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로마서 15:1-13)
1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지만 세상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은 재물을 움켜진채 이 말씀을 듣습니다. 세상의 명예나 지위를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세상의 명예와 지위를 얻기 위하여 교회와 하나님을 찾습니다.
믿는 사람의 삶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했는데 모처럼 한 선행에 대해서 동네방네 나팔을 불며 생색을 냅니다.
태종 이방원이 자기를 도와 난(反亂)을 평정한 공신들과 그들의 사병들을 혁파하는데 이는 그들 공신들의 공로주의가 나라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안에서도 공로주의가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나 제직들은 자신의 교회내에서 중함을 드러내놓고 말합니다. “이 교회가 누구 때문에 이만큼 성장하고있는지 알기나 해?! 한데, 교인들은 그걸 몰라 준단 말이야!”
“우리 교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내가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이야. 교회 구석구석에서 내 손이 닿지 않은 부분이 어디 있나 보아.” 그런데 목사님이나 다른 교인들이 자기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으면 은근히 속으로 “내가 교회를 안나오면 이 교회가 어떻게 되는지 두고보라지!” 합니다.
모세가 없는 이스라엘은 태양없는 세상일줄 알았는데 여호수아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누군가 하면 모세의 수종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실 때 높이 드셨습니다. 그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하셨습니다.
교회의 바른 성장은 학벌이 좋은 목사님이 있기 때문도 아니요 교인들의 눈에 보이는 열심히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그 교회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매어달려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가 얼마나 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소돔성에서 의인 열명을 찾을 수 있으면 의인 열명으로 인하여서 죄악이 관영한 도시 소돔을 멸망치 않으시겠다고(창 18:32)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위하여 전심으로 의인의 기도를 올리셔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믿음의 용사 열명이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쇠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속에 성장할 것입니다.
사람의 목소리가 크고 공로주의가 팽배한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람의 지식과 지혜를 드러내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뜻이 발견되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또한 자기를 자랑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모인 장소입니다.
2
1-2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약점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허물을 덮으신 것같이 우리도 우리 중에 약한 자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강한 사람은 우리 이웃을 도와서 그들도 하나님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러한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 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지상에서 생을 사실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사셨는데 그럼에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꺼리가 되시고 종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할 때 나 자신이 아니라 옆사람과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나에게 비방이 미칠 때가 있지만 조롱을 감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가운데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5-6절에 “이제 인내(忍耐)와 안위(安慰)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영어성경은 인내(perseverance) 대신에 “steadfastness"(RSV)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즉, 한결같으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변함없이 한결같으심으로 오래 참으시고 연약한 우리를 책망하시기 보다는 격려하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은 우리의 약하고 불완전한 가운데 하나님께 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삶이 우리 앞에 막연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삶의 본을 보이셨기에 우리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요즘 공부하는 요한복음을 통하여서 반복하여서 말씀하실 때,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나를 증거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증거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지상의 전 생애가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믿고 증거하는 삶을 살되, 예수님께서 그리 하신 것처럼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본받는 삶--곧, 예수님께서 사신대로 사는 삶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 옆 교인이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러한 삶을 사는 믿음이 강한 나는 나를 드러내는 대신에 옆 교인을 비판하는 대신에 그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울 수 있도록 그를 돕는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를 도우시고 감당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삶입니다.
7절에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의인이요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서 5장 6, 8, 10절에 이른 대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옆 성도를 받아야 할 것은 그가 믿음이 강하고 온전하고 의인이기 때문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기를 원하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 옆 사람을 받고자 함입니다.
8-9절에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나타내시는 삶을 살되 죽으시기까지 그리하신 것은 할례자--곧 이스라엘에게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요, 더 나아가서 이방족속에게까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14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삶을 표현할 때 “그때에 너희 (이방인)은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머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위하는 삶이었는데 이는 결국 그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9-12절에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예언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예언의 약속들입니다.
12절에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에서)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곧, 이새와 다윗의 반열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을 다스리기 위한 이가 나올 것인데 그가 오시매 온 땅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때에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메시야되신 예수님께 온 세상이 소망을 둡니다.
6, 7, 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란 표현을 세 번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다”를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서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을 믿고 증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므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소망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을 충만케 하시며 소망을 넘치게 하십니다.
13절에 “소망(所望)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함으로 14장 1절에서 시작한 “형제를 판단하지 말고 그의 약함을 담당하고 받으라”는 권면의 말씀을 마감합니다.
3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나와 생각과 주장이 다른 사람이 많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데, 나는 모든 결정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고자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음을 발견하고는 분이 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 15장에서 이러한 믿음이 연약한 형제의 약함까지도 담당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담당하실 때, 우리는 아직 연약한 자요, 죄인이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복종하고 형제와 이웃의 약함을 담당하고 그들을 받는 삶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삶입니다.
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신 것 같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 갑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내(忍耐)와 안위(安慰)와 소망(所望)의 하나님은 기쁨과 평강을 충만케 하시고 또 소망이 넘치게 하십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는 우리의 삶가운데 더욱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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