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26, 2013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누가 5:1-11)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누가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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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그를 따라다닌 사람들 중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를 반대하고 비난하고 고소하기 위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들입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병 나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모세의 율법을 범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 말씀과 행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고자 함이 없었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꼬투리를 잡고자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구경 삼아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을 보고 놀라고 호기심이 발동하였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태 12:39)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현세의 문제를 해결 받고 현세의 축복을 받기 위해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갔더니 질병의 문제가 해결되고 배고품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종류의 사람들에게도 자기를 드리고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 받고 현세축복의 목적을 위해서 따라갈 뿐이지 그 이상의 헌신을 하고자함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과 생각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으면 쉽게 떠나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네 번째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좇음’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따르다 보니까 욕심이 나고,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시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 부르심(outer calling)’입니다. 이 부르시는 음성은 누구나 다 듣습니다. 비판하고 트집잡기 위하여 따라다닌 사람도 들었고, 이적을 구경할 요량으로 따라다닌 사람도 들었고, 현세 문제해결과 축복을 위하여 따라다닌 사람도 들었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따라다닌 사람도 들었습니다.
현재의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의 설교를 통하여 주님의 외적 부르심을 듣되, 설교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도 듣고, 구경 삼아 방청객의 입장으로 앉아 있는 사람도 듣고, 현세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도 듣고,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도 듣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외적 부르심을 듣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고, 삶이 변화되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삶이 전혀 변화되지 않고 주님을 증거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교회생활을 합니다.
왜 부르심을 듣고도 주님을 온전히 따라가지 아니하며 증거하지 아니하며 삶의 변화가 없습니까?
이는 주님의 ‘내적 부르심(inner calling)’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판의 귀와 구경꾼의 눈과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만 갖고는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자기의 것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주님의 내적 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말씀과 삶을 좇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부르심의 장소(場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는 특별한 곳이 아닙니다. 저 숲 속의 현자의 은둔처가 아니요,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 살고 있는 궁전이나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어부의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의 대상(對象)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시되 세상의 학문이 많은 자나, 종교 지도자나, 부자나 다른 특권 계층의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아니 오히려 스스로 평범 이하의 우둔한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門閥)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되 일상적인 삶의 터전에서 스스로 평범하다고 혹은 지혜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부르심의 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되 그들이 생업에 분주하게 종사하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그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모두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있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                                                       

든지(마태 4:18; 마가 1:16) 또는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누가 5:2).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마태 4:21; 마가 1:19).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고 있을 때 ‘너희들 정 할 일이 없으면 나를 따라 오지 않을래? 내가 너희에게 할 일도 주고 또 먹을 것도 줄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거절하거나 사양합니다. 그들의 이유는 너무나 바쁘다는 것입니다. 생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냐고, 자녀들 학교 따라다니랴, 음악레슨 시키랴, 운동시키랴, 또 차 태워주랴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일은 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의 때를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때, 농부가 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붙잡고 있는 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때,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종용하십니다. ‘나를 택하든지 세상을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마태복음 8장 21-22절(누가 9:59-60 참고)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61-62절에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쑴하십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드릴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드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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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도 그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4장에 보니까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낫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확장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많으신 분이었지만 혼자서 감당하시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하나님 사역에 동참할 때 더욱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각 촌으로 제자들을 파송하신 일들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2,000년사를 살펴볼 때,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헌신된 성도들의 자기의 시간과 재물과 생명을 드리는 자기희생을 통하여 계속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교회의 사명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생명을 내놓을 각오가 된 헌신된 성도가 많은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것입니다.

    1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무리가 몰려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눅 4:43), 때로 한적한 시간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시고 힘을 재충전받으셨습니다.
그가 갈릴리 호수(또는 바다) 북서쪽에 위치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신 때에도 많은 무리가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2절: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두 배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배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부의 배입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와 피곤한 육신과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시몬이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도록 허락하였는지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그의 말씀은 감히 거절할 수 없는 권세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시몬아, 내가 네 배에 올라 타야 되겠다.”라고 말씀하시매, 시몬은 “선생님, 그리 하옵소서.”라고 순순히 대답했을 것입니다.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몰려든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몰려든 무리들의 관심사는 병 낫기와 귀신들림에서 벗어남과 세상에서의 양식을 구하는 것과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구경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전파하기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몬에게로 그의 관심을 옮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배에 오르신 것은 그에게 몰려드는 인파로부터 떨어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장차 그의 사역에 동역할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성경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명령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물을 내릴 장소까지 지정하여 주셨습니다.

    5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은 어려서부터 갈릴리 바닷가에 살아왔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고향은 갈릴리호수 북쪽의 가버나움입니다. 지금도, 가버나움을 방문하면 베드로의 집이라고 명명된 곳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입니다. 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 그 앞에 누가 아는 척이라도 할라치면, 가만히 있지 못할 그인데, 오늘 이 낯선 사내가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매, 그는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 행하심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말씀하시는 이분이 능력이 많다고 하길래 그의 말씀에 따르기로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병 고치고 귀신 쫓는 일에는 능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고기 잡는 일에서까지는 그보다 낫다고 생각할 리 없는 시몬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절망감과 허탈함에서 온 것이었을 것입니다. 고기 잡는 일에 이력이 난 그였는데,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을 때 그는 참으로 지치고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그에게 권세로 말씀하십니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낯선 남자의 권세 앞에 순종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은, 그렇게 할 때 고기를 많이 잡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앞에 계신 예수님의 권위가 그로 순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과 기대에 앞선 순종과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약속들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데, 당장은 그것이 믿어지지 않고 그것이 과연 그러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습니다.
그러하더라도, 그 약속과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붙잡고자 하고 순종하고자 함이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람은 그가 붙잡고자 한 것을, 믿으려고 한 그것을 얻게 됩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의 지정하신 곳에 그물을 내렸더니, 심히 많은 고기가 잡혀서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시몬의 배와 함께 나간 다른 배를 불러 함께 고기를 담았는데, 그물에 걸린 고기는 두 배를 가득 채워 배가 잠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내릴 때 이것을 기대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지정하신 곳에 그물을 내리면 고기가 많이 잡힐 것이라고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8-10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얻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시몬은 고기를 많이 잡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내게 말씀하신 이분은 과연 누구인가? 이분이 누구시길래, 나의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것 같고, 자연의 모든 현상까지도 아신 단 말인가?
놀라고 두려워한 것은 시몬뿐 아니라 이 광경을 목도한 주위의 어부 모두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두 배 중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어부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다른 어부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두 배를 가득 채운 큰 물고기를 싣고 두 배가 호숫가로 나오면서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고 놀라매 달려와서 함께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마태 4:21; 마가 1:19 참조).

시몬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에 대한 시몬의 호칭이 “선생”(ἐπιστάτα)에서 “주님”(κύριε)으로 바뀌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처음 본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른 것은 가르침을 배운 제자로서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경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시는 이분은 그저 “선생”이라고 불러서는 안될 분 같이 여겨졌습니다. 해서, “주여”(κύριε)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께서 시몬을 위시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것은 그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안에 속한 사람의 수를 늘려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심도 동일한 이유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 삼으시기 위함이요,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기 위함입니다.

    11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만선(滿船)의 배를 저어 육지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에게 더 이상 고기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까닭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생명이요 구원되신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릴(=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그물을 깁던 아버지까지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물은 어부의 생업의 중요한 수단이며, 배는 어부에게 가장 중요하고 큰 재산이요, 부친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들을 포기함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생업도구, 재산과 사람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좇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세오”(ἀκολουθέω)는 ‘따라가다(follow)’, '동행하다‘(accompany)의 의미와 함께 ’제자가 되다‘(be a disciple)는 뜻도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이러한 행동을 하게 했습니까?
주님의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들었기에, 고민과 망설임 없이 가장 중요한 것들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의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의 삶의 가치관과 우선순위가 바뀌게 됩니다.
삶에 놀라운 변화가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생업을 모두 포기하고 다 목회자가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목사로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세상 기업을 경영하는 가운데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놀랍고 은혜스러운 것은 우리가 어떤 주의 일꾼이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과 재물과 몸을 하나님을 위해서 지혜롭게 사용하게 하시며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아간 베드로는 후에 마가복음 10장 28절에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가복음 10:29-30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지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사람은 바른 목적을 위하여 그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나를 따르기에 합당치 않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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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를 좇아간 첫 번째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의 마지막이 어떠했습니까? 전승(傳乘)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하고, 안드레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하고,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 기록된 대로 아직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헤롯 왕(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하여 칼로 죽임을 당하는데 이로써 복음이 세계로 전파됨에 밑거름이 되고, 요한은 소아시아 서해안의 한 섬 밧모섬에 귀향당하고 그후에는 에베소에서 그의 마지막을 보냅니다.

이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이들이 보통 사람들임을--아니 보통 사람들보다도 부족한 사람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들의 앞뒤를 재지 않는 단순한 마음(simplicity)과 주님을 위해서 그들을 헌신하고 희생하기를 원하는 가슴입니다. 그리할 때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을 좇아갔으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with spirit and truth)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4:24).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시며, 여러분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마음을 드리며 여러분의 가장 귀한 부분--시간, 몸, 재물과 생명을 희생하실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이 시간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망설임과 주저함 없이 주님을 따라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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