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4, 2013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마가 10:28-31)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마가 10: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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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국에 유학 오려고 준비할 때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은 저의 장래계획을 아시기에 이번 기회에 ‘평신도선교사로 임명할 테니 미국에서 캠퍼스사역을 감당하라’고 거의 명령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몇 년의 직장생활 끝에 유학 가기로 결단한 터이라 공부하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여겨진 까닭에 시간의 말미를 달라고 말씀드리곤 금식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처음에 삼일금식을 하였는데 아직 확신이 서지 않기에, 일주일 금식계획을 세우고 금식을 끝냈는데 여전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저는 성격상 평신도이건 목회자이건 선교사의 직분을 받게 되면 그 일을 꼭 감당해야 할 것으로 알았기에 칠일 금식이 끝난 뒤에도 선뜻 대답을 못 드렸습니다. 다시 십일 금식을 하기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십일 금식으로 정한 날 첫 이틀동안에 예비군 기본교육이 있게되어 산에 올라가 예비군 훈련을 받음으로 열흘동안 나누어 사용하고자 했던 나의 모든 에너지가 전부 소모되게 되었습니다. 기진맥진하여 사흘부터 나머지 팔일동안 금식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며 포기하고자 할 때 사흘부터 저에게 새로운 힘이 생겨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이 다 소모되어버리자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새 힘을 느끼게 되었는데, 나머지 기간동안 성령께서 힘과 능력으로 채워주실 때 연약한 육신과 의지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십일 금식이 끝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과 함께 하심을 경험하였기에 평신도 선교사의 직분을 받고 힘든 유학생활과 캠퍼스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한 무리의 유목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빛이 그들을 에워싸며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희는 지금부터 가능한한 돌을 많이 모으라. 그것들을 너희 배낭 속에 넣으라. 그런 다음 배낭을 짊어지고 하룻동안 걸으라. 내일 밤이 되면 너희들은 그 돌들 때문에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할 것이다.”
그 빛과 빛 속의 음성이 사라진 후, 유목민들은 허망함을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묵묵히 그 음성을 따라 돌을 배낭에 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투덜투덜 불평하면서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배낭에 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함이 무의미하고 시간과 정력만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무시해버립니다.
유목민들은 그들의 여정을 따라 하룻길을 행하고 또 밤이 되매 천막을 치고, 어제 그 빛 가운데 음성을 마음에 담고 있던 사람은 자신의 배낭에 담아온 돌들을 꺼내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제의 돌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로 바뀌어 있음을 발견하고는 그 기쁨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불평하면서도 돌을 조금 담아온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다이아몬드를 갖게된 기쁨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많은 돌들로 배낭을 채워오지 못함에 아쉬운 마음입니다. 그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한 개의 돌도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통분해했지만 이제 돌이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이, 매일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함이 나의 생활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마치 무의미한 돌덩이를 배낭에 담는 일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의 짐으로 무거운 배낭을 더 무겁게 하며, 그렇지 않아도 세상의 일들로 시간이 없는데 쓸데없이 사용하는 시간같이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기도의 돌들을 배낭에 담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었는가 곧 알게될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의 일들로 가득 찬 배낭을 지고 가는 사람이 현명한 것 같으나, 얼마 안 있어 세상의 짐들은 다소 덜어버리고 말씀과 기도로 채워진 배낭을 지고 가는 자신이 얼마나 잘했는지 생각될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타이타닉'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타이타닉호가 침몰해 들어갈 때 승객들이 생에 대한 애착으로 우왕좌왕하며 먼저 보트를 타고자하는 모습들이 우리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단면인 것 같아 씁쓸함을 줍니다. 그런 가운데 바이올린 주자가 마지막으로 연주하는 “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송가 364장은 생에 대한 비장함을 느끼게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세상의 삶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 30분을 무엇을 하며 보내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삶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온갖 쾌락을 누려온 사람은 세상을 떠남이 너무 아까와 몸부림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로 오래 오래 살게 하실 것이지 왜 나의 생을 이와 같이 짧게 하시나 원망하면서 30분을 보낼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나와 함께 주심에 감사 기도하는 30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 30분을 연장하여 30시간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있는 인간에게 시간이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한정적인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있어서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생에 대해서 진실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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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을 방문하여서 그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 물어본 사건에 이어지는 대화입니다.
예수님을 찾은 그 부자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기에 그의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실 때에 그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돌아간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시는데,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10:23)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재물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재물이 많은 자는 그 재물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사랑함보다 더 크고 탐욕이 가득해지기 때문에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떠한 것에 대한 욕심이 그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는데도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그 문으로 들어서는 대신에 세상 것을 추구하다가 스스로 망하게 됨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있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와 다른 제자가 어떻게 했는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28절에,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갈릴리 바닷가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실 때에 그들이 배와 그물을 놓아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후 삼 년여 세월을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사와 이적을 보면서 또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삼고자 함을 보면서 은근히 욕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전함보다도 이 세상에서 그들의 출신 신분으로는 누릴 생각조차 못했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생겨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 당하심이 눈앞에 다가왔어도 이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자리에 대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그렇다-아니다 대답하시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해야할 일--버려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대화 가운데 우리가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동문서답(東問西答) 식의 엉뚱한 말씀이십니다. 이는 그만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다는 반증입니다. 그 당시의 제자들만 예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른 기대를 한 것이 아니라 요즘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기대와 예수님을 바라봄도 예수님의 생각에 한참 미치지 못함을 예수님께서는 아십니다.

29-30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갖고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인데 그러나 그 목적이 분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어부 제자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은 이유가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함이었다면 이들은 바른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좇은 것은 아닙니다.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우리의 소유나 관계를 버리는 것도 나의 이해관계보다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함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앞에 제자들과의 대화내용이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을 좇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이 보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교회에서 주장하고 목소리를 내려하고 다른 사람 앞에 자기를 드러냄이 그 목적이라고 한다면 제자들간에 다툼이 있었듯이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도 다툼이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교회 다툼의 요인중 상당수가 제직 선출과 서로 다른 주장의 충돌임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 목적이 잘못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버릴 것을 말씀하시는데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것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매우 귀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포기하고자 할 때 나는 비로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나를 따르기에 합당치 않은 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함이 자기의 소유를 부인함이요 세상에서의 나의 관계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심은 바로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하는 삶입니다.

창세기의 성경귀절 중 제가 자주 인용하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과 아브라함의 순종의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동산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 하시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옛 뱀의 미혹에 그들이 넘어간 것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그 땅에서의 그들 자신의 유익을 더 생각한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 할 때 그를 바치기로 작정한 것은 이삭을 사랑치 않음이 아니요 하나님께 순종함이 더 중한 일임을 그가 안 까닭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믿음의 좋은 본을 신약백성들에게까지 증거하여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가장 귀한 것을 버리는 결단을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하시는데 내세뿐 아니라 금세에서도 축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삭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번제할 수양을 허락하시고 이삭을 그의 믿음의 아들로 돌려주셨습니다.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에는 재산이나 부모, 형제, 자매, 자식의 가치를 깨달아 알지 못하였는데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이를 포기하고 나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됩니다.
전에는 부모, 자식과 형제, 자매가 육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그들도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영적으로도 나의 귀한 혈육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나에게 핍박이 함께 옴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핍박을 이길 힘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작정한 사람중에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나의 당할 핍박이 너무나 커서 일시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기쁨이 영원히 넘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 이를 능히 견딜 수 있습니다.

31절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지 오랜 사람중에도 그 말씀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뒤늦게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가운데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그 가운데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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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입니까? 목사이고 장로이고 집사이고 직분이 있고 없음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사 가운데도 잘못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직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하여서 그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영생을 소유한 성도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로는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의 결심만으로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만을 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 하면서도 교회에서 하나님 보다도 나와 나의 주장들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베드로가 비록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주님께 말씀드리지만 자연인 베드로의 모습은 여전히 부족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결점투성이의 인간이었습니다.
그에게 오히려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께서 그를 변화시키시고 그를 충만히 채우실 때, 비로소 그는 온전히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그 복음을 위하여 무엇을 포기하고 계십니까?
바라기는 성령의 충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여러분의 삶의 전부를 여러분의 삶의 중심되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드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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