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12, 2014

“네 원수가 주리거든” (로마서 12:14-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로마서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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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는 것이 우리 정서생활에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음악을 좀 더 세분화시켜 말하면,  대중 유행가는 육적인 감각을 만족시키고, 명곡 (클래식)은 정신적인 면을 만족시키는 것이지만, 찬송가는 인간의 영혼을 어루만져주어 영혼의 상처를 치료하여준다고 합니다. 유능한 음악치료사(Music Therapist)는 찬송가의 심령 치료효과가 높음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찬송가를 치료에 도입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예배와 교회교육을 받고 찬송가를 부르며 자란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안정되어있다는 연구결과도 이를 뒷바침하여줍니다.
우리 교회 교우님들도 예배중에 혹은 가정에서 마음 깊숙히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많이 부르심으로서 육신의 병을 예방하시고, 혹 육신의 질병이 있으신 성도님들은 병치료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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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 밖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살펴보시면 많이 느끼시겠지만, 믿는 사람의 삶이 믿지않는 사람의 삶과 다르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드리고 거룩한 찬송을 부르지만 돌아가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생활하다 보면, 나의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이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생활 속의 거룩함과 경건의 삶은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세끼 밥먹고, 옷입고, 아이키우고, 이웃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되 하나님의 의와 선하심에 따라 믿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말만 앞세우고 약속을 식은죽 먹듯이 깨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님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옆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 배만 채우고 두드리고있는 삶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삶이 아님을 압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열 가지로 사회를 살아가는 믿는 사람이 할 일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14절에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만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한걸믐 더 나아간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행동과 삶이 아무래도 좋다고 말씀합니까?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대로의 삶을,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고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옆사람을 도와주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님은 그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와 원수된 모든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은 예수님을 증거하다 그를 핍박하여 돌로 치는 군중들을 저주하는 대신에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일제 시대를 사신 최 봉석(일명 최 권능)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신 까닭으로 감옥에 갇힘을 당하고, 모진 고문을 당하였는데 고문을 당할 때마다 비명을 지르거나 그를 고문하는 일본형사를 저주하는 대신에 “예수 천당” 하면서 그 고문을 이겨내셨다고 합니다. “예수 천당”이라고 함은 고문을 하는 일본형사라도 “예수님 믿고 천당 가라”는 축복의 말씀일 것입니다.

둘째는,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과 슬픔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있는 이 다른 사람은 교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인데, 이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의 형편에도 동참하여 기쁨과 고통을 나누어 갖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이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우리의 하는 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16절에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 말씀합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캠패인을 벌인 적이 있지만, 믿는 사람들이 믿지않는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실제 삶에 있어서도 그들과 조화(調和)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함께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네째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낮은 데 처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같은 본체이신데 종의 형상으로 낮아지셔서 우리에게 섬기는 자의 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행동을 할 때 그 사람들을 변화(變化)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욕하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의 행동을 우리가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지 않는 이웃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해하다(understand)"는 우리가 상대방보다 “낮은 곳에” “아래에” “서야지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다섯째는, “스스로 지혜(智慧) 있는 체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낫거나 완벽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친구로 삼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친한 친구들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부족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인데도 나의 친구가 된 사람은 그의 장점을, 지혜 있음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을 대하거나 사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별로 인간적인 지혜도 없으면서 지혜있는 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십대 후반 청년 때에 아직 그리스도의 도가 잘 깨달아지지 않아서 기독학생 모임에서 저보다 두세 살 위인 저보다 먼저 믿은 사람과 대화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자기의 성경지식과 믿음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자기에게는 전혀 의심이 없고 삶 자체도 완전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이 당시 저에게는 상당히 거부반응으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같은 12장 3절에서 바울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智慧)롭게 생각하라” 말씀했는데,
우리의 인간적인 지혜도, 믿는 사람으로서의 지혜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없습니다. 해서, 우리는 다만 성령의 능력과 그 지혜로서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는, 17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합니다.
선(善)을 악(惡)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일이요, 악(惡)을 악(惡)으로 갚는 것은 세상사람들의 방법이요, 악(惡)을 선(善)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마땅히 할 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으로 창조된 첫 사람 아담을 악의 모습으로 타락시킨 사단은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선(善)을 방해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사역 처음에 그를 세 가지 것으로 시험하였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도 군중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타락한 이후 아담과 그의 후손된 인류는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갚는 보응(報應)의 법칙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고하신 선이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악이 넘쳐나는 이 세상을 살지라도 “선한 일을 도모(圖謀)하라”고 말씀합니다. 도모(圖謀)하라는 뜻은 소극적(消極的)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하고 모색하는” 적극적(積極的)인 자세입니다. 하나님 앞에 악은 하나님의 형상에 역행하는 것이요, 선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닮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곱째는,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평화는 세상과 타협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일시적인 평화가 아닙니다.
세상의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근원적인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말씀하실 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화목할 뿐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치료해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기도한 것 처럼, 우리는 분쟁이 있는 곳에 화평을,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치료를 공급해주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덟째는, 19절에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원한(怨恨)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하다보면 분냄과 증오의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잘 통제가 되지않고 폭발하여 겉잡을 수 없이 되어버립니다.
그 사람은 나의 다리 하나를 분지러 놓았는데 나의 분냄으로 그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말씀하신 것은 원수 갚는 것을 권장하신 것이 아니라, 원한관계를 해소하되, 당한 것 이상으로 가해하지 말라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가해하되  당한 것 이상으로 하였습니다. 이 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아시는 예수님은 해서 마태복음 5장 39절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냄으로 더 큰 화와 복수를 자초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홉째는, 20절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지혜서인 잠언 25장 21-22절에서 따온 말씀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원수를 사랑함에서 그 극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눈에 보이는 형제, 나에게 잘해주는 이웃뿐 아니라, 나를 핍박하고 못살게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수 있게 됩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장 큰 두 계명이 첫째는 하나님 사람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장 45-47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원수된 자까지도 포용하는 마음입니다.

그리함으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했는데, 활활 핀 숯불을 머리에 두는 것은 고대 근동의 형벌 가운데 하나로서, 이로서 죄인이 고통을 당하고 그 얼굴이 뜨거움으로 붉게 변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을 함은 선한 행동으로 악인(惡人)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고, 후에 그 마음에 깨달음을 갖게 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열째는, 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백성에게 바라시는 긍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이 사단의 지배로 악이 관영(貫盈)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서 나타나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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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과 12장은 우리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에게 참으로 중요한 장들입니다. 8장은 로마서 교리부분의 마지막 장으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믿는 사람들이 왜 그러한 삶을 계속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말씀하였는데,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항상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2장은 성화의 삶의 구체적인 지시사항입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변화입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결단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교회의 변화인데, 이는 우리 자신의 변화로서 가능한데, 교회에 속한 각자가 자신에게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어진 은사를 잘 경영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로서 자신이 할 일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지 9-13절에서 열두 가지로 권면했습니다.
셋째는 사회의 변화인데,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교회의 모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서 수동적이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 확장하는 작업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장차 우리에게 임하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질 것이며, 그 나라에서 주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는 자랑스런 천국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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