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27, 2014

“우상 숭배를 피하라!” (고전 10:14-22)

“우상 숭배를 피하라!” (고전 10:14-22)

           
 
  10: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1
“나는 5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나의 전 생애가 변하였습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을 갈구(渴求)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들이 좋지 않게 보이고 이전에 재미있던 것들이 별로 재미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것들이 나에게 중요해지고 소위 행운의 무지개를 좇는 삶이 허무(虛無)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나의 인생관(人生觀)과 가치관(價値觀)이 뒤바뀌는 것이 곧 예수믿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이는 19세기말 러시아의 대 문호(文豪) 톨스토이(Leo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가 「나의 회심」이란 글에서 한 말입니다.

톨스토이는 41세에 이미 불후의 대작「전쟁과 평화(War and Peace)」(1869)를 출간하고, 후에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1877) 등을 발표함으로써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 되지만 소피 베르(Sophie Behrs)와의 결혼생활(1862년 결혼)은 극도로 불행하였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죽는 날까지 그녀는 나의 목 주위를 누르는 한 바위일 것이다. 나는 나의 목을 누르고 있는 이 바위로 인해 익사(溺死)당하지 않는 법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그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극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내와의 불화(不和), 가족들과의 마찰(摩擦)과 특히 내면의 자신과의 갈등(葛藤)이 톨스토이로 새로운 진리와 평안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60세쯤에 복음서를 읽다가 이상적인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는데,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의 삶이 이로써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표현한 대로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변한 것이 사실입니다. 대 문호로서 불후(不朽)의 명작을 남긴 그의 60년의 인생보다도 크리스천으로서 남은 생을 산 20년이 더 귀하고 값진 것이라고 그는 고백합니다.

톨스토이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이후에 완벽주의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사냥을 포기하고, 담배와 술을 끊고, 육식을 하지 않고, 성적으로 금욕생활을 하기로 작정합니다.
그 는 71세에 쓴 그의 마지막 대작 「부활(Resurrection)」(1899)의 수익금 전체를 당시 짜르(Czar)에 의해서 박해를 당하고 있던 재세례파(Anabaptists) 단체인 두코보르(Doukhobor)를 돕는 일에 사용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산상수훈 해석으로부터 나온 그의 비폭력(非暴力) 철학은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등 비폭력을 주장하는 후세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톨스토이는 크리스천이 된 초기의 기쁨은 다 없어지고 여전히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당시 부패한 러시아 정교회에 비난을 퍼붓다가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고자 한 그의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납니다. 결국 그는 명예도, 가족도, 재산도, 자신의 정체성도 잃어버린 채 마지막 평안을 찾아서 기차를 타고 한 수도원으로 향하다가 중(重)한 병(病)으로 한 기차역(Astapovo)에 내리게 되고 역장의 집에서 82세의 생을 마감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삶 동안 톨스토이는 ‘복음의 이상대로 살수만 있었다면... 내가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는 독백과도 같은 소망을 한 순간도 놓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복음서에서 완벽한 인간상--하나님의 이상을 따르는 삶을 산 그리스도를 발견하였을 때 그는 분명히  크리스천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남은 20년 여생을 통하여 그러한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완전을 향한 성화의 삶이 불완전한 인간의 어떠한 의지와 노력으로도 가능치 않음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완전으로 향한 삶을 추구(追求)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나의 부족을 끊임없이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부족한 모습을 내가 용납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을 이미 하나님께서 용납하여 주셨습니다. 내 스스로가 온전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교만이며, 거기에는 주님이 역사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성화의 삶을 살기를 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부족함을 끊임없이 고백할 때, 그때 비로소 성화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우리를 성령께서 도우사 그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하십니다.

2
14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shun the worship of idols)고 권면합니다.
6장 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shun immorality)고 한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앞에서(6:18) ‘음행을 피하라’고 한 까닭은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육체(flesh)를 이루고(6:16) 그리스도와 합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한 영(spirit)을 이루기(6:17)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를 피할 것’은 같은 원리가 여기에 적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idol worship)를 하는 자는 우상과 합하여 한 육체를 이루고, 주님을 예배하는 자는 주님과 합하여 한 영을 이룰 것입니다.
우상(idols)이 무엇입니까?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그들이 예전에 찾던 그리스 신들--제우스, 아프로디테 등의 신들입니다.
음란은 이들 신전에서 여사제들과 행하는 행위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지적하시는 것은 재물(mammon, 마태 6:24)이요, 가족입니다. 또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세상에서의 영광과 권능이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성공에 대한 숭배는 악마가 가장 주도면밀하게 조장하는 우상 숭배의 형태이다.”라고 말합니다.

우상을 피하기를 ‘원함’이 우리에게 있지만, 우상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은 나약하고 유혹이 많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어떻게 피할 것입니까?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도함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우상을 피하기를 원함은 있지만, 번번히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15절에 “나는 지혜(知慧)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씀합니다.
같은 말씀을 반복하여 읽고 같은 설교를 반복하여 듣지만, 듣고 깨닫고 돌이킴이 없는 사람은 지혜 있는 자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태 11:14, 13:9; 마가 4:23)고 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 가운데 있어서 듣고 행하는 자입니다.

16절에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의 진정한 축복은 세상의 것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얻을 수 있는 축복이나 쾌락이나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허락되어진 축복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흘리신 피를 마시고 찢기신 살을 먹음입니다. 이로써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하게 되며 영원한 생명(生命)과 평안(平安)을 얻을 수 있습니다.

17절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수만큼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the body of Christ), 한 몸을 이룬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한 생명의 떡’(One Bread of Life)이신 ‘한 그리스도’(One Christ)가 필요합니다.

18절에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祭物)을 먹는 자들이 제단(祭壇)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 중에 성소를 지키는 아론 지파의  제사장들이 제단에서 제물을 먹는데(레위기 7:6; 고전 9:13), 이들이 하나님의 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을 먹으면서, 성소를 나가서는 제우스 신전에 드려진 제물을 먹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식물(食物)을 먹는 자는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9절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라고 질문합니다.
바울이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 한 것이 실제로 하나님이외의 다른 신이 있기 때문입니까?
세 상의 헛된 것을 좇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고 그곳 거민들의 신들인 바알과 아세라, 그모스, 밀곰 등을 숭배하였지만 그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실재하는 신들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0절에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20~21 절에 ‘귀신’이란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오는데 헬라어는 다이모니오이(δαιμόνιοι, demons)로서 ‘마귀(혹은 악마’)의 의미입니다. 한국의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와는 약간 구별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조상신이 축복을 줄 것이라고 믿고 제사를 드린다면 그 조상신은 여기서 표현하는 귀신(demons)에 포함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만이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식물(食物)로 마련하여주신 제물을 먹을 권(權)이 있었는데,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 모든 믿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에 참예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서 공급하여주시는 식물(食物)을 먹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에는 제사장들뿐아니라 모든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교제(交際)는 오직 하나님과만의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 나님의 전을 섬기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나가서 제우스 신전을 섬기지 못하듯이, 하나님 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식물을 먹는 고린도 교인들은 나가서 제우스 신전이나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이들 우상들에게 예배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들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곧, 제우스 신전이나 아프로디테 신전을 찾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원수인 사단-마귀를 섬기며 마귀와 교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믿 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나아가서 세상사람들이 즐기는 일을 여전히 행하고 있다면, 이는 바로 하나님과 원수된 마귀를 위하는 일이며,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귀와 교제하는 행위입니다.

21절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잔(盞)과 상(床)은 연합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성찬에 참예함으로써--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주님과 연합한 자는 마귀의 잔을 마시고 상에 참예하는 일을 피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이 사람은 주님과 연합하고 주님과 교제하는 자같으나, 기실은 그렇지 아니하고 여전히 마귀와 연합하고 마귀와 교제하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의 말씀은 참으로 간단하고 명쾌한 말씀이지만 지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財物)로 번역된 맘몬(mammon)은 셈족 계통의 단어(Semitic word)로 돈(money) 혹은 부(riches)를 뜻하는데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감을 방해하는 모든 우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聯合)하고 교제(交際)하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하나님의 연합하며 교제함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계십니까?
제우스 신전이나 아프로디테 신전을 드나들지 않고 그 신들에 바쳐진 제물을 먹지 않은 우리에게도 우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나님 밖으로 향하게 하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우리의 우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 하나님보다 먼저 선택하고자 하는 것--이것이 우리의 우상(偶像)입니다. 재물, 시간, 학문, 배우자나 자식 등등이 우리의 우상이 됩니다. 우리에게 재물, 시간, 학문, 배우자와 자식등과 함께 즐거워할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다만, 그 모든 축복과 즐거움과 평안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22절에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 반문합니다.
성도가 여전히 하나님의 집과 우상의 집을 드나들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한편 또한 우상과 교제할 때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서 노를 발하십니다.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그에게 이를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요 창조주시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피조물인 까닭입니다.

3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우리는 우상 숭배함을 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 그리해야 합니까?
우상 숭배하는 자는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자가 아니요, 온전히 교제하는 자가 아니요, 따라서 주님의 축복과 영광에 온전히 들어갈 수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감을 방해하는 것들이요, 우리로 하나님 밖으로 향하게 하며, 하나님 주변에서 서성거리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사람마다 우상이 다른데, 우리로 하나님보다 먼저 선택하게 하는 것들과 하나님 밖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은 모두 우상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상 숭배를 피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의지(意志)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하고자 할 때, 그 삶은 비록 그리스도의 온전을 향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고통(苦痛)이요 좌절(挫折)이요 번민(煩悶)입니다.
그 삶은 하나님을 위한 삶같지만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자유자의 기쁨이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예에서와 같이 평안을 구하고자 서성거리며 이곳 저곳을 헤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음란을 피하는 일이나 우상 숭배를 피하는 일이나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어떻게 성령의 도우심을 얻을 수 있습니까?
겸손한 심령으로 우리의 무능력과 약함을 고백하는 기도와 간구로서만이 가능합니다.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전 15:31)고 고백한 바울과 같이 우리의 무능력과 약함 가운데 우리의 자아와 의지는 매일 죽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는 비로소 음란을 피하고 우상 숭배의 마음과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간구함으로써 우상숭배를 멀리 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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