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전 10:23-11:1)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誹謗)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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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많은 학생들의 관심이 돈, 권력, 그리고 인기 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일신의 영달과 돈과 권력이 생기기에 공부합니다. 또 어떤 학생들은 연예인이 되기를 원하는 데 이도 자기가 하고자 하는 분야에 대한 애착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될 때 돈과 인기가 얻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들의 눈에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비춰진 사회가 문제입니다.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불편·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 법관을 지망한 사람들이 힘들게 공부하여 판사·검사가 된 다음에 그들이 당초에 목표했던 대로의 길을 갈 수 있는 사회입니까? 커다란 비리(非理)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채 슬그머니 잠재워지는 사회가 아닙니까?
그러다보니 평생을 법관으로 지내는 사람이 많지 않고, ‘법관이 되는 것’을 더 큰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인이 되기 위한 지름길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직업 정치인들과 행정관료와 법관 출신의 정치인들이 한바탕 어울리는데 그들의 하는 작태(作態)란 국민을 위한 정치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권력욕과 탐욕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여당과 야당의 구분이 없습니다.
어른들의 모습 가운데 학생들에게 본이 되어지는 것이 드뭅니다.
사회나 학교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른들을 욕을 하면서도 그들이 욕하는 어른들이 탐닉하고 있는 그것을 붙잡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교생활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하거나 이기적인 동기로 시작하여 이기적인 결과로 끝을 맺습니다.
이러한 가치관 도착증세(倒錯症勢)를 갖고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겠습니까?
아니지요. 현세 축복을 얻기 위한 한 방편으로, 산신령 바다신령 부처님께 복빌던 그 형태를 교회 안으로 옮길 따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의 의는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성장과 사명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가정의 축복과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이 사람에게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내게 중요한 것은 나에게 복을 주실지도 모를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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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4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6장 12절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크리스천의 행동강령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유익한 행동이어야 하고, 둘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을 행동이어야 합니다.
23절에서는 그 위에 한 가지를 추가하는데, 곧 덕(virtue)을 세우는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함에서 비롯됩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33절에서 반복합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덕을 세우는 행동--곧,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행동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뿐아니라 이로써 다른 사람을 구원(救援)에 이르게도 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有益)을 구하는 행동이 무엇으로 말미암습니까?
바울은 사랑의 행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25-26절에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의 신전에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 시장에서 다른 고기들과 함께 팔렸는데 이를 사먹을 때 이것이 제물로 바쳐졌던 것인가 아닌가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유일하신 신인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우상은 허구일뿐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이른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27절에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권고합니다.
불신자 집에 가서 식사를 할 기회가 주어질 때 그들이 차려놓은 음식은 그것이 우상에게 제사드린 음식인지 아닌지 ‘그 불신자의 양심을 위하여’ 묻지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만일에 그 사람에게 묻고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입니다’고 했을 때, 그것을 먹음은 그 불신자의 양심에 거리낌을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가 생각할 때에, ‘아, 나는 믿는 사람은 우상의 제물은 먹지 않는 줄 알았는데 먹는구나,’ ‘이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별 것 없구나,’ ‘이 사람도 우상을 인정하는구나’라고 추측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믿는 사람이 ‘우상은 세상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먹어도 나의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먹는다고 하더라도 불신자가 갖고있던 믿는 사람들의 음식먹는 것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며, 또한 그 불신자가 하나님을 믿게 되기 전까지는 우상의 존재를 믿고있을 것이기에, 식사 테이블에서 ‘우상이 없기 때문에 먹는다’고 함이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고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리할 때, 이 사람은 전도의 좋은 기회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28절에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권고합니다.
그 사람이 우상을 인정치 않는 사람이면 우상의 제물인 줄 알고는 굳이 사오지 않았을 터인데,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사오고 먹는다는 것은 대부분은 우상을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29절에 이른대로, 이 사람과 이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믿는 사람이 양심에 꺼릴 것이 없기에 먹는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은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인정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기의 입장에서 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입장에서 우상의 제물인줄 알고도 먹는 믿는 사람을 동류항(同類項)에 집어넣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는 사람에게 ‘이것은 알코홀 성분이 8%인 포도주인데 같이 마시지 않겠어요?’라고 했을 때, 믿음이 있는 사람이 거리낌 없이 ‘알코홀 성분이 8%’인줄 알면서도 마시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자기와는 다른 사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마신 사람’이라는 동류항에 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술을 같이 마시기 전에는, ‘저 사람이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믿음은 과연 무엇일까?,’ ‘믿는 사람은 뭔가 다르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었던 사람도 함께 술을 마심으로 그와 다를 것이 없는 동류(同類) 의식을 갖게 되고 믿음은 있으나 없으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다만 위안의 수단 정도로 여길 것이기에 그후로는 믿음에 대한 절실한 기대감이 없어집니다.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술 마시는 문제를 갖고 가끔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엡 5:18)고 되어있지 ‘마시지 말라’고는 되어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사람들은 성경에 ’마시지 말라‘고 되어있으면 정말 ’그렇게 할 것처럼‘ 물어옵니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성경에 더 엄격한 규정이 들어있음을 알립니다. 잠언 23장 29~35절에,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뜩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상세하고 정확한 표현입니까?
술을 한 잔 마시는 것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취기가 오를 때의 상태, 또 취함이 더 지나서는 바다 가운데, 돛대 위에 누운 듯한 착각, 그리고 술이 사람을 먹는 상태가 되면 모든 감각을 상실하여 맞아도 아프지 않게 됩니다. 술에 취하여서 머리가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는 술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처럼 하다가도 술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다시 술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 ‘술을 마시는 것은 좋지만 취하지 말라’고 표현되어 있습니까?
가장 가벼운 술로 여겨지는 것 중 하나인 포도주에 대해서도 ‘보지도 말라’고 명하십니다.
‘마시지 말라’와 ‘보지도 말라’ 중 어떤 것이 더 강한 명령입니까?
30절에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誹謗)을 받으리요?”라고 반문합니다.
보통의 식물(食物)이건 우상의 제물이건 나는 그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을 먹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먹습니다. 그러나 우상의 제물인줄 알고도 먹음으로 내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는데 다른 사람의 비방꺼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은 육신의 강건함을 얻어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맡기신 세상 기업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잘 경영하여 좋은 본을 보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든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우리 삶의 목적이 주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2-33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 또는 다른 일상의 일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교회에 속한 자나 어느 누구에게도 거치는 자가 되지 말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믿지 않는 자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권고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그 사랑의 마음입니다.
또 그의 대속적인 사랑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영광돌리신 그 삶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이웃을 사랑하여 나보다는 그들의 유익을 구하며 덕을 세움으로 바울을 본받는, 그리고 그로써 그리스도를 본받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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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교회 밖의 사람들의 것과 같습니까?
교회 밖 사람들이 세상의 풍속을 좇아 혼탁하고 뒤죽박죽인 세상 속에서 재물, 권세와 영욕을 좇는 삶을 살아갈 때에도 믿는 사람은 믿음의 반석(磐石) 위에 서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할 것이며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동일할 때 그것이 가능합니까?
우리는 나의 유익(有益)을 구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덕(德)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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