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10, 2014

“남자의 머리, 여자의 머리” (고전 11:2-16)

“남자의 머리, 여자의 머리” (고전 11:2-16)

           
 
  11: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遺傳)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豫言)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6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깍을 것이요 만일 깍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에 둘지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規例)가 없느니라.
 

1
사회적으로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주의자(feminist)라고 하더라도 남편을 사랑할 때 남편을 위해 저녁을 지어주고 남편의 옷을 빨아주므로 작은 행복을 즐기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성주의(feminism)와 실존주의(existentialism) 사상가와 문학가로 유명한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란 프랑스 여인이 있습니다. 1949년에 발표한 제2의 성(Le Deuxieme Sexe)에서 그는 역사적·철학적·사회적·생리적 분석을 통하여 여성문제를 고찰하고 여성들의 자유로운 실존 가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그의 작품 발표를 전후하여 여성의 개체성(individuality)을 인정하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삶이 특이합니다. 20대 초반에 실존주의 작가로 유명한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를 만나고 그와 2년의 계약결혼을 시작하는데 별 문제가 없기에 평생을 계약결혼관계로 지냅니다. 그는 계약결혼 관계에 묶이지 아니하고 계속 주위의 남자들을 사귑니다. 그의 나이 44세에(1952년) 17세 연하의 유대인 청년 클로드 랑즈만(Claude Lanzmann)과 사랑에 빠지고 그와 7년간(1959년까지) 사실혼(事實婚) 관계를 가집니다. 그의 사후 11년이 지난 1997년에 이제까지 구체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또 다른 남자관계가--퓰리처상 수상작가인 미국의 넬슨 알그렌(Nelson Algren)에게 17년간(1947-1964년) 보낸 304통의 편지가 「A Transatlantic Love Affair」란 제목으로 출간됨으로써--알려지게 되었습니다(한국에서는 1999년에 「연애편지」란 제목으로 출간). 알그렌과의 사랑은 그가 사르트르와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시카고에서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의 편지들을 읽고 있노라면,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를 발견하는 대신에, 사랑하는 남자로부터의 편지를 애타게 기다리며, 그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며, 그를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고, 집안을 정돈하기를 원하는 평범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남자와 여자로서) 하나님의 질서에 합당하고 순응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2
11장 2절로 시작하여 14장까지에서 바울은 공중예배시의 문제들을 다룹니다.
2절에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遺傳)을 너희가 지킴으로 너희를 칭찬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교회에서도 그렇지만 초대교회에서도 중요했던 것이 교회의 권위(權威)와 교회 내의 질서(秩序)입니다. 권위(權威)라고 함은 인간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바른 선포에 따른 것입니다.
질서(秩序)라고 함은 교회 내에서 마땅히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현재 교회에는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과 교단 헌법과 교회법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바울의 고린도 교회를 포함하여--는 아직 신약성경이 형성되기 전이고 구약 성경도 아직 정경화되기(canonize) 전이기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예수님의 말씀(Jesus's sayings)과 기타 사도들이 마련한 교회내의 질서를 위한 전통 혹은 전승 등을 지킴이 필요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권위에 순복하고 질서를 지킴이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무시하고자 하지만 그리할 때 현대 교회내에도 많은 문제와 분란이 생김을 봅니다.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자녀들과 대화로 화목한 가정을 만들려는 아버지·어머니의 권위와 가정의 질서가 무너져내리면 개판의 가정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 질서를 위한 유전(遺傳)을 잘 지키고 있다고 칭찬함으로 시작합니다.

3절에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질서(秩序)를 말씀함입니다.
머리(κεφαλή)는 권세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1절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했는데 각 남자가 굴복해야 할 권세는 그리스도요, 각 여자가 굴복해야 할 권세는 남자요, 지상 삶을 사신 그리스도께서 굴복하신 권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까지 아버지의 권세에 복종하신 것같이 그렇게 각자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씀함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 등에서 표현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구분 없이 하나이라고 한 말을 오해하여 믿는 사람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질서 안에 자주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지킬 바 질서를 무시한 방종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4-5절에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사람의) 권세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권세에 순응하는 질서하에 놓인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하에 놓였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까닭에 불가(不可)하고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는 것은 남자의 권세하에 놓였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일인 까닭에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함은 고린도 지방의 예절과 풍속, 질서와 관계된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공중예배시 남자와 여자 모두 머리에 무엇을 썼습니다.
선교사로서 바울은 한 지방의 풍속과 질서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곧 작은 질서에 따르는 행위에서 커다란 질서를 유도하고자 함입니다.
작은 질서를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커다란 질서도 무시하게 됩니다.
그는 아니라고 하지만, 교회의 지도자의 하는 일이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못마땅하다고 무시하고 비방하는 사람이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에는 온전히 순복하겠습니까?

2,000년전 당시의 한 지방의 작은 교회 주변에 그 지방의 풍속과 예절과 질서가 있었듯이 요즘의 개교회 주변에도 풍속과 예절과 질서가 있습니다.
풍속과 예절과 질서에 대한 순복은 다른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대와 상황과 지역에 따라 마련된 질서와 권위에 순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한 사람을 겸비하게 만들고 이 겸비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비옥한 밭이 형성됩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이고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존심과 교만을 포기하기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쉽습니다. 남자와 여자 중에는 대체로 여성쪽이 자신을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교회에 여성 신자가 많은 것도 그러한 현상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약함은 약점이 아니라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약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자신이 약하다고 여기는만큼 더 가까이 이른 사람입니다.

8-9절에서 바울은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함으로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순서 혹은 질서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10절에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뜻이 쉽지 않습니다.
여자들이 공중예배드릴 때 머리에 무엇을 써서 남자의 권세아래 있음을 표시하라는 말씀은 앞에서 설명하였기에 알겠는데 “천사들을 인하여”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천사들이 어쨋기에 여자가 남자에게 속하였다는 표를 하라는 것인가요?
2세기 말 교부신학자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 난해한 구절을 해석함에 타락한 천사들을 끌어들입니다.
창세기 6장과 구약위경 에녹1서(1-36장)에서 천사의 타락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 여성의 아름다움에 있었던 것에 착안(着眼)한 것입니다.
사람의 딸인 여성이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공중예배에 기도하거나 예언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높은 보좌에 나아갈 때에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에 혹 그 마음이 미혹되거나 선정적이고 음란한 생각이 들어서 타락할 수 있으니까 소속을 분명히 하는 의미에서 머리에 무엇을 쓰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창세기 6장의 천사 타락으로 인한 악 이외에 또다른 악이 세상에 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11-12절에서 바울은 8-9절의 표현으로 혹 여성신자들이 마음 상해할까봐 그리스도 안에서의 남녀 평등의 법칙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주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하나님의 창조에서 남자는 투박하나 강하고, 여자는 연약한 듯하나 아름답습니다. 남녀의 평등은 남자의 하는 일을 여자가 다 할 수 있게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것을 인정함에 있습니다.

남자의 모든 특권을 여자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에게 그러면 군대도 가고 다른 힘든 일도 감당하라고 하면 ‘그런 일을 감히 하라고 그런다’고 화를 냅니다. 남녀평등이라고 해서, 남자가 아기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고,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이 각각 동등한 인격체들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각각 남자와 여자로 존재하며 서로 사랑하고 순복하고 보완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남녀의 구분이 없는 평등은 질서에 순응하되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는 행위입니다.

13-15절에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 말씀합니다.
여자는 공중예배시에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할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순리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남자는 머리에 쓰지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여야 하는데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순리입니다.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름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과 같은데 이것은 순리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반면에 여자가 머리를 길게 기를 때 여자의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긴 머리를 가진 여자는 자연적인 쓸 것을 머리에 갖고 있음으로 머리에 달리 쓸 것을 얹지않아도 좋습니다.

어떤 분은 질문할 것입니다.
영화나 그림에서 보면 예수님은 긴 머리를 갖고 계시는데요. 그러면 이것은 잘못된 것인가요?
맞습니다. 예수님의 초상이 고증을 거친 것이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긴 머리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고린도인들과 다른 풍속, 예절과 질서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당시 공중예배에 유대인들은 남자와 여자 모두 머리에 무엇을 쓰고 참예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이 본문을 말함은 고린도 지방의 풍습과 예절과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고린도인들의 풍속과 예절과 질서는, 남자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여자는 긴 머리를 하며, 가정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유자의 삶과 남녀평등에 관한 바울의 말을 오해한 교회에 출석하는 여자들이 가정에서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분란이 끊이지 않기에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계속 꼬투리를 잡고 시비거리를 찾는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16절에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고 말문을 닫습니다.
곧 여자들은 공중예배시에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인으로서 문화와 질서에 순복하는 삶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3
오늘날 여자들이 교회에 예배드리러 나올 때 머리에 무엇을 쓰고 나오는 예가 거의 드뭅니다.
일부 극보수에 속한 교단이나, 동방정교, 그리고 카톨릭의 미사에 그 잔재가 보이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이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즉,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를 한 시대와 장소의 문화와 풍속과 질서에 따른 명령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와 교회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현재 존재하고 있는 풍습과 예절과 질서에 순응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더 커다란 하나님의 질서와 명령도 무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민교회에는 믿음의 색깔이 한국에 있는 교회에서보다 다양합니다.
주위에 교회가 많지 않기에 한국에서는 감리교회에 다니던 사람, 성결교회에 다니던 사람, 순복음교회에 다니던 사람, 침례교회에 다니던 사람, 성당에 다니던 사람이 장로교회에 다니게 됩니다. 장로교회내에도 다른 교파가 많아서 각각 다른 교회법과 치리제도를 적용합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질서와 제도에 대해서 불만의 소리도 더 많고 소람함도 더 많음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이건 이렇게 처리했는데 이 교회는 왜 이래?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저것을 강조했는데 이 교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같은 교회라도 목회자가 바뀌면 또 다른 불평이 일어납니다. 먼저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하고 이러 이러한 일을 하셨는데, 새 목사님은 왜 저렇게 설교하고 이러 이러한 일을 하시지 않아?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현재 내게 주어진 질서와 규칙에 순응함이, 그것이 여러분을 완전히 망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 말씀에 순복함의 첫걸음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지방에서 태어난 고린도인으로 그곳 문화와 풍속과 질서에 젖어있던 사람이기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것들에 순복하라고 말씀합니까?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가 아닌 소아시아 닷소에서 자란 사람이지만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씀할 때 그곳의 풍속과 질서에 순복하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사람같이 행동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시대에 각자의 교회에 속한 교인으로서 우리 각 사람이 지키고 순복해야 할 교인의 풍속과 예절과 질서가 있습니다. 작은 일에 순복하고 따름으로써 보다 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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