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31, 2012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1): 서머나 교회” (계시록 2:8-11)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1): 서머나 교회” (계시록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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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사꾸 엔도의 「Silence(침묵)」에 나오는 포루투갈인 신부, 프란시스코 가르페(Francisco Garrpe)의 죽음이 감동적입니다. 배교를 하면 살려주겠다는 일본일 관리의 권유를 거부하고 그는 바닷물이 밀려오는 해안 가에 기둥을 세우고 묶이는 신세가 되지만, 바닷물이 그의 입술을 잠글 때까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그곳에서 추위와 바닷물이 그를 삼킬 때까지 그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며 그의 믿음을 지킵니다. 믿음이 약하고 겁이 많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로 보이지만,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매 이러한 일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의 삶이 참으로 환난과 핍박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세상에서 유명하여지기 위하여, 평안한 삶을 얻기 위하여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서 적어도 외형상의 평안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때로는 순교 당하면서까지 충성스럽게 믿음을 지켰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가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봄이었습니다.

팔십이 넘은 나이에 소아시아 지방 에베소 앞 바다 밧모라고 하는 조그만 섬에 유배된 몸으로 노년을 살아가는 사도 요한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히 아무 소망도 없는 절망적인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펜을 들어 박해를 당하고 있는 형제 크리스천들에게 그가 경험하고 그에게 계시(啓示)로 보여주신 주님의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편지로 전합니다. 그가 소아시아 지방의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 것은 1장 10절에서,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신” 까닭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1세기 말 90년경에 실제로 밧모 섬 앞, 소아시아 서편에 가까이에 흩어져있던 교회였습니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이 일곱 교회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세상에 존재할 교회들의 유형이라고 말합니다.
일곱 교회들을 살펴보면, 에베소 교회는 정통적 교회입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가장 먼저 등장한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궁핍하나 부요한 교회요, 버가모 교회는 주위 환경이 나쁜 교회이고, 두아디라 교회는 악한 여선지자가 활동한 교회이며, 사데 교회는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죽은 교회로 중세 카톨릭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연약하나 충성된 교회이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한 것처럼 보이나 가난한 교회로서 현대의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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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8-11절에서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시대적 구분으로는 1세기 말에서 2세기까지 박해가 극에 달하는 순교하는 시대에 살고 있던 교회--곧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핍박 가운데서 인내하며 영적 풍요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편지하는 이는 요한이지만, 그의 편지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이는 누구인가 하면,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서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21장 6-7절에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각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이가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영--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이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서머나 교회와 성도들의 환난과 궁핍”이 무엇입니까?
1세기 말 예수님을 믿는 일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 믿는 일은 만사형통,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환난과 고난이 따르고, 예수 믿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없고, 예수 믿기 때문에 출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의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예수 믿는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함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이 두려워서 그들의 그리스도인 됨을 숨긴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지상명령인 전도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심할 때에는 외딴 곳으로 피하여 그곳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이 겪는 “궁핍”은 극한적인 것으로서 생계의 위협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구제에 대상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정상적인 직업을 갖는데도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들은 크리스천으로 남아 있기를 고집하였습니까? 그것은 그 안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했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에게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실상은 부요한 자입니까?”
그날 그날 끼니를 겨우 이어가고, 정상적인 직업을 얻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약속으로 천국과 그 나라에서의 기업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천지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실상은 부요한 자“입니다.

세금을 책정하는 세무국(IRS)의 직원이 하루는 가난한 목사의 집에 와서 세금을 매기기 위하여 그의 재산을 평가하고자 합니다. 목사가 그 세무국 직원에게 앉기를 권하자 그 직원은 책을 꺼내 들고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재산이 얼마나 되십니까?”
“예, 저는 부자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저에게는 영생을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저 영원한 나라에 우리의 있을 곳을 예비하시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건강과 순종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저에게 능력을 주셔서 이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게 하는 기쁜 마음이 있습니다.”
“또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뿐입니다.”
목사님의 대답이 끝난 후 세무직원은 책을 덮고 일어나서 모자를 들고 나가면서 말합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부자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재산은 세금을 매길 수 없는 재산입니다.”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인데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고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로마정부에 고발하여 죽으시게 한 것도 유대인이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 바울을 로마총독에게 넘겨주고, 또 그를 나중에 참수 당하게 한 것도 유대인들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순교의 거의 대부분은 유대인들이 고소와 훼방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유대인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요 다만 사단의 미혹과 조정을 받고 있는 무리일 따름입니다.

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모든 고난과 시험이 하나님께 대적하였다가 이미 패한 마귀가 그 복수로 하나님의 자녀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세기 중엽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있던 폴리캅(Polycarp)이 로마군인들에게 붙잡혀서 그 지방의 로마총독(Proconsul) 앞에 끌려왔습니다. 총독이 보니 기독교 무리의 괴수라고 하여 극악무도하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임에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노인, 내가 당신에게 은총을 베풀기를 원하는데, 만일 당신이 이 자리에서 ‘가이사(=황제)는 주라’고 말하기만 하면 당신을 놓아주겠소.”
폴리캅이 대답합니다.
    “내가 팔십 육 년을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나를 한번도 부인한 적이 없는데 내가 조금 힘들다고 나의 주님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이 말합니다.
    “당신은 저 포효하는 맹수가 두렵지도 않은가?”
폴리캅이 대답합니다.
    “맹수가 내 육체는 물어 뜯을지 모르나 내 영혼은 맹수의 이빨이라도 조금도 상처를 낼 수 없습니다.”
총독은 말합니다.
    “짐승이 무섭지 않다면 당신을 화형에 처하겠소.” 하고는 “장작을 마당에 쌓으라.”고 명합니다.
폴리캅은 말합니다.
    “잠시 타다 꺼질 불꽃 때문에 영원히 타오르는 불을 잊을 수 있겠소? 총독은 영원히 타는 불을 기억하시오.”
그리고 장작더미에 올라서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당신의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고난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불이 폴리캅을 사르지 못하자, 칼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 죽게 한 다음 그의 시신을 불에 태웁니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십일”은 짧은 기간을 말하는데,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상급과 축복에 비교할 때 이 세상의 환난과 핍박은 잠시 잠간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짧은 생의 기간동안, 또 어떤 사람은 일생 중 일정한 기간동안 환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믿는 사람에게 임하는 환난이 생의 일정한 기간이든지 아니면 그의 전 생애이든지 이것은 하늘의 영원한 삶에 비하면 그저 “십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불과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기우누 피스토스 아크리 사나투(γίΰνου πιστὸς ἄχρι θανάτου)-고 했습니다. “충성하라”는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은 “충성스럽게 되라”인데, “충성스럽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πιστὸς)는 “믿음이 가득하다(faithful)"는 의미입니다.
한글성경은 이 단어를,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할 때는 “신실하시다,” “미쁘시다”라고 번역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자세를 표현할 때는 “충성하다”라고 번역합니다.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을 가지되, “죽을 때까지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서이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충성” 또한 피스토스(πιστὸς)입니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충성”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성도가 일생동안 신실하신(faithful)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신뢰할 때, 그 사람의 충성되게 (faithful) 믿음을 지킴으로 인하여서 주님께서는 반드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이를 그의 충성스런 믿음의 고백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이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삶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은 성령--곧,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입니다.
“첫째 사망”--곧 육신의 죽음이 두렵거나 실망스러워서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둘째 사망”이 이를 것이나, “첫째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망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믿음으로 선한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육신의 죽음인 첫째 사망을 경험하지만, 둘째 사망 곧 백보좌 심판이후의 영원한 고통을 경험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에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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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시고 축복하심을 봅니다. 그들이 환난과 궁핍 가운데도 부요한 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며, 죽도록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대단한 일들을 통하여서만 죽도록 충성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매, 일상의 생활 중에 주님의 말씀으 붙잡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제직 안수식에 참석하였더니, 그 교회의 임직하는 제직들은 “죽기까지 충성하겠다는 서약식”을 가졌는데, 그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말로만 서약하는 것이 아니라 서약서에 서명함으로써 더욱 그들의 주님에 대한 충성--믿음 지킴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들이 서약한 것을 파기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법적 구속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약 의식이 그들의 각오를 견고히 함은 사실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님께 죽기까지 충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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