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31, 2012

“믿음의 분량대로” (로마서 12:3-13)

                                                      “믿음의 분량대로” (로마서 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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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서 출생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 1887-1982)은, “하루 연습을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을 쉬면 내 친구가 알고, 사흘 연습을 쉬면 온 청중이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연습 또는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 말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에 적용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주 신앙생활을 쉬면 내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두 주 신앙생활을 쉬면 가까이 지내는 교우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세 주 신앙생활을 쉬면 온 교회 교우들이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안다.“

신앙생활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요 훈련이라고 바울은 디모데전서(4: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연습을 게을리했을 때 경기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낼 수 없듯이, 믿는 사람이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하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그 길을 달려나갈 수 없습니다.

일전에 강아지를 사기 위하여 인터넷 여러 사이트(sites)를 살피고 강아지에 대해서 약간의 공부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같은 종의 강아지라고 하더라도 훈련되지 않은 강아지와 유명한 사육사에 의하여 훈련되어진 강아지는, 식견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 강아지가 그 강아지 같은데, 그 가격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좋은 종자의 강아지라고 하더라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강아지는 잡견(雜犬)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가치도 이와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훈련되어진 그리스도인과 훈련되어지지 않은 교인 사이에는 그 가치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잡견이나 훈련되어지지 않은 종자견이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거나 주인을 물거나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이 훈련되어지지 않은 교인들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말하거나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반면에 훈련되어진 개는 절제 있는 행동을 하고 함부로 사람을 물지 않지만 주인이 위험한 순간에 처하면 그 목숨까지 내거는 것 같이, 훈련되어진 그리스도인들은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절제가 있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그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고자 합니다.

일전에 커네티컷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시행한 목회자를 위한 제자훈련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에 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 말씀에 미국 이민교회는 어중이떠중이 신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교회 교인들을 보고는 그 생각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 교회의 훈련된 신자들의                                                        

목회자들을 대하는 예절을 기본 신앙인의 모습이나 또한 평신도 사역자들로서 구역인도를 하는 모습들에서 참으로 잘 훈련받으면 평신도들도 전문 목회자들 못지 않게 훌륭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구나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때를 정하여 일년에 한두 번 각 구역별, 각 기관별 헌신예배를 하는 것은 그저 일년에 한 두 번 마지못하여 헌신예배에 참석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 더 많이 쓰임 받고 그분을 더욱 닮아가기 위하여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경건을 연습하고 훈련을 쌓아가기 위한 결단을 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더 여선교회 회원들은 인생의 경력에서 앞선 사람들로서 어머니, 큰언니 또는 누님과도 같은 분들이십니다. 해서, 인생 자체만으로 보더라도 인생의 후배들에게 권면하거나 가르칠 것이 많습니다. 신앙의 경륜에서도 많은 분들이 젊은 사람들보다는 먼저 믿으신 분들이요 교회생활에서도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경험하셔서 신앙의 지혜도 있는 분들입니다. 그 위에 열심과 경건의 훈련까지 그 삶의 연륜만큼이나 오래 쌓아오셨다면 이는 분명 나중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기에 충분한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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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욕심이 우리로 불만의 마음을 갖게 하며 불만의 마음이 우리로 일하지 않게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가 2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을 맡았는데도 다른 종들에게는 그보다 더 많은 달란트가 맡겨진 것에 불만을 품었을 때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참새가 황새를 따라가고자 한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합니다. 아직 믿음으로는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교회에서 큰 일을 감당하려고 하다보면 때로는 자기의 믿음이 그 직분이나 직임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믿음이 어떠한 줄 늘 헤아려서 자기가 기쁨과 감사로 봉사할 수 있는 일을 맡되 믿음이 자람에 따라 그 분량이나 직책의 중함을 늘려가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49장 28절에 야곱이 그 자식들에게 축복하되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 7절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시고 직임을 맡기시는데, 우리의 재능을 따라, 우리의 능력을 따라, 또는 믿음의 분량을 따라 맡기십니다.

4-5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 몸에 눈, 코, 귀, 입, 손, 발, 기타 여러 다른 기관들이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쓸데없이 그냥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몸인 교회의 지체는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사람 몸의 각 지체가 중요하듯이 교회를 구성하는 각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몸을 구성하고있는 지체인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교우를 비난하고 판단할 때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지체의 각 부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이신 교회에 속한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 몸의 지극히 미약한 부분--혹 평소에는 필요 없는 것같이 보이는 지체의 일부분 맹장이 잘못되었다든지, 혹은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다든지 할 때에 우리는 그 부분을 치료하기에 전 신경을 다 씁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미약한 것 같이 보이는, 별로 필요 없는 것같이 보이는 작은 자의 아픔과 고통에도 동참하여야 합니다. 그의 잘못됨을 뒤에서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하기보다는 그 지체의 치료를 위해서 힘쓰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5-26절에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말씀합니다.

6-8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χάρις)대로 받은 은사(χάρισμα)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여기서 은사(恩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신 성령의 선물(膳物)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2:8-10(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 고린도전서 12:28(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하는 것, 사랑), 에베소서 4:11(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에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능력에 따라, 소질에 따라, 혹은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른 은사들을 주셨는데,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성령의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은사들은 고린도전서 12장이나 다른 성경구절에 나오는 은사들에 비해서 비교적 생색이 덜 나고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라기보다는 뒤에 숨겨진 은사들이 많습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믿음의 분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로서 예언(豫言)은 점쟁이가 점을 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선지자(先知者)를 예언자(豫言者)라고도 하며 선지서를 예언서라고도 하는데, 선지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점을 치거나 예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 어떻게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인가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혹은 장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던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사로이 사람의 운세를 점치면서 은사를 받았다고 함은 잘못입니다.

섬기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섬기는 일을 잘 감당함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라 하여 일을 감당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면 이 사람은 일을 하면서도 은사를 제대로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하고, 권위(勸慰)하는 자는 권위(勸慰)하는 일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권위(勸慰)한다고 함은 권면하고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또, 구제하는 자에게는 성실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다스리는 자는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부지런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긍휼(矜恤)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교회에 속한 각 사람이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함에 자기에게 허락되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잘 경영할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9-12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의 삶에 대한 지침(指針)을 12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첫째로 한글성경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되어있는데, 헬라어 원어는 명령적인 의미로서 영어성경의 번역이 원래의 뜻에 가깝습니다: “Let love be genuine!"(RSV) ”성도의 사랑이 거짓 없는 순수한 사랑이 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반대급부(反對給付)를 바라는 사랑이어서도 안되고,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잘해주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22에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말씀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뜨겁게 사랑함이--체면 때문도 아니요 무엇을 바래서도 아닌--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둘째로 “악을 미워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은 악과 결별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하는 대로 죄와 악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내가 죄짓더라도, 허물이 많은 삶을 살더라도 주님께서 내 미래죄도 용서하여 주셨으니 상관없어” 하는 사람은 여전히 악을 미워하지 않는--악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은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로 “선(善)에 속하라”고 말씀합니다. 악(惡)이 어둠이요 사단의 권세(權勢)라고 한다면, 선(善)은 빛이요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영역이니까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속하여야 할 것이요, 추구하여야 할 일입니다.

넷째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love one another with brotherly affection)"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어느 사람의 집에서 무리에게 말씀을 하고 계신 중이었는데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여러분의 형제요 자매입니까? 우리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원하는 우리는 영적(靈的)인 새 가족입니다. 우리는 교우들을 사랑할 때 형제사랑(brotherly love)으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부족한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받은 대접만큼만 그 사람을 대합니다. 그가 나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으면 나도 그를 위해서 별로 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우들이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먼저 다른 지체인 교우를 사랑하고 존경할 때, 그와 같이 아름다운 일들이 교회 내에서 계속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선지자요 율법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절을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그를 원수로 대하는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제물(代贖祭物)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할 때도 우리가 “존경하기를 먼저 할 때” 그러한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로 바뀔 것입니다.

여섯째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믿지않는 사람이 칠일을 갖고 생활하는데 우리는 육일을 갖고 살면서 그들과 같은 혹은 더 나은 삶을 감당하여야 하므로 부지런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일을 말함이 아니요 교회 안에서의 일입니다. 교회의 일은 나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 아니니까 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로 “열심(熱心)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당부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忠誠)이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길 때 열심을 내기가 어려우나 이렇게 함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확증(確證)함입니다.

여덟째로 “소망(所望) 중에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 소망이 없고 낙담과 좌절만 있다면 이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했습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소망 중에도 즐거워하므로” 믿음이 연약한 다른 교우들에게도 소망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아홉째로 “환난(患難) 중에 참으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서 자주 반복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의 환난과 곤고가 임하지만 이를 끝까지 잘 감당할 때 우리에게는 주님의 상급이 마련되어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에,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逼迫)과 환난(患難)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열 번째로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당부합니다.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의 영적(靈的) 호흡(呼吸)입니다.
사람이 호흡을 중단하면 죽듯이 믿는 사람이 기도를 중단함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狀態)에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쉬지말고 항상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님, 기도할 것이 별로 없는데요.” 기도할 것이 왜 없겠습니까? 다만, 무엇을 기도할지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이지요.

열한 번째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말씀합니다.
형제를 거짓없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성도 가운데 누가 무슨 어려움이 있음을 압니다.
다만 우리가 교회에서 누가 무슨 어려움이 있는 줄 모르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어려움에 대해서 별로 듣고싶어 하지 않고 보고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어려움을 알기는 알지만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에 더딘 것은, 듣기는 듣고 보기는 보아도  수다꺼리의 대상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4절에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너희 가운데 있는 소자(=작은 자)에게 잘 한 것이 곧 나에게 잘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소자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우리 중에 어려움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고있는 성도입니다. 이들을 돌보고 필요한 것을 공급(供給)함이 우리 믿는 사람이 마땅히 행할 바입니다.
                                                  
열두 번째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전에 한국의 시골 인심은 나그네에게 음식도 대접하고 잠자리도 제공해주는 아름다운 풍속이었습니다.
누구나 이러한 인심이 좋은 줄 압니다만, 막상 낯선 사람을 대접할 엄두가 잘 안 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해치지나 않을까? 무엇을 훔쳐 가지나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혹은 나와 별로 상관없는 사람에게 왜 잘해주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그네 대접하기에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3:2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말씀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 그랬고, 그의 조카 롯이 그랬습니다. 특별히 롯은 천사들을 잘 대접함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운데 딸 둘과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구분에서 양의 반열에 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영접(迎接)하였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형제·자매 가운데 쉴 고이 없는 사람에게 잘 대접하는 것이, 혹은 낯선 사람이 우리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할 때에 그들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 주님을 잘 대접해준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말로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앵무새처럼 반복하기보다는 실제로 고통 당하고있는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잘 대해주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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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 되기 위하여 우리는 신앙을 연습하고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열거된 은사들과 그 활용, 생활지침들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무엇에 훈련되어질 것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은 어떠한 은사들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저마다의 각기 다른 은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어떠한 은사들이 있나 한 번 찾아보시고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남들에게 있는 그럴듯한 은사가 없고 별로 생색나지 않는 은사가 있다고 하여 불만스런 마음으로 자신의 은사를 천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개발하시고 잘 경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겸손하고 감사하는 삶의 모습으로 인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몸이신 교회를 건강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근본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이 모든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세상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앞서 교회 안에서 성도에 대한 사랑을 먼저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를 사랑하고 돌보되 그들에게 대접을 받은 답례로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그 일들을 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이며 우리 교회가 속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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