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19, 2014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이사야 40:1-11)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이사야 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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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을 쓸 때나, 서론-본론-결론이 있는 작품을 만들 때 서론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을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의 가치가 결정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음악 작품들 중 가장 위대한 곡 다섯 개를 꼽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헨델(George Frederic Handel, 1685-1759)의 ‘메시아’ 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헨델은 1741년 여름 24일만에 ‘메시아’의 작곡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메시아’는 3부로 구성된 작품인데, 제 1부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강림-탄생에 대한 예언, 제 2부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제 3부는 부활과 영생입니다.
‘메시아’의 첫 번째 공연은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Ireland)의 수도 더블린(Dublin)에서 자선사업을 위한 연주회로 열렸는데 헨델이 직접 지휘하였습니다. ‘메시아’가 1743년 런던(London)에서 연주되었을 때, 청중석의 영국 왕 조지 2세는 ‘메시아’ 중 ‘할렐루야’가 연주될 때 작곡가인 헨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일어났는데 이를 본 다른 청중들도 왕을 따라 함께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관례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할렐루야’를 연주하거나 합창할 때는 청중들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제 1부 주제인 “메시아의 강림-탄생의 예언”을 위해서 헨델은 서곡 신포니아(Sinfonia)에 이어서 오늘 본문인 이사야 40장에서 소주제를 따옵니다. -Comfort ye my people(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은 이사야서 40장 1-3절,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골짜기마다 돋우어지리라)는 40장 4절, -And the glory of the LORD(주의 영광)는 40장 5절, -O thou that tellest good tidings to Zion(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은 40장 9절을 주제로 작곡한 것입니다.
또 제 2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중 상당부분은 이사야서 53장을 그 소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He was despised(그는 멸시 당하셨네)는 53장 3절, -Surely He hath borne our griefs(진실로 그는 우리 슬픔을 담당하셨네)는 53장 4절, -And with His strifes we are healed(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53장 5절, -All we like sheep have gone astray(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도다)는 53장 6절, -He was cut off out the land of the living(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셨도다)는 53장 8절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제 3부 “부활과 영생”은 고린도전서 15장과 요한계시록 5장의 천상에 계신 어린 양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헨델이 ‘메시아’의 서론 부분인 제 1부 “메시야의 강림-탄생에 대한 예언”을 이사야 40장을 갖고 시작하였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서는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전체와 이사야서를 대조해보면 참으로 신기한 많은 것들을 발견합니다. 성경이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갖고 있듯이, 이사야서는 전반부 39장과 후반부 27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약(舊約)의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책망과 징계를 다루고 있듯이, 이사야서 전반부 39장 중에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책망과 징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新約)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예고하는 세례요한의 광야에서의 외침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과 같이(마태 3:1-2; 마가 1:1-8; 누가 3:2-6), 이사야서 후반부의 시작인 40장도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라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시작합니다.

이사야는 주전 740년부터 690년까지(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 약 50년간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악한 왕 므낫세에 의하여 톱으로 몸이 반동강으로 썰리는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히 11:37 참고). 그가 활동을 시작한 때는 북방왕국 이스라엘이 아직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기 전(주전 722년)입니다. 남방왕국 유다의 멸망이 주전 586년이니까 유다의 멸망은 아직 먼 것처럼 보일 때였습니다.
그가 100여년 뒤에 일어날 멸망의 사건을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예언케 하십니다.
또 유다가 아직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케 하십니다. 아직 나라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인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하여 유다를 돌려보내어 예루살렘을, 그리고 성전을 중건케 할 것을 예언케 하십니다(사 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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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유다가 아직 바벨론에 끌려가기도 전에 포로상태에서 그들이 해방되어 돌아오리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유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케 하신 것처럼, 유다 백성이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애굽에서 430년간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모세를 통하여 인도해내셨던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감옥과 같은 그곳에서의 복역에 종지부를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위로의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왜 헨델의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의 주제가 되었습니까?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홍해를 건너 광야로 건져내시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유다 백성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때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를 준비해 주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영적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인간들을 그곳에서 해방시키시고 새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실 메시아를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인간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창세기 1장 26-2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이브의 범죄한 이후 모든 인간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음녀 바벨론과 같이 죄된 세상에서 포로의 생활을 하던 인간들을 그 옥에서 해방시키시고 새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1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로는 바벨론의 포로상태에서 돌아올 유다에 대한 위로일뿐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포로 상태에서 놓임을 받는 우리를 향하신 위로이기도 합니다.
                                                 
2절에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복역의 때’--곧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의 종료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직, 죄악에서 돌이킴이 없고 그에 대한 징계도 없는데, 하나님은 징계 이후의 용서를 약속하여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함에 대한 징계를 하시는데, 우리가 회개할 때 그의 용서는 갑절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기억지 아니하시며, 회개한 자에게 크신 축복을 주시고 그 상한 심령을 위로하십니다.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외치는 자”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계시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외치는 자”이신 하나님의 “소리”, 곧 선지자로서 유다 백성들에게 고합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어떻게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대로를 평탄케 할 수 있습니까?
4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4절에서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골짜기”라고 함은 죄로 움푹 파인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함을 통하여 우리의 죄의 골이 메꾸어지고 돋아질 것입니다. “산”이라고 함은 우리의 자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산같이 자고한 마음이 주님 앞에 겸손하고 낮아져서 평탄케 됩니다. 곧, 죄의 골도 메꾸어지고 교만의 산도 낮아져서 평평하게 됩니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맞이할 준비된 마음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앞서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면서,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돌아선 사람들에게 요단강에서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5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다백성들이 포로에서 풀리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그들 가운데 두기 위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므로 솔로몬의 성전에 머물던 여호와의 영광을 그들이 보기를 원합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되 오직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의로와진 사람들만이 그 영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도가 들어갈 최종적인 영광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6-8절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가로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불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장미 꽃이 아름답지만 만개(滿開)하면 그 다음은 시들어짐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은 절정을 지난 다음에는 곧 시들어갑니다.
이것이 낙원을 상실한 땅에서 사는 인생과 피조물을 향하신 여호와의 기운--운행의 법칙입니다.
세상사의 쉬 변하는 모습에 관하여 야고보는 1장 9-11절에서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임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영영히 불변하며 시들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로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확실하고 불변합니다.
이 불변하며 영원히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요한 12:34),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벧전 1:25)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25절에서 베드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9절에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름다운 소식--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오를 것인데, 여기서 높은 산은 복되고 아름다운 소식을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전파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목청을 돋우어서 크게 외쳐야 할 것입니다. 부끄럽고 수줍음으로 입술을 닫고 있든지 낮고 불분명한 소리로 전할 것이 아닙니다.

10-11절에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고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때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의지하고 행한대로 우리에게 상급을 주실 것이며, 목자가 양무리를 대함과 같이 부드러움으로 하실 것이며 그의 양떼인 우리를 먹이시고, 품에 안으시고,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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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위로를 그 백성에게 선포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3절), 말하는 자의 소리(6절)가 된 것같이, 또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된 것같이 우리 모두가 세상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알리고, 주님의 길을 평탄케 예비하라고 선포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 하되, 높은 산에 올라가 크고 분명한 소리로 아름답고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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