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6, 2013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누가복음 18:9-14)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누가복음 18:9-14)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
살아있는 기도
「제자입니까」, 「진정, 신자입니까」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Juan Carlos Ortiz) 목사님은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당한다"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산 기도가 아니라 죽은 기도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크리스천들의 올바른 영성은 기도에서 시작한다고 강조합니다. 기도를 드리되 살아있는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오르테즈 목사님은,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이 우리를 기쁘게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기도할 때마다 '~을 주시옵소서'라며 죽은 제사를 드리곤 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받으옵소서'라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배에 관하여 오르티즈 목사님은, "예배를 드리고 난 뒤의 삶이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은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자신을 온전히 드린 예배에는 다짐과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만 설교를 듣고 찬송하는 것을 즐기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나 혼자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발생할지도 모를 사고에 대비한 보험 또는 보험회사의 직원 정도입니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그가 어느 목적지를 향하여서, 몇 마일의 속도로, 어디를 경유하여 갈 것을 보험회사의 직원과 의논하지 않듯이, 하나님을 보험회사 직원 정도로 여기는  사람은 그의 목적지에 대해서, 그의 경유지에 대해서, 그가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쓰임 받기를 원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상의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고가 났을 때 분주하게 보험회사 직원을 찾듯이, 많은 사람들이 삶에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다급한 기도를 드립니다. 사고가 나도 작은 사고일 때는, 보험료가 올라갈 것을 염려하여 적당히 자기 자신이 주머니 돈으로 해결하듯이, 삶의 작은 문제들은 하나님께 보고함 없이 자신이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매일 매일 삶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나약하고 잘못된 곳으로 고백하고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매일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한 적이 없지만 내 삶이 크게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맞는 말 같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 적이 없었기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십 년을 교회생활을 하고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삶'은 사람의 편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 삶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크게 잘못된 삶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바른 기도생활과 신앙생활의 시작은 하나님이 왜 나의 일상생활에서 필요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정하고 고백함에서 비롯됩니다.

2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과부의 강청기도(18:1-8) 다음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18:9-14)에 관해서 말씀하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가 어떠하여야 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9절 이하의 비유는 자기는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멸시하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내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라고 감히(?) 말할 사람이 없는 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평가와 용서에서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인색함을 보이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0절: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과 세리--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요즘의 교회와는 달라서, 성전 안에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제물을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들어갔습니다.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전 뜰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면, 요즘도 그 당시의 성전 뜰에 해당하는 '통곡의 벽'(Wailing Wall, Western Wall) 앞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 중에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입니다. 하기에, 그들의 열심이 참으로 특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삶의 행위 이상을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외형적인 삶은 자타가 의롭다고 공인할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며, 우리 믿는 사람의 의의 척도로 바리새인의 의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하셨는데 이는 율법에서 요구하는 십일조의 대상이외의 것으로도 십일조를 드린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리새인의 외형적 삶 그 자체는 분명히 평균 유대인들보다는 율법을 더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하시고 그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바리새인이 그러하듯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시고, 2절에서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시고, 5절에서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리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로마의 정부에 빌붙어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세금명목으로 돈을 거두어 간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세리에는 두 부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정기적 세금 징수자인 '카바이'(Cabai)인데 이들은 수확곡식의 1/10, 포도, 과실, 기름의 1/5, 개인수입의 1/100의 소득세를 거두어 갔습니다. 또한 14-65세의 모든 남자와 12-65세의 모든 여자로부터 1인당 1년에 한 데나리온을 인두세로 거두어 갔다고 합니다.
둘째는 세관 세리인 '목헤스'(Mokhes)인데, 이들은 정부 주요 세원 징수자였습니다. 이들은 수출과 수입의 2.5-12.5%를 매매세와 향용세로 거두었고, 통행세, 항구입항세, 시장세, 도시출입세 등등 수많은 세금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동족인 유대인으로부터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덕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자기 스스로 드러낸 것이며, 드러내되 자기보다 못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드러낸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가 '따로' 기도한 것은 '죄 많은 세리'와 동류가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감사 기도'로 여기지 아니 하셨습니다.
첫째는,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드러낸 것입니다.
둘째는,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 그리고 세리'와 비교함으로써 그 자신은 그들과 같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 사람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토색, 불의, 간음, 부정의 죄'를 범한 자는 아닐지라도 그에게는 '위선과 자기 기만과 교만'의 죄가 있었음에도 자신의 것은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 나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는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이어야 할 것이지, 다른 사람의 부족함과 비교하는 교만한 심령의 감사는 감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림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의의 열거입니다. 그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한 분만 그의 의를 알아주시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의 인정함 받기를 원하는 까닭입니다(마태 6:5).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성전 뜰 중에서도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에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리보다 더 의로운' 바리새인의 '감사 기도'를 들으시지 아니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는 이 세리의 기도는 들으십니다. 시편 51편 17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세리는 하나님께 다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간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리의 기도를 들으심은 그는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됨을 알았기 때문이며, 그가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필요한 것이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죄를 지어 죄책감이 생기게 해야 되겠네요??'
그러나, 일부러 더 많은 (추가적인) 죄를 범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의 모습으로도 (아무리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하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더 많은 죄지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함'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닮아 가는 삶을 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바울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고백하였는데, 우리 입술에 이러한 죄인 됨의 고백이 없다면 이는 문제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성경은 역설(paradox)입니다. 자기를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의롭다고 여기는 자'는 불의한 자가 되고, '불의하다고 여기는 자'는 의로운 자가 됩니다. 이는 의·불의의 판단과 결정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이시며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에 속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자기를 낮추려고 '짐짓'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고, 미련하고, 죄와 허물이 많은지 절실히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우리 각 사람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성도의 결단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기도로 끊임없이 대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특별히 필요 없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께 알리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과 죄 많음을 고백하며, 이 거친 광야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주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예비하여주심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대형 사고가 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이번 신호등에서 직진할 것인지, 아니면 우회전할 것인지, 또는 좌회전할 것인지, 이곳에서는 몇 마일로 달리는 것이 적당한지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 매 순간 기도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