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6, 2013

"과부의 강청기도" (누가복음 18:1-8)


"과부의 강청기도" (누가복음 18:1-8)

  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리라.


1
마음을 움직이는 간구
오래된 얘기지만, 한국의 한 지방 청년이 프랑스의 미인대회 출신의 미녀에게 마음이 푹 빠졌습니다. 그는 그 아름다운 프랑스 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해서, 어찌 어찌하여 그의 연락처를 알게되고, 하루가 멀다하고 연애편지를 그에게 보냅니다. 그 프랑스 미녀는 듣도 보도 못한 한국의 청년이 보내는 편지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 미녀의 귀찮음은 호기심으로 변하게 되고 심심풀이 답장을 하다가 결국에는 사랑의 결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이 한국의 재벌이나 준재벌의 아들이 아니요, 그렇다고 뛰어나게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지방청년인데 그가 그렇게 원하던 대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랑을 구하는 마음이 특심한 까닭입니다. 이 청년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신념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간구하는 바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고 그에게 간구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그런 일들을 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과 요셉 등에게 하나님의 같이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하실 때에도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들에게 나타내셨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목이 마르다'고 모세에게 떼를 쓰며 원망할 때에도 그들을 벌하시는 대신에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심으로 그들의 목마름을 채워주셨습니다. 여호수아 이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을 위하여 사사들을 두어 치리하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원한을 풀어주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고 청할 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들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고 그 섭섭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게 되고 신정정치에서 왕정정치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의 삶을 감찰하시고 간섭하기를 원하십니다. "간섭하기를 원하신다"고 해서 '사사건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하시고 통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가 요청할 때 도움을 주고 갈 길을 알려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그 행동의 판단과 결정을 사람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주셨기에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무엇이며 싫어하심이 무엇인지 웬만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임금이 사단이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 때가 많고, 그들의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이것으로 낙망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즐거워하시는 하나님께 매어 달려야 합니다.

2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해주심을 세상의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과부의 강청함에는 못 이기어 그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데, 하물며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자녀의 원함에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1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함
예 수님은 '어떤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가 아닌가'는 '그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가 아닌가'로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 오는 것 같을 때에도, 기도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쁨과 감사의 삶이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은 오래 낙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낙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사단이 믿음의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하여 사용하기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이 항상 기도할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고 계십니다.

   2절: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불의한 재판관
어떤 도시에 믿음이 전혀 없는 불의한 재판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자신의 권세를 누리면 되지,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억울함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3절: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되

과부의 강청
그런데 그 불의한 재판관의 도시에 억울한 사정이 있는 과부가 살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그 도시 권력의 정점이라고 한다면, 이 과부는 그 도시의 권력이 없고 소외 받는 사람의 대표자입니다.
이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그는 달리 호소할 길이 없기에 자주 불의한 재판관 앞에 나아가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강청(强請)합니다.

   4-5 절: 그가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강청을 들어준 까닭
과부의 억울함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재판관은 귀찮기만 합니다. 처음에는 철저히 무시하였습니다. '이 과부가 나의 쾌적한 삶을 방해하는구나. 내게 죽이고 살리는 권세가 있는데, 이걸 죽여? 살려?!'라고 속으로 자신에게
묻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다가, '그냥 하루 이틀 내버려두자. 제 풀에 꺾이겠지. 뭐, 죽이고 송장 치를 일 있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과부는 지칠 줄 모르고 그의 집무실로 찾아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졸라댑니다. 때로는 욕설을 퍼붓고, 때로는 모욕을 주는데도 한결같이 찾아와 그에게 떼를 씁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처음에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귀 막고 있었지만, 얼마쯤 지나니까 도저히 이대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그 과부의 사정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원한을 풀어주기로 결정합니다.
이 재판관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불의한 판관이지만, 강청하는 사람 앞에서는 손을 들고 만 것입니다.

   6절: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불의한 재판관의 말의 의미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고 권고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점잖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 자체를 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말을 건다고 하더라도 최대한의 격식과 예의를 갖추어서 합니다. 그리고 항상 물러날 준비를 갖추고 하나님께 접근합니다. "하나님, 혹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이런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 바쁘시면 다음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안 들어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것은 제 문제인걸요." 지극히 공손하고 예의를 갖춘 듯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이런 기도에는 응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시며 그의 "아빠 아버지(Abba Father)"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7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밤낮 부르짖는 자들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제게 여러 아이가 있어서 제게 무엇을 들어달라,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떤 아이는 제가 'No'라고 하면, 그냥 물러나는데, 어떤 아이는 'No'라고 두 세 번 대답하더라도, 그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 졸라댑니다.
이 때 이익을 보는 아이는 결국 계속 졸라댄 아이이며, 아버지로서 그 아이의 떼씀이 그렇게 나쁘게 여겨지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그렇게 졸라대는 아이가 사랑스럽게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떼쓸 때 아빠가 결국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 '아빠와 아이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도 많은 자녀들이 있는데, 어떤 자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남이라고 생각하여서 아예 접근하지도 않고, 어떤 자녀는 하나님께 요청은 하는데 혹시 뭐라고 나무라지나 않으실까 하는 마음에서 항상 물러날 자세를 취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요청하되 체면 같은 것은 따지지 않고 매어 달려 간구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요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체면 불구하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매어 달리는 자녀를 사랑하시며 그의 요청을 들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물론, 그의 간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어야 할 것이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 같은 요청도 (그것이 불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 가운데 "Yes"로 응답되어지기도 합니다.

세상의 불의한 판관이라도 떼를 쓰며 매어 달리는 과부의 강청을 물리치지 못하는데, 의로우시며 인정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의 간구를 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때로 강청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그의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왜 그에게 그가 바라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는지 알게 하십니다.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속히 응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강청하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들어주시되 "속히"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낙망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로 세상을 살게 하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질문을 하십니다. 이 질문이 앞의 기도와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믿음을 신실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이라는 예상이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야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할 것인데, 교회들과 교인들은 많아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적기에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는 하지만 '들어주셔도 그만 안 들어 주셔도 그만'이라는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의 뜻은 그러나, 그와 같이 믿음이 있는 사람을 보기가 드문 그 때에도 '내게 속하기를 원하는 너희는 항상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함으로써 믿는 자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3
성도의 결단
어떤 장로님의 아들이 심한 교통사고로 뇌사(腦死) 상태에 빠졌습니다. 식물인간의 판정을 받고 그러한 환자들만 전문적으로 수용하는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여기는 뇌사에서 깨어나게 하는 곳이 아니라 다만 신체의 다른 기관들은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니 그저 최소한의 영양을 공급하여 다른 기관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곳입니다. 병원의 의사들이나 간호원들은 이 식물인간들이 깨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식물인간들 중에 하나가 된 아들을 둔 아버지 장로님과 어머니 권사님은 아들의 침상을 떠나지 않고 밤낮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을 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해주십시오. 이 아이가 하나님을 위해서 귀히 쓰임 받기를 원하는데 그냥 이렇게 누워있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교회 담임목사님의 기도를 받기 위하여 "매일 매일 와 주십사"라고 강청합니다. 해서, 부모님이 밤낮을 기도하고, 담임목사님이 거의 매일 들러서 그 아들의 의식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7개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한 어느 날 그 장로님의 아들은 놀랍게도 긴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는 구하지 않은 까닭이요, 구하여도 그저 형식적으로 건성 구한 까닭이요, 또는 세상의 정욕을 위하여 잘못 구한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매어 달려 강청하여 기도하는 사랑하는 자녀의 간구를 물리치지 아니 하십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되, 한 번뿐 아니라 여러분의 삶 전체를 통하여서 매일 매일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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