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오래 참고” (고전 13:1-13)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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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베스트셀러 서적들을 보면, 불교에 관한 책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불교 인구를 능가한다고 하는데, 어째서 스님들의 책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전반적으로 목회자들이나 평신도 크리스천들의 책들보다 더 많이 읽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그간 한국 사회에서 보여지고 증명된 것과 같이, 믿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이기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의 모습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크리스천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광대(廣大)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부처님보다 한수 위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하나님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사는 한, 믿지 않는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에게서 전혀 들을 것도 배울 것도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신교도들과 구교도들 중에서는 구교도들이 그래도 낫다고 여깁니다. 그들은 그래도 윤리적인 삶을 살려고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까닭입니다. 최근 교황의 한국 방문으로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교인들을 카톨릭에 빼앗길까 봐 걱정하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신교도들인 우리는 ‘가장 우월한 교리’--아니, 유일한 진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를 갖고 있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점점 우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도 좋고 다 좋은데, 그래 ‘구원 받은 사람’의 삶이 어찌 그 모양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 합당한 삶의 진지함도 없고,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사랑을 따라 행하는 모양도 없고,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탐욕스럽고 자기 자신만을 알고 뽐내는 그 모습은 차마 봐줄 수 없다고 합니다. 불교도나 카톨릭교도들은 삶에 진지함도 있고 구도자적인 자세도 있는데,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은 비방하고 중상함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한마디도 빠짐없이 말씀을 듣고, 기적과 병고침과 죽은 자를 살심을 목격하고, 같이 먹고 같이 자는 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의 삶에 변화가 있었습니까? 그들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질문을 모세와 함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40년 동안 옷과 신발이 헤지지 않고 닳지 않는 기적을 보며, 반석에서 솟아오르는 물을 마시고 하늘로서 내려오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밤낮으로 보는데, 그들에게 조그마한 믿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의 삶이 애굽에서의 삶에서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옆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기는커녕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이 더욱 더 늘어가고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들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왜 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 도망갑니까?
이는 예수님이 진리이심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며, 3년간의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후에도 그들에게 삶의 변화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을 변화시켰습니까?
바로 성령이십니다.
‘오직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시매’ 그들이 권능을 받고, 이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며 그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의 속사람이 변화했습니다. 성령은 사람의 가치관을 변화시킵니다. 그전에는 진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리스도가 중심(中心)이 되며 우선(優先)이 되는 삶을 살아가지 못했지만 성령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시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은 믿음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쳐오면 송두리째 흔들려 버립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여 구하는 이에게 주십니다. 미운 사람을 사랑함이 불가능해보입니다. 철천지 원수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랑으로 같이하시매, 미운 사람이 불쌍해 보이며 철천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먼저, 사모하고 구할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도우실 때 하나님으로 향한 믿음이 자라게 하시며, 진리를 발견케 하시며,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으로 미운 사람도, 불구대천지 원수도 사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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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장으로 잘 알려진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세상에 많은 은사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사랑과 무관하게 행해지면 그것들은 무익할 따름입니다.
1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했습니다.
세상나라의 말들과 또 세상나라 말에는 없는 천상의 말들의 각종 방언을 하는 은사를 선물로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에게 사랑의 은사가 없으면 그 사람은 방언의 은사를 자기 자랑거리로 삼을 것이기에 교회에서 시끄러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2절에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합니다.
예언하는 은사가 있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드러나는 신령한 비밀의 진리와 지식을 알고, 또 성령의 은사로서의 믿음을 받아 산을 옮기는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예언의 은사도 믿음의 은사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2장 8절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구제하는 일도 희생하는 일도 성령의 은사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주고, 위기에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던지는 희생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러한 선행이 아무 유익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문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베푸는 것--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름에까지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까?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대답은 ‘No!'라고 하십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거지에게 동전 몇 푼을 던져주고, 차에 칠 위험에 처한 어린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을 던지는 것도 엄격한 의미에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안되었다고 느껴지는 동정의 마음은 사랑의 시작이지만 사랑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스님 가운데 어떤 분들은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와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慈悲)는 무념(無念), 무상(無想), 무정(無情)의 부처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비참함에 동요됨이 없이 그 마음과 정이 격리되어 있는 가운데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그 대상과 함께 하는 일체감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6절에 표현된 대로, 함께 고통을 느끼고 함께 즐거워하는 마음이요 삶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씀한 대로 함께하는 마음과 삶이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감정 개입을 통제한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그가 분명히 잠시 후면 그를 죽은 자 가운데 일으키실 것이지만, 잠간의 육체적 분리를 슬퍼하시고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과 고통을 아시기에 같이 슬퍼하고 같이 고통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위적이거나 통제되어진 것이나 격리되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적이요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아진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인간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많은 것들로 요구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며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 십자가상에서 죽음의 고통이 없으셨습니까?
너무나 그 고통이 심하시기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하늘 아버지께 처절하게 부르짖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느끼지 않으시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성부 하나님도 독생자의 고통 가운데, 인간의 고통 가운데 같이 고통을 당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떻게 주위의 사람들--때로는 나를 비방하고 나를 저주하며 나를 해하려드는--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직 연약할 때에,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아직 원수에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모른다 부인할 때에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합니다.
말 잘듣는 자식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반항하며 대들고 집을 뛰쳐나가는 자식도 사랑합니다.
아니, 말 안듣는 자식에게 더욱 마음이 쏠립니다.
그 자식을 야단치고 그 자식으로 인하여 한탄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인간의 자연스럽고 가식이 없는 사랑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러한 미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의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될 수만 있다면, 굳이 크리스천이 가져야할 사랑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4-7절에 “사랑은 1오래 참고, 사랑은 2온유하며, 3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4자랑하지 아니하며, 5교만하지 아니하며, 6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7성내지 아니하며, 8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9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10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11모든 것을 참으며, 12모든 것을 믿으며, 13모든 것을 바라며, 14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의 속성이 잘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속성이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온전히’ 회복한 믿는 사람의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은사로서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견고케 하며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그 소용가치가 없어지지만, 사랑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여전히 소용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어울려 생활할 때에도 그들을 사랑으로 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9-10절에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며 믿음생활을 할 때, 우리의 아는 것이나 성령의 은사도 우리의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부분적인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부분적으로 행해지던 것은 폐하여지고 온전한 것으로 대체됩니다.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씀합니다.
현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어렸을 적의 생활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우리에게 전개될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은 장성한 사람의 생활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온전한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말하는 것이나 깨닫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 앞에 이를 때 우리는 비로소 장성한 자와 같이 실수함이 없이 온전히 말하고 온전히 깨닫고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 믿을 때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께 달라고 요구만 하는 사랑이었지만,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자라서 장성한 후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매 우리의 사랑의 방식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전에는 사랑받기만을 원하던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이제는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사랑을 나누어주되 무심하고 무정한 마음으로 동정을 베풀 듯이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통과 슬픔과 즐거움과 기쁨 가운데 같이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성령의 은사들 중에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이 우리 가운데 값없는 선물로 주어지매 이것이 가능합니다.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요즘 거울은 선명하게 물체를 비춰 주지만, 바울 당시의 거울은 동판이나 철판으로 되어있어서 희미하게 보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춰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다만 희미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그 나라가 실현될 때에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주님에 대한 나의 지식도 현재는 부분적일 뿐이지만 그 날이 이르면 온전할 것입니다.
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맺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πίστις)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며, 세상의 미혹을 뿌리치게 합니다.
소망(ἐλπίς)은 현재 보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고(롬 8:24-25 참고), 우리의 믿음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합니다
사랑(ἀγάπη)은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어질 수 있도록 크리스천들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두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이중에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지만, 사랑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소용되어질 것입니다.
3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인 사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고통 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는 삶입니다(고전 12:26; 롬 12:15 참고).
사랑의 은사는 인간의 노력이나 구도자의 극기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런 후, 마음을 비우고 사모함으로 하나님께 사랑의 은사를 구할 때 우리에게 값없는 선물로서 주어집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랑의 은사를 갖게 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온 교회와 가정 위에 나타나고, 더욱 더 아름다운 모양으로 하나님께 사용되어지는 교회와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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