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연약한 자를” (로마서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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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세가지 범주 속에 집어 넣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혹은 사회의 보편적 윤리·규범의 원칙으로 명백하게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고 “반드시 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안해도 되지만 하면 유익한 것”이 있고 “해도 되지만 안하면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세 번째 범주로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혹은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범주(範疇)의 반드시 해야 할 것과 반드시 해서는 안될 것을 가지고는 별로 시비가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행한 것을 가지고는 별로 생색도 나지 않습니다. 이건 누구나가 다 해야 할 일이거나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잘 지키지 못할 때 내가 그를 비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의 법이 그를 구속합니다.
두 번째 범주(範疇)의 안해도 되지만 하면 유익한 일과 해도 되지만 안하면 유익한 일은 일반 사람들의 상식 가운데 꼭 해야 할 일이다 꼭 안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큰 시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일을 한 사람이 하지 않은 사람을 부족한 사람이라 바른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라 비판을 함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 사람중에는 생색을 냄으로서 그의 유익한 삶의 보상(報償)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은 하나님의 법으로서는 꼭 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의 사회법으로는 꼭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이 때에는 사회의 법을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이 일을 행한 믿는 사람이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자신만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범주(範疇)의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일을 행한 것 갖고는 생색(生色)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가지고 가장 많은 시비(是非)가 일어나고 판단(判斷)의 문제가 따릅니다.
하나님의 법으로나 사람의 법으로나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이 분명하면 할수록 시비도 적고 생색도 적은 데, 반드시 해야 할 일인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인가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 사이에 갈림이 있을 때에는 간혹 판단의 문제가 있지만 생색(生色)이 두드러지고, 하나님의 법으로나 사람의 법으로나 명백히 규정한 바 없어서 “이렇게 해도 그만 저렇게 해도 그만”의 일을 가지고는 생색은 없는 대신에 시비와 판단은 참으로 두드러집니다.
이조시대의 당파싸움이 커져 삼족을 멸하는 사화(士禍)로까지 번진 것중에도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일을 갖고 시비한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당파싸움의 논쟁꺼리 가운데는 어느 왕후의 장례를 5일장으로 할 것인지 7일장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포함합니다. 5일장으로 하든 7일장으로 하든 그것이 무엇이 그리 큰 문제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자신과 자기의 당의 의견이 반드시 옳은 것이요 관철되어져야 합니다. 이를 따르지 않을 때에 그는 간신(奸臣)이요 역적(逆賊)이요 마음에 무엄한 생각을 갖고 있는 자라고 몰아부칩니다.
교회의 예를 들자면, 예배시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 웬만한 교회는 2부 3부이상 예배를 드림으로 반드시 고정된 예배시간 관념이 없어졌지만 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는 교회는 반드시 11시에 예배를 드려야 하지 9시나 혹은 오후 3시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배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경건함도 없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히게 마련이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도 요즘은 덜하지만 전에는 그러한 고정관념에 빠져있어 내가 과거에 간직하고있던 예배 습관이나 규정과 다른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흔히 “경건치 않은 자”로 불리웁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찬양함에 “비파와 수금과 나팔과 소고로 찬양하고, 현악과 퉁소로 찬양하고, 춤추고 손뼉치며 찬양하자”라고 되어있는데, 장로교회에 속한 어떤 목사님이 어떤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시간에 춤추며 꾕과리치고 찬양하는 것이 어떻습니까?”고 제안한다면 “저 목사님이, 저 집사님이 필경 제 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해” 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은 예배를 모욕(侮辱)하는 사람으로까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요즈음은 한국의 큰 장로교회에서도 관현악단을 마련하여 아름다운 주악에 맞추어서 찬송을 하고 성가대가 찬양을 부르는데 참으로 은혜스럽고 듣기가 좋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배시간 전에는 찬송을 인도하는 사람 혹은 팀이 나와서 프로젝터(projector)와 스크린(screen)을 사용하여 복음성가를 인도하고 예배중에도 복음성가를 사용하는데 별로 불경건한 느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주일날 교회의 예배에 관현악을 사용하거나 복음성가를 부름은 비난을 면치 못하는 무식하고 경망스러운 일이요 정죄꺼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은 배운 것이 없고 요란스러운 오순절교회에서나 하는 일이라고 매도해버렸습니다.
로마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의하면(Claudius, 25:4) 주후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때에 크레스투스(Chrestus)란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오해가 생겨 크리스천들이 반란을 주동한 것으로 되고 크리스천 중에 특히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포함하여 반란 소지가 많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을 당합니다.
이때 사도행전 18장 2절에 나오는 아굴라와 부리스길라 부부도 추방을 당하여 고린도지방으로 오게 되고 이곳에서 마침 그곳에 머물면서 사역을 감당하고있던 바울을 만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은 이 사건이후 7-8년이 지난 뒤였는데, 이 사건으로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대부분이 로마를 떠나 있다가 수년 뒤에 사건이 무마되고 잠잠해지자 유대인 크리스천들중에 일부가 돌아왔지만 교회의 운영이라든가 주도권이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헌데, 그들의 믿음의 색깔과 방식, 친교와 음식을 먹는 것들이 다 유대인들이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지켜온 것과는 달랐습니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는 이러한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서로 상대방의 편의를 생각하고 상대방의 쓸 것을 공급하며 그렇게 오손도손 잘 지내왔는데 이제 십여년 이십년가까이 지나다 보니까, 교회 내에 제도도 마련해야 되고 운영방법도 정하여야 되고 지도자도 뽑아야 되고 하니까 분제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욱이,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방인 크리스천들은 단지 소수파로서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마련한 제도와 운영방식에 따라왔었는데 7-8년 그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주도권이 바뀌게 되고 이로 인해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사이에서 사사건건(事事件件) 시비가 붙습니다. 그러나, 그 시비꺼리는 하나님의 지시사항 가운데 있지 않은 사소한 것들입니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에는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지키던 전통에 따라서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침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좋은 저녁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크리스천 가운데는 다른 사람의 종노릇 하던 사람도 많았으므로 비교적 시간을 내기가 수월한 저녁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박해를 당하는 과정중에 교회운영의 주도권이 이방인들의 손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는 안식일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로 여겨져서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보편화되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 가운데도 이렇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있어 어떤 집단에서는 안식일에 어떤 집단에서는 주일에, 또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과 주일 모두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해서, 안식일에는 그들이 전통적으로 해오던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일을 삼가고 주일에는 크리스챤으로서 모여서 말씀을 듣고 성례전을 행하였습니다.
또, 이제 숫적으로 많아진 이방인 크리스천들과 유대인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문제가 된 것이 음식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챤들은 그들 조상대대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여전히 구분하여 먹고 있었고 그렇게 먹지 않고 있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비난하고 그들과 식사자리를 같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코셔(Kosher)라고 하는 그들만의 음식 조리와 요리 방법이 따로 있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먹을 때는 반드시 칼로 목을 베어서 피를 빼낸 다음 짐승을 굽든지 다른 방법으로 요리하여 먹지, 닭이나 비들기를 목을 비틀어 피가 몸안에 응어리지게 해서 먹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이방인과 유대인 크리스천들사이에서 큰 논쟁꺼리로 여겨지고 있던 할례의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예루살렘공회의 지도자들을 방문하였을 때, 당시 예루살렘 공회장이었던 예수님의 육적동생 야고보는 이 문제는 크게 문제 삼지 않기로 하고 다만 사도행전 15장 19-20절에 있는대로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할례의 문제로)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2
오늘 본문 1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안에는 믿음이 강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의심하는 것--왜 예배는 꼭 정한 시간에 드려야 하나? 왜 크리스천들은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나? 왜 크리스천들은 술을 마시지 말고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하나? 하는 많은 질문꺼리들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러한 질문 혹은 그들의 기존 교인들과 다른 생활방식으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특별히 성경상에 어떤 구체적인 지시사항이 없는 견해차이(matter of opinion)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2절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인줄 알고 먹어도 마음 속에서 우상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는데, 믿음이 약한 사람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서 먹으면서도 이 고기가 혹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에 아예 고기는 전혀 먹지 않고 우상에게 바쳐지는 경우가 없는 채소를 먹습니다. 이는 그가 세상에 신은 하나님 한분이라고 생각하지만 혹 다른 신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세상사람과 어울려 술자리에 가도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고 설령 술을 마시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에 있지 않는줄 알기 때문에 전혀 그의 믿음에 동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는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는데,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에 술자리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믿음이 강한 사람은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3절에 나오는데,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먹는 자나 먹지 못하는 자를--) 받으셨음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그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의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먹기 때문도 먹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의 믿음이 아직 연약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돌아가신 까닭이고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한 까닭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하나님의 하인(servant)--청지기(steward)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은 다만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판단하지 말라”고 하여서 “권면하지도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판단(判斷)과 권면(勸勉)은 다른데, 비판으로서의 판단은 그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게 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잘못된 행동 자체를 나무라기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랑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권면은 잘못된 행동을 나무라기 보다는 그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것으로서 그 안에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부모님이 잘못된 자식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권면이나 경책은 나무람이 수반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화를 못이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금하는 판단은 또한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무방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나 고정관념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의견이나 방식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는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이 가장 귀한 날로 여겨집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는 주일도 귀하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신 그들 조상대대로 지켜온 안식일도 매우 귀하게 여겨집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모든 날들이 다 귀하게 여겨집니다. 우리가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더 낫게 여기거나 모든 날을 다 같게 여기더라도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요 다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서 특별히 지시하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6절에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마감합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 다른 크리스챤과 같지않음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옆의 성도의 생각과 행동이 나와 다른 것--특별히 성경에 구체적으로 지시된 바가 없는 견해의 차이일 때 나는 그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3
내가 생각하고 행하기로 힘 쓸 것은 나의 먹는 것을 통하여 나의 날을 귀중히 여김을 통하여 내가 이러한 날과 식물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나 살펴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비판이나 판단보다는 권고와 사랑이 넘치고 하나님께 감사함이 많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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