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삼마의 하나님” (에스겔 48: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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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Soul for Christ Foundation'(그리스도를 위한 중국 영혼 재단)이란 단체에서 내놓은 “The Cross-Jesus in China"(십자가-중국에 계신 예수)란 제목의 영상물은 4부작인데, 1부는 ‘생명의 샘’(The Spring of Life), 2부는 피의 씨’(Seeds of Blood), 3부는 ‘쓴 잔’(The Bitter Cup)이고, 4부는 ‘가나안 찬송’(The Canaan Hymns)으로 샤오민(Xiao Min, 小敏)이라고 하는 중학교를 중퇴한 음악적 훈련이 없는 10대 소녀가 어떻게 천 곡에 가까운 아름다운 찬송을 지을 수 있었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China Soul이 3년에 걸쳐서 제작하였다는 이 영상물(映像物)은 1949년에 70만 명이던 중국의 기독교 인구가 현재 7천만 명 또는 1억 가까이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가정교회가 당한 핍박과 그 핍박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가정교회들이 부흥될 수 있었는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영상물이 중국 지하교회들에서, 또한 한국과 미국 등에서 급속도로 보급되며 가정교회의 실상이 알려지자 중국 당국에서는 당황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국과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북한에도 계시며 믿는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억압된 가운데서도 자유하게 하시며 평안하게 하십니다.
엘리위젤(Eli Wiesel)의 자전적 작품 ‘밤’(Night)에서 그는 그가 어린 시절 나치 수용소에서 목격한 장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세 명의 유대인이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는데 그 중에 한 어린아이가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은 ‘나는 그 어린아이의 죽음 가운데, 유대인들의 고통과 절규 가운데 함께 있노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 때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나의 슬픔, 나의 고통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님도 그저 아득히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항상 거기 계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다’(Jehovah is there)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저 저 멀리 거기 계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기 가까이 계셔서 나의 슬픔과 고통을 보시고, 아시고, 그 중에 나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121편 1절 이하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고 찬양합니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도우시며 지키시기에 어떠한 환경도 그를 상케 하거나 해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이래,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하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자신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에녹과 동행하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하시고,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 알게 하셨는데, 그는 창세기 14장 19절과 22절에 엘-엘욘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요, 창세기 16장 13절에 엘-로이 곧,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창세기 17장 1절에 엘-샤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청세기 21장 33절에 엘-올람 곧,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창세기 22장 14절에 여호와 이레 곧,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여호와이심”(출 3:14)을 알게 하시고, 40년 광야생활을 통하여 그는 자신이 출애굽기 15장 26절(또한 민수기 12:13; 시편 30:2)에 여호와-로페카, 너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요, 출애굽기 17장 6절에 여호와-닛시 곧 깃발, 승리되시는 하나님이요, 출애굽기 31장 13절에 여호와-므카디슈켐, 곧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사사시대에 기드온에게는 그의 사자를 통하여서 그가 여호와-살롬 곧, 평강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고(사사기 6:24), 다윗에게는 여호와-로이 곧 ‘나의 목자되시는 하나님’을 보이시고(시편 23:1), 예레미야에게는 여호와-치드케누 곧, 우리의 의되시는 하나님을 보이셨습니다(예레미야 23:6).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그의 택하신 사람들이 자신이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알게 하시는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를 바라보기를 원하고 그에게 간구드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 또는 천사를 통하여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신약시대에는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속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 이다’(=I Am)라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6:35, 48),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6:51), “나는 양의 문이라”(10:7), “나는 선한 목자라”(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14:6), “나는 참 포도나무라”(15:1)고 하심으로 그의 ‘여호와 되심’을 증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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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자신의 속성을 계시하여 주시는데, 에스겔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여호와-삼마의 하나님, 곧, 항상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은 남방왕국인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침략(侵略)당하고 유린(蹂躪)당하던 시대에 산 선지자였습니다. 북방왕국인 이스라엘은 이미 120-130년 전인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점령당하여 이들에 의하여 피가 더럽혀집니다. 이들의 후손이 예수님 시대에 차별 당하던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주전 605년 바벨론의 1차 침입 때 선지자 다니엘은 이미 포로로 붙잡혀가고, 에스겔은 2차 침입 때인 주전 597년에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586년에 유다의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예속(隸屬)됩니다.
에스겔보다 먼저 끌려온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궁 가까이에 머물며 궁정선지자가 된 것에 비하여, 에스겔은 유대인들과 같이 거하면서 주전 593년에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이상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가 됩니다.
에스겔은 1-24장에서 아직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 예루살렘이 훼파되고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였는데, 40-48장에서는 성전이 재건되고 새 예루살렘이 건설될 것을 이상 중에 보고 예언합니다. 이 성전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모세 시대에는 성전이 광야에 천막으로 존재하였는데 솔로몬 때에 나무와 돌을 사용하여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불순종으로 이 성전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무너져 내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서 떠났다고 했습니다.
칠십 년 뒤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하여 조서가 선포되고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했을 때 스룹바벨과 예수아에 의하여 성전이 재건됩니다.
그러나 이 스룹바벨 성전의 모양은 에스겔에게 보이신 에스겔 성전의 모양과 다릅니다.
또 예수님 시대에 스룹바벨 성전에 대체한 헤롯 성전이 지어지지만 이 헤롯 성전의 모양도 에스겔이 본 새 예루살렘에 건설된 성전의 모양과 다릅니다.
에스겔서 43장 2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유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함으로 성전을 떠나셨던 여호와의 영광이 에스겔이 이상 중에 보는 성전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여호와의 임재하심입니다.
하나님은 43장 7절에서 에스겔에게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이 성전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믿음의 성도들에게 회복될 때 그들에게 주어지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에스겔의 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그 모양이 흡사한데, 차이는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은 도시 전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요 그 도시 안에 따로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1절을 보면, “그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고 했습니다.
장차 성도들이 생활할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의 임재를 모든 곳에 나타내실 그러한 도성입니다.
에스겔서 본문 48장 3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회복될 성읍-새 예루살렘을 보이시고,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항상 거기 계시다’라는 뜻인데, 이는 유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신 것과 같이 아니하시고, 항상 그 성전에 거하시며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시고 도움을 간구하는 자들에게 복의 근원으로 임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계십니다. 하늘뿐 아니라 음부에도 계시고, 육지와 바다 끝에서 성도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고 계십니다. 시편 139편 7-10절에서 다윗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니이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은 종말에 새 예루살렘-곧 새로운 낙원-이 우리에게 회복되기 전에, 자신의 몸이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메시야 오시기를 갈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보여주시고, 영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므로 우리 속에서 ‘항상 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 삼마의 주님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과 약함과 유혹을 담당하시고 위로하시고 도우시고 격려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장 18절에서 “자기(=그리스도)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씀하고 4장 15절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體恤)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6절에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연약함을 도우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3
우리가 많은 경우에 ‘여호와 삼마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성전인 우리의 몸’(고전 6:19)을 떠난 까닭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 영으로 거하고 계신 ‘여호와 삼마의 주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은 항상 거기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로 부르짖고 간구드릴 때,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그의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그의 영광을 소망 중에 바라복 수 있게 하십니다.
성도의 평안과 건강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우리 몸이 질병으로 고통받고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으로 환난 당함도 또한 은혜인 것은 환난과 고통 가운데 우리가 ‘여호와 삼마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자 함이 있기 때문이며, 그 때에 ‘여호와 삼마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인 도종환은 그의 시집 『당신은 누구십니까』에 들어있는 ‘당신은 거기 계십니다’란 시에서 ‘거기 계시는 여호와-삼마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당신은 거기 계십니다
장미의 문을 지나 당신은 거기 계십니다.
오월꽃들의 단내와 함께 당신은 그곳에 계십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이 가심덤불 속에서 피어나듯
고통과 형극의 길 위에서 당신은 아름답게 계십니다.
우리가 처음 당신을 만난 것은
절망의 골짜기를 헤매일 때였습니다.
어둠 건너편에서 당신은 환하게 계시었습니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다 쓰러져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의 머리 바로 위에서 함께 울고 계시는
당신의 눈물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잃고 바라처럼 떠돌다
어둔 숲에서 잠이 깨었을 때
아침 햇살과 함께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당신은 우리에게 걸어오시었습니다.
우리가 때로 손발이 묶이어 철창에 갇히고
가진 것을 모두 다 잃었을 때에도
당신은 그 음습한 감옥의 벽에 함께 와 계시었습니다.
이제 황량한 들을 건너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나씩 모이고
거친 들판의 모퉁잇돌 하나를 주워
그 위에 땀과 눈물로 당신의 집을 지을 때
당신은 여기 오시어
머릿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시며
함께 벽돌을 쌓으십니다
당신의 집에 모여 올리는 우리의 간절한 목소리들이
우렁차게 광야를 향해 떠날 때
그곳에도 항상 당신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가시덤불 속에서 오월 장미가 피면
장미의 단내를 딛고 당신은 항상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가실 것입니다.
‘항상 거기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며 위로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며 평안한 성도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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