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6, 2013

"주님 가르치신 기도" (마태복음 6:9-13)

 "주님 가르치신 기도" (마태복음 6:9-13)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
기도란?
기도에 관해서 어떤 이(루스 그레이엄)는, "기도는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과 인격 대 인격으로 전화 통화하는 것과 같다. 만일 우리 자녀들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전화 한 통 없다면 얼마나 애타는 일이겠는가? 기도란 우리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그 누군가(=하나님)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울음일 수도 있고, 한탄일 수도 있고, 혹은 찬양의 노랫소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기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이래 오늘날까지, 해서, 주기도문은 기도의 모범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 즐겨 암송하는 성경구절이 바로 이 주기도문과 시편 23편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2
기도할 때에 외식하지 아니할 것은(5절),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람 듣기에 유창하고 좋은 기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말씀하심은(6절) 은밀한 중에 계시며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만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은밀한 교제이요 대화입니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7절). 한 번의 기도에서 한 말을 또 하고 조금 있다가 또 비슷한 말로 반복하는 것은 자신이 간구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심은 한 기도제목을 놓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들을 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응답하실 것을 믿기에 들어주실 때까지 몇 번이고 기도하는 것과 응답하실 것을 믿지 못하기에 한 자리에서 한 기도 또 하고 또 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이며, 그러하기에 응답을 받을 때까지 끊임없이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도 다 아시는 왜 기도로 구하여야 합니까? 하나님은 구하는 사람의 믿음의 간구를 보시기 원하십니다.

   9-10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셔서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땅에도 계시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다스리심의 영역이 지구라고 하는 이 땅과 땅에 속한 피조물만이 아니라, 해와 달과 별들과 다른 항성들을 포함한 우주 전역과 그 너머에까지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에 있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심은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이 전혀 남이 아니요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요, 자녀의 간구에 응답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4-15절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갈 4:6 참고).
하나님은 양자(養子) 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독생자요 맏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기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간구에 응답해주지 아니하실 것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에게 "Yes"로 응답주실 때, 우리를 망하게 하거나 신앙의 교만에 빠지게 하는 간구에 대해서는 "No"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위한 세 가지의 간구를 하게 하신 후에 사람에게 필요한 것 세 가지를 간구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한 세 가지 간구는 사람의 신앙생활 여하에 따라 응답되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은 본래 거룩하십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사실은 하나님의 속성)인 '여호와'가 너무 거룩하기에 감히 입으로 부를 수가 없으며 글자로도 기록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점 네 개(....)로서 표시할 뿐이었습니다(tetragram). 대신에, "주님(아도나이)"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첫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 45)고 반복하여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거룩하여지고자 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 중에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기는커녕 그들보다 못한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로 말미암아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뭐 저 모양이야? 저를 보니까 저가 믿는다는 하나님도 별 것 없을꺼야.'라는 소리를 들음은 하나님의 거룩을 가리는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을 위한 간구의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우리 각 사람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와 나라와 이 땅에 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에게 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Sovereignty of God)'가 미치는 영역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온전히 순복할 때,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여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리심' 아래에 놓이기를 원할 때, 우리의 가정이,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다스리심에 우리를 순복하게 해달라는 따라서 우리의 순복을 위한 간구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간구함은 잘 먹고 작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와 평안과 희락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함도 그 나라에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계획 또는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온전히 미치는 하늘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계획과 섭리--가운데 진행됩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현재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거나 뜻에 거역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거나 거역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 '나'의 생각과 삶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간구하는 사람의 바른 모습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믿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 위하여서는 부정하고 음란한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며 오직 하나님 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새 사람으로 변화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이런 결단을 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며,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때 하나님의 뜻이 그 사회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우리의 간구는 하나님께서 독자적으로 이루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을 위한 일꾼 된 우리의 바람과 노력과 변화를 통해서 확장되고 성취되어질 수 있습니다.

   11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목말라하거나, 헐벗은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마 태복음 6장 31-32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의식주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심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로 믿음이 없는 지나친 염려와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언 30장 8절에서 지혜자 아굴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생활에서 만나와 매추라기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여주신 하나님께서 이 광야같은 인생을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입니다.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께 죄와 허물의 사함을 받기를 간구하는 사람은 먼저 '내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했나?' 돌아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를 앞에 두심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함을 받기 위한 선결조건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또한 이것이 선결조건임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 후에도 다시 한번 반복하십니다. 14-15절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죄사함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의 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없으며, 우리는 죄에 대한 가책과 부담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특성인 마음에 의와 평안과 희락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 위하여 나무 사이로 숨은 것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하여 어둠으로 숨어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죄사함의 확신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경미한 죄에 대한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연인으로서 우리는 이 죄사함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로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며, 이런 일의 선행 후에 하나님께 우리의 죄사함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13절상: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사단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넘어뜨리고자 합니다. 사단은 이것이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자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사단의 시험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을 넘어뜨릴 재간이 없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의 나태함이나 교만함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그때에 자고 있던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성도는 또한 악에서 구분된 삶을 살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값을 치르시고 이미 성도들을 악에서 건져내셨는데, 다시 악에게 져서 악으로 빠져 들어가는 일이 성도의 삶에 없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21절에서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고하고 있는데, 악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13절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권세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사안입니다. 이렇게 기도함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인정하는 고백이요 찬양입니다.

3
성도의 결단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창조의 땅인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 가운데 번성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번성과 축복은 우리의 사치스럽고 지나친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어떤지 이웃들에게 전하고 함께 나누기 위한 번성과 풍요로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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