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교회 방문계획” (고전 16:5-12)
16: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過冬)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공효(功效)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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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타운에 (평생을) 살기 위해서 이사온 사람은 자기가 정하는 교회를 (평생의) ‘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곳에 장기간 머문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곳을 떠날 기약이 있는 사람은 ‘내 교회’라는 생각을 잘 갖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유학생으로 박사학위 과정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은 적어도 4년 이상 길어지면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한 곳에 머물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다니는 교회는 ‘내 교회’가 아니라 언젠가는 떠날 교회라고 생각하여서 교회봉사의 의사와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어떤 교회를 평생토록 다닐 것이기에 ‘내 교회’이고 나는 언젠가 떠날 것이기에 현재 다니고 있는 교회는 ‘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교회생활을 충성스럽게 하지 못하게 하며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잘 경영하지 못하게 합니다. 잘 경영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땅속에 묻어두게 합니다. 우리의 일생은 여행을 계획하며 여행을 하고 있는 과정(itinerary) 중의 삶입니다. 어떤 곳에 6개월을 머물든지, 일년을 머물든지, 아니면 십년을 머물든지 있는 곳에서 우리의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맡기신 달란트를 잘 경영해야 할 것입니다.
다메색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바울의 일생은 항상 여행하고 있는 과정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이 에베소 교회로서 삼년동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삼년의 기간도 떠날 것이 예정되어 있던 삼년이었습니다. 각 교회가 모금한 은혜를 예루살렘에 전하여주기 위하여 속히 떠나기를 바라던 기간이었습니다. 떠날 것이 예정되어 있고 그의 마음이 이미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있다고 바울이 하나님 일 감당함을 등한시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가 어떤 지방에 한달을 머물든지 하루를 머물든지 주님의 일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이 십년 이상을 애착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라고 할지라도 어떤 유감스런 일로 인하여 혹은 교회가 어려워서 그 교회를 떠나게 되면 그 교회를 향하여서는 눈길을 돌리고 싶지 않고 그 교회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개척하고 단지 일년 육개월 동안 목회한 고린도 교회의 시끄러운 문제들을 위해 평생을 기도하고, 마음을 쓰며,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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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절에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곳은 소아시아의 에베소 지방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20:31)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한 기간이 3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의 일을 하고 있던 바울이 한 곳에 3년씩이나 머문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터인데 그 이유인즉 각지방의 교회들마다 모금의 일정한 금액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다보니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갔던 것입니다. 모금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되, 바울은 넉놓고 할 일없이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기간동안에도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면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항구 밀레도로 내려와서 배를 타면 바로 고린도에 도착할 것인데 그리하지 않고 마게도냐를 지나서 고린도로 가고자 함은 빌립보 교회를 위시한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의 헌금을 거둔 후 고린도 교회가 위치한 아가야 지방으로 가고자 함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겨울을 보내고자 함은 그 기간동안에 고린도 교회에 당부한 모금이 완성되어 그로 예루살렘에 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모금이 완성됨으로써 바울은 기쁜 마음으로 “나의 갈곳”인 예루살렘으로 향하고자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보면,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히 퍽 많은 사람을 격동시켰느니라. 그런데 이 형제들(디도 일행, 고후 8:16-24)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위시한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보다 일년 늦게 모금을 시작한 마게도냐 교회들은 고린도후서를 쓸 당시 이미 모금을 완성하였는데 아가야 교회들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아가야 지방에 대한 방문계획이 상당히 지연되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 20장 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이 아가야 지방에 석달을 머물지만 이 석달은 그 해 겨울을 그곳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일년을 더 기다린 다음의 일입니다. 이 고린도에 석달을 머물면서 바울은 로마서를 썼습니다. 그 편지 안에서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가난한 성도들에게 연보를 전해 준 다음에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로마의 성도들을 보기 위하여 로마로 갈 계획이 있음을 언급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서반아까지 갈 뜻을 비춥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5장 25-28절에 “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 28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기도하고 소망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 다음에는 로마로 갔지만, 로마로 감에는 자유인의 몸이 아니라 사슬에 메인 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셨지만 바울의 시간과 원함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과 뜻 가운데 응답하여 주심을 봅니다.
7절에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보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지나는 길에 마주치는 정도의 잠간만의 상면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그들과 얼마간의 기간을 함께 보내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인들은 마치 (속썩이는) 자식과도 같습니다. 그들이 비록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바울의 마음은 늘 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그곳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에게 크리스천의 마땅히 지켜 행할 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행전 18:11).
8-9절에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오순절(Pentecost)은 유월절(Passover)이후 오십일째 되는 날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기록에 보면 오순절에는 각 지역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이 절기를 기념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에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으며, 유월절을 기산점으로 오십일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바울이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기를 원함은 소아시아 지방에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칠 효과적인 기회가 넓게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하고 말씀을 가르칠 기회가 많은 것과 함께 대적하는 자도 많았으며 위험도 많았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이하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바울의 복음 증거가 큰 실효를 거두자, 데메드리오를 비롯한 은장색들이 들고 일어나서 바울과 그의 일행을 해하고자 소동하였습니다.
10-11절에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9장 21-22절에 “이 일(에베소에서의 교회 개척)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자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5장 25-28절에 나오는 바울의 로마 여행계획이 언급되어 있고, 디모데와 에라스도의 마게도냐 파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그에 앞서서 마게도냐에 파견한 것은, 그 자신에게는 아직도 아시아에서 복음증거할 광대한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며(8-9절)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들에서의 모금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10절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디모데를 위해서 특별한 당부를 한 까닭은 아마도 디모데가 소심하고 연소(年少)하여서 그를 무시하는 일이 일어날까봐 염려하는 바울의 자상한 배려입니다. 디모데의 나이가 20대 초반쯤이었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십년이 지난 뒤에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인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여전히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때의 나이가 삼십대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그 위에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따르는 그룹이 있었는가 하면 그를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냉대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소심하고 연소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심에 바울의 동역자요 중요한 일군으로 쓰임받음을 우리는 봅니다.
여기에 “형제들”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에라스도를 비롯하여 디모데와 함께 마게도냐, 아가야 지방 여행에 함께한 사람들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12절에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왜 아볼로에게 고린도 교회를 한 번 가보라고 권하였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아마도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분파의 문제에 대한 원만한 해결과 화해를 모색하고자 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6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아볼로에 대한 기록은 고린도전서 이외에 별로 없어서 그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현재 아볼로가 처해 있는 상황이 고린도를 갈 형편이 못되었는지 아니면 그 자신이 문제투성이인 고린도 교회의 일에 다시 말려들어가고 싶지 않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고 하여서 아볼로가 갈 시간은 있으나,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노력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것처럼 번역되었으나, 뜻과 시간(기회)은 아볼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항입니다. 해서,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를 사용하셔서 갈 의사(意思)를 주시고 기회(機會)를 주시면 그가 가리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5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의사에 따라서 우리의 일을 결정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일군이 될 때, 나의 시간과 의사까지도 더 이상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시간을 운행하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하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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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많은 여행 계획을 세우고 또 실제로 이곳 저곳을 여행합니다.
우리의 일생 그 자체가 여행하는 일정(itinerary)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디이든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여행계획을 마련하여 주시며 그 여행하는 기간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마련하신 여행계획이 다소 나의 원함과는 다른 것일 수 있으며, 때로는 나의 원치 않는 곳을 여행하게 하실 수 있지만, 오늘 현재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받고자 하는 바람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실 것이며, 이런 사람의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시어 크신 능력과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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