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12, 2014

“거룩한 산 제사” (로마서 12:1-2)

                                             “거룩한 산 제사” (로마서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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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복권의 윤리성문제를 떠나서, “만일 500만 불 짜리 복권이 당첨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질문하면 아마 80-90%는 “그중 100만 불은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사용하고, 또 얼마는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돕고.....” 하며 지키지 못할 사항들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을 매우 사랑한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는 친구와 이야기하는 중에 “나는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바칠 수 있다. 주님을 위해서는 어떤 충성도 다 할 것이다” 하고 장담하였습니다. 친구는 그에게 묻습니다: “그럼 자네에게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두 필은 하나님께 바치겠는가?” “아무렴 십일조를 못 바치겠는가?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당연히 두 필은 주님께 바쳐야지. 그런데, 나에게는 말이 없다네.” “그럼, 소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아니, 십일조를 안 바칠 수 있겠는가? 두 마리라도 바치지. 그런데 나에게는 소가 함 마리도 없지 않은가?” 그럼, 돼지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이때 그 사람은 버럭 역정을 내며 “나에게 돼지 열 마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하며 벌떡 일어나 가더랍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지 않고는 주님을 믿을 수 없었던 환난과 역경가운데서도 좋은 믿음을 지녔던 초대교회의 성도들만큼만 신앙생활하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못될 사람이 없습니다.
로마에 살던 성도들은 많은 숫자가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catacomb)에 몰려 살았습니다. 로마정부의 눈을 피해서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지하묘지에 숨어들어서 그곳에서 단체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찬송하고 주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로운 찬송의 노래도 아직 없었고 성경의 말씀도 아직 없었지만 예수님의 인간구원과 부활을 찬송하고 이를 증거함이 그들의 예배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귀하고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로마의 좋은 가정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를 찬송하고 증거함이 귀한 삶인 까닭에 그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카타콤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카타콤에서 발견된 벽화들을 봅니다. 최후의 만찬의 벽화가 있고 또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그린 벽화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사모하며 오늘의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소아시아 터어키의 갑바도기아라고 하는 곳에는 평지에 작은 언덕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각 언덕들에 굴이 파져 있습니다. 멀리 서 보면 언덕들이요 가까이 가보면 동굴들입니다. 어떤 동굴은 8층짜리도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 주님께로 향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를 원하던 사람들이 몰려 살았습니다. 한 굴에 보통 2만 명씩 해서, 많은 때에는 이 갑바도기아의 언덕 동굴들에 200만 명까지 몰려 산 적이 있다고 합니다. 조금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정부의 박해의 눈을 피해 살아가던 것을 짐작케 합니다. 그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생활을 유지해가기 위하여 평지에 씨를 뿌리고 가꿉니다. 그러다가 로마정부에서 이곳에 그리스도인들이 집단생활을 한다는 정보를 제공받고 군대를 보내면 밭을 가꾸던 사람들은 재빨리 양떼 속으로 몸을 굽히고 숨어듭니다. 그리하면, 멀리서 보기에 감쪽같이 사람은 없고 양떼로만 보이게되어 그냥 돌아간 예가 많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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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으로 시작하여 바울은 믿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2장에서 바울은 우리의 삶을 통한 제사를 셋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변화(transformation)입니다(1-2절). 둘째는, 우리의 변화로 인한 우리가 지체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변화입니다(3-13절).
셋째는, 교회의 변화로 인한 사회의 변화입니다(9-21절).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신 공자님의 가르침과도 일치가 됩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없이 교회가 변화되지 않고, 교회의 변화없이 사회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가 받는 앞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8장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9-11장은 특별히 이스라엘에 대한 장들이므로 괄호안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교리의 마지막 부분인 8장 31-39절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被造物)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히 큰 것을 알 때 우리의 결단이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여전히 자기만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지고(至高)함을 깨달아 안 사람입니까?

‘그러므로’는 또한 9-11장의 전체를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비밀의 경륜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여전히 세상 가운데 세상과 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12장의 첫부분을 시작하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하고있습니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함은 나 바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부하는 것입니다’는 뜻입니다.

"너희 몸"에서 몸(σώμα)은 우리의 바깥사람인 육체가 아닙니다. 이 몸은 우리의 자아와 인격--곧 전인체(全人體)를 의미합니다. 곧, 우리의 삶(life)입니다.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산 제사“(living sacrifice)라고 함은 우리의 전인격체로서 드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구분되고 귀한 마음의 중심을 드리는 제사를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첫 소산과 온전한 짐승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구분되지 않고 불완전한 짐승으로 제사드렸을 때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중심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오직 외형의 제사만 드렸을 때, 하나님은 호세아 6장 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때를 따라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사를 계속드려야 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때를 따라 제사의 종류별로 제물을 준비하여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희생제물로 드린 바 되어서 우리의 과거죄뿐아니라 현재죄와 미래죄까지 다 사하여 주신 까닭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회개하는 마음과 입술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죽은 짐승으로 드렸던 것이라면, 신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고자 하여, 우리 자신의 살아있는 몸으로, 마음으로, 인격과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첫째 계명, 곧,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마음을 당하여, 혼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靈性)은 세상에서 떨어진 수도원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데 있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평상의 세상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모습이 영적예배입니다.

2절은 1절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산 제사의 삶--영적 예배의 삶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1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2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3변화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나의 사는 모습이 세상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내가 속한 교회는 변하지 않고 세사의 다른 모임과 다를 바 없고, 내가 속한 교회가 다른 모임과 다를 바 없다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강물을 따라 헤엄쳐 내려가는 다수의 물고기들과 구별되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흐르는 강물을 헤치고 올라가는 소수의 물고기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확실한 일에 관심을 갖고 살며 불확실한 하늘나라의 일에는 등한시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확실하게 되어지는 일은 좀 모르고 어리석어도 하늘나라의 일은 믿음의 눈으로 확실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며, 둘째, 마음을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하여야 할 것이며, 셋째, 해서 변화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4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생활을 통하여 자기의 주장(主張)과 의(義)와 만족(滿足)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해서,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인정해줄 때는 신이 나서 교회생활을 하고 믿음이 좋은 것 처럼 보이다가도, 그렇지 않을 때는 믿음이 뚝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한 경배(敬拜)와 찬양(讚揚)의 제사는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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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지켜가기 위한 노력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야기꺼리가 됩니다.
미국의 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James Garfield)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얼마 안있어 그의 비서실장이 그에게 말합니다: “각하, 이번 일요일 오전 10시에 첫 번째 각료회의가 있습니다. 의제는 국가 비상사태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다른 개인적인 스케쥴을 마련하지 마십시오.”
                                                   
가필드대통령은 점잖게 대답합니다: “비서실장,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날에 어떤 분과 만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어떤 새로운 약속을 할 수 없습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에게 반문합니다: “아니 각하, 국가 비상사태를 의논하기 위한 각료회의보다 더 중대한 약속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 약속을 다른 날로 돌리시면 되지 않습니까?”
대통령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매 주일 오전 10시 30분에 하나님을 만나뵈러 가는데, 하나님과 한 이 약속을 지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내게는 없습니다.”
결국 국가 비상사태를 의논하기 위한 각료회의는 다른 날로 옮겨졌고, 가필드 재임시에는 주일 날 다른 모임 스케쥴을 잡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매우 귀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영적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시작은 작은 일을 지킴에서 비롯됩니다. 주일예배 참석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한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우리는 더 크고 어려운 약속은 아주 쉽게 쉽게 어길 수 있고, 어기면서도 양심의 가책(呵責)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휴가를 맞이하여 여행하거나 또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도, 타지에서 교회를 찾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거룩한 산 제사, 영적예배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출발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의 과정에서 아름다운 작은 믿는 성도들의 미담(美談)들을 만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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