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4, 2014

“그리스도의 부활” (고전 15:1-11)

“그리스도의 부활” (고전 15:1-11)

           
 
  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滿朔)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使徒)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니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
불교의 언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사고팔고(四苦八苦)라고 불리는 갖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태어나는 것이 고통인 것은 죽는 것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외에 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백혈병(leukemia)으로 수 개월 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소천하셨는데, 그의 죽음 앞에 가족들이 애통해합니다. 그 사모님이 그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장례식에 참석한 분들에게 편지하셨는데 그 편지 가운데 “끊임없이 목사님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께 질문했지만 저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고 그 뜻을 헤아릴 수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라는 구절(句節)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이와 같이 말씀함은 그가 믿음이 없는 까닭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잠시동안의 육적인 이별이 그만큼 고통스러운 때문입니다.
원증회고(怨憎會苦)--증오하는 자와 만나는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삶 중에 안 보고 안 듣고 지내면 참 좋을듯한데 이런 사람이 주위에 있어 이 사람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하늘 아래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인간의 미움이 승(乘)할 때 그 정도가 어떠한지 짐작케 합니다.
구불득고(求不得苦)--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인데, 이 괴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떤 한국사람이 박사학위를 얻고자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고 세월만 계속 흘러가자 실성하게된 예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하여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양가 부모님의 결혼승낙을 얻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분은 재물을 크게 모으기를 소원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사업에 실패할 때 이 고통이 또한 상당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인데 정작 본인은 얻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는 다, 종류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불득고(求不得苦)가 있습니다.
오음성고(五陰盛苦)란 것이 있는데 이는 번뇌의 고통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만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번민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윤회설에 따르면 한 생명은 여섯 세상--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과 천상(天上)--사이를 영원한 옛날부터 영원한 미래에 걸쳐 계속해서 윤회전생(輪廻轉生)합니다. 따라서, 한 생명은 이 여섯 세계를 영원히 윤회(輪廻)하고 전생(轉生: transmigration)하는데 이것이 고통입니다(구보 아리마사, 「불교와 기독교 무엇이 다른가?」 참조함). 한 세상에서의 죄업(罪業)이 큰 중생은 여섯 세상 중 고통이 가장 심한 지옥(地獄)에 떨어질 수 있는데, 한번 지옥에 가면 아무리 짧아도 1조 6,200억 년 동안은 그곳의 심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섯 세상 중 제일 좋은 곳이 천상(天上)인데, 이곳은 여러 가지 쾌락으로 가득차 있어 고통이 없는 듯이 보이지만 중생에게는 이곳에 사는 것도 고통인데, 그 까닭은 이곳에서의 삶도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 900만 년 혹은 그 이상을 산 후에는 또다시 죽음을 경험하고 윤회의 바퀴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힌두교와 원시 불교 혹은 초기 불교의 영향권에 속한 사람들의 원함은 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두 번 다시는 여섯 세상 어디에도 들어와 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남이 해탈(解脫)이요, 벗어난 상태가 열반(涅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실과 현상은 계속 변하는 것으로 실체를 지니지 않은 공(空)이므로, 이것을 깨닫고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라.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욕망을 끊을 때 자신을 윤회 세계로 태어나게 하는 업(業)은 소멸된다. 그렇게 되면 윤회의 생존(生存)으로부터 해방된다.”고 가르칩니다. 초기의 열반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 정적(靜寂), 즉 절대적 무(無)의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열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는 ”꺼져버린 상태“를 뜻하는데, 곧 생명의 불꽃이 꺼져서 없어진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최초의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 보면,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석가(釋迦)에게 “열반에 들어간 사람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는데, 이에 대해 석가(釋迦)는 “그에게는 그러한 것을 측량할 만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렇다 저렇다 논할 만한 실마리가 그에게는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끊어지고 모든 논의의 길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노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통에서는 벗어나고 싶지만 생명이 영원히 정지 혹은 사라져버리는 허무(虛無)는 원치 않습니다.
이에 그들은 열반(涅槃)의 본래의 의미에 대하여 불만족했는데, 2-3세기에 걸쳐서 불교가 중국과 한국에 전파되고 대승불교(大乘佛敎)로 성립되는 과정에서 “열반에 들어가면 기쁨을 누린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비교종교학자들은 이것이 도마(Apostle Thomas)에 의해서 인도와 중국에 전파되어진 기독교의 영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열반은 기독교의 천국(天國)과 유사한 개념입니다. 즉, 정토(淨土)나 불국토(佛國土) 또는 극락세계(極樂世界)라는 말과 결부되어 환희와 행복과 영생의 세상에 사는 삶이 열반이라고 하는데, 이는 불교에서 나온 사상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부활(復活)은 타종교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참으로 독특(獨特)하고 탁월(卓越)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후기 대승불교는 미래(未來) 부처인 미륵불(彌勒佛)--마이트레야가 56억 7천만년 후에 이 땅에 강림하여 이 세상사람들을 구원할 때 그동안 열반에 들어갔던 모든 사람들이 그와 함께 다시 오고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바로 메시아(Messiah) 사상--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우리가 증거하기를 원하는 복음(福音)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인데, 그 구원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매일 새로운 삶이 보장되는 세계(=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할 때 그 믿음은 선생과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먼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구세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전반을 산 교부 신학자, 터툴리안(Tertullian)은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육신(The Flesh of Christ)」이라고 하는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수사학적으로 말합니다:
The Son of God was crucified.                 I am not ashamed, because it is shameful.
The Son of God died.                                It is credible, because it is absurd.
He was buried and rose again.                  It is certain, because it is impossible.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기에 나는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일이기에 믿을만합니다.
 그가 장사지낸 바 되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수치요,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인간으로서 장사지낸 바 된 자가 부활함은 불가능한 일인데도 이 불가능한 것같이 보이는 사건을 증거하는 제자들의 죽음도 불사하는 무모한 담대함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의 부활은 확실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지상생애의 끝이 죽음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가 과연 오늘까지 존재하였을까요? 
예수님 지상생애의 끝이 죽음이었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들은 다만 다른 성인들의 말씀과 같이 교훈적인 것으로 학교의 윤리시간에 참고문헌 정도는 되었을지언정 그의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들이 목숨까지도 바쳐서 전하고자 하는 사건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망한 마음으로 뿔뿔히 흩어져서 공친 3년 여 세월을 한탄하며 좌절의 나날들을 보내다가 그냥 그렇게 죽어갔을 것입니다.

2
앞에서 분쟁(1-4장), 음행(5-7장), 우상숭배(8-10장)와 공중예배시(11-14장)의 문제들을 다룬 바울은 15장에서는 부활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모범적이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에 부활신앙이 없다면 그 교회는 윤리적인 집단은 될지언정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주님되심과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고백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믿지 못할진데 우리는 영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를 믿는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도 십자가에 죽으심도 다 헛된 것일 뿐입니다.

1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그가 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한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말씀합니까? 그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2,00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한결같은 복음의 본질이 있는데--즉,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永生)에 이르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구원도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부활하지 못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이 세상의 삶을 살다가 죽어서 몸의 부활(bodily resurrection)을 맛보지 못한 체 그저 그렇게 무덤에서 썩어버릴 것입니다.

2절에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비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고린도 교인들이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구원(救援)은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번 육신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대로 부활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부활시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살면 그것으로 족하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에게 믿음이 없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하지 않아요?’라고 반문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마음 속에서 먼저 평안과 기쁨이 샘솟는 천국 상태’를 느끼는 것이 필요함은 소망 중에 더욱 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실제로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위함입니다.

3-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며 우리의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는데, 시편 17편 10절에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호세아서 6장 2절에는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말씀하고, 요나서 2장에 나오는 요나의 표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사흘간 음부에 머물러 계시다가 부활하실 것을 예표하였습니다.

5-8절에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滿朔)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은밀히 이루어지고 얘기되어온 사건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사건은, 복음서에 증언되는 대로,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단회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은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증언하고, 1장 9절은 많은 무리들(바울의 500여 형제들)이 보는 데서 승천하심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9장, 22장과 26장에서 증거하는 대로, 바울은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러 가다가 빛 가운데 임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매 그의 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9절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9장 1-2절에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했고, 21장 4-5절에는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가더니”라고 했고, 26장 9-11절에는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可便)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석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라고 자신의 한 일들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바울이었지만,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매 그의 삶이 변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사도행전 26장 8절에서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그곁의 무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던진 질문이 무엇입니까?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였습니다.
이 일을 증거케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10절에 “그러나 나의 나 돤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음에 내준 바울의 허물은,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용서받지 못할 커다란 잘못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매 그를 죄 가운데 내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혜를 맛본 바울이 그의 남은 생애를 온전히 바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하여 많은 결실을 거두었지만 그것이 그의 수고의 까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까지는 우리는 무익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매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부활(復活)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몸과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11절에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기타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것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평안한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그와 함께 부활되고 기쁨과 평안함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가 전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영생을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음으로 믿기를 소망합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는 교회와 믿음은 죽은 교회요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커다란 가르침이나 윤리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힌두교나 (초기) 불교의 끊임없는 윤회로부터의 탈출인 열반(涅槃)이 복음(福音)--복된 소식이 되지 못함은 그 안에 부활도 없고 영생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의 모든 한계성을 뛰어넘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가 바라볼 것이 과연 무엇인가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봄으로 우리도 그와 함께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간구를 통하여 모든 교우님들이 생활 중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여러분을 더 이상 고통과 번민 가운데 가두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함과, 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함과, 삶에 대한 번뇌가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지 못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우리도 부활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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