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19, 2014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이사야 43:1-7)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이사야 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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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이름은 중요합니다. 특히 First Name을 부르기를 즐겨하는 미국에서 주변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면, 발음하기 쉬운 First Name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미국사람들은 First Name을 쉽게 부르지 못하면 또한 친해지기도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해서, 미국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가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친구들을 잘 사귀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부르기 편한 한국어이름을 지어주든지 아니면 크리스천이름 또는 영어이름을 마련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저의 네 명의 아이들에게 한국이름과 크리스천 이름이 있는데, 학교에서 미국친구들은 Paul, Priscilla, Peter, Philip 등 크리스천 이름을 부르지만, 제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는 영어이름보다는 한국어이름이 더 정감 있게 느껴집니다. 커서 미국에 온 사람은 미국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한국적 사고나 문화에 더 익숙하여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부를 때, “야,” “어이,” “거기”라는 말보다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정겹고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이름이 주는 매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담아”라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창 3: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어린 사무엘을 이름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실 때 “야곱아,” “이스라엘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은 그의 자녀들과의 친밀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문 상담가로 유명한 앤 랜더스(Ann Landers)가 그에게 보내온 상담편지들을 그 주제별로 구분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두려움에 관한 상담편지들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상담을 요청하여 오는 가장 많은 이유가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갖가지 두려움과 걱정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기의 장래 또는 자녀들의 장래에 관한 두려움, 먹고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관한 두려움, 사고에 관한 두려움, 병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관한 두려움 등등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들 중에 90% 이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닌 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이러한 두려움과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두려움이 만병의 원인이 됩니다. 우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라비아 사람이 바그다드로 가다가 전염병을 만났습니다. "전염병아, 너는 어디를 가는 중이냐?" 아라비아인이 물었습니다. "나는 바그다드로 가는데 거기서 오천 명을 죽일 것이오." 전염병이 대답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바그다드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고, 그로 인해 오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 후 아라비아인은 다시 그 전염병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의했습니다. "너는 지난번에 오천 명을 죽이러 간다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오만 명을 죽였느냐?" 그러자 전염병이 대답합니다. "그렇지가 않소. 나는 오천 명만 죽였을 뿐이요. 나머지는 모두 공포로 죽어갔던 것이요." 두려움이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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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야곱아”라고 하심은 야곱의 후예 이스라엘과 유다 민족을 부르심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어 바벨론에 70년동안 포로의 삶을 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70년 동안 포로로 살게 하심도 하나님의 그들을 사랑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되, “야곱아”라고 그들의 근원이 되는 야곱의 이름으로 부르심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며 그들을 지키시는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그의 열악하고 불확실한 환경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만일 그가 거친 세상에서 혼자라고 생각하면 그는 불안과 근심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는데 마침 옆에 한 청년이 앉았습니다. 그와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다가 보니 청년이 교회를 다니기는 한데 장래 일에 대하여 근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청년에게 한 가지 문제를 내주었습니다. 성경책을 그 앞에 놓고 만년필을 성경책 위에 놓고 그 청년에게 세워보라고 말합니다. 성경책 위에 만년필을 세움이 당연히 불가능해 보이므로 청년은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목사님은 청년에게 ‘나는 세울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청년은 그 목사님이 약간 이상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만년필을 성경책 위에 세울 수 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목사님은 성경책 위에 만년필을 놓고 그 끝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에게 만년필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청년은 그게 어디 만년필을 세운 것이냐고 묻습니다.
목사님은 대답합니다: “만년필 스스로는 흔들리고 달려가는 기차 안에서, 아니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홀로 설 능력이 없지만 손이 그것을 붙잡고 있을 때 설 수 있는 것 같이, 우리 사람도 그 스스로는 여러 가지 변동하는 환경 가운데 서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신 팔로서 붙들고 계시매 서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1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약속 주시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속하였다”란 말은 ‘값을 주고 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또한 영적 이스라엘 된 우리를 위하여 값을 지불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되신 하나님께서 나를 이름으로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심은 참으로 대단한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젊은 남녀들은 열렬히 연애하는 동안에는 ‘너는 내 것’이라 찜해 놓기도 하고 커플링(couple ring)을 하나씩 나눠 끼기도 하고 커플 셔츠(couple shirts)를 하나씩 나눠 입기도 하면서 서로 상대방에 대한 소유를 다짐하기도 하지만, 더 매력적인 이성(異性)이 나타나면 그렇게 열렬히 사랑한다, ‘너는 내 것’이라 주장하던 사람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런데, 신실하시고 한결같으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병들고 추해지고 세상에서 실패한 것 같은 삶을 살더라도 여전히 나를 부르시며, 붙드시며,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물”(deep waters) 또는 “강”(rivers)은 감당하기에 벅찬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러한 어려운 순간들을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통의 연속인 그 때에 나는 견딜 수 없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데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하시니 그 어려움이 나를 아주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불”은 우리를 짓누르는 압박이요 또한 위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그 위험과 압박 가운데서도 나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3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재천명하십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유다가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것인데, 결국에 포로생활에서 구원함을 얻게 해주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다민족의 귀환을 허락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대가-속량물-로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s)에게 그 주변국가들인 애굽과 구스(=에티오피아)와 스바(아라비아반도 남쪽, 현재의 예멘) 등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4절: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페르시아가 주변국가들을 점령하여 유다에 대한 관심에서 이들 나라들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속량물로 내어주시고 유다를 구원하여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요 자녀인 이스라엘과 유다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 까닭이요,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연고입니다. 그들이 현재에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여 장차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의 삶을 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매 종국에는 놓임을 받을 것이란 약속입니다.

5-6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 북방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침공을 당하여 멸망하고 앗수르의 자국민 이주정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인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짐을 당하게 됩니다.
남방왕국 유다 역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120년 뒤로 시작하여 바벨론에 의하여 세 차례에 침공을 당하여 얼마간의 무리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또 상당수는 이곳저곳으로 흩어짐을 당합니다.
이와 같이 흩어짐을 당한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하는데,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와 메데, 그리고 시리아, 키프로스, 아르메니아, 애굽 등 사방에 흩어져 있게 됩니다.
이들 사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동서남북에서 모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예수님 이후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멸망당한 유대인들이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거의 2,000년 뒤인 1948년에 그들을 또다시 시온으로 모으시므로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이셨습니다.

7절: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우리가 어느 곳에서 어느 상황 가운데 처하여 있든지 항상 기억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바 된 자녀요, 그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심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매,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강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가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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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 사는 새들 가운데 비서새가 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하늘을 곧잘 날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벌레를 잡기도 하고 또 노래를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위기를 만나게 되면 날개가 꽁꽁 얼어붙고 온몸이 마비가 되어 다른 짐승들의 밥이 된다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비서새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찬양도 하고, 감사도 하고 예배에도 잘 참석합니다. 그러나 삶의 어려움이나 위기상황을 만나게 되면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선원이 노련한 사람인지는 잠잠한 바다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일어나 물결이 흉흉할 때 우왕좌왕하느냐, 아니면 차분하게 풍랑에 대처하는가를 보면 그가 얼마나 노련한 선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 앞에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하고 생의 위기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이 전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시며,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시며,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놀라지 아니하며, 강하고 담대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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