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31, 2012

“제직의 소명과 헌신” (누가복음 5:1-11)

                                                  “제직의 소명과 헌신” (누가복음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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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召命, call)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어떤 특별한 일로 부르심을 말합니다.
넬슨(John Oliver Nelson)이라고 하는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목회자로 부르십니다.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들을 목회자로 삼으십니다. 교회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청년들을 부르실 때 부르시는 그런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거듭난 청년들을 부르시고, 설교하시고, 계획을 세우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든 가릴 것 없이 누구든지 자기 전공 직업이 있는 동시에 성별된 주교와 사제가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회자이든 장로이든, 권사나 집사이든, 아니면 평신도이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소명을 받은 사람이므로 소명의 귀중함을 생각하며 신실함과 열성으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 신학자인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그의 저서 “소명(The Call)"에서 ”소명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삶 전체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종종 이같은 총체적인 소명이 왜곡되어 세상의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은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종교적이고 영적인 것만이 성직이라고 격상시키는 일종의 이원론이 문제가 되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소명이란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만이 소명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의 달란트와 능력에 따라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그(=하나님)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성도들을 각각 다른 직임으로 부르셨지만, 그의 부르심의 뜻은 각각 자기의 달란트와 재능에 따라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꾼을 부르심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사람이 예상하는 것과는 다른 때에 부르시는 분이신 것을 알게 합니다.
인생의 삼분지 이를 산 모세를 하나님은 그의 나이 80세에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일로 부르십니다. 그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을 때 그는 자신의 삶이 아무 것도 아니고 그저 실패한 인생으로 여기고 있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그는 아직 인생의 미숙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성년이라고 하기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유약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 예레미야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부르실 때 그는 남방왕국 유다의 한 시골 드고아의 목자요 농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선지자 그것도 적대관계에 있던 북방왕국 이스라엘에서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증오하던 이스라엘의 국수주의자 요나를 적국 니느웨에서 말씀을 외치게 하는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모세, 예레미야, 요나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난색을 표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기도 하였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이 일군을 원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자원하였습니다.

소명이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시는 일이라고 한다면, 헌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서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에게 구원의 확신을 경험케 한 모라비안 교회의 창설자 진젠도르프(Nikolaus Zinzendorf, 1700-1760)는 청년 때에 각 지방으로 유람을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미술관에 들어가서 그림들을 구경하다가 “에케호모”--“이 사람을 보라”란 제목의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 그림 밑에는 “나는 너를 위해 몸을 버려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느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 글귀에 크게 감명을 받아 뜨거운 눈물을 쏟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울다가 일어나 이후로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께 몸바쳐 일할 것을 결심하고 돌아와서 모라비안 교회를 세웠습니다. 진제도르프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게 한 그 글귀는 찬송가 185절의 주요 가사내용이기도 합니다:

    1.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2.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3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4.    한 없는 용서와 참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하느냐?

이 찬송가의 작사자 프란시스 리들리 해버갈(F. R. Havergal, 1836-1879)도 소녀 시절에 친구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그 집에 걸려있던 이 “에케호모”란 그림 속에서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피 흘리고 계심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즉시 이 찬송가를 작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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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에는 첫째, 부르심의 장소(場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는 특별한 곳이 아닙니다. 저 숲 속의 현자의 은둔처가 아니요,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 살고 있는 궁전이나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어부의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두 번째는, 부르심의 대상(對象)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시되 세상의 학문이 많은 자나, 종교 지도자나, 부자나 다른 특권 계층의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아니 오히려 스스로 평범 이하의 우둔한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門閥)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되 일상적인 삶의 터전에서 스스로 평범하다고 혹은 지혜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세 번째는, 부르심의 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되 그들이 생업에 분주하게 종사하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모두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든지(마태 4:18; 마가 1:16) 또는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누가 5:2).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마태 4:21; 마가 1:19).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고 있을 때 ‘너희들 정 할 일이 없으면 나를 따라 오지 않을래? 내가 너희에게 할 일도 주고 또 먹을 것도 줄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거절하거나 사양합니다. 그들의 이유는 너무나 바쁘다는 것입니다. 생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냐고, 자녀들 학교 따라다니랴, 음악레슨 시키랴, 운동시키랴, 또 차 태워주랴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일은 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의 때를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때, 농부가 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붙잡고 있는 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때,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종용하십니다. ‘나를 택하든지 세상을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마태복음 8장 21-22절(누가 9:59-60 참고)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61-62절에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쑴하십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드릴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드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1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무리가 몰려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눅 4:43), 때로 한적한 시간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시고 힘을 재충전받으셨습니다. 그가 갈릴리 호수(또는 바다) 북서쪽에 위치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신 때에도 많은 무리가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2절: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두 배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배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부의 배입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와 피곤한 육신과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시몬이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도록 허락하였는지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그의 말씀은 감히 거절할 수 없는 권세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시몬아, 내가 네 배에 올라타야 되겠다.”라고 말씀하시매, 시몬은 “선생님, 그리 하옵소서.”라고 순순히 대답했을 것입니다.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몰려든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몰려든 무리들의 관심사는 병 낫기와 귀신들림에서 벗어남과 세상에서의 양식을 구하는 것과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구경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전파하기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몬에게로 그의 관심을 옮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배에 오르신 것은 그에게 몰려드는 인파로부터 떨어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장차 그의 사역에 동역할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성경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명령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물을 내릴 장소까지 지정하여 주셨습니다.

5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은 어려서부터 갈릴리 바닷가에 살아왔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고향은 갈릴리호수 북쪽의 가버나움입니다. 지금도, 가버나움을 방문하면 베드로의 집이라고 명명된 곳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입니다. 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 그 앞에 누가 아는 척이라도 할라치면, 가만히 있지 못할 그인데, 오늘 이 낯선 사내가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매, 그는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 행하심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말씀하시는 이분이 능력이 많다고 하길래 그의 말씀에 따르기로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병 고치고 귀신 쫓는 일에는 능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고기 잡는 일에서까지는 그보다 낫다고 생각할 리 없는 시몬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절망감과 허탈함에서 온 것이었을 것입니다. 고기 잡는 일에 이력이 난 그였는데,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을 때 그는 참으로 지치고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그에게 권세로 말씀하십니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낯선 남자의 권세 앞에 순종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은, 그렇게 할 때 고기를 많이 잡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앞에 계신 예수님의 권위가 그로 순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과 기대에 앞선 순종과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약속들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데, 당장은 그것이 믿어지지 않고 그것이 과연 그러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습니다. 그러하더라도, 그 약속과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붙잡고자 하고 순종하고자 함이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람은 그가 붙잡고자 한 것을, 믿으려고 한 그것을 얻게 됩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의 지정하신 곳에 그물을 내렸더니, 심히 많은 고기가 잡혀서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시몬의 배와 함께 나간 다른 배를 불러 함께 고기를 담았는데, 그물에 걸린 고기는 두 배를 가득 채워 배가 잠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내릴 때 이것을 기대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지정하신 곳에 그물을 내리면 고기가 많이 잡힐 것이라고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8-10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얻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시몬은 고기를 많이 잡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내게 말씀하신 이분은 과연 누구인가? 이분이 누구시길래, 나의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것 같고, 자연의 모든 현상까지도 아신 단 말인가? 놀라고 두려워한 것은 시몬뿐 아니라 이 광경을 목도한 주위의 어부 모두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두 배 중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어부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다른 어부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두 배를 가득 채운 큰 물고기를 싣고 두 배가 호숫가로 나오면서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고 놀라매 달려와서 함께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마태 4:21; 마가 1:19 참조).

시몬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에 대한 시몬의 호칭이 “선생”(ἐπιστάτα)에서 “주님”(κύριε)으로 바뀌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처음 본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른 것은 가르침을 배운 제자로서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경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시는 이분은 그저 “선생”이라고 불러서는 안될 분 같이 여겨졌습니다. 해서, “주여”(κύριε)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께서 시몬을 위시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것은 그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안에 속한 사람의 수를 늘려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심도 동일한 이유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 삼으시기 위함이요,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기 위함입니다.

11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만선(滿船)의 배를 저어 육지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에게 더 이상 고기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까닭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생명이요 구원되신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릴(=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그물을 깁던 아버지까지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물은 어부의 생업의 중요한 수단이며, 배는 어부에게 가장 중요하고 큰 재산이요, 부친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들을 포기함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생업도구, 재산과 사람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좇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세오”(ἀκολουθέω)는 ‘따라가다’(follow), ‘동행하다’(accompany)의 의미와 함께 ‘제자가 되다’(be a disciple)는 뜻도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생업을 모두 포기하고 다 목회자가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목사로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세상 기업을 경영하는 가운데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놀랍고 은혜스러운 것은 우리가 어떤 주의 일꾼이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과 재물과 몸을 하나님을 위해서 지혜롭게 사용하게 하시며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아간 베드로는 후에 마가복음 10장 28절에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지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사람은 바른 목적을 위하여 그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나를 따르기에 합당치 않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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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를 좇아간 첫 번째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의 마지막이 어떠했습니까? 전승(傳乘)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하고, 안드레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하고,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 기록된 대로 아직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헤롯 왕(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하여 칼로 죽임을 당하는데 이로써 복음이 세계로 전파됨에 밑거름이 되고, 요한은 소아시아 서해안의 한 섬 밧모섬에 귀향당하고 그후에는 에베소에서 그의 마지막을 보냅니다.

이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이들이 보통 사람들임을--아니 보통 사람들보다도 부족한 사람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들의 앞뒤를 재지 않는 단순한 마음(simplicity)과 주님을 위해서 그들을 헌신하고 희생하기를 원하는 가슴입니다. 그리할 때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을 좇아갔으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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