입니다.

둘째로 “악을 미워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은 악과 결별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하는 대로 죄와 악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내가 죄짓더라도, 허물이 많은 삶을 살더라도 주님께서 내 미래죄도 용서하여 주셨으니 상관없어” 하는 사람은 여전히 악을 미워하지 않는--악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은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로 “선(善)에 속하라”고 말씀합니다. 악(惡)이 어둠이요 사단의 권세(權勢)라고 한다면, 선(善)은 빛이요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영역이니까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속하여야 할 것이요, 추구하여야 할 일입니다.

네째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love one another with brotherly affection)"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어느 사람의 집에서 무리에게 말씀을 하고 계신중이었는데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여러분의 형제요 자매입니까? 우리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원하는 우리는 영적(靈的)인 새 가족입니다. 우리는 교우들을 사랑할 때 형제사랑(brotherly love)으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부족한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받은 대접만큼만 그 사람을 대합니다. 그가 나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으면 나도 그를 위해서 별로 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우들이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먼저 다른 지체인 교우를 사랑하고 존경할 때, 그와 같이 아름다운 일들이 교회내에서 계속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12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선지자요 율법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절을 황금율(Golden Rule)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그를 원수로 대하는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제물(代贖祭物)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할 때도 우리가 “존경하기를 먼저 할 때” 그러한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로 바뀔 것입니다.

여섯째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믿지않는 사람이 칠일을 갖고 생활하는데 우리는 육일을 갖고 살면서 그들과 같은 혹은 더 나은 삶을 감당하여야 하므로 부지런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일을 말함이 아니요 교회 안에서의 일입니다. 교회의 일은 나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 아니니까 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로 “열심(熱心)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당부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忠誠)이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길 때 열심을 내기가 어려우나 이렇게 함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확증(確證)함입니다.

여덟째로 “소망(所望) 중에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 소망이 없고 낙담과 좌절만 있다면 이는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소망 중에도 즐거워하므로” 믿음이 연약한 다른 교우들에게도 소망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아홉째로 “환난(患難) 중에도 참으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서 자주 반복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의 환난과 곤고가 임하지만 이를 끝까지 잘 감당할 때 우리에게는 주님의 상급이 마련되어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4에,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逼迫)과 환난(患難)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열번째로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당부합니다.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의 영적(靈的) 호흡(呼吸)입니다.
사람이 호흡을 중단하면 죽듯이 믿는 사람이 기도를 중단함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狀態)에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쉬지말고 항상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님, 기도할 것이 별로 없는데요.” 기도할 것이 왜 없겠습니까? 다만, 무엇을 기도할지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이지요.

열한번째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말씀합니다.
형제를 거짓없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성도 가운데 누가 무슨 어려움이 있음을 압니다.
다만 우리가 교회에서 누가 무슨 어려움이 있는줄 모르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어려움에 대해서 별로 듣고싶어 하지않고 보고싶어 하지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어려움을 알기는 알지만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에 더딘 것은, 듣기는 듣고 보기는 보아도  수다꺼리의 대상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14에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너희 가운데 있는 소자(=작은 자)에게 잘 한 것이 곧 나에게 잘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소자가 누구입니까?
다름아닌, 우리중에 어려움을 당하고있는, 고통을 당하고있는 성도입니다. 이들을 돌보고 필요한 것을 공급(供給)함이 우리 믿는 사람이 마땅히 행할 바 입니다.

열두번째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전에 한국의 시골 인심은 나그네에게 음식도 대접하고 잠자리도 제공해주는 아름다운 풍속이었습니다.
누구나 이러한 인심이 좋은 줄 압니다만, 막상 낯선 사람을 대접할 엄두가 잘 안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해치지나 않을까? 무엇을 훔쳐가지나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혹은 나와 별로 상관없는 사람에게 왜 잘해주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그네 대접하기에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 그랬고, 그의 조카 롯이 그랬습니다. 특별히 롯은 천사들을 잘 대접함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운데 딸 둘과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구분에서 양의 반열에 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영접(迎接)하였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형제·자매 가운데 쉴 고이 없는 사람에게 잘 대접하는 것이, 혹은 낯선 사람이 우리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할 때에 그들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 주님을 잘 대접해준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말로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앵부새처럼 되뇌이기 보다는 실제로 고통당하고있는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잘 대해주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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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성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근본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이 모든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세상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앞서 교회 안에서 성도에 대한 사랑을 먼저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를 사랑하고 돌보되 그들에게 대접을 받은 답례로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그 일들을 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이며 우리 교회가 속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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