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로마서 13:1-7)
1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복(福)은 얼마나 평안한 가운데 풍요로운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을 사는가에 달렸습니다.
해서, 평안한 가운데 부자의 삶을 살지만 복이 없는 사람일 수 있고, 환란과 곤고 가운데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지만 복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복있는 죽음은 100세가 넘도록 손자, 증손자, 고손자들과 함께 살았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을 본향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망으로 육신의 죽음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은 삼십여세의 나이로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리는 죽음을, 또 바울은 콜로세움에서 몸의 마디 마디가 끊기는 죽음을 당하였지만 그들의 죽음을 복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망대가 무너져서, 태풍으로, 차사고로, 혹은 비행기 추락등 갑작스런 사고로 사람이 죽을 수 있지만, 그러한 갑작스런 죽음은 그 죽음을 당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중 누구에게나 예고없이 찾아오는 이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가 준비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좋은 왕이나 대통령 혹은 다른 명칭의 위정자 밑에서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고, 아니면 극악무도한 위정자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시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악한 정부 하에 사는 사람들이 선한 정부 하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러한 곤고와 환란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들이 살던 시대는 아마도 다른 시대보다 더 악한 왕이 다스리던 시대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 아합시대의 사람이며, 유다의 예언자들 이사야나 예레미야도 각기 유다의 악한 왕 시대를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고와 예언은 악한 왕들과 제사장들과 방백들과 백성들을 무너뜨려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눈물로 호소함으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기도 하지만 목적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재정립시키고자 함입니다.
2
바울은 12장이하에서 개인의 변화와 아울러 그의 교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 사회에 대한 의무에 이어 오늘 본문에서는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말씀합니다.
1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위에 있는 권세들’이란 하나님의 권세를 의미함이 아니라 국가 권력구조의 상부 곧 국가권력을 말합니다. 권세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은 권세의 구체적 실행기관으로서의 의미입니다.
이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수시아(ἐξουσία)인데 이는 엑스(ἐξ)와 우시아(οὐσία)의 합성어입니다.
엑스(ἐξ)는 ‘...으로부터’란 뜻이고 우시아(οὐσία)는 ‘본질, 본체, 소유’란 뜻입니다. 해서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본질로부터, 본체로부터, 또는 소유로부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권세란 것은 어떠한 권세이든 ‘본질 혹은 본체’로부터 나와서 부여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 이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가 인간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사셨지만 그의 권위 혹은 권세는 로마정부에 의해서 부여된 것도 아니요, 유대의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 만물의 근본되시고 본질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목회자의 권세는 비록 사람들에 의해서 안수를 받더라도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서 비롯된다는 말씀입니다.
장로와 집사의 직분에 대한 권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통하여 안수가 베풀어지나 사람인 목사가 그에게 직분자의 권세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직분의 권세가 위임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맡은 직분을 경홀히 여기지 못할 것은 근본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국가권력의 권세(ἐξουσία)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許諾)하셨기 때문에 ‘위정자가 국가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위정자의 책무가 있습니다. 해서, 위정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한 정치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위정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한 정치를 베풀 때 그 나라의 백성은 이 위정자가 정한 법을 잘 준수하여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과 의의 정치를 하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절에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사람을 거스름이 아니요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대행자를 통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4절에,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관원이 하나님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악을 행하는 자를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심판을 베풀 권세가 그에게 있습니다. 해서, 믿는 사람들도 선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자유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율법 아래 놓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놓이지 않는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속박감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계속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인데 이는 율법의 말씀들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시사항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자유함을 받은 백성은 또한 세상 법에서도 자유한데, 율법을 지킴과 같은 이유로 세상의 질서를 위하여 그가 위임한 위정자를 통해 마련해놓은 세상 법규들을 지킴도 주님의 뜻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권세에 굴복하고 선을 행하여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5절에 기록된 대로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양심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7절에 이른 대로, 우리는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권한을 위임하신 세상 관원이 국가를 다스리기 위하여 제정한 국세와 공세를 바치는 것이 믿는 사람으로서도 마땅히 행해야할 일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눈에 보이는 우리 주위의 이웃을 사랑함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를 핍박하고 저주하는 원수에게까지 불쌍한 마음이 들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위정자가 정해놓은 법규를 잘 지킬 수 있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명령을 지킬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위정자의 법령은 현세에서 구속하는 힘이 큰데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현세에서 구속하는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법령을 어김은 손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쉽게 할 것입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공세와 국세의 납부를 등한시하거나 속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할 헌물을 속이거나 등한시하지 않겠습니까?
3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하여 권한을 위임받은 정부를 말하되 선한 권세에 대해서만 말씀하였을뿐 악한 정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되 악한 정부인 것이 분명할 때도 그들의 권세에 굴복하여야할 것입니까? 이 문제를 말씀드리기에 앞서서 왜 바울이 로마서에서 ‘권세에 대한 복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권세에 복종하라고 권면함은 바울 당시 일부 믿는 사람들이 폭력적 방법으로 당시의 로마정부에 대항하여 정부를 전복(顚覆)시키고자 하는 일에 전력(全力)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가장 큰 사명은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인데, 그들은 로마타도의 일에 전념함으로 자신들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증거할 기회는 전혀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정부에 대항할 뿐만 아니라 로마정부가 제정한 모든 법규를 지키지 않음으로 사회의 질서를 파괴(破壞)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한 사회에 속하고 국가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함이 악한 권세를 비호(庇護)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악한 권세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까 그 정부가 어떠한 일을 수행하든 상관없다고 말씀함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만 국가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직무를 수행해야하고, 국민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선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어떠한 시대였습니까?
바울은 로마황제 가운데도 가장 악명이 높은 네로시대에 살고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그가 예루살렘에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을 때에 그는 로마시민권을 소지한 사람으로서 로마황제에게 재판받게 해달라고 청원했고 그는 사악하고 우매한 황제, 네로에게 재판받기 위하여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고 재판의 결과 2-3년의 가택연금상태에 처해집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정부에 아부하거나 이를 비호한 것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기에 이 로마정부까지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한 대행자로 삼으셨다고 믿었던 때문일 것입니다. 혹은 이것은 다만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함이 그에게 가장 급박한 사명이라고 믿은 까닭입니다.
동시대를 산 베드로 역시 베드로전서 2장 17절에서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왕은 로마황제이며 그 또한 네로의 폭정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에 의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지만 “왕을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폭군을 두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간섭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시대도 로마정부에 의한 악정이 베풀어지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로마정부가 유대땅에 시행하고있던 로마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이를 지키셨습니다. 그는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취하게 하여 자신과 베드로 몫으로 세금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하신 말씀은 가이사--로마 황제와 하나님을 양극화(兩極化)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세상의 의무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무엇인지 분별하여서 잘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구약(舊約)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서 앗수르를, 유다를 치시기 위하여 갈대아인의 나라--바벨론을 그의 사자로 세우신 적이 있고 다니엘로 바벨론의 폭군 느부갓네살 밑에서 그의 신하로서 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거치면서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서 명쾌한 해석(解釋)을 내리기를 주저해왔습니다. 과연 여기에서 바울이 말씀하는 권세가 포악을 일삼는 정부까지도 포함하는 것인지 의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해석함에 “크리스챤들은 종교를 빙자하여 권세에게--그것이 악한 것이라 할지라도 복종하는 것을 거부(拒否)해서는 안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마틴 루터의 해석이 후에 히틀러 정권 때에 정권에 빌붙어서 그의 시녀 노릇을 하는 하는 신학자들에 의하여 악용되어 정부에 저항하는 크리스챤들을 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이에 칼 바르트(Karl Barth)를 비롯한 신학자들이 1934년에 5월 29-31일에 Barmen에 모여 독일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바-멘(Barmen) 신학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 골자는 교회가 국가의 시녀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어떠한 국가도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다른 목적으로 대체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국가 전복(顚覆)을 기도(企圖)하기 위한 선언이 아니라, 시대와 국가 상황을 초월한 교회의 사명을 밝히고자 함입니다. 우리 교회가 미국장로교회는 이 바르멘 선언(Barmen Delaration)을 장로교회 신조 가운데 하나로 택하고 있습니다.
히틀러 자신은 “하나님의 사자”를 자처하여 메시야를 죽게한 책임을 물어 유대인들의 씨를 말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성경해석은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해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은 그가 권한의 최종적인 본체가 아님을 깨닫고 겸손한 자세로서 선하게 이를 수행할 것인데 그 권한밖의 일을 하려할 때 그 권한은 빼앗김을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임되어지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한을 잘못 사용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림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믿음의 분량을 감사하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값없이 선물로 받은 은사들을 잘 경영하여야할 것입니다.
한 사회를 사는 사회인으로서 우리의 책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안으로 우리를 핍박하고 저주하는 원수까지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축복하며 주님의 선으로서 사단의 악이 관영하는 사회를 주님의 평안의 사회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한 국가에 속한 백성으로서 우리의 책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간섭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권한을 위임하신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복음을 증거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그리하여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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