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10, 2014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17-34)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17-34)
           
 
  11: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 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9   너희 중에 편당(偏黨)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晩餐)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歸正)하리라.
 

1
사람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까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식물생리학자에 의하면,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려줄 때 식물의 성장이 촉진되는 ‘모짜르트 효과(效果)’가 있는 반면, 주위 공사장의 작업 등으로 시끄럽거나 진동이 심하면 식물이 스트레스를 받고 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에틸렌(ethylene)’이란 독성물질이 형성되어 성장이 지체되거나 심하면 죽기도 한다고 합니다. 대도시 가로수의 낙엽이 일찍 떨어지는 것도 자동차 소음이나 진동의 영향 때문입니다. 사람의 경우, 극한 고통이나 스트레스가 장기화할 경우 이것이 암(癌)의 원인이 되어 7년이 경과하는 동안에 암(癌)이 발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즐겁고 은혜가 되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할 때 이것은 목회자는 물론 더욱이 우리를 ‘모든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때로는 부담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달란트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각자의 능력에 합당하게 감당하면 됩니다. 바울도 또한,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지적하듯이, ‘각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당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라기는 받은 달란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되,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즐거움이 여러분 삶 가운데 항상 있기를 축원합니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産業)을 크게 일으킨 찰스 키터링은 80세가 넘어서도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등 매사에 적극적이었습니다. 83회 생일 때 아들이 그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이제는 연구를 중단하시고 좀 쉬시지요.” 키터링은 대답합니다: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은 흉하게 늙는다. 나는 항상 미래를 바라본다.”
사람은 나이들면서 노년(老年)을 걱정합니다. 여유있는 노년의 삶은 돈이나 권력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크리스천 신문에 나이듦을 우아하고 여유있게 맞기 위해서 유의(留意)할 사항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영혼(靈魂)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무슨 일에나 함부로 참견하는 습관을 버리는 것이고, 셋째는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남을 헐뜯는 일을 삼가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을 볼품없이 흉하게 늙게 하는 다섯 가지 독약(毒藥)이 있습니다. 곧, ‘불평-의심-절망-(지나친) 경쟁-공포’입니다. 이 다섯 가지 독약의 양이 많을수록 노년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진다고 합니다.
반면에 사람을 우아하게 나이들게 하는 다섯 가지 묘약(妙藥)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여유-용서-아량-부드러움’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교우님마다 이 다섯 가지 묘약을 적절히 잘 복용하셔서 우아한 모습들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어떤 사람의 말입니다.
그 사람과 가족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집 문간방에 월세를 들어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이 중에 지진아가 하나 있었는데, 교회에 다니는 주인집 내외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무슨 징그러운 벌레를 대하듯이 그리 대합니다. 그들이 너무 가난해서 교회에 별로 도움이 될 것같지 않아서인지 교회에 같이 가자는 말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그 집주인이 나가는 교회의 목사님과 교인들이 그 집에서 구역예배인지 속회인지를 보는데 안에서 찬송소리가 들립니다. 얼마간 예배를 드린 다음에 다과를 나누는 것같은데 먹어보란 말 한마디가 없습니다. 하긴, 그 집에 세들어 산지 일년 가까이 되도록 콩 한쪼각 먹어보라고 권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마당 앞에 섰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안주인이 목사님과 교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집에 세들어 사는 집 아이들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말도 못해요. 월세도 꼬박꼬박 제때에 맞추어서 내는 적이 드물어요. 저들을 나가라고 할까봐요.” 교인들이 한 마디씩 거듭니다. “그래, 다른 사람을 알아봐요.” “깔끔한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 저런 사람들을 두었어.” 이 대목에서 목사님이란 사람이 한 마디쯤 할 법도 한데 묵묵히 듣고만 있습니다. 맞장구를 치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요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
교회는 여러 가지 다른 계층과 환경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모이되,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이야기하고, 세상사람의 생각으로 교회의 일들을 의논하고 계획하기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부자가 부를 자랑하며, 권세자가 권력을 과시하며, 많이 배운 자가 학문을 내보이기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주위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무관심하되 자기를 위해서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저마다 복받기를 원하여서 모이는 장소는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역에 대해서 듣고 (현재는 그렇지 못하지만) 그렇게 살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며, 주님의 고난받으심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재림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전파하고자 결단하는 사람들이 기도와 찬송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장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의 잘못된 모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바울 당시의 교회에서는 일정한 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수시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저녁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함께 저녁식사로 주의 만찬을 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남에게 매인 몸이 아닌 사람들--부자 혹은 상전들은 시간의 여유가 있어 일찍 모임의 장소에 올 수 있었지만, 남에게 매인 사람들--가난한 자나 종의 신분인 사람들은 자기들이 해야할 일을 다하고 주인의 눈치를 살펴가며 허락을 받아내야 간신히 모임의 장소에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찍 온 사람들은 이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여 먼저 식사를 하거나, 주으 만찬 때 쓰기 위하여 마련해둔 포도주를 홀짝거리다 나중에는 아예 병째 마셔버려 취하기가 일쑤였습니다.

17절에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 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고 그에게 감사와 기쁨을 돌려드리기 위한 것인데, 모일 때마다 교인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 대신에 마음 상하게 된다면 그 모임은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됩니다.

18-19절에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偏黨)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모일 때마다 분쟁(分爭)이 있고 편당이 있다면 이는 물론 덕이 되고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갈려서 끝까지 하나님 안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기 위한 편당이라면 최소한의 긍정적 측면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분쟁이나 편당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분쟁과 편당의 와중(渦中)에서도 하나님 앞에 옳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20-21절에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교회의 몸은 성도들의 연합이요, 몸의 각 지체는 각 성도입니다.
주의 만찬의 의미는 그리스도와 성도들과의 연합입니다.
몸이 지체(肢體)들로 나뉘어서 분쟁을 함은 연합의 의미와는 전혀 동떨어진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주의 만찬을 나누기 위하여 먼저 모인 사람들이 주인에게 매인 몸이라 늦어지는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먼저 떡을 갖다가 배불리 먹고 어떤 사람들은 포도주를 아예 병째 들고 마셔서 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먹을 떡이 없어 시장하고 포도주도 다 마셔 버려서 정작 주의 만찬에 같이 참예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하다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예배요 성찬입니다.

22절에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너희’는 상전--부자들로 집도 있고 일찍 나올 여건에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예배의 모임이 한 두 번 행해짐에 따라 첫 번째 모임에 저녁을 먹고 가지 않았더니 배고픔을 경험한 사람은 그 다음 모임부터는 약간의 식사를 하고 가서 허기짐이 없이 나중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 하지 않고 굳이 모임에 먼저 도착하고, 여유있어 먼저 온 사람들끼리 먹고 마실 것을 갖다가 먹고 마심은 그리스도께서 피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며 교회의 또다른 지체들인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 가난한 사람들은 ‘내가 못살아서, 주인에게 매인 몸이라 교회에서조차 사람 대접을 못받는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이리할 때, 바울은 부자이고 상전이라 먼저왔지만 사랑의 나눔과 연합을 기다리지 않는 그들의 ‘먼저온 행위’를 칭찬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23-26절은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로마병정에 붙잡하시기 전날인 목요일 밤 제자들과 같이 하신 마지막 만찬예식의 예입니다.
먼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24절) 했습니다.
떡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의 몸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 몸은 그가 말씀하신 대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먹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 만나의 상징입니다.
요한복음 6장 32-3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2-33절).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25절)고 말씀합니다.
잔(포도주 혹은 포도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피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관계(New Covenantal Relationship)에 들어가는데, “새 언약”은 그리스도 피의 효력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추모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고인(故人)에 대한 생각--그가 생전에 베픈 사랑과 덕담을 나누는 정도의 일을 말씀함입니까? ‘그래,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여러 가지 선한 일들을 하셨지.’ ‘3년여 짧은 공생애기간동안 그가 이룬 일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어.’ ‘하기에, 그는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와 함께 세계의 4대 성현(聖賢) 중에 한 분이 되셨지.’ 이렇게 ‘예수님의 지상 행적을 단편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예수님을 기념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심은 26절에 말씀하는 대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기억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나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자의 삶입니다.

27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분쟁의 마음과 나눔의 생각으로 주의 떡이나 잔을 먹고 마심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을 가볍게 생각하고 교회에 속한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은 성찬 참예에 합당치 않습니다. 주의 만찬에 참예함은 연합과 아울러 주님께서 당부하신 이웃사랑의 실천을 다짐함인데,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성찬에 참예함도 합당치 않습니다. 세례를 아직 받지 않은 분도 성찬에 참예하지 않을 것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기에(롬 6장 참조) 세례 받기 전은 아직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가 아니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효력성’이 없습니다.

28-29절에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分辨)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찬에 참예할 때 죄와 허물에 대한 고백 기도를 먼저 합니다.
이는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참예하고자 함입니다.

30-32절에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罪)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와 허물의 마음으로, 교회의 성도 연합에 대한 오해와 업신여김으로 성찬에 참예함으로써 그 심령과 육신이 실제로 약해지고, 병들고, 죽기까지 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뭐 저래. 맨날 교회 안에서 싸우기나 하고, 교회 밖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을 무시하기나 하구’라고 비난 당함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징계하심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대로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고치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정죄(定罪)를 당할 것이요, 고치는 사람은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33-34절에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歸正)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가정교회를 비롯하여 초대교회는 모일 때에 충분한 떡을 떼는 일로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됨을 확인하려는 것인데 신분의 귀천(貴賤)에 따라 먹는 일에서부터 갈림이 있으면 온전한 그리스도의 연합이 될 수 없으며, 마음이 갈리어져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상전(上典)들과 부자(富者)들에게 최소한의 예를 지켜서 주의 만찬에서 ‘성도들의 연합’을 이루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임과 성도들의 하는 일이 아름답고 본이 되어서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판단거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우리를 위하여 찢기시고 흘리신 몸과 피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신 성도들의 연합이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한 지체가 그리스도의 몸에서 분리되어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할 때 그 지체는 더 이상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하고 교제(交際)할 수 없습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 의회에 의해서 종교는 폐기되었고, 주일은 사라져 버렸으며, 성직자들은 숲속으로 내쫓김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원하며, 그리스도 몸의 지체임을 확인하기를 원하는 믿는 사람들은 모이기를 사모하고 주의 만찬에 참예함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로운 힘을 얻기를 원하였습니다. 비밀 모임의 장소를 알리는 전달자가 암호를 갖고 당국의 눈을 피해 믿는 사람들의 집들을 돌아다닙니다.  그는 “검은 숲지요” 말하고는 작별인사도 고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자정이 넘는 시간에 남자들과 여자들은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고 동네 아래에 있는 검은 숲지로 모여듭니다. 숲 속에 피하여 지내던 성직자들 중에 한 분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예배를 인도하고 성찬의 떡과 잔을 돌립니다. 그러다가, 군인들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사격을 당하고 모인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장소를 바꾸어 또 다시 모여 성찬에 참예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몸의 각 지체인 것을 확인합니다. 그들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일으키실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아주 조용히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갔다고 합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과 재림하심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실 때까지 증거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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