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31, 2014

“고린도전서를 마치면서” (고전 16:13-24)

“고린도전서를 마치면서” (고전 16:13-24)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오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18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1
큰 배가 대양을 항해하다가 대풍을 만났습니다. 며칠을 비바람과 싸우며 고생하던 끝에 배는 거의 파선하였으나 불행중 다행히도 인명에는 큰 피해없이 무인도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목숨은 건졌지만 선원들은 이 망망대해(茫茫大海)의 무인도에 있는 그들을 누가 언제 발견하여 구원해줄 것인가 낙담이 크기만 합니다. 선장은 “아직은 여름이라 산의 열매를 따먹고 밖에서 자도 되지만, 얼마 안 있어 겨울이 될 터인데 그때까지 우리들이 발견되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밭도 일구고 집도 짓자”고 선원들을 독려합니다. 상심하고 있던 선원들도 하루 이틀 지나면서 다시 기운을 차리고 선장이 말한 대로 집을 짓기 시작하며 비상시를 대비하여 마련해 놓았던 곡물과 채소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밭을 일구기 시작합니다. 밭을 일구던 이곳 저곳에서 얼마 안 있어 금은보화가 발견됩니다. 아마도 이 섬에 오래 전에 해적들이 보물을 숨겨놓았던가 봅니다. 보물이 이곳 저곳에서 발견되자 선원들은 밭을 일구는 일은 팽개치고 보물찾기에 온통 혈안이 되어 다닙니다. 집 짓는 일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겨울은 다가왔는데 그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1년여가 지난 뒤 봄이 되었을 때 어느 배가 그 섬을 발견하고는 잠시 쉬었다가 가기 위하여 섬에 정박합니다. 배에서 내린 선원들이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보물을 움켜쥐고 죽어 있는 해골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보물을 두고는 두 세 해골들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보물에 눈이 어두워 밭을 일굴 생각도 않고 집을 지어 겨울을 대비할 생각도 않고 보물을 끌어 앉고 그렇게 죽어간 것입니다.

2
13절에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말씀합니다.
13절에서 바울은 네 가지로 권면합니다.
첫째는 “깨어라”(γρηγορείτε)고 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으라’(be alert)는 뜻입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믿음에 굳게 서라”(στήκετε ἐν τῇ πίστει)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바탕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재물이나 지위나 학문이 아니라 믿음 위에 서되 ‘굳게’ 서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남자답게 행동하라”(ἀνδρίζεσθε, act like a man)고 했습니다. “남자답게 행동하라”는 것은 ‘용기있게 행동하라’(be courageous)는 뜻입니다. 어떤 환난이나 고통 중에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용기있게 잘 견디라는 뜻입니다.
넷째는 “강건하라”(κραταιούσθε)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육신은 약하여도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연약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에 굳게 선 사람이 아니며 강건한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고 강건한 사람은 육신의 연약함이 그의 하나님 사랑함의 강열한 뜻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13절에 열거한 네 가지 권면 위에 한 가지 권면을 더하는데 그것은 14절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πάντα ὑμών ἐν ἀγάπῃ γινέσθω)는 권고입니다. 사랑은 우리 크리스천 믿음과 삶의 완성입니다.

15-16절에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스데바나와 그의 집은 그리스보와 가이오(고전 1:14)와 함께 바울이 고린도 지방에서 사역할 때 세례를 베푼 얼마 안되는 사람들 중에 들어있습니다(고전 1:16). 특히 가정(family)으로는 처음 세례 받은 가정이었습니다. 스데바나의 집이 귀한 것은 이들이 성도 섬기는 일에 헌신한 까닭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서 성도를 섬기는 사람들과 또 주님의 일을 위하여 동역하는 사람들과 육신의 피곤함을 무릅쓰고 열심히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권합니다. 이리할 때 교회는 평안하고 분쟁이 없으며 살아서 역동할 것입니다.

17절에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 언급이 없기 때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으나, 이들이 바울을 찾아온 것을 바울은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바울에 대해서 무관심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있던 바울이었는데, 고린도에서 멀리 이곳 에베소까지 찾아준 그들이 고맙습니다. 바울의 권면에 귀 기울이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염려하는 바울이지만 그들의 방문은 그러한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합니다.

18절에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고 말씀합니다.
“시원케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파우오(ἀναπαύω)는 (심령에) 휴식을 주다, 긴장을 풀어주다, 편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 분당이 있다, 음란의 문제가 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로 시끄럽다, 공중예배의 문제로 소란하다 등등 온통 좋지 않은 소문을 들어서 염려와 근심이 쌓였었는데, 이들을 대한즉 그가 염려한 것만큼 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 심령이 얼마간의 평안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또한 바울의 처방과 권면과, 위로의 편지를 그들에게 전할 것이기에 고린도 교인들의 심령도 놓임을 얻게 할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이러한 사람들--문제를 완화시키고 사람들 간에 얽힌 오해와 불만을 풀어주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함을 지적합니다.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고 했습니다. “알아 주다”(ἐπιγινώσκω)란 ‘인정해 주다’는 뜻입니다.

19절에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된 대로 바울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브리스가) 부부의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던 것이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행전 18:4).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수리아로 돌아오는 길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동행합니다(행전 18:8).
소아시아 에베소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이들을 여기에 머물게 하여서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의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 아굴라와 브리스가(브리스길라)는 에베소에 있는 그들의 집을 가정교회로 사용하도록 내어 놓았습니다.
바울이 후에 고린도에 가서 삼 개월을 머물면서(행전 20:3) 로마서를 쓸 때에 아굴라와 브리스가(브리스길라)는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철거령으로 쫓겨났던’(행전 18:2) 로마에 다시 돌아가 있었습니다(롬 16:3).

현재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머물고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가,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교회들의 소식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이 순조로운 일과 어려운 일, 기쁜 일과 괴로운 일, 즐거운 일과 슬픈 일을 서로 전하고, 그 문제들을 놓고 서로 기도하고 위안하는 일이 성도들의 마땅히 할 바 교제(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입니다.

20절에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ἐν φιλήματι ἁγίῳ; with a holy kiss)는 초대 교회 주의 만찬(Lord Supper)의 의식(儀式)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입맞춤(롬 16:16, 고후 13:11, 살전 5:26, 벧전 5:14...“사랑의 입맞춤”)은 성도간에 사랑의 표시요 또한 용서의 표시였습니다.
처음에는 남자와 여자 가리지 않고 거룩한 입맞춤이 주의 만찬 예식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얼마 후에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성도 간에 행해졌고, 그러다가 더 뒤에 와서는 폐지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성도간에 용서와 화해의 교제와 문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1절에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말씀합니다.
바울의 육체적 조건이 열악(劣惡)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의 나이가 60세가 넘었습니다. 지금은 60세가 장년의 나이요 한참 일할 때지만 바울 당시에는 60이면 노인 중에 노인이었습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바울은 눈이 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안수기도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지만(행전 9:18), 이후로 그의 눈은 성치 못하고 쉬 피로하고, 눈물이 나고, 글을 쓸 수도 없는 지경이었습니다(갈 4:15 참조). 그는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보는 바 대로 이 문제(“육체에 가시”, 고후 12:7; “육체의 약함”, 갈 4:13 참조)를 놓고 열심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평생을 그대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역사하신 “예수님의 흔적”이기에(갈 6:17) 그는 육체적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울의 눈이 이와 같기에 그의 편지는 대서(代書)되어집니다. 로마서는 더디오가 대서했고(롬 16:22), 고린도전서는 소스데네가 대서했습니다(고전 1:1). 그러나, 바울은 편지들이 그에게서 온 것임을 보이고 또한 그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마지막 부분의 문안인사는 친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1절에도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했고, 골로새서 4장 18절에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했고, 데살로니가후서 3장 17절에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고 했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여건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바울만큼 좋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가 선교사로서 이곳 저곳을 다녀야 하는데 눈이 성치 못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고자 하셨을 때 그가 위대한 사도로 쓰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가끔 교우님들이 교회 봉사를 잘 하지 못하는 어려운 사정들을 말씀합니다. ‘나는 무엇이 이래서’, ‘나는 무엇이 저래서’ ...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의 외적 환경이나 육체적 사정이 정말 어려워서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감당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까?

22절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경고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종국에 하나님의 날이 이를 때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성 예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전체를 통하여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사랑을 따라 행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8장 1절에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했고, 8장 3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 했고, 13장 사랑 장에서 모든 은사들을 활용함에도 사랑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모든 은사 위에 사랑의 은사를 구하라고 했고, 14장 1절에는 은사를 구함에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또 오늘 본문 16장 14절에도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피상적(皮相的)이고 관념적(觀念的)인 사랑은 아닙니다. 성도들 사이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질 수 있는 실천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갇히고 굶주리고 목말라하고 병든 성도를 보고 구제하고, 도와주고, 방문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서 말씀한 대로 구제하고 희생하는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만 자기 만족이나 자기 공로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이 사람도 사랑을 따라 행한 사람은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의 영혼이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가는데, 그를 위하여 사랑으로 기도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 방임하는 사람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아직도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이며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믿지 않는 자의 모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했는데, 원어는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또는 μαράνα θά 또는 μαράν ἀθά)로 아람어의 음역으로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기원의 표시입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 22장 20절에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원한 것과 같은 소망입니다.
“마라나타”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널리 사용하던 소망의 인사말이며 성찬예식을 행할 때 공식적으로 사용한 기도문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믿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재림이야말로 인생의 목표이요 최대의 소망입니다. 하기에,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기원하는 사람들은, 13-14절에서 바울이 권면하는 대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용기있게 행하고), 강건하고, 모든 일을 사랑을 따라 행하는 삶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23-24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로 편지를 맺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함께하심과 사랑의 빛에 노출되고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사하는(reflect)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들어온 사람은 이제 다시 그 은혜와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바울의 고린도 교인 사랑”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기에,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한 것입니다.

3
고린도 교회 안에 여러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분당의 문제가 있었고, 음란과 송사의 문제가 있었고,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먹는 문제--그로 인해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문제가 있었고, 공중예배시 성령의 은사의 오용(誤用) 혹은 남용(濫用)으로 교회가 소란하고 혼동과 무질서에 빠지는 문제가 있었고, 그리스도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문제가 있었고, 고린도 교인들의 인색함과 무관심함으로 구제나 기타 형제 돌봄의 실천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서 바울은 그들을 권면할 때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사랑의 결핍으로 야기된 것이므로 “너희는 사랑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을 기쁨으로 맞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고, 믿음에 굳게 서있고, 남자답게 용감하게 행동하고, 어떠한 환경과 여건 중에서도 늘 강건하여야 할 것이며, 모든 것 위에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당부합니다.

고린도전서를 마치면서 현대 교회의 문제들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랑을 따라 행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불일 듯 열망함이 없는 것, 교회를 위한 뜨거운 기도와 눈물의 간구가 없는 것, 충성스런 교회 봉사와 헌신이 없는 것, 형제·자매의 아픔과 상실이 나의 아픔과 상실이 되지 못하는 것, 교회 안이나 밖에서의 삶이 하나님보다는 세상과 타협하고 교제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이 사랑을 따라 행하지 못하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사랑을 따라 형제·자매를 돌아보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여서 “깨어, 믿음에 굳게 서고, 용기 있고, 강건하며, 사랑으로 행하는” 크리스천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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