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후 1:1-11)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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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는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요 성경 주석자입니다. 그가 어느 날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습니다. 그는 그날 ‘참으로 감사해서’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소매치기 당한 것이 감사하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다. 소매치기는 지갑을 훔쳐갔지만 내 생명은 훔쳐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앙과 영생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았다. 설령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털렸다고 하더라도 아깝지 않은 것들이다. 또한 내가 범죄자가 아닌 피해자가 되었기에 감사하다.”
바울에게 임한 환난이 매우 컸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8절에서 바울은 이를 기술하는데, “23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외적 환난이 참으로 크고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나, 그를 더욱 못 견디게 했던 것은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해서 그의 복음이 왜곡(歪曲)되어 받아들여지고 그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挑戰)과 무시(無視)가 끊임없이 계속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외적 환난이 그에게 기쁨이 되고 또한 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려 내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곧 교회 내의 바울의 반대세력들이 그의 사도권을 부인하고 따라서 그가 전파하는 복음을 무효화하는(nullify)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히 여기는 일이 부인(否認)당할 때 그 마음에 겪는 고통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후서 전체를 통하여 그의 사도권에 대한 변론(apology)을 전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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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1-2절에 문안인사로서 고린도후서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ἀπόστολος)란 ‘(주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인데, 바울의 사도권이 일생을 통하여 두고두고 문제가 된 것은, 반대파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사도로서의 ‘자격요건(qualifications)'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자격요건이란 가룟 유다를 대신할 열두 번째 사도를 선택할 때 베드로가 언급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22절에 보면,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한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동안 그와 함께 한 사람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눈으로 목격한 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두 가지 조건에서 모두 결격(缺格)인 사람입니다. 하기에, 그를 싫어하는 유대주의 반대파들은 늘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아왔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하면서 8절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말씀한 것도 그가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증인으로 자격요건이 있음을 보이고자 함입니다.
그 외에도, 사도행전 9장 15절에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가라 이 사람(=바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시고, 22장 21절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시고, 또 26장 16-18절에서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것도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에 대한 증거로서 기록한 것입니다.
3-4절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εὐλογητὸς)” 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할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십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반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찬미)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했고, 6절에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고, 12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고, 14절에서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은 평안할 때만 하는 일이 아니라, 고통 중에도 슬픔 중에도 할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위로의 하나님이시요, 또한 구원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θεὸς πάσης παρακλήσεως)”이라고 했습니다.
“위로(慰勞)”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시스”(παράκλησις)는 ‘용기를 돋우어주다’, ‘도와주다’, ‘위로하다’, ‘(대신) 요청하다’,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4-7절에 위로(παράκλησις)란 단어가 10회나 걸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26절에서 “보혜사(保惠師)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 보혜사(Helper) 성령께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위로하는 자, 도와주는 자--입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는데,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아뢰어 주실 대언자(代言者), 중보자(仲保者)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이십니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위로자(Comforter)--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되어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거기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여호와 삼마”(Jehovah is there, 에스겔 48:35)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심은 우리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의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환난 중에 빠져서 고통하며 근심하며 헤어나지 못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운데서도 찬송하며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성도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 때에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당한 고난(τὰ παθήματ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매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고난이 넘친 것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위로도 바울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코자 하는 사람에게 넘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믿는 사람들과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여 주십니다.
또한 로마서 8장 17절에서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현재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가운데 장차 우리에게 임할 영광을 소망 중에 바라봄이 커다란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6절에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고통을 맛본 사람만이 고통받는 자를 위로할 수 있고, 눈물의 떡을 먹어본 사람만이 배고픔을 당한 자를 위로할 수 있고, 실패를 경험한 사람만이 실패자의 아픔 가운데 참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고난을 당하신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2장 18절에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에게 때로 애매(曖昧)한 고난이 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또한 애매히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도간에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는 이렇게 함으로써 위로받는 자로 고난을 견디게 하며, 더 나아가서는 위로하는 자도 그가 하는 위로로써 자신도 위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7절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방탕한 자식이요 사회에서 불필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모는 그 자식을 사랑함과 그를 위한 기도를 중단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를 포기하였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거는 기대를 포기하지 못함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문제가 많은 교회였지만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이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소망을 견고히 붙잡기를 원하였습니다. 현재는 문제가 많고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러나 고난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들이 후에 하나님의 위로에도 참예할 수 있기를 바람입니다.
8-9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依賴)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말은 “알기를 원한다”는 것에 대한 강조적인 표현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바울의 서신들에 종종 등장하는데(롬 1:13, 살전 4:13), 바울은 그의 기쁨뿐 아니라 괴로움과 환난도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로써 고난당하는 그들을 위로하고 또한 서로를 위해서 서로 기도해주기 위함입니다. 그가 전도여행 중에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참으로 컸다고 했습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으로 여길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환난이 임한 때도 있었습니다.
고난이 성도들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난을 통하여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가 함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에게 고난이 임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로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따라서 의뢰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의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나의 판단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나의 주장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발견할 수 없고, 믿을 수 없고, 의뢰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 간구하되, “주여 저는 부족합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사 저를 만나 주시며 저의 의지가 되어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임하십니다.
10절에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전에 아시아에서 또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서 사망이라고 부를 정도로 커다란 환난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도우사 건짐을 받았습니다. 하기에, 현재 그가 겪는 고난 중에도 구원의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닥칠 어떤 환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구원하실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두렵지 않습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86편 7절에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고 확신했습니다.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녀를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같이 내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11절에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인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의 고난 가운데 그 고난의 원인을 제공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이는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을 용납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반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어. 너희가 망하나 망하지 않나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원망의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2장 21절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신 권고대로 사랑과 용서로 반대자를 제어하는 지혜입니다. 그들의 기도로 바울이 고난에서 벗어나게 될 때 이것으로 인하여 바울을 염려하고 위하는 사람뿐 아니라 이제까지 해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도 감사가 넘치게 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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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잃어본 사람은 자유의 고마움이 얼마나 큰지 압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할 기회를 박탈당했던 사람은 그 생명의 복음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줄 압니다.
그러나,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가 얼마나 감사하고, 복음을 박탈당하지 않고 그 복음이 얼마나 귀한 줄을 깨닫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평안 가운데 있습니까?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위로를 나누어주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하여지고 감사가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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