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31, 2012

“주여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6-13)


                                               “주여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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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뉴잉글랜드 지방에 존 엘리어트(John Eliot, 1604-1690)라는 유명한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교인들에게 교회를 사임하고 세계를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목사님, 이곳에 오래 계시면 우리 교회당도 웅장하게 짓고 목사관도 잘 지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극구 말렸습니다.
엘리어트 목사님은, “나의 사명은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한 곳에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교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세계 전도의 길을 떠납니다. 그는 80세가 되기까지 설교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힘이 다하여 걸을 수가 없게 되었을 때 흑인 아이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읽어주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이 같은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의 제자가 그에게 말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그동안 수십 년간 일하셨으니까 이제는 안 하셔도 됩니다. 좀 쉬세요.”
그러자, 엘리어트 목사님은 정색을 하면서 대답합니다.
“몇 십 년간 일을 했다 해도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일세. 내가 비록 자리에 누웠으나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줄 힘은 아직 남아 있네. 그래서 그것을 지금 실행하는 것일세.”
그는 86세로 생을 마치는 때까지 자기의 달란트를 잘 경영하였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뉴잉글랜드의 특별한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군으로 귀하게 사용됩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주님을 사랑하고 주인께 충성하는 마음으로 잘 경영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는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귀한 교훈인데, 내게 맡겨주신 달란트가 한 달란트인지, 두 달란트인지, 다섯 달란트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맡겨주신 것을 주인을 위해서 잘 충성되게 경영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만일 다섯 달란트를 맡은 사람이 두 달란트를 남기고, 한 달란트를 맡은 사람이 두 달란트를 남겼다면 누구에게 더 큰 칭찬이 있겠습니까?
능력이나 재능이상의 것을 남긴 한 달란트를 맡은 자일 것입니다.
내게 맡겨주신 것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적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달란트를 잘 경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의 경영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이래서 어떻고 저것은 저래서 어떻다고 핑계하는 사람은 많은 수확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자기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핑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하되 실패하거나 수확이 적더라도 핑계거리를 찾지 않는 사람에게 주인은 다음에 더 큰 것을 맡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또는 지시보다는 자기의 판단에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귀한 일군으로 사용되어질 수 없습니다. 주인의 일을 하는 사람은 내 방법이나 법칙이 아니라 주인의 방법이나 법칙을 따라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주인이 지시하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주님은 주님의 방법에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서 지혜 있는 자를, 능한 자를, 문벌 좋은 자를 사용하고자 안 하십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이의를 달지 않는 대신에, 지혜 있는 자는 자기의 세상 지혜에, 능한 자는 자기의 세상 능력에, 문벌 좋은 자는 세상의 능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고 계획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사용하시는 일군은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농부가 인내하지 아니하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없습니다.
인내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망을 온전히 간직할 수 없으며 소망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5장 7-8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했고 또한 11절에서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3-4절에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환난 중에도 인내함으로 연단되어질 때 우리는 소망을 이룰 수 있는데, 이 '소망'을 어떤 영어성경은 '하나님의 인정하심' (God's approval)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사용하시는 일군은 자원함과 열정과 항상 힘씀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권고합니다.

교회의 비교적 젊은 층으로서 하나님의 귀한 일군이 되기 위하여서는 겸손과 순복함이 또한 필수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5-6절에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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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절: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火箸)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는 기도하는 사람이요 주를 의뢰하며 말씀에 의지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환상(幻想) 중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 중에 임재하심을 보고 또 스랍 천사들의 창화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 사람인 줄 알고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5절에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입술이 부정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사람들이 입술로--즉, 말로써 짓는 죄가 참으로 크고 많음을 알게 합니다. 입술을 조심할 수만 있다면, 입술이 정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짓는 죄 중에 70-80%는 줄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입술로 불신앙의 말을 한다든지, 입술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든지, 입술로써 거짓 증거한다든지 함으로 얼마나 많은 죄가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는 스랍 천사 하나를 보내셔서 그의 부정과 불의를 제하여 주십니다.
스랍 천사 하나가 화저로 (번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에게로 날아와서 그의 입에 대고 말하기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말합니다.
스랍(שׁרף)은 “불태우다, 불이 나다”란 동사의 뜻으로, 명사로는 “불태우는 자”란 뜻을 가집니다. 스랍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며(6:3) 하나님의 대변자들(6:6-7)로서 행동하였습니다.
스랍 천사가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한 이사야의 입술에 화저를 댄 것은 하나님이 그의 속죄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속죄의 제사와 번제의 제사가 같이 드려지는데, 번제의 제사--즉,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결신의 제사는 죄와 허물의 회개와 사함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죄사함 받기 전까지는 온전한 헌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기 위하여 전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습니다.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때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여전히 부정한 입술로 부정한 죄를 저지르며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백성들을 향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일군을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적극성을 띠게 됩니다. 이는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이 아니요, 능력과 지혜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9-10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가 하나님께 “날 보내소서” 대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유다 백성에게로 보내시어 그들의 현재의 영적 상태를 지적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는 “귀가 있어 듣기는 듣지만 깨닫지 못함이요 눈이 있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교만과 불신앙이 그들의 영의 귀와 영의 눈을 막아 놓은 까닭입니다.
해서, 듣고 보는 것에 대하여 깨달음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반어적(反語的)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의 귀와 영의 눈이 열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인데,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여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에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11-12절: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 백성들에게 선포함을 어느 때까지 해야 할 것인가’ 묻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을 선포할 것이지만 그 동족 유다를 사랑함이 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함이 있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이러한 뜨거운 가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리석음을 아시고 미리 보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는 예루살렘 성읍들이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유다가 황무하여질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임하시기 전에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좋으련만 세상 가운데 탐닉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그들이 붙잡고 있는 세상 신들을 쉽게 놓지 못합니다.

13절: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유다의 백성들 중 십분의 일이 의인으로 남아 있으면 좋을 것이나, 이 사람들도 환난과 곤고 중에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듯이 그렇게 베어질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베인 것의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것같이 유다의 거룩한 자들의 씨도 이와같이 남을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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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일군이요 구원받을 자이면 좋을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현실이 어떠하든 남선교회 회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또한 우리 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믿음의 뿌리를 끝까지 견고하게 보존하는 그루터기 신앙인들이 되기를 원하며, 이 시대를 구원하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치며, 하나님의 온전한 도구로 쓰임 받는 남은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번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은 돌이켜 다시 흔들리거나 베임을 당하거나 끊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헌신을 가로막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단호하게 버려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 겸손하게 헌신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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