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31, 2012

“새 언약의 영광” (고린도후서 3:6-18)

                                              “새 언약의 영광” (고린도후서 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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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남자 기계체조에서 채점이 잘못되어서, 금메달을 받아야 할 한국선수가 동메달을 받고 은메달을 받아야 할 미국선수가 금메달을 수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대한 반응이 미국사람들과 한국사람들 간에 천지차이처럼 컸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채점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선수(Paul Ham)가 금메달을 수상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채점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금메달을 양보하지 않고 모른 체하는 것은 양심불량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체조위원회는 미국선수로 하여금 금메달을 양보하게 하든지 적어도 공동 금메달을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이와 같이 다른 의견들이 각각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까?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다른 의견들이며 말하자면 다른 편견들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에 편견이나 아집이 없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이 세상에는 참으로 공평 정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하나님 말씀대로 되어지지 않음을 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각각 다른 환경이나 처지가 우리의 눈에 베일을 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부한 사람은 부함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높은 지위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낮은 지위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남자는 남자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여자는 여자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백인은 백인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흑인은 흑인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습니다.
우리의 색안경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우리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는 항상 굴절된 시각이거나 채색된 이해일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멜 깁슨(Mel Gibson)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영화를 만들되 이제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원어 사용이란 획기적인 방법으로 만들었습니다. 해서, 배우들이 아람어로 말하고, 또한 라틴어로 말하였습니다. 의상도 역사적 고증을 받아 최대한 당시의 사람들이 입었음직한 의상들을 갖추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역을 맡은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백인 미국인 배우가 맡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 속에 연상할 때 흔히 갈색 또는 금발의 긴 머리를 가진 백색의 미남을 그리는 것은 우리가 보았던 영화 속의 예수님이, 혹은 영화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러할 것이라고 여기는 나의 상상이 편견으로 덮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백인들은 백인 우월주의에서 백색 그리스도를 만들고, 다른 유색인들 역시 백인이 우월하거나 아름답다는 생각에서 백색 그리스도를 연상하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여기에 도전한 것이 “흑인 신학(Black Theology)"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흑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인 예수님이 편견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 예수님도 편견인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2,000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이셨겠습니까?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태어나시고 그의 조상 아브라함이 지금 이란-이락 부근인 갈대아-우르 사람이었기에 얼굴은 다소 검은 색을 띠고 머리카락은 약간은 곱슬거렸을 것입니다. 2,000년 동안 세상을 유리하다가 피가 타인종과 많이 섞여버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모습과도 많이 다르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각 다른 수건을 쓴 얼굴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세축복(現世祝福)이라는 수건'을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대신에 말씀 속에서 현세축복만을 찾고자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고 말씀하지만, 이 말씀이 이 부류에 속한 사람의 눈에 보일 리가 없고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은 그저 그가 명령하고 강청하는 대로 순종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하나님은 그가 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셔야 하고, 병이 낫게 해달라고 하면 병을 반드시 고쳐 주셔야 하고, 높은 지위를 달라고 강청하면 반드시 높은 지위를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시면 그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해서,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될 때 하나님은 피곤하시고 고달프십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많고 ‘이런 사람들을 위한 수건’으로 가려진 가짜 복음(false gospel)이 참으로 인기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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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오릅니다. 40일을 밤낮으로 시내산에 거하다가 내려와보니 백성들과 자기 형 아론이 그새를 못 참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낸 여호와라고 칭하며 그것에 절하고 춤추고 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모세는 두 돌판을 내어던져 깨버리고, 금송아지는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합니다(출 32:19-20).

두 번째 산에 오를 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이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19-23).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얼굴로 대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태양도 너무 밝아 바로 쳐다보면 눈이 멀어버리는데, 하물며 태양을 지으신 하나님이야 더욱 광채가 찬란하여 그 존귀하신 얼굴을 감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영광(榮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보드”(דבכ)는 영광의 본체(本體)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광채(光彩)입니다. 햇빛의 따사로움을 받으며 태양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광채를 받으며 하나님의 계심을 경험하고 사랑과 은총에 감사해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얼굴에 난 광채로 인하여 그를 주목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해서, 모세는 백성들 앞에 설 때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여호와의 영광의 광채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있는 광채는 근원적인 광채가 아니었기에 차츰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건으로 덮은 모세의 얼굴의 가려진 광채를 주목하며, 새 언약의 그림자요 모형인 불완전한 율법을 마치 영광의 본체인양 착각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여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9-11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는데,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께서 본체의 영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모세의 수건으로 가리워진 영광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은 더 큰 영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지 아니하였습니다.

6절에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천거서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확신을 주시고 그로 인하여서 만족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바울과 그 일행을 새 언약의 일군으로 삼으신 일을 만족케(충분케, 잘 감당하게) 하십니다.
“만족케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카노오”(ἱκανόω)는 ‘잘 감당하게 하다’ 또는 ‘충분케 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을 잘 감당케 함이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문(儀文)은 율법을 말하는데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한 것은 바울이 율법의 역할을 부인하거나 부정적으로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세와 그 이후의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제사장들이 의문의 일군들--구 언약의 일군들이었는데 그들의 역할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의문 곧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 새 언약이신 그리스도께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데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입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사람에게 오매 그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율법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죄의 결과가 죽음입니다. 의문--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을 초래하는 죄’를 깨닫게 되었는데 율법은 우리를 살릴 힘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다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가 되어 생명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한 율법은 또한 우리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맡기신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은 죄를 생각나게 하는 일을 위한 것이 아니요 사람을 살리는 일을 감당케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은 그와 같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영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일군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그가 먼저 영으로 살아남을 경험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이 죽는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하나님)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이제 의문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됩니다.
성령으로 살리심을 얻은 새 언약의 일군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의 생의 가치관과 우선순위가 바뀌고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전에는 나를 위하여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그전에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 없는 사람 같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이 즐겁고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음을 느낍니다.

7-8절에 “돌로 써서 새긴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의문의 직분의 영광은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과 사십 일을 함께 거하며 말씀한 까닭에 얻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에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일시적이요 따라서 없어질 것인데도 감히 주목하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일군에게 허락하신 영광은 근원적이요 지속적인 것이기에 모세가 맡았던 의문--구 언약의 직분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은 모세가 감당했던 의문의 직분, 정죄의 직분과는 달리, 복의 근원, 영광의 근원, 광채의 근원인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말미암는 귀한 것입니다.
모세의 영광은 결국 없어지고 대체될 모형적인 것이었지만, 새 언약의 영광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광이요 광채이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항상 계시기 때문입니다.

9절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했습니다.
의문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문의 직분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죄인인 것을 선포하게 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일꾼된 신약 백성들에게 맡기신 의의 직분은 죄를 깨달은 사람--사망에 이르게 된 사람을 살리는 일을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롬 1:17) 의의 복음, 생명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선포케 합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직분도 영광스러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는 생명의 직분, 의의 직분을 감당함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이 일 감당함을 뒤로 미루어야 하겠습니까?
이 일을 감당할 때 그저 침묵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10-11절에 “영광 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과거 모세를 비롯한 구 언약의 일군들이 맡았던 의문의 직분도 영광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영광은 일시적인 것이요 한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더 큰 영광이 이르매 이제 사라진 것입니다. 그 영광은 사람을 살리는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영광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 있을 영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직분을 영광스럽고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이같은 소망”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새 언약의 일군이 되는 것이요, 의문의 직분보다 더 영광스러운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그가 맡기신 직분에 대하여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과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합니다.

13절에서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광채는 그 끝이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덮은 까닭은 백성들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광채가 점차 사라질 것이기에 그 결국을 드러내지 않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원함은 덮여지고 가리워진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고자 함이 아니요, 그의 증거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그러나 저희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그 얼굴에 수건을 쓴 까닭에 이스라엘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 모세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신 것과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그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 한 것은 모세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 때문도 아니며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요 편견과 강퍅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서, 모세의 얼굴에만 수건이 덮여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도 수건이 덮여져 있어서 약속의 말씀이신 구약을 읽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15절에서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 했습니다.
14절의 부연 설명입니다.
“오늘까지”라고 한 것은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는데’(갈 3:24), 그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현재까지란 뜻입니다. 구약에 예언되어진 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인 것이 그의 생을 통하여 밝히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오늘까지” 전혀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얼굴을 덮은 수건 외에 또 다른 ‘편견과 완고의 수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덮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수건에 덮여진 모세의 얼굴--‘가리워진 모세의 광채’ 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를 바라보는 것도 두려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더더욱 두려워서 피하고자 했습니다.
‘두려움의 수건’이 그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안일과 편견과 고집의 수건들’이 그들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했지만, 그들의 경배의 대상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를 통한 ‘모세의 하나님’이었으며, 그것도 잘못 이해되고 왜곡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도자로 삼으심으로써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을 찾으며 그들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모세의 등뒤로 숨어서 모세의 그늘에 가려진 채로 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16절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34-35절에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대함으로 보기를 원하였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는 그 얼굴의 수건을 벗고 영광의 광채를 바라보았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하신 논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글(토라, 하나님의 지시사항들)을 잘못 해석한 그들의 잘못된 마음의 눈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편견과 안일함의 수건’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수건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간구하고 주의 영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으로 우리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만날 때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쇠사슬에서 놓임을 받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 일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번번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참 자유자가 아니며 여전히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종의 멍에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과 하나님(혹은 교회)의 일을 하는 데 상충함(conflict)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물론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당연히’ 세상의 일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보통사람(크리스천이라고 할지라도)의 세상을 사는 지혜라고 여깁니다. 이는 아직도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일은 무시(無視)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을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노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6:33)”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 말씀을 믿고, 이 말씀을 의지하고, 이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변명(excuse)의 수건’으로 그 마음을 덮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그 일은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는 대신에 자기가 하지 않는 일마다 이래서 저래서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고 자기 주장을 전개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허락하신 일을 무시(無視)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의 일 다음에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영육(靈肉) 간에 강건(剛健)함을 허락하십니다. 적은 수면을 취하고도 피곤치 않게 만드십니다. 시간의 상충을 피하는 지혜를 또한 허락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진리의 말씀에 의지해서 행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분이시며 신실한 분이시며 진정으로 우리로 자유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신 것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방법이요 지혜입니다.

18절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담대함과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야 합니까?
여기서 성소는 “지성소”를 의미하는데 곧 하나님의 찬란하고 밝은 영광이 머물러 계신 곳입니다. 전에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때를 얻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신을 씻기시매 휘장이 찢어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길을 통하여서 담력을 얻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는데 왜 어떤 사람은 아직도 영광 가까이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온전히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특권과 효력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본체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 아니요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을 바라보며 나아오는 자마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요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9절)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11절)”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하는데, 예수님을 3년 가까이 따라다닌 빌립은 어째서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제자들이 아직 그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받기 전이어서 그들 마음을 덮고 있던 ‘욕망과 편견의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던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던 수건을 벗겨주시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영광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고, 영광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행하되 죽음도 사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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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고집과 편협과 교만과 왜곡과 안일함의 수건’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어떠한 방법과 모양으로 습관적으로 주님을 믿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여러분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지 못해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지 못하여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아니 하였다면, 그리스도 안에 참 자유자의 기쁨과 평안이 여러분 가운데 아직 없다면, 잘못된 믿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참 기쁨과 참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카보드: כבד)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모세의 얼굴에 덮인 여호와의 영광의 뒷면의 광채가 아닌,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앞면의 광채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의의 직분, 영광의 직분이 참으로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질 것이며, 이 직분을 위하여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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