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의 질서” (고전 14:26-40)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多不過)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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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두 개의 우주(宇宙)에 대한 개발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세기가 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첫 번째 우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서 해와 달과 수천억이상--바닷가의 모래알 수보다 더많은 무수한 별들과 천체들로 구성되어있는 공간(space)입니다.
앞으로 50년이내에 우주여행이 대중화되는 시대가 도래(到來)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우주는 인간이 창조한 것으로서 불과 2-3년 사이에 수천만, 수억의 웹사이트들(web sites)로 늘어난 인터넷 혹은 사이버 공간(space)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이 인터넷 우주의 개발에 집중되어있습니다.
인터넷 공간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전도와 선교의 무대가 됩니다. 2,000년전 바울은 육로로 혹은 해로로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세 번의 전도여행을 하였지만, 그가 평생을 다니며 전도한 곳은 소아시아 일부와 그리-스 반도와 로마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인터넷 공간을 이용하여서는 하루에만도 북미주는 물론 극동아시아, 소아시아, 그리-스 반도, 유럽, 아프리카 구석 구석까지 넘나들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는 선교사들과 소식을 교환할 수 있고 그들의 기도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바울 시대에는 그의 소식을 전하고 또 흩어진 교회들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 소식을 전하는 자가 몇 주 혹은 몇 달을 여행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였지만, 지금은 하루동안에도 여러 지역의 목회자, 선교사들과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긍정적인 인터넷 우주 개발의 결과들이라고 한다면, 인터넷 공간은 부정적인 면들도 적지않이 많습니다. 무수한 음란 사이트들이 판을 치고 있고, 인터넷 공간에서 매춘(賣春) 등 성범죄가 이루어지고, 기타 다른 대규모적인 범죄의 음모가 마련되어집니다. 악성 바이러스(virus)를 전송함으로써 수많은 컴퓨터들을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타회사의 기밀(機密) 파일(files)을 도둑질하는 범죄가 일어나고, 한 국가의 군사기밀(軍事機密)도 노출되어버립니다.
인터넷 우주가 개발되면 될수록,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공간이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찰 위험에 처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해서, 일각에서는 벌써 이 무질서와 혼돈의 위험이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cyber-space)를 어떻게 질서있게 운영할 수 있는가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또다른 걱정은 인터넷 우주를 창조한 인간이 그렇지 않아도 교만하던 터인데, 이제 간이 더 붓기 시작하여 ‘하나님--창조주가 별거냐 내가 창조자다’라고 저마다 자기가 신(神)이라고 주장하며,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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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天體)라는 대우주와 인터넷 공간이라는 소우주의 질서(秩序)가 중요하듯이, 교회 내와 예배의 질서도 중요합니다. 질서를 존중함이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지으신 세계를 유지하는 역사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26절에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啓示)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질서(秩序)있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찬송이 있고, 말씀에 대한 가르침이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통하여 친히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계시가 있고, 방언과 방언 통역함이 있을 때 이는 질서있고 조화된 예배를 만들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있고 조화된 예배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이로써 교회에 덕(德)을 세울 수 있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곧, 질서(秩序)와 조화(調和)의 하나님께서 교회와 예배를 통하여 우리에게 원하심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27-28절에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多不過)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방언과 예언의 유익이 무엇인지 강조한 바울은 다시 한번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 당부합니다.
공중예배시 통역하는 자가 있으면 방언 말함이 가하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함에도 질서와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예배시에 통역이 있어 방언을 말하기를 원한다고 할지라도 두 사람 혹은 많아야 세 사람까지만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역이 없을 때는 잠잠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방언말함이 듣는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9-30절에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啓示)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언하는 일이 좋은 것이나 이를 함에도 질서와 절제를 필요로 합니다.
또 그 예언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가 분변(分辨)함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이 글을 쓸 당시인 주후 56-57년 경에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예언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 말씀인가 아닌가를 분별할 기준(canon, criterion)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영분별의 은사가 절실히 요구되었습니다. 영분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의 예언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인가를 분변하라는 것입니다.
계시(ἀποκάλυψις)는 현재 교회나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하시는--말하자면, 특별 예언으로서 다른 예언들 말함보다 우선으로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31절에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질서(秩序)와 경중(輕重)을 따라서 예언을 말할 때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오묘하고 깊은 것을 배울 수 있고, 격려를 얻고, 또한 도움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32-33절에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이를, “Remember that a person who has a message from God has the power to stop himself or wait his turn. God is not one who likes things to be disorderly and upset. He likes harmony, and he finds it in all the other churches."라고 풀어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멈추어야 할 때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을 아울러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무질서와 혼돈 가운데 일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조화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주님의 놀라운 솜씨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우주의 수천억이 넘는 항성들이 어떻게 운행하는지 보십시오. 정교한 궤도를 따라서 질서와 조화있게 운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질서와 조화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가 무질서와 혼돈으로 어지럽혀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34-35절에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여성상위 혹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센 현대에 이 말씀은 설교자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이 말씀이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에 나오는 공중예배시 여자가 머리를 덮게로 가리는 것과 같이 2,000년 전이라고 하는 시대상황과 고린도 지방의 문화와 관습을 염두에 두고 한 특별 명령인가 아니면 시대와 상황을 초월한 보편적인 명령인가에 대해서는 성경학자들 간에 논란(論難)이 있습니다.
극보수적인 신학교 가운데는 지금도 목사훈련 과정인 Master of Divinity(신학석사) 프로그램에는 여학생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이 더러 있습니다. 어떤 미국 교회들에서는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현재까지도 여자 신도들을 집사로 임명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시대와 상황을 초월한 하나님의 절대적·보편적 명령이라고 말씀드리지는 않지만, 여자 성도나 남자 성도나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발언과 주장은 교회에서 삼가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현재의 교회에서도 많은 경우에 사실이지만--여자 신도들로 인하여 교회의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저마다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말하면서 성령께서 시켜서 한다고 하였는데 기실은 자기의 자랑을 위한 것이고 자기의 주장을 말하여서 교회에 어지러움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이렇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여성의 지위와 목소리가 현재처럼 높지 않았던 2,000년전의 사회이었지만, 교회 안에서는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일이 많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도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에서 보는 바대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고 명합니다.
36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 질문을 던집니다.
방언과 예언을 말함에 질서와 절제를 지킬 것과 여자들은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조용할 것을 말씀하는 바울의 권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반문(反問)입니다.
‘나의 말에 동의하지않는 너희의 생각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줄로 아느냐?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는 바울의 단호한 주장입니다.
37절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통하여서 예언이나 다른 신령한 은사들을 받은 사람은 바울이 지금 말씀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줄 분변할 것입니다. 만일 바울의 권면에 다른 주장이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받았다고 하는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미혹하는 자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바울의 확신입니다.
38절에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 잘라서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변론함에도 만일 어떤 사람이 여전히 “나는 바울의 권면에 동의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한다면, 바울은 그 사람을 그의 무지(無知) 가운데 내어버려둘 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39-40절에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14장에서 말씀하고자 함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더 많은 방언 말하기를 힘쓰되 통역하기를 바랄 것이며, 그 위에 예언 말하기를 사모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이라도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과식(過食)하면 체하듯이, 아무리 방언과 예언이 좋은 은사라고 하더라도 무질서하고 무절제하게 남용할 때, 이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보다는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무너뜨려내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에,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라”는 권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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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되기를 원하는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선물(free gifts)로 주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몸되신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심입니다.
믿는 성도들은 은사를 사모하여야 할 것인데, 이것이 성령의 은사를 얻는 비결입니다.
은사를 교회와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원하는 성도들은 제일 먼저 교회의 덕을 생각하여야 할 것인데, 이를 위해서 질서와 조화에 순응하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의 모습이 오히려 교회를 소란하게 하고, 어지럽게 하고,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질서와 조화와 화평의 하나님의 영광(榮光)과 교회의 덕(德)이 질서와 절제를 지키는 우리의 봉사와 은사의 사용으로 더욱 드러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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