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4, 2013

“예루살렘 입성(入城)” (마가 11:1-11)

                                           “예루살렘 입성(入城)” (마가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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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사회적 불안이 사람들의 심리를 불안케 하고, 이로 인해 그들의 발걸움을 교회로 옮겨 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래전 오클라호마시 폭발물 사건 이후에 교회를 찾는 사람이 한동안 증가를 보였었는데,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여러운 시기에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남을 봅니다.
생을 자포자기 하거나 자살의 방법을 택하는 것보다 교회를 찾는 것은 매우 건설적인 해결책이나, 근본적으로 영적인 갈함이 없이 물질적·육적인 갈함만으로 교회를 찾음은 때로 좋은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곤경을 당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교회가 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 교회를 찾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영적인 생명의 양식을 채워주려고 함이 교회와 교회에 속한 일군들이 감당해야할 임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의 수가 한때에는 장정만 5,000이요, 여자를 합하면 이보다 훨씬 많았을 터인데, 그들은 육적인 양식을 보고 예수님을 따른 터라, 예수님께서 정작 고난당하실 때에는 아무도 그 곁에 없었습니다.

한 생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가고있는 길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의미없는 일생을 살 수 있으며, 아무리 고난의 삶을 살지라도 그 삶에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30여세의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그 일생이 인간구원의 삶이었기에 그의 생이 의미있는 삶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삶이나 요한의 삶이나 무식한 어부의 본업을 가진 면에서는 그들의 생이 의미없는 삶이 될 것인데, 주님을 위한 삶을 산 까닭에 의미있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 때, 그 사람의 생에는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3년여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까? 예루살렘 입성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처음 올라가신 것은 누가복음 2:21의 기록대로, 난지 팔일이 지나서 유대인들의 예대로 결례 (潔禮)--성결케하는 예식--를 행하려 한 때입니다. 누가복음 2:41에는 그 부모가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한 걸로 보아 적어도 매년 유월절 한 차례씩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살이 되시던 해에도 마리아와 요셉은 아이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의 날들을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가는데 아이 예수가 그들 일행 중에 알았다가 나중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성전에 유대인들의 선생들과 함께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계셨다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할 때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았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반문하십니다(누가복음 2:48-49).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도 유월절의 절기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그가 초막절에도 비밀히 예루살렘에 가시고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가시는 때의 절기도 유월절입니다.

유월절(逾越節)은 유대인들의 모든 절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시고자 하나 애굽 왕 바로가 이를 가로막을 때, 죽음의 천사로 애굽인의 장자는 죽이시고 이스라엘인의 장자는 살리시게 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인들에게 어린 양을 죽여 그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십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인의 집과 애굽인의 집을 구별하여, 죽음의 천사로 하여금 애굽인의 집 장자는 죽이게 하시고, 이스라엘인의 집은 그냥 지나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심은 유월절 어린 양과 같이 하나님께 속한 (영적)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유월절의 희생양(Paschal Lamb)이 되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의 입성을 환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연관된 예루살렘”은 종교의 중심지이기 보다는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은 로마의 이스라엘 식민통치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이곳에 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성을 환영하는 그들의 기대는 이스라엘의 메시야라고 하는 이 예수님이 그들의 식민통치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기를 원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예루살렘은 그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은 하나님 통치를 상징하는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또한 이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을 의미합니다. 장차 성도들에게 임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심은 하나님 통치의 회복이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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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에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끌고 오너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통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예수님의 입성은 성경의 예언에 따른 것입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메시야의 입성에 대해서 스가랴서 9:9에, “시온의 딸아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되어있습니다.
                                                   
3절에 “만일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말씀합니다.

맞은 편 마을에 나귀 새끼가 매여있음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 주인이 나귀새끼를 순순히 내어주실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나귀 새끼의 참주인은 주님이시오, 주인인 것 처럼 보이는 그는 다만 그 관리를 맡은 자에 불과합니다. 가끔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시간을 드려라.” “너의 재물을 드려라.” “너의 몸을 드려라.” 우리가 주님께 묻습니다: “왜 그리 하십니까?” 주님께서, “내가 쓰고자 한다” 말씀하실 때, 지체하지 않는, 변명을 달지 않는 여러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가진 것중 우리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청지기로서 이 세상을 살 동안만 맡아서 관리하고 경영할 뿐입니다. 누구의 원대로 관리하고 경영해야 할 것입니까? 주님의 원하심 대로 해야 할 줄 믿습니다.

4-6절에 보는 바 대로 맞은 편 마을에 들어간 두 제자는 거기에서 무 앞 거리에 매여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하고 그것을 풀 때에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 하려느냐?’” 묻습니다.

여기 마가가 일부러 나귀 새끼의 주인이란 말을 쓰지 않음은 나귀 새끼의 참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대답할 때, 그들은 순순히 나귀 새끼를 내어줍니다.

7-8절에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지날 길에 펼쳐놓음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북방왕국 이스라엘에서 예후가 아합의 집을 치기 위해서 선지자의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가 왕이 되었다 함을 당치 않은 일로 여기던 사람들이 그가 여차여차 하여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열왕기하 9:13에 보니,  “무리가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예후는 왕이라” 말하며 그의 왕됨을 인정하고 그를 왕으로 받아들입니다. 겉옷은 그 사람의 몸의 일부와 같은 것으로 겉옷을 깔았다고 함은 ‘자신을 낮추어 신하(臣下)로서 왕(王)께 복종(服從)하겠다’는 뜻입니다.

9-10절에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합니다.

9절은 시편 118편 25-26절을 축소 인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호산나”라 함은 “호시아”와 “나”의 합성어인데, ”이제 구하소서!“ 하는 뜻입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群衆)이 ”호산나“ 하며 종려나무를 흔듦은 ”그들을 구원(救援)하기 위해서 왕으로, 또한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며 당장의 구원을 청원함입니다.” 이 예수님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대리자로 그들에게 오심입니다.

10절은 시편 148:1을 다소 변경하여 인용합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그들은 구원의 주님을 그들께 보내주신 하나님께 “할렐루야” 찬송합니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라  함으로써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그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이 그들이 염원하는 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주권의 회복을 위함이 아니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이,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고자 함이었음”을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하고, 유대인들의 다수는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11절에 예루살렘에 이르신 예수님은 성전을 둘러 보시고 날이 이미 저물었음에 그의 친한 친구들이 있는 베다니로 가시고 다음 날 아침까지 거기 머무십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월요일에 되어진 사건으로서, 그 다음 날 성전에 가시어 성전 안에서 장사하시는 자들을 내어쫓으시고 하나님의 전을 청결케 하시는 일로 시작하여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생에 가장 중요한 며칠을 보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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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삼년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눈먼 자도 보게 하시고, 앉은뱅이도 일으키시고, 손마른 자도 낫게 하시고, 혈루병으로 고생하는 여인도 낫게 하시고, 죽은 자도 일으키시고 하셨지만, 결국 이러한 치료의 사역이 무엇을 위하이심이었습니까? 그가 물위를 걸으시고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다섯 개의 떡덩어리와 두 마리의 물고기로 5,000명을 먹이시고 (마태 14:17이하), 또 다른 때에 일곱 개의 떡덩어리와 두어 마리의 물고기로 4,000명을 먹이셨지만(마태 15:34 이하), 이 모든 기사와 표적들이 무엇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까? 이는 결국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그의 나라가 어떠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으로 여러분의 영혼의 질병이 치료받아 온전하여지고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 사건으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하나님께 청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주기도문을 입술로만 외지 마시고, 마음으로 간절히 청원하심으로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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