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17, 2014

“사랑은 오래 참고” (고전 13:1-8)

                           “사랑은 오래 참고” (고전 13:1-8)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1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남조(南朝)인 양(梁) 나라에 장승요(張僧繇)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관료로서도 상당한 지위에 올랐지만,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신의 경지에 이른 그의 그림솜씨였다고 합니다. 장승요(張僧繇)는 온갖 것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렸다는 중국의 전설적인 화가입니다.
어느 날 그는 금릉(金陵: 남경) 안락사(安樂寺)의 주지로부터 용(龍)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는 사방의 벽면에 용 한 쌍을 그렸습니다. 뭉개 치는 먹구름을 박차고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두 마리의 용은 그 비늘 하나에도, 날카롭게 펼친 발톱에도 강한 생명력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용의 벽화를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상한 것은 용에 눈동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눈동자를 그려 넣는 날이면 용이 벽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기 때문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고 용의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고 졸라댑니다. 장승요(張僧繇)는 마침내 눈동자를 그리려고 먹물이 흥건한 붓을 한 마리의 용의 눈에 내려놓았습니다. 순간 벽 속에서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이면서 용이 벽을 박차고 튀어나와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벽을 보았습니다. 아직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용만이 그냥 벽에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수형기(水衡記)에서》
여기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생겨났습니다. 화룡점정이란 “용 그림에 눈동자를 찍는다”란 뜻으로서 ‘사물의 가장 핵심적인 곳’을 나타낼 때 또는 어떤 일의 가장 중요한 끝마무리를 할 때 쓰는 말입니다.
“화룡점정을 결했다”라고 하는 말은 전체적인 꼴은 갖추었지만 가장 요긴한 것을 빠뜨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새 사람이 된 사람의 옷을 이 안락사(安樂寺)의 용 그림에 비유한다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는 장승요가 눈동자를 제외하고 그린 용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용은 외견상으로는 용에 틀림없지만 꿈틀거리거나 비상하지 않는 그림 속의 용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화룡점정(畵龍點睛)은 무엇입니까?
크리스천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모든 성품들은 있는데 사랑이 그 가운데 없다면, 이는 “화룡점정이 결하여 있는 상태”입니다.
사랑이 결핍되어 있는 성령의 은사나 열매들, 구제, 자비와 긍휼은 자칫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용의 눈동자와도 같은 사랑을 가미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서 활동하는 온전한 새 사람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무엇인지 바로 아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첫째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형제와 자매, 성도들과 이웃에 대한 사랑인데,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기를 원하는 어떤 청년이 목사님께 상담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삶을 살아가기로 작정하였으나 그의 친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성격이 다르고 대화를 하면 계속 꼬이고 얽히고 설켜서 짜증만 늘어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이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훼방하는 사단의 간계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미움과 다툼이 사람들 마음 속에 없었는데, 타락한 이후에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서로 미워하게 하며, 이간질하며, 다투며, 때로는 죽이게까지 하였습니다.
가장 서로를 위해야 할 형제들끼리, 형제와 자매가 싸우며, 때로는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원수 맺는 일까지 자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가인으로 아벨을 죽이게 하고, 라멕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하고, 사람들의 총체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사건을 초래합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과 에서가 장자권을 다투고,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하고, 압살롬이 아비 다윗과 다투는 인간비극을 만들어냈습니다.
무엇입니까?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그런데, 종종 말하는 ‘인간성’의 상실은 사실은 신의 성품--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상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오심은 우리가 상실했던 (본래의) 인간성--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화룡점정인 “사랑”의 마음의 회복입니다. 이 사랑의 숨결, 기운을 우리 안에 불어넣어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 되게 하십니다.
미운 형제, 짜증나는 교우,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이웃을 사랑함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우실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형제, 교우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인기를 끌었던「만행(萬行)·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1999년)란 책을 쓴 폴 뮌젠 곧 현각은 그의 책에서 말합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언제나 넓은 길, 위대한 길, 그리고 열린 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다. 노래하는 새소리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로 표현되는 것이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 밖에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말씀이며 부처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왜 부처님의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과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여러분이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넓은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얻겠다는 마음가짐이라면 여러분은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사랑(love)과 자비(mercy)로 이끄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과 자비가 결국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하권 176-177페이지).
현각이나 불교의 스님들은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慈悲)는 무념(無念), 무상(無想), 무정(無情)의 부처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비참함에 동요됨이 없이 그 마음과 정이 격리되어 있는 가운데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그 대상과 함께 하는 일체감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6절에 표현된 대로, 함께 고통을 느끼고 함께 즐거워하는 마음이요 삶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씀한 대로 함께 하는 마음과 삶이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감정 개입을 통제한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그가 분명히 잠시 후면 그를 죽은 자 가운데 일으키실 것이지만, 잠간의 육체적 분리를 슬퍼하시고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과 고통을 아시기에 같이 슬퍼하고 같이 고통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위적이거나 통제되어진 것이나 격리되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적이요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진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인간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많은 것들로 요구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며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 십자가상에서 죽음의 고통이 없으셨습니까?
너무나 그 고통이 심하시기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하늘 아버지께 처절하게 부르짖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느끼지 않으시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성부 하나님도 독생자의 고통 가운데, 인간의 고통 가운데 같이 고통을 당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떻게 주위의 사람들--때로는 나를 비방하고 나를 저주하며 나를 해하려드는--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직 연약할 때에,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아직 원수에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모른다 부인할 때에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합니다.
말 잘 듣는 자식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반항하며 대들고 집을 뛰쳐나가는 자식도 사랑합니다.
아니, 말 안 듣는 자식에게 더욱 마음이 쏠립니다.
그 자식을 야단치고 그 자식으로 인하여 한탄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인간의 자연스럽고 가식이 없는 사랑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러한 미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의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될 수만 있다면, 굳이 크리스천이 가져야할 사랑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사랑 장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세상에 많은 은사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사랑과 무관하게 행해지면 그것들은 무익할 따름입니다.

1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했습니다.
세상나라의 말들과 또 세상나라 말에는 없는 천상의 말들의 각종 방언을 하는 은사를 선물로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에게 사랑의 은사가 없으면 그 사람은 방언의 은사를 자기 자랑거리로 삼을 것이기에 교회에서 시끄러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2절에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합니다.
예언하는 은사가 있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드러나는 신령한 비밀의 진리와 지식을 알고, 또 성령의 은사로서의 믿음을 받아 산을 옮기는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예언의 은사도 믿음의 은사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2장 8절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구제하는 일도 희생하는 일도 성령의 은사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주고, 위기에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던지는 희생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러한 선행이 아무 유익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문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베푸는 것--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름에까지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까?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대답은 ‘No!'라고 하십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거지에게 동전 몇 푼을 던져주고, 차에 칠 위험에 처한 어린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을 던지는 것도 엄격한 의미에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안되었다고 느껴지는 동정의 마음은 사랑의 시작이지만 사랑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4-7절에서 바울은 사랑의 속성을 열다섯 가지로 나열합니다: “사랑은 1오래 참고, 사랑은 2온유하며, 3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4자랑하지 아니하며, 5교만하지 아니하며, 6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7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8성내지 아니하며, 9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10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11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12모든 것을 참으며, 13모든 것을 믿으며, 14모든 것을 바라며, 15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속성이 잘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속성이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온전히’ 회복한 믿는 사람의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love is patient)고 했습니다.
둘째, 사랑은 ‘온유합니다’(친절합니다: love is kind)고 했습니다.
셋째,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합니다’(시기 또는 질투하지 않습니다: love does not envy)고 했습니다.
넷째,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love does not boast)고 했습니다.
다섯째,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잘난 체 하지 않습니다: love is not proud)고 했습니다.
여섯째,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버릇없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love is not rude)고 했습니다.
일곱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또는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love is not self-seeking)고 했습니다.
여덟째,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love is not easily angered)고 했습니다.
홉째,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love keeps no record of wrongs)고 했습니다.
열 번째,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습니다’(love does not delight in evil)고 했습니다.
열한 번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love rejoices with the truth)고 했습니다.
열두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love always protects)고 했습니다.
열세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love always trusts)고 했습니다.
열네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love always hopes)고 했습니다.
열다섯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love always perseveres)고 했습니다.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love never fails),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은사로서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견고케 하며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그 소용가치가 없어지지만, 사랑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여전히 소용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어울려 생활할 때에도 그들을 사랑으로 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처음 믿을 때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께 달라고 요구만 하는 사람이었지만,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자라서 장성한 후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매 우리의 사랑의 방식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전에는 사랑 받기만을 원하던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이제는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사랑을 나누어주되 무심하고 무정한 마음으로 동정을 베풀 듯이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통과 슬픔과 즐거움과 기쁨 가운데 같이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성령의 은사들 중에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이 우리 가운데 값없는 선물로 주어지매 이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인 사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고통 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는 삶입니다(고전 12:26; 롬 12:15 참고).
사랑의 은사는 인간의 노력이나 구도자의 극기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런 후, 마음을 비우고 사모함으로 하나님께 사랑의 은사를 구할 때 우리에게 값없는 선물로서 주어집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랑의 은사를 갖게 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온 교회와 가정 위에 나타나고, 더욱 더 아름다운 모양으로 하나님께 사용되어지는 교회와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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