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31, 2012

“헌신하는 청년” (시편 110:3)

                                                         “헌신하는 청년” (시편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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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누구입니까?
교회 청년회의 회원입니까?
연령적으로는 40세 미만의 사람입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서 명확히 하고 있지 않지만, 전도서 12장 1절 이하에서 보면, 아직 그에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말하기 전, 아직 창조주를 기억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목소리와 기력이 있는 때를 말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성경이 말하는 청년은 육신의 나이라고 하기보다는 정신적 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청년의 특성은 힘(strength)입니다.
잠언 20장 29절에서 잠언 기자는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Strength)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기력(strength)이 있습니다.
청년의 또 다른 특성은 배우는 자세이요 변화의 가능성입니다.
‘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라든가 ‘나는 더 이상 배울 수 없다’라고 하는 사람은 이미 청년기를 넘긴 사람입니다.
청년에게는 크고 높은 이상(vision)과 무한한 가능성이 있으며 도전을 마다하지 않으며, 변화를 추구합니다. 요엘서 2장 28절(행전 2:17 참고)에서 “너희 젊은이는 이상(또는 환상: vision)을 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청년의 또 다른 특성은 순수함(purity)입니다. 악에 물들지 아니하며 이를 거부하고자 저항합니다. 청년 때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그에게 감격이 있으며 그의 순수한 믿음의 마음을 지키고자 힘씁니다.

그러나 때로는 정과 욕심에 따라 살다가 이로 인하여 고통 당하기도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전도서 11장 9절에서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말씀하여, 이 세상에서 정과 욕심을 좇는 삶의 결과가 심판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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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9장 16-22절
마태복음 19장 16절 이하에 보면 한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에 관하여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먼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자신 있게 그 모든 것을 그가 어릴 때부터 지켜왔다고 말하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가’라고 의기양양하게 반문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태 19:21)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할 때 그 청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성경은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사람은 부자이고, 청년이고, 관원이기에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였기에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이 없었습니다.
물론, 부자이며 청년이며 관원임에도 하나님께 온전하게 헌신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시편 110:3
새벽이슬은  요란하게 내리지 않습니다.  깊은 밤, 새벽이 되려는 시간에 조용하게 산천 초목 위에 촉촉이 내려 생명을 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이슬은 생명과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이곳 투산과 같이 한 낮에는 햇볕이 매우 뜨겁기 때문에 식물들에게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낮에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새벽이슬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호세아서 14장 51절에서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죽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주셔서 백합화같이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하시고 백향목같이 우람하게 자라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청년을 새벽이슬에 비유한 것은 그렇게 조용하고 촉촉하게 교회라고 하는 초목에 내려 교회에 생명을 주고, 교회가 성장하게 하고, 교회가 복음의 꽃을 피게 하고,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청년들은 “거룩한 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새벽 이슬 같이 깨끗한 주의 청년들은 옛사람의 옷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와 온갖 불의와 정욕으로부터 깨끗합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언어와 행실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시편 119장 9-11절에서 시편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고 그 말씀을 따라 행실을 삼가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구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은 “(혼탁한)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롬 12:2) 할 것입니다.

주의 청년들은 “즐거이 헌신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사업에서 열심을 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기쁨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는데 그 가운데 즐거움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도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헌신이 아니며 하기에 즐거움이 없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과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께 자기의 시간과 몸을 기쁨으로 드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맡겨진 일을 즐거움으로 감당하시는 청년과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8: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고 함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의 동참은 바울이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기에 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솔선하여 자원하여 그들을 동참케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마게도냐 교회들의 구제 또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리 믿는 사람의 이웃 사랑함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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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의 생명을 내어주실 때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우리에게 주신 것 같이, 우리들의 헌신은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 다음에 그의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해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헌신의 순서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헌신하실 때 신실함(faithfulness)으로 하신 것같이 우리의 헌신도 하나님 앞에 신실한 헌신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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