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31, 2012

“여호와 치드케누의 하나님” (예레미야 23:1-8)

                                     “여호와 치드케누의 하나님” (예레미야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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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건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예수님의 11제자들 가운데 순교하지 않고 노년을 보낸 사람은 오직 사도 요한밖에 없을 정도로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들을 의롭게 하는 믿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1세기 클라우디우스(Claudius), 네로(Nero)와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 때만 박해와 순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2세기에 들어서도 박해는 계속되고 철학을 사랑한 황제라고 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때도 박해와 순교는 계속되었습니다.
2세기의 순교자들 가운데는 안디옥 교회의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와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Polycarp)이 잘 알려진 사람들이지만 무수한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그들을 하나님 앞에 의롭게 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사나운 짐승에 의하여, 불에 의하여, 또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중국에 삼자교회(三自敎會)라고 하는 정부의 공인교회가 있지만 많은 중국의 크리스천들은 삼자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참 믿음의 삶이 아니라 하여서 정부의 단속이 심한 가정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 해서, 가정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다가 붙잡혀 매를 맞고 감옥에 보내지기도 하고 심하면 죽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정교회에서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왜 그들이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고자 하며 순전한 믿음을 지키고자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을 의롭다 칭하시며 하나님께 가까이 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북한 평양 만경대구역에 북한 당국이 인정하는 공식교회인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있지만 이 둘이 참된 의미의 교회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북한에 지하교회가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갑론을박이 된 적도 있지만 탈북한 사람들의 증언들과 북한을 왕래하며 비밀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보고를 보면 그곳에 지하교회들이 존재하며, 미국의 한 종교단체의 증언에 의하면 4만 명 이상의 지하교회 신자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예배드리는 것이 발각되거나 성경책이나 찬송가를 소지한 것이 발견되면 그들은 심한 고문, 감옥생활 또는 처형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들은 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하신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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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holiness, sanctification: 성화)을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process)이라고 한다면, 의로움(righteousness, justification: 칭의)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리(right)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의로운’ 백성이라 부르시고 그들에게 ‘내게 가까이 나오라’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그 축복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기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형식적인 제사와 예배가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전혀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내게로 가까이오라,’ ‘내 말을 청종하라’고 부르시지만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며 말씀을 듣든지 읽고 묵상하든지 합니까?
나를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며 얼마나 자주 읽기를 원하십니까?

구약시대와 예수님의 때와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이 오해하는 부분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난지 팔일만에 육신의 할례를 받고 그 자녀들에게도 난지 팔일만에 육신의 할례를 받게 하는 그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습니까?
그들은 율법을 의무조항으로 지켰기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율법 지킴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의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말씀대로 살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에녹을, 노아를, 아브라함을 축복하셨습니까?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6절에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賞)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11장 7절에서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方舟)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11장 8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 또는 세례로서가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키거나 선한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우리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두려워서 두 차례나 자기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며 다른 남자--애굽왕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양보하였습니다.
로마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 이후 600여 년 뒤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의 일인데,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은 그가 아직 사라의 여종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갖기 전이므로 아마도 85세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창세기 16장 16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가질 때 그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얼마만한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여기셨습니까?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로 고백하고 바라보는 믿음이 얼마나 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십니까?
사실 우리의 믿음의 있고 없음, 많고 적음은 주관적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있으면 의롭다 하심과 구원을 얻고, 생명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내’가 생각할 때에는 김집사나 이집사나 박권사 보다 ‘내 믿음’이 백 번 낫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도 동일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의이신 여호와,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여호와--‘여호와 치드케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의로와질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의’ 되신 하나님께서 ‘너는 의롭다’고 칭하실 때 또는 여기실 때 의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고 의인이 된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인한 나의 의’는 나 한 사람밖에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나 한 사람밖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에스겔서 14장 14, 16, 18, 20절에서 하나님은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칼이나 기근이나 사나운 짐승이나 온역으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고자 하실 때 노아, 다니엘, 욥과 같은 의인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오직 자기 생명만 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의인 노아, 다니엘, 욥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다른 사람을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을 향하여 의롭다 하시며 해서 인생을 구원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 찌드케누’ 되시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의롭다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서 45장 25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50장 8절에서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라고 반문합니다.
바울도 로마서 8장 33-34절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반문합니다.
의롭다고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아무도 우리와 다투어 승리할 수 없고, 우리를 하나님께 송사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양들인 이스라엘과 유다의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오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며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게 한 지도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의 잘못된 인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징계하시되, 북방왕국 이스라엘을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하게 하시며 남방왕국 유다의 거민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을 그곳에 머물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곳에 고아와 같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아주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새로운 목자들을 세워서 그들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하실 것입니다.
3-4절에서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縮)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목자들은 바벨론 포로귀환 당시의 지도자들인 에스라와 느헤미야, 스룹바벨과 예수아 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범적인 목자들의 예로서 궁극적이고 선한 목자 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5-6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여호와 치드케누)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가계에서 오실 것인데 그가 왕이 되어 지혜와 공평과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실 것을 예언하시며, 그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여호와’라 칭함을 얻을 것을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우리에게 오심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시기 위함이며, 또한 그 스스로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며 해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특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히 5:6, 5:10, 6:20, 7:17).
히브리서 7장 1-3절에서 이 멜기세덱에 관하여 설명하는데,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신약성도들과의 관계의 모형인데, 멜기세덱이란 이름 자체는 ‘의의 왕’이란 뜻으로 ‘우리의 의되신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칭하심을 얻은 아브라함은 신약백성을 대표합니다.
멜기세덱이 살렘 지방의 왕이었기에 그를 평강의 왕이라고도 했는데, 이 또한 ‘여호와 살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름입니다.

‘여호와 치드케누’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구약시대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롭다고 하신 것같이, 신약시대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성도들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19-20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라고 함은 우리가 ‘우리의 의(義)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심을 믿을 때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성소에 들어갈 권한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감’은 의로와진 자의 권리-곧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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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만한 무슨 자격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무슨 대단한 믿음이 됩니까?
우리가 판단할 때는 별 것 없는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실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으나 찬양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싶으나 그러한 환경 가운데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환경 가운데 우리를 의롭다 하시며 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축복하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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