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분량과 은사(恩賜)” (로마서 12:3-8)
1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다,” “우리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가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坐礁)되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섬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파선(破船)된 배에서 몇 가지 물건을 건져낼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약품상자였습니다. 크루소는 그 약품상자 속에 있는 약 가운데서 가장 좋은 약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구약’ 곧 성경이라는 약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합니다. 그는 시편 50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과 도우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50:15)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나?” 하는 측량(測量)의 기준은 내가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나의 연봉이 얼마나 올랐나? 얼마나 부자가 되었나? 얼마나 높은 지위를 얻었나? 세상을 살 때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잘된 횟수가 얼마나 많았나?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셨나? 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가름될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그것은 나의 입술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횟수가 얼마나 많아졌나로 판가름됩니다.
“아-멘”을 잘하는 신자를 보면 목사님이 실수로 틀린 말씀을 하는데도 습관적으로 “아멘”을 하여 웃음을 자아냅니다. 저는 이것이 처음에는 잘못된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더 생각해보니 그리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무엇이나 옳은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입술에 항상 “주님 감사합니다”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사람의 기준으로는 “감사합니다”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 감사합니다” 하시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씀하시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때, 감사할 수 없는 조건에도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우리의 고백과 증거대로 “감사할 조건들”을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2
지난 주에는 로마서 12장의 첫 부분으로서 우리 자신의 변화(transformation)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는 교회의 변화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3절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말씀합니다.
여기 카리스(χάρις) ‘은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카리스(χάρις)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 가운데 카라(χαρά)가 있습니다.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할 때에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무덤을 방문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그에게 “평안하뇨?” 물으실 때, 이 평안하뇨란 인사말의 다른 뜻이 “기뻐하라(χαίρετε)” 였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에게 기쁨이 넘쳐나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욕심이 우리로 불만의 마음을 갖게 하며 불만의 마음이 우리로 일하지 않게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가 2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돈을 맡았는데도 다른 종들에게는 그보다 더 많은 달란트가 맡겨진 것에 불만을 품었을 떄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야고보는 1장 15절에서, “욕심(慾心)이 잉태(孕胎)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長成)한즉 사망(死亡)을 낳느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自足)하기를 배웠노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헤아려 아는 것도 나 자신의 모습으로 헤아려 알아야 합니다. 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하면 부족하고 흠이 많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의 모양으로도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 주님을 깨닫고자 할 때,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부족한 중에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4-5절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에 눈, 코, 귀, 입, 손, 발, 기타 여러 다른 기관들이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쓸데없이 그냥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몸인 교회의 지체는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사람 몸의 각 지체가 중요하듯이 교회를 구성하는 각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몸을 구성하고있는 지체인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교우를 비난하고 판단할 때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지체의 각 부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이신 교회에 속한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 몸의 지극히 미약한 부분--혹 평소에는 필요없는 것같이 보이는 지체의 일부분 맹장이 잘못되었다든지, 혹은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다든지 할 때에 우리는 그 부분을 치료하기에 전 신경을 다 씁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미약한 것 같이 보이는, 별로 필요없는 것같이 보이는 작은 자의 아픔과 고통에도 동참하여야 합니다. 그의 잘못됨을 뒤에서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하기 보다는 그 지체의 치료를 위해서 힘쓰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5-26절에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말씀합니다.
6절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χάρις)대로 받은 은사(χάρισμα)가 각각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은사(恩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신 성령의 선물(膳物)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 고린도전서 12장 28절(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하는 것, 사랑), 에베소서 4장 11절(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에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능력에 따라, 소질에 따라, 혹은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른 은사들을 주셨는데,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6-8절에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성령의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 열거된 은사들은 고린도전서 12장이나 다른 성경구절에 나오는 은사들에 비해서 비교적 생색이 들나고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라기 보다는 속에 숨겨진 은사들이 많습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믿음의 분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로서 예언(豫言)은 점쟁이가 점을 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선지자(先知者)를 예언자(豫言者)라고도 하며 선지서를 예언서라고도 하는데, 선지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점을 치거나 예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 어떻게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인가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혹은 장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던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사로이 사람의 운세를 점치면서 은사를 받았다고 함은 잘못입니다.
섬기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섬기는 일을 잘 감당함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라 하여 일을 감당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면 이 사람은 일을 하면서도 은사를 제대로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하고, 권위(勸慰)하는 자는 권위(勸慰)하는 일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권위(勸慰)한다고 함은 권면하고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또, 구제하는 자에게는 성실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다스리는 자는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부지런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긍휼(矜恤)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교회에 속한 각 사람이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함에 자기에게 허락되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잘 경영할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3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은 어떠한 은사들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저마다의 각기 다른 은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어떠한 은사들이 있나 한 번 찾아보시고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남들에게 있는 그럴듯한 은사가 없고 별로 생색나지 않는 은사가 있다고 하여 불만스런 마음으로 자신의 은사를 천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개발하시고 잘 경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겸손하고 감사하는 삶의 모습으로 인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몸이신 교회를 건강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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