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4, 2013

“달리다굼” (마가복음 5:35-43)

                                                  “달리다굼” (마가복음 5: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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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印度)에 ‘귀사코타미’라고 하는 젊은 과부 여인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으매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들의 시체를 끌어안고 길거리로 나가 “내 아들 좀 살려주세요,” “내 아들 좀 살려주세요,” “내 아들을 살려줄 사람은 없나요?”라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치면서 이 골목 저 골목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그저 여인의 동정만 살피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석가모니의 제자 중 하나가 이 광경을 보고는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지금 석가모니께서 기원정사라는 절에 계시니 죽은 아들을 데리고 가보시지요.”
여인은 마지막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서둘러서 석가모니가 있다는 ‘구시라’ 성 ‘시다림’이라고 하는 숲 속에 있는 절로 죽은 아들의 시체를 안고 갔습니다.
아들의 시신을 안고 그를 찾아온 여인을 보자 석가모니는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여인은 석가모니에게 매달려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석가모니는 여인이 진정할 때를 기다려 그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여인이여, 울음을 멈추시오. 그리고 일어나 마을로 내려가시오. 그곳에 이르거든 아직 한번도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만 골라서 쌀을 조금씩 얻어다가 죽을 끓여서 죽은 아들에게 먹이면 그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요.”
여인은 죽은 아들이 살아날 수 있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하여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서둘러서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여러 집을 돌아다녀 저녁이 되어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한 톨의 쌀도 얻지 못한 채 빈손으로 힘없이 석가모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석가모니님, 하루 종일 자녀 보았지만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가정은 한 집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톨의 쌀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어서 내 아들을 살려주십시오.”하고 애원하였습니다. 석가모니는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여인이여,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 했거늘, 꽃은 피어도 곧 지고 사람도 나서 이윽고 죽는 법이오. 인연따라 일어나서 인연따라 사라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할 것이 없소.”
석가모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인지라 그도 생자필멸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죽은 사람을 살린 이야기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고(왕상 17:22),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왕하 4:34).
신약에서는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렸고(행 9:40), 바울도 죽었던 유두고를 살렸습니다(행 20:9-12).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여러 차례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장지로 가는 도중에 살리셨고(눅 7:11-17), 죽은 지 나흘이나 되고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요 11장).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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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을 떠나서 다시 배를 타고 본래의 장소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주 활동장소였던 가버나움(Capernaum)일 것입니다. 전과 다름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의 무리를 헤치고, 예수님께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야이로요 직업은 회당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장은 그 사회에서 유지에 속합니다. 많은 장로들 가운데서 뽑힌 사람이요, 공중예배에 있어서 모든 질서를 책임지고 일반적으로 회당의 일을 지휘 감독하는 사람이 회당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임무는 성경을 낭독할 자를 임명하고 설교할 사람을 초청하고 회당의 건물을 깨끗이 보관하거나 보전하는 일을 책임지고 돌보았습니다. 이러한 회장당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서 여러 번 간구하였습니다.

딸의 병 낫기를 위하여 야이로는 선입견을 버렸습니다. 유대인 지도층에게 예수님은 위험한 이단종파를 퍼뜨리는 사람으로 보였을 텐데 야이로는 유대인 지도자 중에 한 사람으로 그런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야이로는 체면을 버렸습니다.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던 야이로이지만 목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겸손히 예수님께서 자기 딸의 병을 고쳐주실 것을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간청을 하되 한 번만 말한 것이 아니라 많이 간구하였다고 했습니다(마가 5:23). 기도와 간구의 응답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한 번만이 아니라 응답을 얻을 때까지 구할 것입니다.

35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아직 길을 가고 있는데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낙심천만한 일입니까? 자신의 체면과 지위를 다 버리고 사정사정하여 병 고치는 능력이 출중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데 딸이 죽었다니 이 얼마나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입니까?
이제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일이 헛된 것처럼 여겨집니다.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이때 예수님께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8장 50절에는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야이로에게 예수님은 병은 고칠 수 있는 분이지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의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야이로의 믿음의 결단이 요구되어지는 상황입니다.
                                                  
병 고치는 능력이 출중하다고 소문난 예수님이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판단은 아직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기대(期待)였습니다. 자기의 기대가 사라진 후에 믿음이 시작됩니다.
현재의 상황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믿기만 하라”는 뜻입니까?
예수님도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셨는데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니 무엇을 믿기만 하라는 얘기겠습니까?
그가 죽은 생명도 살리실 수 있음을 믿기만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 되심을 믿기만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들은 반드시 이뤄짐을 믿고 있습니까?

만일 야이로가 예수님의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께 ‘이제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았기에 예수님과 계속 동행하여 집에까지 갔습니다.

37-39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예수님은 중요한 사건에 모든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는 대신에 주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가십니다. 아마도 그들의 믿음이 다른 제자들의 믿음보다는 앞섰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을 큰 일에 데리고 갔다가 실망스런 표정을 짓거나 말을 하는 것이 주위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에, 그들이 장차 크게 쓰임 받을 것이기에 그러셨을 수도 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크게 소리지르고 울며 심히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소망이 있는 믿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닙니다.
해서,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듯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심은 소녀가 육체적으로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켜 세우실 것이기에 “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해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잔다”고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 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죽은 자에게는 깰 소망이 없지만 잠자는 자에게는 깨어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40-41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그러나 소망이 없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저 허탄한 것으로 들릴 뿐입니다. 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의 세 제자를 데리시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가셔서 소녀의 손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달리다”(Talitha)는 ‘소녀야’란 뜻입니다.
”(Koum)은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일어나라”는 육신이든 영혼이든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나라는 뜻이며, 활동이 정지된 상태에서 빠져나와 활동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사야서 60장 1절에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잠자는 것 같은 성읍 예루살렘을 향하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읍으로서 활동을 재개하며 하나님의 빛과 영광을 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패역하고 악독한 도시 니느웨를 변화시키시기 위하여 요나에게 외치는 자의 사명을 맡기실 때, 요나를 향하여 “일어나라-가라-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요나서 1:2; 3:2).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4절에서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고 말씀함으로 성도가 일어나서 빛 되신 예수님께로 나오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14절에서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 관에 집어넣어져 장지로 향하고 있을 때,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어 멘 자들이 멈추어 서게 하신 다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리다굼”이라고 하심은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시는 권능의 음성입니다.
달리다굼” 하심은 야이로가 예수님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한 것에 대한 응답이십니다.
달리다굼” 하심은 영적으로 잠자는 자들을 일으키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달리다굼” 하심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케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입니다.

42-43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소녀에게 “달리다굼” 하실 때,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는 즉시 효력을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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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우리를 향하여 ‘쿰(Koum)’--‘일어나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일어나서 주님을 위하여 우리 자신들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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