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26, 2012

“차든지 더웁든지” (계시록 3:14-22)

                                              “차든지 더웁든지” (계시록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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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이 믿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넘어지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은 강공책이 아닙니다.
들어보면, 가장 우리를 위하는 길인 것같이 여겨집니다.
“너무 힘들게 교회봉사를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섬기면 누가 알아준답니까? 오히려 목사님한테 지적이나 당하지 않나요?”
“쉬엄쉬엄 하세요. 신앙도 좋지만, 우선 몸이 건강해야 하잖아요?”
“남들보다 특별히 튈 필요 없어요. 남들 하는 만큼만 하세요. 그러면 족해요.”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오늘은 쉬고 내일 하세요.”
사단은 무서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통하여 우리를 미혹하고 우리 신앙의 뜨거움을 식게 하고 미적지근하게 만듭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64㎞에 위치한 도시로서, 골로새 및 히에라볼리와 함께 비옥한 루커스 계곡의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원래 이 도시는 주전 3세기(BC 261-247년경)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 2세가 건설한 도시로서,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백성의 정의)"로 명명했는데, 에베소 해안으로부터 아시아 내륙으로 뻗은 대로마 도로가 그 중앙을 지나가고 있어서 군사 및 무역과 통신의 요지인 동시에 검정 색 양모의 생산지로 당대 제일의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이 도시는 일찍부터 은행제도가 생겨날 정도로 금융 자산이 대단하였고,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으며, 눈과 귀에 효험이 있다는 고약도 생산하였습니다.

이 도시의 가장 취약점은 물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인데, 약 10㎞ 떨어진 수원에서 수로를 통해 물을 얻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물도 온천과 지하수에서 흘러나온 것이 뒤섞여서 항상 미지근한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교회는 경제적으로 풍부하고, 이단사교의 바람도 별로 없고, 핍박과 환난이 별로 없는 도시에 위치하고 있는 터라 자연히 그 신앙도 나태해지고, 그 도시의 물의 미지근함만큼이나 미지근해지고, 잠자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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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열거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에 맨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빨리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와 현대의 교회들을 향하여서 세 가지로 권고하시는데, 첫 번째로,                                                    

14-16절에서는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라고 하시고, 두 번째로 17-19절에서는 영적인 눈을 떠서 실상을 바라보라고 하시고, 세 번째로 20-22절에서는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님이심을 인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하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주님을 가르켜 "아멘이시요"하는 말은, 주님은 진실하시며, 참되시며,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아멘”은 또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19-20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②"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을 증거하시는 일에,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시는 일에, 진리를 증거하시는 일에 충성하셨습니다.(요:44,요18:37,요1:18,요8:18)

요1:2-3에-"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인하여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 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1: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5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다른 교회를 가만히 보면/ 처음에-적든 크든 다 칭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만은 칭찬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책망입니다. 왜 책망만 들었을까?
우리 교회는 돈도 많다, 우리 교회는 부족함이 없다, 바로 그것 때문에 교만해졌고, 그리고 그 교만 때문에 신앙생활을 등한히 했고, 그래서 결국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차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수크로스"라고 하는데, 얼음이 얼 정도의 냉기-즉,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 않는, 성령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웁다"는 말은 헬라어로 "제스토스"라고 하는 데, 이것은 물이 펄펄 끓어오르듯이, 열렬한 신앙, 적극적인 신앙, 영적으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신앙, 열심으로 가득찬 신앙, 성령 충만한 신앙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라오디게아교회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미지근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딱 부러지게 믿든가/ 아니면 아예 안믿든가 해야 하는 데-이건 도대체 믿는 건지, 안 믿는건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인이고, 어떻게 보면 교인 아니고-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뭡니까?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예수를 믿으려면 딱 뿌려지게 믿든가/ 아니면 아예 신앙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되든가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더웁지 못할 바에야 차라고 하십니다. 차라는 말씀은 차라리 등을 돌려버리라는 뜻입니다. 아주 세상 밖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 상태가 차게 되는 것을 원해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한 상태에서 주님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을 때에 하나님은 말라기서 1장 10절에서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는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왜 더웁지, 아니하면 차갑기를 원하셨는지 아십니까?
아예 처음부터 예수 ‘예’자도 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전도하기가 더 쉽습니다. 힘이 덜 듭니다. 그런데 어정쩡한 사람들/ 교회 몇 번 나왔다가 안 나오는 사람들/ 옛날 교회 열심히 나왔다가 시험 들어 안 나오는 사람들/- 정말 속 썩이고, 애 먹입니다.

16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라오디게아는 지리적으로 찬 생수가 나오는 골로새와 뜨거운 온천수가 나오는 히에라폴리스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지역에서 흘러오는 물은 라오디게아에서 언제나 미지근한 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의 지리적인 위치를 비유로 들면서 그들에게 차든지 더웁든지 확실하게 크리스천의 자아를 가지고 살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상태에 계속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다 말씀하십니까?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여기 "토하여 내치리라"는 말씀은 결국 구원에서 제하여 버리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이 결론적으로 주시는 말씀은 이왕 신앙생활 하는 것- 잘 하라는 말입니다.
이왕 예수 믿는 것-뜨겁게, 남이 보드래도 좀 믿는 것 같이 믿으라는 말입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는 로마시대에 소아시아 고대 국가였던 프리지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며 은행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안과(眼科)학과 직물 산업이 유명했습니다. 이러한 '재정적인 성공'과 '의료의 발달'과 '환경의 부유함'은 참된 영적인 상태를 가리웠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당시 라오디게아교회가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①돈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그러니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별나시게 교회 다닐 필요가 없겠어요? 그래서 신앙생활 제대로 못한 것입니다.
                                                   
②너무 평안해서 그랬습니다- 다른 교회처럼 황제예배의 박해도 없었습니다./ 에배소 교회처럼 니골라 당의 위험도 없었습니다./ 서머나교회와 같은 박해도 없었습니다./ 버가모교회처럼 발람의 교훈도 없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처럼 자칭 거짓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의 유혹으로 인한 괴로움도 없었습니다.
도전 받을 것도, 고민할 것도 없었습니다. 영적인 싸움을 할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순교할 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옥에 갇힐 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사데교회처럼 이 교회도 신앙생활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다만 있는 것은 돈, 부요함과 평안뿐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게을려집니다. 나태해 집니다. 관심이 없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에 적극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배도 그저 되는 대로/ 기도도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교회 오고 싶으면 오고, 말고 싶으면 말고/ 헌금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이 교회를 향하여 '네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지적하신 것은 바로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들의 이면에 숨어있는 영적인 실체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물질 세계를 보는 육신의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 만물을 바라봅니다. 산과 바다 등이 어떻게 생겼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이 닫힌 사람은 물질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세계에도 이 세계를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 세계를 보려면 영적인 눈이,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열려집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 이 영적인 눈이 닫혀진 사람은 신앙생활이 답답하고 힘듭니다. 긴가 민가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열러진 사람은 신앙 생활이 확신 있고 활력이 넘치고 담대합니다.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영적인 눈의 뜨임 받음이 필요하고 영적인 귀가 열림이 필요하고, 영적인 풍요로움이 나타나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신앙의 모습을 바꿔갈 것이 아니라 불 시험을 견딜 수 있는 금과 같이 단단한 신앙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의의 거룩함의 옷을 입어 우리 옛 사람의 수치를 가려야 할 것입니다.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회개하고 열심을 내어  이 모습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책망하고 징계하신다 (19절). 이러한 하나님의 책망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히 12:4-11).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회개하고 열심을 낼 때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결과를 약속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여기서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다는 것은 가장 흔한 일상 생활을 함께 나누는 관계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크리스천의 회개는 가장 일상적인 삶의 모습까지 하나님께 열어드리는 것이며, 그리할 때 주님을 향한 진실한 열심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주님의 주되심, Lordship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을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올바른 신앙은 주님의 주되심을 100%인정하고 순종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마음의 보좌에 앉으셔서 나를 다스려야 합니다.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을 주님이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주님은 문 밖에 서 있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강압적으로 우리를 다루시지 않으십니다. 문밖에서 마음 문을 계속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고 우리가 스스로 마음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21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러한 크리스천의 열심 있는 삶은 이 땅에서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이 땅에서 가장 흔한 일까지 예수님과 나누는 관계일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까지 함께 나누는 관계이다 (21절). 주님은 그 영광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을 위한 삶의 열심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1절);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계 22:5).

22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들은 헛된 가치들로 꾸며댄 위선을 벗어버리고, 깨어 있어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귀가 성령을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말씀을 들을 귀 있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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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믿음이 미지근한 우리들을 여전히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믿음이 뜨거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의심하고 방황하는 사람들도 사랑하시며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그들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 안에 영으로 거하시어 그들의 삶을 지켜보시며 변화되어지기를 원하시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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