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4, 2014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 (고전 16:1-4)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 (고전 16:1-4)

           
  16:1    성도를 위하는 연보(捐補)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가지고 갖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1
바람이 심하게 부는 어느 지역의 나무들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쳐서 꼿꼿이 서있다가는 당장 부러질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강한 바람을 묵묵히 잘 견디어 온 “무릎을 꿇고 있는 나무들”로 나중에 악기를 만드는데 그것이 바이올린입니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견디어온 나무로 만들어진 바이올린은 맑은 음을 내는데, 그 나무가 얼마나 강한 바람을 견디어온 것이냐에 따라서 얼마나 더 맑고 아름다운 음을 내느냐도 결정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도 세찬 바람이 불어치는 세상이라는 지역에 서있는 나무들과 같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바람의 강도가 더욱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강한 바람 가운데 어떻게 견디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사용되어지느냐도 결정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때로는 더욱 심한 고난과 시련을 주시기도 하는데, 이는 그 자녀를 정금(正金)으로 빚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욥기 23장 10절에서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련하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정금 같이 귀하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서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어떤 강한 시련과 고통의 바람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무릎을 꿇고 있는 낮은 자세로서 묵묵히 환난을 인내하면서 견디고 연단되어질 때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바라는 바 소망--곧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바 은혜는 큰 것이라도  돌아서는 순간 잊어버리고 남이 섭섭하게 대한 것, 나에 대해 해를 가한 것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다 기억하여 두고두고 잊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원수는 물에 새겨서 쉽게 잊어버리고 은혜는 돌에 새겨서 두고두고 기억하라.”고 권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free gift)이기에 우리는 하찮게 여기거나 쉽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값이 없다”는 것은 하찮은(valueless)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값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priceless) 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귀한 은혜이기에 우리는 이를 마음 판에 새기고 오래오래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갈라진 요단 강을 건널 때에 열두 지파가 각 지파 별로 요단 가운데에서 돌을 취하여 강 건너 가나안 땅 입구 길갈에 세우게 합니다.
여호수아 4장 6-7절에서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바닥이 드러난 요단 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같이, 신약백성인 우리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 요단 강을 건너 영적 가나안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돌비에 세기어 기념하고 마음판에 새기어 잊지 아니한 것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판에 새기어 잊지 말고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실 때, “너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올바로 기억하는 것은 온전한 지킴을 동반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이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기억하라(Remember)"에 합당한 삶이 아닙니다.

머리로만 알고 입술로 고백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심령에 새기고 행함으로 나타난 믿음이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같이 하시는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 은혜를 지켜 행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지켜 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자녀들 간에 은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형제에게 자매에게 이웃에게 베푼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지켜 행하는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 25:35-36).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눠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오천명의 무리(남자 장정만)와 빈들에 계실 때 저녁이 되어 시장기가 동하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어찌할 것을 여쭈올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을 사는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어라.”
믿음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오늘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나누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나타나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실 때 성경은 또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마태 14:19-20). 제자들을 사용하시는 주님의 놀라우신 뜻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시기 위해서 그 자녀들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 현재 이 세상을 사는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제일 큰 계명은 ‘사랑’이라는 것을 압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 사랑’인데, 성경은 둘째 계명을 지키는 자만이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요한일서 4:20) 이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이 이웃 사랑이 믿는 사람에게는 “은혜의 나눔”을 통하여,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음증거(전도)를 통하여 실천되어집니다. “은혜의 나눔”은 영적인 것 뿐아니라 물질적인 것도 포함합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1차, 2차 전도여행 중에 그가 개척하고 목회하던 교회들이 있는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을 다니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 캠페인을 벌였던 여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목회자나 선교사 중에 돈에 대해서 설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자칫하다가는 ‘복음(福音)에 장애거리’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3차 전도여행 기간 몇 년 동안(52-56 혹은 57년)을 열심히 모금운동을 바울의 심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가난한 형제를 돌봄이 크리스천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합니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해서는 바울의 4대 주요서신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진행순서대로 살펴보면, 첫 번째는, 3차 전도여행 전에 기록한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 “다만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노라.”고 했고, 두 번째는, 고린도전서 16장 1-4절, 즉 오늘 본문말씀이고, 세 번째는, 고린도후서 8-9장 두 장에 걸친 장장의 역설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감당함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본을 받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같은 고린도후서 8장 13-14절에서는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平均)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裕餘)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9장 13-14절에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모금이 완료되어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전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쓴 로마서 15장 25-27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와 아가야(고린도, 아덴)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방 크리스천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진 빚이란 신령한 빚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이방에 전파되어졌기에 그렇습니다. 신령한 것으로 진 빚을 물질적인 것--육신의 것으로 갚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이 사도행전 18장 23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데, 18장 23절에 “(바울이)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이때에 어떻게 모금할 것인가 갈라디아 교회들(the churches of Galatia)에게 당부한 것 같습니다.

연보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게이아(λογεία)는 모금(collection) 혹은 기부금(contribution)의 의미로서 “자발적인 사랑의 헌금으로서의 선물”(a gift comparable to the voluntary love offerings,「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입니다.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언급함에 돈에 해당하는 아르구리온(ἀργύριον) 혹은 아르구로스(ἄργυρος)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서 헌금되어진 돈은 더 이상 세속의 의미로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일에 성도들이 헌금한 물질을 우리는 ‘돈’이란 명칭으로 부르지 않고 ‘예물(禮物)’ 혹은 ‘헌물(獻物)’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돈은 세상에 속한 사람(크리스천이든 아니든)이 세상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면, 예물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이라고 한 것은 갈라디아 지방에 교회가 하나가 아닌 까닭입니다.
갈라디아는 한 작은 도시가 아니라 미국의 주(state)와 같이 넓은 지역입니다.
거기에 있던 교회들은 건물로 존재하던 교회가 아니라, 성도들 중 어떤 집을 사용하는 가정교회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십여명 혹은 몇십명의 무리가 모일 때마다 조금씩 헌금을 하도록 권하였습니다.

2절에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매주일 첫날”에 했는데, 매주일 첫날은 “주일(Sunday)"입니다.
나타난 기록을 보면, 처음 교회가 형성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할 때에는 어떤 곳에서는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고 또 어떤 곳에서는 안식후 첫날 곧 주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바울이 전도를 했던 이방의 교회들에서는 주일에 예배를 드렸는데, 기존의 안식일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에 예배드림이 더 설득력이 있기에 후에는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으로 통일되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제칠 안식교회같은 교회도 있습니다.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하는데 매주일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 번에 연보를 거두어들이는 어려운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슨 뜻이 들어 있습니까? 가난한 성도를 기억하고 구제함은 연례행사처럼 한 번 작정하고 끝낼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크리스천의 삶 중에 기억하고 실천할 일입니다. 그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3절에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아직 에베소에 머물면서 소아시아 지방에서의 모금운동을 하고 있으면서 보낸 편지인데, 이제 바울이 소아시아 지방의 모금운동을 마치면 그리-스 반도로 갈 것인데, 먼저 마게도냐를 들른 다음 고린도 교회가 있는 아가야로 갈 것을 말씀함입니다.

예루살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 전도여행을 하고 있던 바울이 사도행전 19장에서 보는 바대로(또한 20:34 참조) 3년이나 에베소 교회에 머물었던 까닭은 모금이 지지부진했던 것도 한 이유일 것입니다.
물론 형편이 좋지 않아서 가난한 성도를 위한 모금운동에 적극 참여치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인색(吝嗇)함으로 인하여서 이리 빼고 저리 뺐습니다. 하기에, 이 편지를 보낸지 일년이 지나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보내면서 장장 두장에 거쳐서 크리스천의 봉사의 직무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너희의 인정한 사람”이란 고린도 교회를 대표하여서 모금한 것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갈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에게 바울이 편지를 아울러 예루살렘에 보내겠다는 뜻입니다.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했는데, 여기서 “너희의 은혜”라고 표현한 것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한 모금을 “은혜(χάρις)”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너희의 은혜”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성도를 통한 실천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반향(reflection)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빛을 비추어주신 것같이 우리 크리스천들도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써 은혜를 끼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4절에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고 말씀합니다.
각 교회가 모금(collection)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대표들을 뽑아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러나 바울이 가는 것이 더 합당하다면 바울이 그들과 함께 갈 것입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이 예루살렘에 많았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그의 앞에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있을 것입니다.
후에 모금한 연보를 갖고 각 교회의 대표들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결의에 찬 말씀이 사도행전 20장 22-24절에 나오는데,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삶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희생이 따르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여야 합니다. 입으로는 이것저것 할 것처럼 말하고 의논하면서 이를 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아닙니다.

3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물이 아니라 돌에 새김이 있습니까?
마음의 비석에 깊이 새기고 기억함이 있습니까?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어떻게 나타나집니까? 헐벗고 갇히고 병들고 굶주린 이웃을 돌아봄이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삶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하며 마음으로 믿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앞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무엇인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가난하고 병들고 갇힌 자 가운데 함께 계시면서 우리가 이들을 돌봄을 통하여서 주님 사랑함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삶 가운데 실천하며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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