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19, 2014

“자다가 깰 때라” (로마서 13:11-14)

                                             “자다가 깰 때라” (로마서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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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것인데 우리는 그 귀중함을 잊고 살다가 뒤늦게 시간이 참으로 속절없이 빨리 흐르고 있음을 깨닫고는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하여야 할지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시간 가는 것이 빠르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제 인생(人生)을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간이 몹시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인생(人生)의 가치(價値)를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생을 알거나 인생의 가치를 알기 시작한 사람은 시간 사용하는 일에 더욱 신중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5-17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혹은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먼 앞날을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만을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이유나 내가 현재 이러한 분야에서 이러한 일을 하는 이유가 단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는 식입니다.

우리 한국사람에게는 유행성 사고방식이나 행함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인교회 안에서도 무분별하게 범람(汎濫)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한인교회나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를 가리지 않고 참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무엇을 하였더니 교회가 부흥·성장하였더라 하면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어떠한 상황가운데 성장하였는지 가리지 않고 그 방식을 도입하여 목회자 자신이 그러한 자질(資質)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적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성장될 리 없습니다. 그러다가, 더러는 나중에 그 성장했다는 교회의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가 나오고 그 내용이 비성경적이라는 비판이 나오지만 그것이 있기 전까지는 그것이 이단성이든 비성경적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하려고 합니다.
         
"영어 배우는 데 왕도(王道) 혹은 지름길이 있다, 없다"로 설왕설래합니다.
영어 기초를 잘 다지기 위해서 그 기초를 잘 쌓는 요령을 터득할 수는 있겠지만, 영어로 잘 표현하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이왕 믿기로 하였으니까, 신앙생활도 잘 해보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는 남들보다 시간을 덜 투자하면서 그들보다 더 신앙생활 잘한다는 소리듣고 더 축복받는--말하자면 세상적으로 지름길을 가로질러 가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마음을 주님께 덜 드리면서도 세상에서 더 평안한 삶을 사는 신앙생활은 할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이 하나님께서 더 원하시는 믿음의 삶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시간과 마음은 많이 들였는데 주님께서 기뻐 받지 않으시는 신앙생활이 있어 우리가 이것을 피해야 할 것이지만 적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주님의 더 많은 칭찬을 얻는 그런 속성(速成) 믿음의 생활은 없습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미련한 신앙생활이란 시간과 마음은 남들만큼 쏟으면서도 늘 하나님께 불평하고 감사가 없는 삶인데, 우리가 이런 것을 피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삶을 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 무릎꿇는 횟수가 많을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시간이 많을수록, 하나님께 마음의 중심을 드릴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는 것은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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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기”란 믿는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때로는 피곤하여서 잠을 자거나 졸 때가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깨어있을 때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종말론적(eschatological) 혹은 계시론적(apocalyptic)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인데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가 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기름을 잘 준비하고 깨어있으므로 밤늦게 신랑이 오매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미련한 다섯처녀는 등은 가지되 예비기름이 없었고 게다가 더디 오는 신랑을 기다릴 새 졸며 자다가 기름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기름이 떨어진 것을 발견하곤 시장에 사러가지만 그사이 신랑이 왔는데 한번 닫혀진 혼인잔치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태 25:13) 말씀하십니다.
때가 가까운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지 않고있는 사람과, 잠자느냐고 때가 가까이 이른 줄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때가 가까운 것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잠자고 있던 중이라 할지라도, 졸고 있던 중이라 할지라도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아직 캄캄한 어둠--사단의 세력--이 지배하는 밤일지라도 밤이 깊으면 곧 새벽이 가까움을 알고 일어날 준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세월이 빠른줄 느낄 때, 너무 늦은 줄로 생각할 때라도, 늦잠을 자서 도저히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난 때인줄로 낭패감이 들 때라도 영적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구원의 시간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이른” 까닭입니다. 여기서 처음 믿을 때란 우리의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때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오늘 본문을 Baptismal Formula 혹은 Sacramental Formula 라고도 말합니다. 곧, 세례의식을 행할 때나 성찬의식을 행할 때 성도들의 본분에 대해서 깨닫게 하기 위한 글이란 뜻입니다.
시간적으로 분명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구원--하나님의 영광나라에 들어감은 세례로부터 세월이 흐른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이르고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더디 오시는 것같아 그 때를 알지 못하여 자다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잘못을 우리는 범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 주님께서 이르지 않으셨을 때 우리는 깨어야 할 것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전 아직 새벽이 밝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영적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 꿈을 꾸신 적이 있습니까?
어느 날 꿈속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섰는데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 이르시기를, “너는 입으로는 주님을 믿었지만 마음으로는 믿지않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런 두려움이 현실로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12절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합니다. 밤과 낮이, 어둠과 빛이 대조(對照)되어있습니다.
밤과 어둠은 사단--곧 악의 권세입니다. 낮과 빛은 그리스도의 권세입니다. 밤이 아직 다 지나지 않았지만, 밤이 깊다고 함은 이제 곧 새벽이 오고 낮이 옴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해서 우리는 낮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준비(準備)는 곧, 우리가 이제까지 몰두해온 어둠의 일--세상에 탐닉하는 일에서 벗어나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용사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로마서 본문에서는 단지 빛의 갑옷이라고 표현했지만, 에베소서 6장 13절이하에서는 구체적으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13절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되어있습니다. 방탕하고, 술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고, 쟁투와 시기는 성령의 다스리심이 없는 자연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깨어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다스리시는 사람에게서는 이런 일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말씀하십니다. 술은 세상--곧 악에 취한 삶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악의 세력과 싸워야될 믿는 사람은 세상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악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영리하여 카르타고의 대학에서 철학(哲學)과 수사학(修辭學)을 공부하고 20대에 밀라노대학의 교수가 되어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 모니카의 믿음의 기도와는 달리 경건생활을 하기 보다는 술 취하고 성적(性的)으로 방탕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맑은 정신이 들면 자신의 방탕한 생활에 대하여 후회감(後悔感)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는 어느날 잠껼에서인지 어린아이들의 “들고 읽어라, 들고 일어라” 노래하는듯한 음성을 듣고 황급히 성경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말씀이 이 구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로 말미암아 그의 삶이 변하고 히포(Hippo) 지방의 감독의 지위에 까지 오르고 기독교 역사상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12-13절 말씀에 대한 요약입니다. 우리는 세례 받을 때에 이미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새사람의 옷을 입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골로새서 3장 9-10절에,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했고,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새사람의 옷을 입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이를 에베소서 4장 23절에서는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표현했고, 로마서 12장 2절에서도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이미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인데 우리가 영적인 게으름으로 인하여 혹은 영적인 잠에 빠져 그리스도의 새사람의 옷을 벗었든지 더러워져 새롭게 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게으름으로 은혜를 잊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또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으며 육신의 일을 도모함으로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늘 새로운 모습으로 사는 “변화하는 그리스도인(transforming Christian)”의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어떤 영적인 상태에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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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영적으로 졸고있거나 잠에서 깨어나있지 않은 것인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 여러분은 주님의 작고 세미하지만, 분명하신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영적인 잠에서 깨어있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이 원하시는 새사람의 옷-주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계셔서 어느 때에 주님이 오시더라도, 어느 때에 주님께로 가더라도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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