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4, 2014

“방언과 예언의 은사” (고전 14:1-25)

“방언과 예언의 은사” (고전 14:1-25)
           
 
  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1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 미국인과 결혼하신 분이 계십니다. 남편 되는 분이 저명한 의사이며 교수이신데 이 여자 분은 한때 아나운서를 하신 경험이 있는 인텔리입니다. 이분이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는 그의 모든 생활 가운데 주님을 증거합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웃고 계시고 성령에 대해서 말하기를 즐기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방언을 하라고 권하고, 당신은 예언의 은사가 있으니 이 자리에서 성령님이 시키시는 대로 예언하라고 청합니다. 그분 가정이 타운의 유지이기 때문에 한국 목사님이나 미국 목사님이 그 집을 방문하게 되면 그분은 어김없이 같이 기도하자고 하고, 방언 기도를 못하는 목사님에게는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셨으니 성령을 받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그의 하는 모든 일이 성령의 지시에 따라 하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물 한 컵을 대접하는 일로부터 다과를 나누는 일, 꽃 한송이를 건네주는 일까지 다 성령님이 하라고 해서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분이 하기를 원하는 모든 일이 성령의 지시라고 믿습니다. 처음 그분을 만났을 때는 참 은혜를 많이 체험하신 분이구나 생각하여 그분 집을 방문하는 것이 기쁨이었는데 나중에는 부담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번에 가면 또 무엇을 하라고 하실건가?” “무엇을 하라고 하시면서 성령께서 시키신다고 하실건가?” 그분의 삶이 은혜롭고 화평해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그분의 성령에 대한 이해는 바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이나 크리스천의 성령 체험에 대해서 자신의 편견을 말하면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함은 삼위 하나님의 한 위이신 성령에 대한 오해입니다.

제가 아직 목회자가 되기 전에 다니던 교회의 한 집사님의 남동생 부부가 어느 해 여름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두 사람 다 교회에는 문외한(門外漢)이었습니다. 여자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고 남자는 슬립퍼를 끌고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 부부가 그 다음 해 여름에도 왔는데 이번에는 1년 사이에 180도 바뀌어서 왔습니다. 둘 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여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고 자랑합니다. 교회 수련회를 가게 되었는데 그들도 같이 갔습니다. 남자가 기타를 칠 줄 안다고 하여 찬양을 인도하였습니다. 찬양을 인도하면서 박수 칠 것을 강요하고 박수를 안치는 사람은 은혜를 못 받은 사람이라고 압박합니다. 저도 주일예배 이외의 모임이나 예배에서 박수 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박수 안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못받은 사람’이란 말에는 상당히 거부감이 느껴졌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말씀에 바탕을 두지 않은 까닭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목적과 그 유용성을 오해한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예언이 더 우위의 은사이며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나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말씀합니다.
은사의 우위를 말씀함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렇게 말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처음 받은 사람은 이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혹 없어지지나 않나 하여서 수시로 말함으로서 점검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또 다른 사람 앞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이와같은 현상이 나타났는데 방언의 은사를 받기가 예언의 은사를 받기 보다 쉽고, 방언의 은사는 말하는 것이니까 받은 여부를 금방 알 수 있는데, 예언의 은사는 식별이 곤란하였습니다. 또 받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말로 표현되어지는 것이니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쉽게 들고, 자랑하기도 쉬웠습니다. 따라서, 공중예배때 저마다 일어나서 자기도 알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고는 앉습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 당시의 예배는 일정한 순서와 형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찬송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 예배내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고 알지 못하는 소리들만 있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증거하고 예배를 인도할 사도나 선생이 있으면 좋을 터인데,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저마다 일어나서 방언으로 말하는 예배 자체가 무질서하고 의미가 없는 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이에 바울은 1절에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씀합니다.
13장에서 모든 은사 위에 사랑의 은사를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한 바울은 은사들을 사모하고 구하되 사랑을 따라 그리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은사를 그 적절한 용도대로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했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예언의 은사는 세상 점치는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사람, 하나님 말씀에 민감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2절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심은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심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겉사람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럽고 깊은 것이라도 다 하나님께 아뢸 수 있으며, 응답에 대한 확신이 크게 임함을 느낍니다.

3절에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며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면, 예언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관하여, 교회의 장차 될 일에 관하여 말하는 것인데, 이로써 교회에 덕을 세우고 성도들을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4-5절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공중예배(公衆禮拜)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방언의 은사가 개인의 영적 성숙을 위한 것이라면 예언의 은사는 공동체인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했지만, 이미 상당수의 교인들이 공중예배에서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통역하지 않고 방언만 말하고 있는 관계로 예배가 혼란스러웠습니다.
바울의 논지는 공중예배시 방언을 말하려거든 듣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게 통역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 알아듣는 언어로 되어지기에 ‘통역없는 방언’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예언의 은사가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지 않고 목회자가 되었다면, 이 사람은 설교하는 것이 고역(苦役)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신 권면과 당부의 말씀과 교회의 사명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선포하는 것이 이 시대의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목사가 증거할 예언의 말입니다.

6절에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반문합니다.
주님이 바울을 사도로, 선생으로 부르신 까닭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함인데, 공중예배 때에 방언으로만 말한다면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계시로, 말씀의 깨달음의 지식으로, 현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하는 예언으로,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한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주기 원하십니다.

7-9절에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는데 피리를 부는 것인지 거문고를 타는 것인지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할 때 듣는 사람은 그 음을 감상할 수 없습니다. 나팔소리가 나긴 나는데 그 음이 분명치 않을 때 이것이 기상을 알리는 것인지, 취침을 알리는 것인지, 전쟁을 알리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공중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교회의 사명에 관한 말씀을 들음으로써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이 무슨 소리인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일 때 이는 공허할 뿐입니다.

10-12절에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소리가 저 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새 소리, 바람 소리, 물 소리에게까지 그 뜻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도 그 의미가 있음은 분명한 일이지만, 알 수 없는 방언을 말하고 듣는 것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에게 유용한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공중예배의 목적인데, 이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사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도 결국 그 은사들을 통하여 교회와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시기 위함입니다.
방언을 말함이 잘못이 아닙니다. 뜻도 알지 못하는 방언을 공중 앞에서 자랑삼아 말함으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3절에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라고 권면합니다.
자신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한 방언이라면 굳이 통역이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예배시에 방언 말하기를 원할 때, 그가 하는 방언의 의미가 해석하여 주기 위해서 통역이 필요합니다. 방언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와 마찬가지로 방언 통역의 은사도 사모함에서 비롯됩니다.
병고치는 은사의 임함이 자기 병 낫기를 구함에서 시작됨과 같이 통역의 은사도 자신의 방언을 통역하기를 구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통역하기를 구함은 그 방언이 무슨 뜻인지--혹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는 말씀을 성도로 듣게 하기 위함입니다.

14절에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방언 통역함의 은사가 없을 때, 방언 기도는 ‘나의 영(τὸ πνεύμά μου)’의 기도로서 모든 것을 통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알아들으시지만, ‘나의 마음(ὁ νούς μου)’은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15절에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때 이것이 가능합니까? 방언 통역의 은사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때에는 나의 영의 깊은 것으로 하나님께 아뢰고 내가 아뢰는 것을 나의 마음이 이해함으로 영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이로써 영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어찌 아멘 하리요?” 했습니다.
공중예배시에 하나님께 올리는 방언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께는 감사하는 것이요 듣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축복하는 기도라고 할지라도 통역함이 없을 때 방언 기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기도의 내용을 알지 못하기에 ‘아멘(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믿습니다)’으로 화답할 수 없습니다.

17절에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방언을 하되 통역이 없을 때, 이 사람은 자신의 영으로는 하나님께 감사를 잘하였지만, 듣는 사람은 그 기도의 내용을 알 수 없으므로 덕 세움--권면이나 안위를 얻지 못합니다.

18절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방언 통역함이 없으면 공중예배시에 방언 말함이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한다는 말을 고린도 교인들이 오해할 수 있습니다. ‘저가 방언을 말하지 못하니까 시샘하여 저렇게 말하는 것이지’ 할지도 모르기에 바울은 그가 지금 권면하는 것이 시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19절에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과 성도들을 향하신 계획이 무엇인지 가르침을 받는 곳입니다.
그렇지 않은 목적으로--곧 자기의 은사를 자랑하기 위한 드러냄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방언뿐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헤아리기 보다는 인간의 주장과 선호를 앞세우다가 보면 교회의 덕을 세우기 보다는 교회를 무너뜨려내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바울이 오늘 권면하고 경계하고자 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한 방언이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돋우워짐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20절에 “형제들아 지혜에는(ταίς φρεσὶν)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τῇ κακίᾳ)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지혜(φρήν)는 상황 가운데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혹은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악(κακία)은 이 세상 임금이 주장하고 미혹하는 데에 따른 판단입니다.
믿는 사람의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사단의 미혹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21-23절에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율법이란 이사야서 28장 11-12절의 말씀으로, 다른 방언 말하는 자인 아수르인을 사용하여 유대인들을 깨닫게 하고자 하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바울은 방언은 믿지 않는 자에게 표적이 되고,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알게하는(“preaching the deep truths of God, Living Bible)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온 교회가 방언을 말할 때,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하는 일이 미친 짓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각 족속나라의 방언을 말하매, 듣는 사람들이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2:13)고 했습니다.

24-25절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언을 말함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깊으신 경륜의 진리를 선포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말하며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선포할 때,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처음 찾았다고 할지라도 이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과 책망으로 그 마음이 뜨거워지고 회개하게 되고, 성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이 그 자녀들 가운데 계시다고 증거하는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연합인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 이루시기를 원하는 놀라우시고 크신 뜻입니다. 자기를 내세우거나 주장하는 사람들을 통하여서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진리와 뜻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3
우리의 예배드리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헤아려 알며 그와 같은 인간구원의 계획을 알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주일의 예배가 우리의 삶을 통한 영적 예배로 이어지기 위함입니다.

예배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교회의 덕(德)을 세우고, 권면(勸勉)하고, 안위(安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덕은 하나님의 말씀이 산포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할 때 세워진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공중예배에 참여하는 우리는 사단의 악에 미혹을 받는 자기의 주장과 목소리를 내세우는 일을 삼가고, 하나님의 지혜에 장성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헤아리고 이해하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주일 하루 교회라고 하는 건물에서만 그렇게 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예배인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향하신 놀라우신 뜻이요 계획입니다.
이리할 때,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증거거리가 될 것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