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26, 2014

“형제를 실족케 말라” (로마서 14:13-23)

                                              “형제를 실족케 말라” (로마서 14: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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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외출하기 전에 거울 앞에 서서 자기의 매무새를 살펴봅니다. 혹시 넥타이가 삐뚤어 매어있지나 않나, 옷의 색깔이 잘 어울리나, 얼굴에 무엇이 묻어있지나 않나 살핍니다. 여자분들은 더 많은 시간을 거울 앞에 앉아서 자신의 얼굴을 가다듬습니다. 자기의 약한 부분들을 화장으로 보완(make-up)하기 위해서 혹은 화장하는 것이 취미라서 어떤 사람들은 매일 2시간 이상도 소비(消費)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신의 “만들어진 모습”에 만족할 수 있을 때에야 거울 앞을 떠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에 만족할 수 없어 얼굴을 혹은 가슴을 뜯어고칩니다. 쌍가풀 수술을 하고, 코를 좀 더 높히고, 눈가의 주름을 없에고, 가슴을 크게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거울이라고 표현합니다. 야고보서 1장 23-24절에 “누구든지 도(道)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의 도리(道理)는 우리의 마음, 생각과 행동의 매무새가 제대로 되어있는지 비추어보는 거울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말씀이신 거울을 멀리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에 비춰진 자기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의 매무새가 어떠한지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세상사람도 나름대로 자기를 비춰보는 거울이 있지만 이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왜곡(歪曲)되고 굴절되어있는 거울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쯤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비춰볼 기회를 갖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이나 행동이 고쳐지지 아니하고 나아지지 않는 것은 야고보가 말씀한 대로, 나의 모양이 어떠한지 보고 부족한 모습을 깨달아 안 사람이라도 거울 앞을 떠나는 순간 자신의 모양이 어떠한 가를 바로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만을 탓합니다.
혹은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건 고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은 읽고 들음으로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두꺼운 색안경(sunglasses)을 끼고 바라봄으로 자기의 흠이 많은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진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지만 별 생각없이 바라봄으로 그것이 자기의 추한 모습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의 거울 앞에 비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것이 나의 모습이 아니라 아무개의 모습일 꺼라고 여기며 자기는 아니라고 부정하기 때문에 자신의 흠을 발견도 못하고 더욱이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바른 마음의 눈으로 이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자신의 모습이 온전하고 흠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흠없고 티없는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고칠 부분이 많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바울도 자신을 표현할 때,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고, “이미 모든 것을 얻은 사람도 아니요 온전히 이룬 사람도 아니요 또한 잡은 사람도 아니라”고 하고, 다만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외모를 비추는 거울 앞에만 오래 서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비출 수 있는 말씀의 거울앞에 더 자주, 더 오래 서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과 외형만 성형수술할 것이 아니라, 화장하고 간단한 치장으로는 나아질 수 없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함의 잘못도 수술하여 고쳐야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이후 로마서의 실천장들은 특별히 우리의 행함들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과연 우리의 행동들이 하나님의 거울에 흠이 없는 것들인가 바라봅니다. 이 말씀들을 통하여서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의 행동이 옳았다고 보기보다는 그는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였거나 거울에 비추인 그 사람을 보면서 옆사람의 모습일꺼라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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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합니다.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판단은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 그 사람의 약함이나 나와 다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행동이 그 사람을 넘어뜨리거나 거치게 하는 걸림돌(stumbling-stone)이 됩니다. 특히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은 이러한 일을 당할 때 넘어질 수 있습니다.

15절에서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형제가 근심함은 내가 그 형제에게 “세상에 신은 하나님 한 분이신데 너는 어찌하여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먹지 못하느냐?”고 비판하는 데서 오는 근심이 아닙니다. 형제가 근심함은 자신은 거리낌이 있기 때문에 채소를 먹는데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는 교회의 제직이 그가 보는 앞에서 버젓이 ‘우상에게 바쳐졌는지도 모를“ 고기를 먹고있는 까닭입니다.

나의 믿음으로는 세상에 속된 것이 없되 스스로 속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속된것인줄 알기 때문에, 술집에 들어가는 것이 전혀 거리낌이 없는데 이것이 나를 바라보는 형제에게는 거리낌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거리낌을 주는지 알고도 내가 그 행동을 계속 할 때 이는 사랑으로 행치 않아 형제를 근심케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할 때, 나는 나에게는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으로 행한 것임에도 형제에게 거리낌을 주거나, 근심케 하거나, 실족하여 넘어지게 하는 것일 때 우리는 이것까지도 삼가므로 비방꺼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은 여기 판단이나 비방꺼리는 성경상에 명백하게 하라-하지말라 말씀한 바 없는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은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일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나라에 속한 일들은 사소한 시비꺼리에 관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백성들이 감당하고 이루기를 원하시는 일들은 하나님나라의 속성--곧, 의와 평강과 희락을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의 삶에서 하나님나라에 속한 일인 화평과 덕을 세우는 일들을 감당하기에 힘쓸 것입니다.

20-21절에서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합니다.
식물이란 시비꺼리를 말합니다. 때로 이 시비꺼리로 정작 더 중요한 하나님의 사업은 시작도 못하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어느 정도 이루어놓은 사업도 망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교회의 주요한 시비꺼리중 장로선출의 문제와 성전건축의 문제가 있습니다. 장로선출이나 성전건축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사업 그 자체는 아니고 이를 위한 준비인데, 이러한 일들로 교회안에 분쟁이 심하거나, 교인중 얼마가 교회를 떠나거나 더 심하면 교회가 깨어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물론 주장하는 쪽은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러하겠지만 이러한 일들로 우리는 때로 더 크고 중심과제인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다시, 먹고 마시는 문제로 돌아가 보면,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까닭에 다 정하다고 말씀합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이 악하게 되는 것은 먹고 마시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 가운데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리낌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의 거리끼는 것을 먹고 마심으로 악하게 됩니다.
해서, 그는 그가 거리끼는 것을 먹지도 마시지도 말아야 합니다. 거리끼는 일을 할 때 이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바로 봄으로서, 거리낌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에게는 그의 먹고 마시는 일이 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게는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나의 먹고 마심이, 나의 다른 어떠한 행동이 믿음이 연약한 형제에게 거리낌을 주는 일이고 이를 내가 알았을 때, 이를 하지 않음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해서, 형제사랑을 믿음의 규범(規範)으로 삼는 우리는 우리의 먹고 마심과 행함에 형제에게 거리낌을 주는 것이 혹 없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발견하고자 힘 쓸 뿐아니라 발견하였을 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위해서 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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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의 행동규범을 정리하여보면, 첫째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 우리의 행동가운데 거리낌을 주는 것이 있나 살펴 나에게 거리낌을 주는 것인데 아직도 그대로 먹고 마시고 행하는 것이 있다면 이를 버려야 합니다. 의심하고 거리낌으로 행한 모든 것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은 것으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나의 먹고 마시는 일, 다른 행하는 일에서 우리는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거리낌이 없는 것은 나의 판단의 기준이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내가 알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없는 것은 내가 먹고 마시고 행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그러나 나의 거리낌이 없는 먹고 마심과 다른 행함으로 내 주위의 형제에게 거리낌을 주고 근심하게 하고 넘어지고 망하게 한다면 우리는 이를 삼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사랑의 으뜸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말씀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췬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 자이며 우리의 매무새를 바로 고치는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로마서 14:7-12)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로마서 1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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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정치시대에 사는 신하들은 왕을 그들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오직 왕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의 의견이나 행동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왕을 위하는 것이 아닐 때 충신으로 불리우지 않습니다. 때로는 왕을 위하는 주장이나 행동이라 할지라도 왕의 노여움을 사서 귀향을 가거나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주인의 집관리를 맡은 하인이 주인의 눈을 속이고 자기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물건을 빼돌린다면 그는 충직한 하인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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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14장 4절에서 믿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인과 주인의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한 주인이신 하나님의 하인(servant)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인은 우리의 하는 일에 일일이 간섭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할 일이 무엇인지 지시사항을 알려주신 후에는 한동안 여행을 떠난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돌아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그분에게 돌아갈 때까지 우리를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직무가 끝나는 날이 올 터인데 그때는 그분과 셈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생을 우리의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7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우리는 주인의 집과 그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steward)라고 했습니다. 청지기의 직무를 주시되 재량권을 많이 주셨습니다. 해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맡고 경영하는 재산이, 시간이, 몸이 다 자기 것인줄 착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지만 이는 주인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집사(deacon)란 말이 이조시대와 그 이후에도 사용되어왔는데, 이는 양반집이나 부자집의 재산이나 창고를 관리하는 사람을 일컬음입니다. 이 집사란 사람이 주인을 위하는 삶을 사는 대신에 자기를 위하는 삶을 살 때에 그는 부정하고 악한 사람이라 여김을 받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살지 못하고 죽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하나님께 영광돌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기 전에도 우리는 우리 몸과 생명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에는 이 에상의 주인인 사단이 우리 생명과 사망의 주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고백입니까? 여러분도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시면서 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삶이 우리의 남은 생동안에 계속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백합니다.
또한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우리를 주장하여 달라고 요청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주인되시지만 잠잠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주장을 그분의 생각과 주장에 양보하고자 결단하고 그분께 그리하여 달라고 요청할 때 그분은 비로소 우리안에서 영으로 역사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분의 생각과 주장이 매일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해드리기 위아여 우리는 매순간 우리의 자아를 죽이는 작업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씀하는 매일 죽는 삶이며 십자가를 지고가는 삶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약하고 고집스러운 자아가 다시 살아나 자기를 주장하며 주님의 방법과 길보다는 자신의 방법과 길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9절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어 씻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심은 죄씻음받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기에 인간의 죄가 씻음을 얻고, 예수님의 살으심이 있기에 우리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신 후에 사흘동안 음부에 머무신 것은 그의 권세가 거기에도 미침을 선포하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19절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해서 모든 죽은 자와 산 자에게 미치고, 그리스도를 안믿다가 죽은 자와 잘 믿다가 잠깐동안 잠자는 자, 그리고 지금 육체로 살아서 숨쉬는 모든 인간에게 미치십니다. 이는 인간을 심판하시는 권세가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10-11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앞서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그를 비판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고, 남의 하인을 판단하지 말라고 권면한 바울은 다시 한 번 이를 언급합니다.
이는 남의 하인을 세우는 권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요 10절에 기록된 대로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에 의해서 판단되기 위해서 그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 바울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했고, 히브리서 기자는 9장 27-28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심판에서 우리가 정죄되어지는 것을 면케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심판자로서 또한 동시에 우리의 변론자(Advocate)로서 그를 바라는 우리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체로 살아서 주님을 믿고 주님안에 거하는 삶을 산 사람은 그의 갈 곳을 분명히 압니다. 그는 육체의 삶을 마칠 때 그의 영혼이 낙원에 이름을 경험합니다. 영혼이 낙원에 이른 사람은 최후에 백보좌 심판이 있지만 그가 그 징벌의 심판대에 서지 않을 것을 압니다. 이는 그가 천국에 이른 것이 이미 은혜의 심판(=판정)을 받아 영생을 얻고 낙원에 이르렀기에 징벌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징벌의 심판은 우리가 면하지만 믿는 사람의 은혜의 심판에서는 우리가 행한 것에 따라 상급심판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부끄러운 구원이 아니라 주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는 넉넉한 구원이 여러분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결국 그의 권세를 깨닫게 되고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서 주님을 믿던 자나 믿지 않던 자나 종국에 다 그앞에 무릎을 그가 주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며 자기 마음대로 자기만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결국에 그의 생명을 주관하시며 그에게 징벌의 심판을 가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권능과 보좌 앞에 그를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미 때가 늦은 자백이 될 것입니다.

12절에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直告)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3-5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 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의 전에 잘못된 행동이나 속임의 말에 대해서 적당히 둘러대어도 이것이 통할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정치인들은 한 입으로 다른 말들을 많이 하지만 잊어버리기를 잘하는 국민들은 정치인이 현재 하는 말을 사실인가 보다 믿고 받아들이다가 또 다시 그가 번복하더라도 또 그 말이 맞는가 보다고 별 판단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심판주로 임하시는 주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의 생각까지도 헤아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우리 마음 중심의 계획과 의도까지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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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 이 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장차 우리가 주님을 대면할 때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는대로,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믿지않는 사람에게는 징벌과 그에 따른 영원한 사망의 심판이 있고, 믿는 사람에게는 상급의 심판이 있습니다. 상급심판을 사모하며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우리들은 우리의 욕심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위하는 생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로마서 14:1-6)

                                             “믿음이 연약한 자를” (로마서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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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세가지 범주 속에 집어 넣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혹은 사회의 보편적 윤리·규범의 원칙으로 명백하게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고 “반드시 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안해도 되지만 하면 유익한 것”이 있고 “해도 되지만 안하면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세 번째 범주로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혹은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범주(範疇)의 반드시 해야 할 것과 반드시 해서는 안될 것을 가지고는 별로 시비가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행한 것을 가지고는 별로 생색도 나지 않습니다. 이건 누구나가 다 해야 할 일이거나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잘 지키지 못할 때 내가 그를 비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의 법이 그를 구속합니다.
두 번째 범주(範疇)의 안해도 되지만 하면 유익한 일과 해도 되지만 안하면 유익한 일은 일반 사람들의 상식 가운데 꼭 해야 할 일이다 꼭 안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큰 시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일을 한 사람이 하지 않은 사람을 부족한 사람이라 바른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라 비판을 함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 사람중에는 생색을 냄으로서 그의 유익한 삶의 보상(報償)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은 하나님의 법으로서는 꼭 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의 사회법으로는 꼭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이 때에는 사회의 법을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이 일을 행한 믿는 사람이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자신만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범주(範疇)의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일을 행한 것 갖고는 생색(生色)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가지고 가장 많은 시비(是非)가 일어나고 판단(判斷)의 문제가 따릅니다.

하나님의 법으로나 사람의 법으로나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이 분명하면 할수록 시비도 적고 생색도 적은 데, 반드시 해야 할 일인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인가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 사이에 갈림이 있을 때에는 간혹 판단의 문제가 있지만 생색(生色)이 두드러지고, 하나님의 법으로나 사람의 법으로나 명백히 규정한 바 없어서 “이렇게 해도 그만 저렇게 해도 그만”의 일을 가지고는 생색은 없는 대신에 시비와 판단은 참으로 두드러집니다.

이조시대의 당파싸움이 커져 삼족을 멸하는 사화(士禍)로까지 번진 것중에도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일을 갖고 시비한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당파싸움의 논쟁꺼리 가운데는 어느 왕후의 장례를 5일장으로 할 것인지 7일장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포함합니다. 5일장으로 하든 7일장으로 하든 그것이 무엇이 그리 큰 문제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자신과 자기의 당의 의견이 반드시 옳은 것이요 관철되어져야 합니다. 이를 따르지 않을 때에 그는 간신(奸臣)이요 역적(逆賊)이요 마음에 무엄한 생각을 갖고 있는 자라고 몰아부칩니다.

교회의 예를 들자면, 예배시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 웬만한 교회는 2부 3부이상 예배를 드림으로 반드시 고정된 예배시간 관념이 없어졌지만 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는 교회는 반드시 11시에 예배를 드려야 하지 9시나 혹은 오후 3시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배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경건함도 없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히게 마련이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도 요즘은 덜하지만 전에는 그러한 고정관념에 빠져있어 내가 과거에 간직하고있던 예배 습관이나 규정과 다른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흔히 “경건치 않은 자”로 불리웁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찬양함에 “비파와 수금과 나팔과 소고로 찬양하고, 현악과 퉁소로 찬양하고, 춤추고 손뼉치며 찬양하자”라고 되어있는데, 장로교회에 속한 어떤 목사님이 어떤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시간에 춤추며 꾕과리치고 찬양하는 것이 어떻습니까?”고 제안한다면 “저 목사님이, 저 집사님이 필경 제 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해” 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은 예배를 모욕(侮辱)하는 사람으로까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요즈음은 한국의 큰 장로교회에서도 관현악단을 마련하여 아름다운 주악에 맞추어서 찬송을 하고 성가대가 찬양을 부르는데 참으로 은혜스럽고 듣기가 좋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배시간 전에는 찬송을 인도하는 사람 혹은 팀이 나와서 프로젝터(projector)와 스크린(screen)을 사용하여 복음성가를 인도하고 예배중에도 복음성가를 사용하는데 별로 불경건한 느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주일날 교회의 예배에 관현악을 사용하거나 복음성가를 부름은 비난을 면치 못하는 무식하고 경망스러운 일이요 정죄꺼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은 배운 것이 없고 요란스러운 오순절교회에서나 하는 일이라고 매도해버렸습니다.

로마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의하면(Claudius, 25:4) 주후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때에 크레스투스(Chrestus)란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오해가 생겨 크리스천들이 반란을 주동한 것으로 되고 크리스천 중에 특히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포함하여 반란 소지가 많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을 당합니다.
이때 사도행전 18장 2절에 나오는 아굴라와 부리스길라 부부도 추방을 당하여 고린도지방으로 오게 되고 이곳에서 마침 그곳에 머물면서 사역을 감당하고있던 바울을 만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은 이 사건이후 7-8년이 지난 뒤였는데, 이 사건으로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대부분이 로마를 떠나 있다가 수년 뒤에 사건이 무마되고 잠잠해지자 유대인 크리스천들중에 일부가 돌아왔지만 교회의 운영이라든가 주도권이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헌데, 그들의 믿음의 색깔과 방식, 친교와 음식을 먹는 것들이 다 유대인들이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지켜온 것과는 달랐습니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는 이러한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서로 상대방의 편의를 생각하고 상대방의 쓸 것을 공급하며 그렇게 오손도손 잘 지내왔는데 이제 십여년 이십년가까이 지나다 보니까, 교회 내에 제도도 마련해야 되고 운영방법도 정하여야 되고 지도자도 뽑아야 되고 하니까 분제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욱이,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방인 크리스천들은 단지 소수파로서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마련한 제도와 운영방식에 따라왔었는데 7-8년 그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주도권이 바뀌게 되고 이로 인해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사이에서 사사건건(事事件件) 시비가 붙습니다. 그러나, 그 시비꺼리는 하나님의 지시사항 가운데 있지 않은 사소한 것들입니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에는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지키던 전통에 따라서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침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좋은 저녁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크리스천 가운데는 다른 사람의 종노릇 하던 사람도 많았으므로 비교적 시간을 내기가 수월한 저녁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박해를 당하는 과정중에 교회운영의 주도권이 이방인들의 손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는 안식일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로 여겨져서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보편화되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 가운데도 이렇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있어 어떤 집단에서는 안식일에 어떤 집단에서는 주일에, 또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과 주일 모두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해서, 안식일에는 그들이 전통적으로 해오던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일을 삼가고  주일에는 크리스챤으로서 모여서 말씀을 듣고 성례전을 행하였습니다.

또, 이제 숫적으로 많아진 이방인 크리스천들과 유대인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문제가 된 것이 음식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챤들은 그들 조상대대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여전히 구분하여 먹고 있었고 그렇게 먹지 않고 있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비난하고 그들과 식사자리를 같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코셔(Kosher)라고 하는 그들만의 음식 조리와 요리 방법이 따로 있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먹을 때는 반드시 칼로 목을 베어서 피를 빼낸 다음 짐승을 굽든지 다른 방법으로 요리하여 먹지, 닭이나 비들기를 목을 비틀어 피가 몸안에 응어리지게 해서 먹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이방인과 유대인 크리스천들사이에서 큰 논쟁꺼리로 여겨지고 있던 할례의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예루살렘공회의 지도자들을 방문하였을 때, 당시 예루살렘 공회장이었던 예수님의 육적동생 야고보는 이 문제는 크게 문제 삼지 않기로 하고 다만 사도행전 15장 19-20절에 있는대로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할례의 문제로)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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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1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안에는 믿음이 강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의심하는 것--왜 예배는 꼭 정한 시간에 드려야 하나? 왜 크리스천들은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나? 왜 크리스천들은  술을 마시지 말고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하나? 하는 많은 질문꺼리들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러한 질문 혹은 그들의 기존 교인들과 다른 생활방식으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특별히 성경상에 어떤 구체적인 지시사항이 없는 견해차이(matter of opinion)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2절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인줄 알고 먹어도 마음 속에서 우상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는데, 믿음이 약한 사람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서 먹으면서도 이 고기가 혹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에 아예 고기는 전혀 먹지 않고 우상에게 바쳐지는 경우가 없는 채소를 먹습니다. 이는 그가 세상에 신은 하나님 한분이라고 생각하지만 혹 다른 신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세상사람과 어울려 술자리에 가도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고 설령 술을 마시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에 있지 않는줄 알기 때문에 전혀 그의 믿음에 동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는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는데,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에 술자리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믿음이 강한 사람은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3절에 나오는데,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먹는 자나 먹지 못하는 자를--) 받으셨음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그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의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먹기 때문도 먹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의 믿음이 아직 연약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돌아가신 까닭이고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한 까닭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하나님의 하인(servant)--청지기(steward)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은 다만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판단하지 말라”고 하여서 “권면하지도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판단(判斷)과 권면(勸勉)은 다른데, 비판으로서의 판단은 그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게 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잘못된 행동 자체를 나무라기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랑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권면은 잘못된 행동을 나무라기 보다는 그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것으로서 그 안에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부모님이 잘못된 자식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권면이나 경책은 나무람이 수반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화를 못이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금하는 판단은 또한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무방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나 고정관념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의견이나 방식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는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이 가장 귀한 날로 여겨집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는 주일도 귀하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신 그들 조상대대로 지켜온 안식일도 매우 귀하게 여겨집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모든 날들이 다 귀하게 여겨집니다. 우리가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더 낫게 여기거나 모든 날을 다 같게 여기더라도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요 다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서 특별히 지시하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6절에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마감합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 다른 크리스챤과 같지않음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옆의 성도의 생각과 행동이 나와 다른 것--특별히 성경에 구체적으로 지시된 바가 없는 견해의 차이일 때 나는 그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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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고 행하기로 힘 쓸 것은 나의 먹는 것을 통하여 나의 날을 귀중히 여김을 통하여 내가 이러한 날과 식물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나 살펴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비판이나 판단보다는 권고와 사랑이 넘치고 하나님께 감사함이 많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세례요한의 증언” (요한 1:19-34)

                                                 “세례요한의 증언” (요한 1: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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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이자 에딘버러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제임스 심프슨(James Simpson, 1811-1870)은 수술 중에 환자가 받는 고통에 대하여 매우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그는 환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수술하기 위하여 수술용 마취제의 개발에 노력하였고 마침내는 성공하였습니다. 19세기 후반 마취제의 발견은 수술계의 혁신적인 일이었습니다.
한 번은 한 학생이 그의 강의시간에 심프슨 교수에게 질문합니다: “교수님의 생애에 가장 뜻깊고 소중한 발견 한 가지를 든다면 무엇입니까?”
그 학생은 당연히 ‘마취제의 발견’이란 답을 기대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심프슨 교수는 대답합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로 내몰림을 당한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모습으로(레위기 16장),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물 당시 애굽의 장자들과 구분하여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은 어린양의 모습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시기 위하여 어린 양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산을 오를 때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질문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사랑과 믿음을 보시고, 그의 고백대로 번제할 어린 수양을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해서, 아브라함은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하나님이 예비하시다’라고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위하여 어린 양을 준비하셨듯이, 온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번제로 준비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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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세례요한이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베다니의 요단 강의 지류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이한 행적과 복장과 담대한 외침에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요단 강에 도착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다른 위대한 선지자인지 알아보고자 그에게 묻습니다: “네가 누구냐?”

20절: 요한이 드러내어 증거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세례요한은 그들이 묻는 것이 그가 그리스도인지 묻는 것인 줄 알기에 직설적으로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21절: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세례요한이 혹시 그러면 엘리야가 아닌가 질문합니다. 왜 엘리야인가 질문했나 하면 말라기서 4장 5-6절에서 하나님은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두려운 하나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오리라 예언되어진 엘리야가 아닌가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세례요한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대답한 것은 아합왕 시대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재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임의로 대하였다”고 세례요한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들은 또 질문합니다: “그러면, 네가 ‘그 선지자’냐?
여기서 ‘그 선지자’란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모세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희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말한 “(후에 나타날) 나와 같은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선지자”란 곧 장차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22절: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그런데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가 보통사람이 아닌 알기에 계속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구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절: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군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간명하게 선포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다.”
“외치는 자의 소리”는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의 시작--곧 이스라엘의 회복의 장의 시작인 40장 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세례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예비하고 증거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밝혔습니다.

24-25절: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그들은 이제 따지듯이 묻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또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느냐?”
이에 세례요한은 자신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는지 답하는 대신에 그의 다음에 나타나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26-27절: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증거는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한 것입니다.
주인의 신들메를 푸는 것은 보통 노예 중에 하급의 노예의 일이었는데, 그리스도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신들메 푸는 노예도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한 분인지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요한의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사람과 개미의 관계보다 더욱 큰 것입니다.

28절: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세례요한이 회개의 물 세례를 베풀던 곳은 예루살렘 동남쪽 베다니 지방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물으러 온 곳이 베다니 지방이라는 설명입니다.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두 번째 증거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의 허물과 죄의 짐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30절: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0절에 나오는 증거는 15절에 나온 것의 반복입니다.
태초부터 계시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보다 먼저 계신 것은 자명합니다.

31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1절에서 세례요한은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가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장차 사역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미리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32절: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세 번째 증거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나오시고 그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뭍으로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그에게 비둘기같이 임하시고”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마태 3:16-17).
해서, 세례요한은 그가 예수님께 물 세례를 베풀 때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33-34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네 번째 증거는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셔서 예수님 위에 머물렀기에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다섯 번째 증거는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그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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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 때 사람들은 교만하고 자고하기 쉬우나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매우 잘 안 사람입니다. 그는 겸손하게 그러나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겸손하게 그러나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 되시는 분이십니다. 세례요한의 담대함과 겸손함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축원합니다.


Sunday, January 19, 2014

“자다가 깰 때라” (로마서 13:11-14)

                                             “자다가 깰 때라” (로마서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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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것인데 우리는 그 귀중함을 잊고 살다가 뒤늦게 시간이 참으로 속절없이 빨리 흐르고 있음을 깨닫고는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하여야 할지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시간 가는 것이 빠르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제 인생(人生)을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간이 몹시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인생(人生)의 가치(價値)를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생을 알거나 인생의 가치를 알기 시작한 사람은 시간 사용하는 일에 더욱 신중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5-17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혹은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먼 앞날을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만을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이유나 내가 현재 이러한 분야에서 이러한 일을 하는 이유가 단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는 식입니다.

우리 한국사람에게는 유행성 사고방식이나 행함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인교회 안에서도 무분별하게 범람(汎濫)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한인교회나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를 가리지 않고 참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무엇을 하였더니 교회가 부흥·성장하였더라 하면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어떠한 상황가운데 성장하였는지 가리지 않고 그 방식을 도입하여 목회자 자신이 그러한 자질(資質)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적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성장될 리 없습니다. 그러다가, 더러는 나중에 그 성장했다는 교회의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가 나오고 그 내용이 비성경적이라는 비판이 나오지만 그것이 있기 전까지는 그것이 이단성이든 비성경적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하려고 합니다.
         
"영어 배우는 데 왕도(王道) 혹은 지름길이 있다, 없다"로 설왕설래합니다.
영어 기초를 잘 다지기 위해서 그 기초를 잘 쌓는 요령을 터득할 수는 있겠지만, 영어로 잘 표현하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이왕 믿기로 하였으니까, 신앙생활도 잘 해보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는 남들보다 시간을 덜 투자하면서 그들보다 더 신앙생활 잘한다는 소리듣고 더 축복받는--말하자면 세상적으로 지름길을 가로질러 가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마음을 주님께 덜 드리면서도 세상에서 더 평안한 삶을 사는 신앙생활은 할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이 하나님께서 더 원하시는 믿음의 삶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시간과 마음은 많이 들였는데 주님께서 기뻐 받지 않으시는 신앙생활이 있어 우리가 이것을 피해야 할 것이지만 적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주님의 더 많은 칭찬을 얻는 그런 속성(速成) 믿음의 생활은 없습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미련한 신앙생활이란 시간과 마음은 남들만큼 쏟으면서도 늘 하나님께 불평하고 감사가 없는 삶인데, 우리가 이런 것을 피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삶을 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 무릎꿇는 횟수가 많을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시간이 많을수록, 하나님께 마음의 중심을 드릴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는 것은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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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기”란 믿는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때로는 피곤하여서 잠을 자거나 졸 때가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깨어있을 때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종말론적(eschatological) 혹은 계시론적(apocalyptic)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인데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가 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기름을 잘 준비하고 깨어있으므로 밤늦게 신랑이 오매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미련한 다섯처녀는 등은 가지되 예비기름이 없었고 게다가 더디 오는 신랑을 기다릴 새 졸며 자다가 기름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기름이 떨어진 것을 발견하곤 시장에 사러가지만 그사이 신랑이 왔는데 한번 닫혀진 혼인잔치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태 25:13) 말씀하십니다.
때가 가까운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지 않고있는 사람과, 잠자느냐고 때가 가까이 이른 줄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때가 가까운 것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잠자고 있던 중이라 할지라도, 졸고 있던 중이라 할지라도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아직 캄캄한 어둠--사단의 세력--이 지배하는 밤일지라도 밤이 깊으면 곧 새벽이 가까움을 알고 일어날 준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세월이 빠른줄 느낄 때, 너무 늦은 줄로 생각할 때라도, 늦잠을 자서 도저히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난 때인줄로 낭패감이 들 때라도 영적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구원의 시간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이른” 까닭입니다. 여기서 처음 믿을 때란 우리의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때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오늘 본문을 Baptismal Formula 혹은 Sacramental Formula 라고도 말합니다. 곧, 세례의식을 행할 때나 성찬의식을 행할 때 성도들의 본분에 대해서 깨닫게 하기 위한 글이란 뜻입니다.
시간적으로 분명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구원--하나님의 영광나라에 들어감은 세례로부터 세월이 흐른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이르고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더디 오시는 것같아 그 때를 알지 못하여 자다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잘못을 우리는 범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 주님께서 이르지 않으셨을 때 우리는 깨어야 할 것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전 아직 새벽이 밝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영적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 꿈을 꾸신 적이 있습니까?
어느 날 꿈속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섰는데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 이르시기를, “너는 입으로는 주님을 믿었지만 마음으로는 믿지않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런 두려움이 현실로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12절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합니다. 밤과 낮이, 어둠과 빛이 대조(對照)되어있습니다.
밤과 어둠은 사단--곧 악의 권세입니다. 낮과 빛은 그리스도의 권세입니다. 밤이 아직 다 지나지 않았지만, 밤이 깊다고 함은 이제 곧 새벽이 오고 낮이 옴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해서 우리는 낮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준비(準備)는 곧, 우리가 이제까지 몰두해온 어둠의 일--세상에 탐닉하는 일에서 벗어나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용사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로마서 본문에서는 단지 빛의 갑옷이라고 표현했지만, 에베소서 6장 13절이하에서는 구체적으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13절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되어있습니다. 방탕하고, 술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고, 쟁투와 시기는 성령의 다스리심이 없는 자연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깨어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다스리시는 사람에게서는 이런 일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말씀하십니다. 술은 세상--곧 악에 취한 삶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악의 세력과 싸워야될 믿는 사람은 세상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악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영리하여 카르타고의 대학에서 철학(哲學)과 수사학(修辭學)을 공부하고 20대에 밀라노대학의 교수가 되어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 모니카의 믿음의 기도와는 달리 경건생활을 하기 보다는 술 취하고 성적(性的)으로 방탕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맑은 정신이 들면 자신의 방탕한 생활에 대하여 후회감(後悔感)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는 어느날 잠껼에서인지 어린아이들의 “들고 읽어라, 들고 일어라” 노래하는듯한 음성을 듣고 황급히 성경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말씀이 이 구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로 말미암아 그의 삶이 변하고 히포(Hippo) 지방의 감독의 지위에 까지 오르고 기독교 역사상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12-13절 말씀에 대한 요약입니다. 우리는 세례 받을 때에 이미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새사람의 옷을 입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골로새서 3장 9-10절에,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했고,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새사람의 옷을 입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이를 에베소서 4장 23절에서는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표현했고, 로마서 12장 2절에서도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이미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인데 우리가 영적인 게으름으로 인하여 혹은 영적인 잠에 빠져 그리스도의 새사람의 옷을 벗었든지 더러워져 새롭게 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게으름으로 은혜를 잊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또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으며 육신의 일을 도모함으로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늘 새로운 모습으로 사는 “변화하는 그리스도인(transforming Christian)”의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어떤 영적인 상태에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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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영적으로 졸고있거나 잠에서 깨어나있지 않은 것인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 여러분은 주님의 작고 세미하지만, 분명하신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영적인 잠에서 깨어있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이 원하시는 새사람의 옷-주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계셔서 어느 때에 주님이 오시더라도, 어느 때에 주님께로 가더라도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로마서 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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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본은 관심과  애정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싫증내지 말고 주십시오. 상처를 받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십시오.”
이것은 10여년 전 (1997년) 87세를 일기로 심장병으로 소천한 테레사 수녀가 한 말입니다.
5척 단신인 테레사 수녀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고 여기며 가난한 자들의 곁을 자기 자리로 고집했고 이 세상에서 몽당연필의 역할을 다마치고 더 나은 본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는 1910년 8월 27일에 알바니아(마게도냐)의 수도 스코피(Skopje)에서 건축가의 삼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본명은 아그네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ejaxhiu)입니다.
18세때(1928년) 집을 떠나 아일랜드 더블린의 로레토 수도회(Loretto Order)에 들어가 수녀가 되기 위한 신앙생활의 첫발을 내디딥니다. 이때 얻은 세례명이 테레사(Teresa)입니다.
19세때(1929년) 인도 캘커타의 세인트 메리 고등학교 교사로 임명받고 현지에 도착합니다.
27세때(1937년) 수녀가 되기로 최종 서원(誓願)합니다.
36세때(1946년) “가난한 사람들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계시를 받고 일생을 그렇게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38세(1948년)부터 캘커타에서 본격적인 구제활동을 시작하며, 40세때(1950년) 사랑의 선교회(The Order of Missionaries of Charity)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그후 50년을 한결같이 가난한 자 가운데 사랑의 천사로서의 생을 보내고 마감합니다.
1974년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모든 인간에게서 신을 봅니다. 나환자의 상처를 씻을 때는 그리스도를 돌보는 느낌입니다. 어찌 아름다운 경험이 아니겠습니까?”란 말을 남긴 테레사 수녀가 평생 봉사를 통하여 세계를 감동시킨 것은 그의 순수성(純粹性)과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에도 “연회를 열지말고 연회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자신의 활동에 대해 “베푸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작은) 구원”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1996년 8월 그의 심장병이 악화되었을 때 병상에서 그리-스의 미카엘공을 만났을 때, 테레사 수녀는 “어느 날 꿈속에서 내가 천국의 문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내게 ‘지상으로 돌아가라. 여기에는 빈민굴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하며 이 세상 삶에서의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일생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성녀(聖女)의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오적조건이 우리보다 특별히 뛰어나서 그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150cm도 되지 않는 단신이요, 교육도 그리 많은 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의 나라가 강국이라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 하나인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활동무대가 spot-light을 받는 세계의 중심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지가 아닌 인도의 빈민촌에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머물러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에 대해 다른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가  세계에 알려진 것은 긴 세월을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께 대하듯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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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리부분인 1-8장에서 믿음에 대해서 다루고 실천부분인 12장 이하에서 사랑에 대해서 다룹니다. 12장이하에서 자신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무와 변화에 대해서 언급한 바울은 다시 작은 단위(unit)인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앞서 로마서 8장 12절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갚을 길 없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탕감해주셨습니다. 해서, 우리도 우리 형제·자매의 잘못을 사랑으로 탕감해주어야 하며 그들이 굶주리고 목말라할 때 이를 공급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들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채워줄 때, 우리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빚을 갚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우리가 또 부지불식(不知不識) 가운데 형제·자매에게 잘못을 할 때 혹은 우리가 궁핍할 때 그들에게 사랑의 빚을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 12절 황금율에 있는 대로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했습니다. 해서, 사랑의 빚을 질 수 있는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빚을 먼저 탕감해주므로 우리가 또 빚을 지게 될 경우에 탕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적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사랑과 용서를 당연시할 때, 이 사람은 주님의 대속의 사랑에 대해서도 감사함이 전혀 없는 삶을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4절 이하에서 (병행구절: 마가복음 12:28-31) 바리새인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신 6:5, 10:12). 둘째는 그와 같으니 (=And a second is like it; 둘째도 첫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레 19:18)” 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에 대한 구약의 언급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에 있는데, 모세는 신명기 5장에서 십계명을 말씀한 다음에 6장에서 하나님사랑을 말씀하고, 또한 레위기 19장에서는 십계명을 비롯한 주요사항을 설명하는 중에 이웃사랑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둘째 계명이 결국은 첫째 계명과 같다”(And a second is like the first one)고 말씀하셨는데 어찌 그렇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눈에 보이는 일을 먼저 할 수 있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데 있는 쉬운 일, 작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먼 데 있는 어려운 일, 큰 일도 감당합니다. 실천 장에서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일들은 눈에 보이는 우리 주변의 일들입니다: 나, 교회, 믿지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사회와 국가, 그리고 다시 이웃. 이러한 주변의 일들에 충실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한결같고 신실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2장 1절 이하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의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 일이 그리스도인의 실천강령(實踐綱領)으로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일들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일부터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또한, 12장 2절에 말씀한 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두 개의 다른 계명이 아니라, 결국은 사랑이란 한 계명안에 포함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둘째 계명이 첫째 계명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둘째 계명 역시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첫째 계명인 하나님 사랑을 잘 이행하고 있다고 입으로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며--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해서, 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말씀한 것은 바로 이와같은 까닭입니다. 눈에 보이는 남--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이로소 율법의 가장 큰 두 계명을 지키는 자이며 이 가장 큰 두 계명안에 모든 율법의 본질이 포함되어있습니다.

9절에서 바울은 구체적인 율법의 조항들 가운데 일부를 나열해봅니다: “간음하지 말라” 한 것은 십계명중 제 칠계명이요, “살인하지 말라” 한 것은 제 육계명이요,  “도적질하지 말라” 한 것은 제 팔계명이요, “탐내지 말라” 한 것은 제 십계명입니다.
성경에서 율법이라 할 때, 가장 좁은 의미는 십계명이요, 보통의 의미는 흔히 토라(ה■וֹת)라고 불리우는 모세오경(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이고, 넓은 의미로는 창세기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율법서와 선지서를 다 포함합니다. 또 신약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신·구약 전체를 가리키건, 구약 전체를 가리키건, 모세오경만을 가리키건, 아니면 십계명만을 가리키건 이 율법은 사랑이란 한 마디로 요약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율법의 완성이라 말할 때, 이 그리스도는 사랑의 본체란 뜻입니다.

십계명을 살펴보면,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삼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제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육은 “살인하지 말찌니라”; 제칠은 “간음하지 말찌니라”; 제팔은 “도적질하지 말찌니라”; 제구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제십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입니다.
이중, 제일에서 제오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연관되어있습니다. 제육에서 제십계명까지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관되어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살인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여인을 간음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집을 탐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 소유를 탐하지 않을 것입니다.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 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3-14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말씀합니다.
 
사랑은 이웃에 대하여 어떤 악도 행하지 않습니다. 살인하지 아니하며, 간음하지 아니하며, 도덕질하지 아니하며, 거짓증거하지 아니하며, 탐내지 아니합니다.
이웃사랑은 이웃에 대하여 하지 말아야 될 악을 행치 아니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12장 17절에서 바울이 말씀한 대로 이웃사랑은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는 삶”입니다.
이웃사랑은 이웃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할 때에 마실 것을 주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우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迎接)하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갇혔을 때에 찾아가보는” 적극적 행동입니다.
이렇게 할 때 이러한 이웃사랑의 마음은 곧 하나님을 잘 대접하는 하나님사랑의 마음이며 해서 우리의 사랑은 주님이 그러셨듯이 율법을 이루는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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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탐험가로 유명한 사람 가운데 영국인 세클턴이 있습니다.
기자들이 그와 회견하는 중에, 그의 탐험 경험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달라고 요청합니다.그가 탐험대장으로 대원들과 함께 남극을 탐험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조난을 당하여서 생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임시 대피소에 피하기는 하였지만 식량도 다 떨어지고 그날 밤 추위에 어떻게 살아남을지 암담할 따름입니다. 배고품과 추위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마지막 건빵봉지를 나누어줍니다. 오늘방 이 혹한에 누군가 살아남아서 자신들의 조난경위와 운명을 보고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바람뿐입니다.
대원들은 혹심한 추위에도 고단한 나머지 다 곯아 떨어졌는데, 이 세클턴은 대장이라고 하는 책임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대원들 가운데 한명이 조심 조심 일어나더랍니다. 그리고는 자기 전에 나누어준 옆 사람의 건빵 봉지를 슬쩍 합니다. 그 대원은 다름아닌 세클턴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동료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옆에서 자고있는 동료의 생명줄과도 같은 건빵을 훔치다니 가슴이 철렁하고 어이가 없고 배신감으로 분노마저 치밀어 올랐습니다. 당장 일어나서 호통을 쳐주고 싶지만 그렇지 않아도 절망가운데 잠든 대원들을 더 큰 절망과 배신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싶지않아 그대로 누워서 더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대원은 슬쩍한 옆 동료의 건빵봉지를 뜯고나서는 또 자기의 건빵봉지를 뜯더니 자기의 건빵을 한웅큼 꺼내서는 옆 동료의 건빵봉지에 집어넣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을 청하더랍니다. 그때 그는 형제 사랑이 무엇인지 비로소 발견했다고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 위기에 처하여 마지막 생존근거인 건빵을 동료를 위해 몰래 자기 것을 더 덜어줌에서 위대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물론, 그들은 그 조난에서 극적으로 다 구출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믿으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삶을 사심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확증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로마서 13:1-7)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로마서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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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복(福)은 얼마나 평안한 가운데 풍요로운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을 사는가에 달렸습니다.
해서, 평안한 가운데 부자의 삶을 살지만 복이 없는 사람일 수 있고, 환란과 곤고 가운데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지만 복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복있는 죽음은 100세가 넘도록 손자, 증손자, 고손자들과 함께 살았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을 본향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망으로 육신의 죽음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은 삼십여세의 나이로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리는 죽음을, 또 바울은 콜로세움에서 몸의 마디 마디가 끊기는 죽음을 당하였지만 그들의 죽음을 복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망대가 무너져서, 태풍으로, 차사고로, 혹은 비행기 추락등 갑작스런 사고로 사람이 죽을 수 있지만, 그러한 갑작스런 죽음은 그 죽음을 당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중 누구에게나 예고없이 찾아오는 이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가 준비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좋은 왕이나 대통령 혹은 다른 명칭의 위정자 밑에서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고, 아니면 극악무도한 위정자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시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악한 정부 하에 사는 사람들이 선한 정부 하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러한 곤고와 환란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들이 살던 시대는 아마도 다른 시대보다 더 악한 왕이 다스리던 시대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 아합시대의 사람이며, 유다의 예언자들 이사야나 예레미야도 각기 유다의 악한 왕 시대를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고와 예언은 악한 왕들과 제사장들과 방백들과 백성들을 무너뜨려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눈물로 호소함으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기도 하지만 목적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재정립시키고자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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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12장이하에서 개인의 변화와 아울러 그의 교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 사회에 대한 의무에 이어 오늘 본문에서는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말씀합니다.

1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위에 있는 권세들’이란 하나님의 권세를 의미함이 아니라 국가 권력구조의 상부 곧 국가권력을 말합니다. 권세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은 권세의 구체적 실행기관으로서의 의미입니다.
이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수시아(ἐξουσία)인데 이는 엑스(ἐξ)와 우시아(οὐσία)의 합성어입니다.
엑스(ἐξ)는 ‘...으로부터’란 뜻이고 우시아(οὐσία)는 ‘본질, 본체, 소유’란 뜻입니다. 해서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본질로부터, 본체로부터, 또는 소유로부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권세란 것은 어떠한 권세이든 ‘본질 혹은 본체’로부터 나와서 부여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 이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가 인간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사셨지만 그의 권위 혹은 권세는 로마정부에 의해서 부여된 것도 아니요, 유대의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 만물의 근본되시고 본질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목회자의 권세는 비록 사람들에 의해서 안수를 받더라도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서 비롯된다는 말씀입니다.
장로와 집사의 직분에 대한 권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통하여 안수가 베풀어지나 사람인 목사가 그에게 직분자의 권세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직분의 권세가 위임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맡은 직분을 경홀히 여기지 못할 것은 근본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국가권력의 권세(ἐξουσία)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許諾)하셨기 때문에 ‘위정자가 국가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위정자의 책무가 있습니다. 해서, 위정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한 정치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위정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한 정치를 베풀 때 그 나라의 백성은 이 위정자가 정한 법을 잘 준수하여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과 의의 정치를 하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절에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사람을 거스름이 아니요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대행자를 통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4절에,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관원이 하나님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악을 행하는 자를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심판을 베풀 권세가 그에게 있습니다. 해서, 믿는 사람들도 선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자유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율법 아래 놓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놓이지 않는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속박감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계속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인데 이는 율법의 말씀들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시사항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자유함을 받은 백성은 또한 세상 법에서도 자유한데, 율법을 지킴과 같은 이유로 세상의 질서를 위하여 그가 위임한 위정자를 통해 마련해놓은 세상 법규들을 지킴도 주님의 뜻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권세에 굴복하고 선을 행하여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5절에 기록된 대로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양심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7절에 이른 대로, 우리는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권한을 위임하신 세상 관원이 국가를 다스리기 위하여 제정한 국세와 공세를 바치는 것이 믿는 사람으로서도 마땅히 행해야할 일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눈에 보이는 우리 주위의 이웃을 사랑함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를 핍박하고 저주하는 원수에게까지 불쌍한 마음이 들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위정자가 정해놓은 법규를 잘 지킬 수 있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명령을 지킬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위정자의 법령은 현세에서 구속하는 힘이 큰데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현세에서 구속하는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법령을 어김은 손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쉽게 할 것입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공세와 국세의 납부를 등한시하거나 속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할 헌물을 속이거나 등한시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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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하여 권한을 위임받은 정부를 말하되 선한 권세에 대해서만 말씀하였을뿐 악한 정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되 악한 정부인 것이 분명할 때도 그들의 권세에 굴복하여야할 것입니까? 이 문제를 말씀드리기에 앞서서 왜 바울이 로마서에서 ‘권세에 대한 복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권세에 복종하라고 권면함은 바울 당시 일부 믿는 사람들이 폭력적 방법으로 당시의 로마정부에 대항하여 정부를 전복(顚覆)시키고자 하는 일에 전력(全力)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가장 큰 사명은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인데, 그들은 로마타도의 일에 전념함으로 자신들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증거할 기회는 전혀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정부에 대항할 뿐만 아니라 로마정부가 제정한 모든 법규를 지키지 않음으로 사회의 질서를 파괴(破壞)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한 사회에 속하고 국가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함이 악한 권세를 비호(庇護)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악한 권세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까 그 정부가 어떠한 일을 수행하든 상관없다고 말씀함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만 국가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직무를 수행해야하고, 국민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선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어떠한 시대였습니까?
바울은 로마황제 가운데도 가장 악명이 높은 네로시대에 살고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그가 예루살렘에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을 때에 그는 로마시민권을 소지한 사람으로서 로마황제에게 재판받게 해달라고 청원했고 그는 사악하고 우매한 황제, 네로에게 재판받기 위하여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고 재판의 결과 2-3년의 가택연금상태에 처해집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정부에 아부하거나 이를 비호한 것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기에 이 로마정부까지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한 대행자로 삼으셨다고 믿었던 때문일 것입니다. 혹은 이것은 다만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함이 그에게 가장 급박한 사명이라고 믿은 까닭입니다.
동시대를 산 베드로 역시 베드로전서 2장 17절에서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왕은 로마황제이며 그 또한 네로의 폭정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에 의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지만 “왕을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폭군을 두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간섭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시대도 로마정부에 의한 악정이 베풀어지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로마정부가 유대땅에 시행하고있던 로마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이를 지키셨습니다. 그는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취하게 하여 자신과 베드로 몫으로 세금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하신 말씀은 가이사--로마 황제와 하나님을 양극화(兩極化)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세상의 의무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무엇인지 분별하여서 잘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구약(舊約)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서 앗수르를, 유다를 치시기 위하여 갈대아인의 나라--바벨론을 그의 사자로 세우신 적이 있고 다니엘로 바벨론의 폭군 느부갓네살 밑에서 그의 신하로서 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거치면서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서 명쾌한 해석(解釋)을 내리기를 주저해왔습니다. 과연 여기에서 바울이 말씀하는 권세가 포악을 일삼는 정부까지도 포함하는 것인지 의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해석함에 “크리스챤들은 종교를 빙자하여 권세에게--그것이 악한 것이라 할지라도 복종하는 것을 거부(拒否)해서는 안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마틴 루터의 해석이 후에 히틀러 정권 때에 정권에 빌붙어서 그의 시녀 노릇을 하는 하는 신학자들에 의하여 악용되어 정부에 저항하는 크리스챤들을 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이에 칼 바르트(Karl Barth)를 비롯한 신학자들이 1934년에 5월 29-31일에 Barmen에 모여 독일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바-멘(Barmen) 신학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 골자는 교회가 국가의 시녀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어떠한 국가도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다른 목적으로 대체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국가 전복(顚覆)을 기도(企圖)하기 위한 선언이 아니라, 시대와 국가 상황을 초월한 교회의 사명을 밝히고자 함입니다. 우리 교회가 미국장로교회는 이 바르멘 선언(Barmen Delaration)을 장로교회 신조 가운데 하나로 택하고 있습니다.
                                                   
히틀러 자신은 “하나님의 사자”를 자처하여 메시야를 죽게한 책임을 물어 유대인들의 씨를 말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성경해석은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해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은 그가 권한의 최종적인 본체가 아님을 깨닫고 겸손한 자세로서 선하게 이를 수행할 것인데 그 권한밖의 일을 하려할 때 그 권한은 빼앗김을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임되어지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한을 잘못 사용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림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믿음의 분량을 감사하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값없이 선물로 받은 은사들을 잘 경영하여야할 것입니다.
한 사회를 사는 사회인으로서 우리의 책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안으로 우리를 핍박하고 저주하는 원수까지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축복하며 주님의 선으로서 사단의 악이 관영하는 사회를 주님의 평안의 사회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한 국가에 속한 백성으로서 우리의 책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간섭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권한을 위임하신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복음을 증거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그리하여야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이사야 43:1-7)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이사야 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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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이름은 중요합니다. 특히 First Name을 부르기를 즐겨하는 미국에서 주변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면, 발음하기 쉬운 First Name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미국사람들은 First Name을 쉽게 부르지 못하면 또한 친해지기도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해서, 미국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가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친구들을 잘 사귀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부르기 편한 한국어이름을 지어주든지 아니면 크리스천이름 또는 영어이름을 마련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저의 네 명의 아이들에게 한국이름과 크리스천 이름이 있는데, 학교에서 미국친구들은 Paul, Priscilla, Peter, Philip 등 크리스천 이름을 부르지만, 제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는 영어이름보다는 한국어이름이 더 정감 있게 느껴집니다. 커서 미국에 온 사람은 미국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한국적 사고나 문화에 더 익숙하여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부를 때, “야,” “어이,” “거기”라는 말보다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정겹고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이름이 주는 매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담아”라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창 3: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어린 사무엘을 이름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실 때 “야곱아,” “이스라엘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은 그의 자녀들과의 친밀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문 상담가로 유명한 앤 랜더스(Ann Landers)가 그에게 보내온 상담편지들을 그 주제별로 구분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두려움에 관한 상담편지들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상담을 요청하여 오는 가장 많은 이유가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갖가지 두려움과 걱정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기의 장래 또는 자녀들의 장래에 관한 두려움, 먹고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관한 두려움, 사고에 관한 두려움, 병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관한 두려움 등등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들 중에 90% 이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닌 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이러한 두려움과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두려움이 만병의 원인이 됩니다. 우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라비아 사람이 바그다드로 가다가 전염병을 만났습니다. "전염병아, 너는 어디를 가는 중이냐?" 아라비아인이 물었습니다. "나는 바그다드로 가는데 거기서 오천 명을 죽일 것이오." 전염병이 대답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바그다드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고, 그로 인해 오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 후 아라비아인은 다시 그 전염병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의했습니다. "너는 지난번에 오천 명을 죽이러 간다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오만 명을 죽였느냐?" 그러자 전염병이 대답합니다. "그렇지가 않소. 나는 오천 명만 죽였을 뿐이요. 나머지는 모두 공포로 죽어갔던 것이요." 두려움이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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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야곱아”라고 하심은 야곱의 후예 이스라엘과 유다 민족을 부르심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어 바벨론에 70년동안 포로의 삶을 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70년 동안 포로로 살게 하심도 하나님의 그들을 사랑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되, “야곱아”라고 그들의 근원이 되는 야곱의 이름으로 부르심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며 그들을 지키시는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그의 열악하고 불확실한 환경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만일 그가 거친 세상에서 혼자라고 생각하면 그는 불안과 근심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는데 마침 옆에 한 청년이 앉았습니다. 그와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다가 보니 청년이 교회를 다니기는 한데 장래 일에 대하여 근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청년에게 한 가지 문제를 내주었습니다. 성경책을 그 앞에 놓고 만년필을 성경책 위에 놓고 그 청년에게 세워보라고 말합니다. 성경책 위에 만년필을 세움이 당연히 불가능해 보이므로 청년은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목사님은 청년에게 ‘나는 세울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청년은 그 목사님이 약간 이상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만년필을 성경책 위에 세울 수 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목사님은 성경책 위에 만년필을 놓고 그 끝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에게 만년필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청년은 그게 어디 만년필을 세운 것이냐고 묻습니다.
목사님은 대답합니다: “만년필 스스로는 흔들리고 달려가는 기차 안에서, 아니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홀로 설 능력이 없지만 손이 그것을 붙잡고 있을 때 설 수 있는 것 같이, 우리 사람도 그 스스로는 여러 가지 변동하는 환경 가운데 서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신 팔로서 붙들고 계시매 서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1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약속 주시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속하였다”란 말은 ‘값을 주고 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또한 영적 이스라엘 된 우리를 위하여 값을 지불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되신 하나님께서 나를 이름으로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심은 참으로 대단한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젊은 남녀들은 열렬히 연애하는 동안에는 ‘너는 내 것’이라 찜해 놓기도 하고 커플링(couple ring)을 하나씩 나눠 끼기도 하고 커플 셔츠(couple shirts)를 하나씩 나눠 입기도 하면서 서로 상대방에 대한 소유를 다짐하기도 하지만, 더 매력적인 이성(異性)이 나타나면 그렇게 열렬히 사랑한다, ‘너는 내 것’이라 주장하던 사람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런데, 신실하시고 한결같으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병들고 추해지고 세상에서 실패한 것 같은 삶을 살더라도 여전히 나를 부르시며, 붙드시며,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물”(deep waters) 또는 “강”(rivers)은 감당하기에 벅찬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러한 어려운 순간들을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통의 연속인 그 때에 나는 견딜 수 없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데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하시니 그 어려움이 나를 아주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불”은 우리를 짓누르는 압박이요 또한 위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그 위험과 압박 가운데서도 나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3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재천명하십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유다가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것인데, 결국에 포로생활에서 구원함을 얻게 해주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다민족의 귀환을 허락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대가-속량물-로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s)에게 그 주변국가들인 애굽과 구스(=에티오피아)와 스바(아라비아반도 남쪽, 현재의 예멘) 등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4절: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페르시아가 주변국가들을 점령하여 유다에 대한 관심에서 이들 나라들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속량물로 내어주시고 유다를 구원하여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요 자녀인 이스라엘과 유다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 까닭이요,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연고입니다. 그들이 현재에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여 장차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의 삶을 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매 종국에는 놓임을 받을 것이란 약속입니다.

5-6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 북방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침공을 당하여 멸망하고 앗수르의 자국민 이주정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인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짐을 당하게 됩니다.
남방왕국 유다 역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120년 뒤로 시작하여 바벨론에 의하여 세 차례에 침공을 당하여 얼마간의 무리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또 상당수는 이곳저곳으로 흩어짐을 당합니다.
이와 같이 흩어짐을 당한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하는데,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와 메데, 그리고 시리아, 키프로스, 아르메니아, 애굽 등 사방에 흩어져 있게 됩니다.
이들 사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동서남북에서 모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예수님 이후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멸망당한 유대인들이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거의 2,000년 뒤인 1948년에 그들을 또다시 시온으로 모으시므로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이셨습니다.

7절: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우리가 어느 곳에서 어느 상황 가운데 처하여 있든지 항상 기억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바 된 자녀요, 그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심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매,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강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가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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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 사는 새들 가운데 비서새가 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하늘을 곧잘 날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벌레를 잡기도 하고 또 노래를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위기를 만나게 되면 날개가 꽁꽁 얼어붙고 온몸이 마비가 되어 다른 짐승들의 밥이 된다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비서새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찬양도 하고, 감사도 하고 예배에도 잘 참석합니다. 그러나 삶의 어려움이나 위기상황을 만나게 되면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선원이 노련한 사람인지는 잠잠한 바다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일어나 물결이 흉흉할 때 우왕좌왕하느냐, 아니면 차분하게 풍랑에 대처하는가를 보면 그가 얼마나 노련한 선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 앞에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하고 생의 위기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이 전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시며,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시며,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놀라지 아니하며, 강하고 담대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이사야 40:1-11)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이사야 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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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을 쓸 때나, 서론-본론-결론이 있는 작품을 만들 때 서론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을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의 가치가 결정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음악 작품들 중 가장 위대한 곡 다섯 개를 꼽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헨델(George Frederic Handel, 1685-1759)의 ‘메시아’ 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헨델은 1741년 여름 24일만에 ‘메시아’의 작곡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메시아’는 3부로 구성된 작품인데, 제 1부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강림-탄생에 대한 예언, 제 2부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제 3부는 부활과 영생입니다.
‘메시아’의 첫 번째 공연은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Ireland)의 수도 더블린(Dublin)에서 자선사업을 위한 연주회로 열렸는데 헨델이 직접 지휘하였습니다. ‘메시아’가 1743년 런던(London)에서 연주되었을 때, 청중석의 영국 왕 조지 2세는 ‘메시아’ 중 ‘할렐루야’가 연주될 때 작곡가인 헨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일어났는데 이를 본 다른 청중들도 왕을 따라 함께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관례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할렐루야’를 연주하거나 합창할 때는 청중들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제 1부 주제인 “메시아의 강림-탄생의 예언”을 위해서 헨델은 서곡 신포니아(Sinfonia)에 이어서 오늘 본문인 이사야 40장에서 소주제를 따옵니다. -Comfort ye my people(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은 이사야서 40장 1-3절,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골짜기마다 돋우어지리라)는 40장 4절, -And the glory of the LORD(주의 영광)는 40장 5절, -O thou that tellest good tidings to Zion(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은 40장 9절을 주제로 작곡한 것입니다.
또 제 2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중 상당부분은 이사야서 53장을 그 소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He was despised(그는 멸시 당하셨네)는 53장 3절, -Surely He hath borne our griefs(진실로 그는 우리 슬픔을 담당하셨네)는 53장 4절, -And with His strifes we are healed(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53장 5절, -All we like sheep have gone astray(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도다)는 53장 6절, -He was cut off out the land of the living(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셨도다)는 53장 8절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제 3부 “부활과 영생”은 고린도전서 15장과 요한계시록 5장의 천상에 계신 어린 양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헨델이 ‘메시아’의 서론 부분인 제 1부 “메시야의 강림-탄생에 대한 예언”을 이사야 40장을 갖고 시작하였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서는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전체와 이사야서를 대조해보면 참으로 신기한 많은 것들을 발견합니다. 성경이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갖고 있듯이, 이사야서는 전반부 39장과 후반부 27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약(舊約)의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책망과 징계를 다루고 있듯이, 이사야서 전반부 39장 중에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책망과 징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新約)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예고하는 세례요한의 광야에서의 외침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과 같이(마태 3:1-2; 마가 1:1-8; 누가 3:2-6), 이사야서 후반부의 시작인 40장도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라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시작합니다.

이사야는 주전 740년부터 690년까지(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 약 50년간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악한 왕 므낫세에 의하여 톱으로 몸이 반동강으로 썰리는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히 11:37 참고). 그가 활동을 시작한 때는 북방왕국 이스라엘이 아직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기 전(주전 722년)입니다. 남방왕국 유다의 멸망이 주전 586년이니까 유다의 멸망은 아직 먼 것처럼 보일 때였습니다.
그가 100여년 뒤에 일어날 멸망의 사건을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예언케 하십니다.
또 유다가 아직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케 하십니다. 아직 나라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인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하여 유다를 돌려보내어 예루살렘을, 그리고 성전을 중건케 할 것을 예언케 하십니다(사 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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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유다가 아직 바벨론에 끌려가기도 전에 포로상태에서 그들이 해방되어 돌아오리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유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케 하신 것처럼, 유다 백성이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애굽에서 430년간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모세를 통하여 인도해내셨던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감옥과 같은 그곳에서의 복역에 종지부를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위로의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왜 헨델의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의 주제가 되었습니까?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홍해를 건너 광야로 건져내시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유다 백성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때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를 준비해 주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영적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인간들을 그곳에서 해방시키시고 새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실 메시아를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인간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창세기 1장 26-2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이브의 범죄한 이후 모든 인간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음녀 바벨론과 같이 죄된 세상에서 포로의 생활을 하던 인간들을 그 옥에서 해방시키시고 새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1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로는 바벨론의 포로상태에서 돌아올 유다에 대한 위로일뿐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포로 상태에서 놓임을 받는 우리를 향하신 위로이기도 합니다.
                                                 
2절에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복역의 때’--곧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의 종료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직, 죄악에서 돌이킴이 없고 그에 대한 징계도 없는데, 하나님은 징계 이후의 용서를 약속하여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함에 대한 징계를 하시는데, 우리가 회개할 때 그의 용서는 갑절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기억지 아니하시며, 회개한 자에게 크신 축복을 주시고 그 상한 심령을 위로하십니다.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외치는 자”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계시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외치는 자”이신 하나님의 “소리”, 곧 선지자로서 유다 백성들에게 고합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어떻게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대로를 평탄케 할 수 있습니까?
4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4절에서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골짜기”라고 함은 죄로 움푹 파인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함을 통하여 우리의 죄의 골이 메꾸어지고 돋아질 것입니다. “산”이라고 함은 우리의 자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산같이 자고한 마음이 주님 앞에 겸손하고 낮아져서 평탄케 됩니다. 곧, 죄의 골도 메꾸어지고 교만의 산도 낮아져서 평평하게 됩니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맞이할 준비된 마음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앞서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면서,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돌아선 사람들에게 요단강에서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5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다백성들이 포로에서 풀리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그들 가운데 두기 위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므로 솔로몬의 성전에 머물던 여호와의 영광을 그들이 보기를 원합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되 오직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의로와진 사람들만이 그 영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도가 들어갈 최종적인 영광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6-8절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가로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불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장미 꽃이 아름답지만 만개(滿開)하면 그 다음은 시들어짐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은 절정을 지난 다음에는 곧 시들어갑니다.
이것이 낙원을 상실한 땅에서 사는 인생과 피조물을 향하신 여호와의 기운--운행의 법칙입니다.
세상사의 쉬 변하는 모습에 관하여 야고보는 1장 9-11절에서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임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영영히 불변하며 시들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로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확실하고 불변합니다.
이 불변하며 영원히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요한 12:34),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벧전 1:25)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25절에서 베드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9절에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름다운 소식--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오를 것인데, 여기서 높은 산은 복되고 아름다운 소식을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전파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목청을 돋우어서 크게 외쳐야 할 것입니다. 부끄럽고 수줍음으로 입술을 닫고 있든지 낮고 불분명한 소리로 전할 것이 아닙니다.

10-11절에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고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때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의지하고 행한대로 우리에게 상급을 주실 것이며, 목자가 양무리를 대함과 같이 부드러움으로 하실 것이며 그의 양떼인 우리를 먹이시고, 품에 안으시고,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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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위로를 그 백성에게 선포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3절), 말하는 자의 소리(6절)가 된 것같이, 또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된 것같이 우리 모두가 세상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알리고, 주님의 길을 평탄케 예비하라고 선포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 하되, 높은 산에 올라가 크고 분명한 소리로 아름답고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Sunday, January 12, 2014

“네 원수가 주리거든” (로마서 12:14-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로마서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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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는 것이 우리 정서생활에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음악을 좀 더 세분화시켜 말하면,  대중 유행가는 육적인 감각을 만족시키고, 명곡 (클래식)은 정신적인 면을 만족시키는 것이지만, 찬송가는 인간의 영혼을 어루만져주어 영혼의 상처를 치료하여준다고 합니다. 유능한 음악치료사(Music Therapist)는 찬송가의 심령 치료효과가 높음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찬송가를 치료에 도입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예배와 교회교육을 받고 찬송가를 부르며 자란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안정되어있다는 연구결과도 이를 뒷바침하여줍니다.
우리 교회 교우님들도 예배중에 혹은 가정에서 마음 깊숙히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많이 부르심으로서 육신의 병을 예방하시고, 혹 육신의 질병이 있으신 성도님들은 병치료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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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 밖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살펴보시면 많이 느끼시겠지만, 믿는 사람의 삶이 믿지않는 사람의 삶과 다르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드리고 거룩한 찬송을 부르지만 돌아가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생활하다 보면, 나의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이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생활 속의 거룩함과 경건의 삶은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세끼 밥먹고, 옷입고, 아이키우고, 이웃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되 하나님의 의와 선하심에 따라 믿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말만 앞세우고 약속을 식은죽 먹듯이 깨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님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옆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 배만 채우고 두드리고있는 삶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삶이 아님을 압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열 가지로 사회를 살아가는 믿는 사람이 할 일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14절에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만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한걸믐 더 나아간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행동과 삶이 아무래도 좋다고 말씀합니까?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대로의 삶을,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고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옆사람을 도와주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님은 그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와 원수된 모든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은 예수님을 증거하다 그를 핍박하여 돌로 치는 군중들을 저주하는 대신에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일제 시대를 사신 최 봉석(일명 최 권능)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신 까닭으로 감옥에 갇힘을 당하고, 모진 고문을 당하였는데 고문을 당할 때마다 비명을 지르거나 그를 고문하는 일본형사를 저주하는 대신에 “예수 천당” 하면서 그 고문을 이겨내셨다고 합니다. “예수 천당”이라고 함은 고문을 하는 일본형사라도 “예수님 믿고 천당 가라”는 축복의 말씀일 것입니다.

둘째는,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과 슬픔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있는 이 다른 사람은 교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인데, 이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의 형편에도 동참하여 기쁨과 고통을 나누어 갖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이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우리의 하는 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16절에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 말씀합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캠패인을 벌인 적이 있지만, 믿는 사람들이 믿지않는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실제 삶에 있어서도 그들과 조화(調和)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함께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네째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낮은 데 처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같은 본체이신데 종의 형상으로 낮아지셔서 우리에게 섬기는 자의 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행동을 할 때 그 사람들을 변화(變化)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욕하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의 행동을 우리가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지 않는 이웃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해하다(understand)"는 우리가 상대방보다 “낮은 곳에” “아래에” “서야지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다섯째는, “스스로 지혜(智慧) 있는 체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낫거나 완벽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친구로 삼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친한 친구들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부족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인데도 나의 친구가 된 사람은 그의 장점을, 지혜 있음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을 대하거나 사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별로 인간적인 지혜도 없으면서 지혜있는 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십대 후반 청년 때에 아직 그리스도의 도가 잘 깨달아지지 않아서 기독학생 모임에서 저보다 두세 살 위인 저보다 먼저 믿은 사람과 대화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자기의 성경지식과 믿음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자기에게는 전혀 의심이 없고 삶 자체도 완전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이 당시 저에게는 상당히 거부반응으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같은 12장 3절에서 바울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智慧)롭게 생각하라” 말씀했는데,
우리의 인간적인 지혜도, 믿는 사람으로서의 지혜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없습니다. 해서, 우리는 다만 성령의 능력과 그 지혜로서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는, 17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합니다.
선(善)을 악(惡)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일이요, 악(惡)을 악(惡)으로 갚는 것은 세상사람들의 방법이요, 악(惡)을 선(善)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마땅히 할 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으로 창조된 첫 사람 아담을 악의 모습으로 타락시킨 사단은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선(善)을 방해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사역 처음에 그를 세 가지 것으로 시험하였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도 군중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타락한 이후 아담과 그의 후손된 인류는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갚는 보응(報應)의 법칙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고하신 선이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악이 넘쳐나는 이 세상을 살지라도 “선한 일을 도모(圖謀)하라”고 말씀합니다. 도모(圖謀)하라는 뜻은 소극적(消極的)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하고 모색하는” 적극적(積極的)인 자세입니다. 하나님 앞에 악은 하나님의 형상에 역행하는 것이요, 선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닮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곱째는,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평화는 세상과 타협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일시적인 평화가 아닙니다.
세상의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근원적인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말씀하실 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화목할 뿐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치료해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기도한 것 처럼, 우리는 분쟁이 있는 곳에 화평을,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치료를 공급해주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덟째는, 19절에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원한(怨恨)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하다보면 분냄과 증오의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잘 통제가 되지않고 폭발하여 겉잡을 수 없이 되어버립니다.
그 사람은 나의 다리 하나를 분지러 놓았는데 나의 분냄으로 그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말씀하신 것은 원수 갚는 것을 권장하신 것이 아니라, 원한관계를 해소하되, 당한 것 이상으로 가해하지 말라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가해하되  당한 것 이상으로 하였습니다. 이 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아시는 예수님은 해서 마태복음 5장 39절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냄으로 더 큰 화와 복수를 자초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홉째는, 20절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지혜서인 잠언 25장 21-22절에서 따온 말씀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원수를 사랑함에서 그 극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눈에 보이는 형제, 나에게 잘해주는 이웃뿐 아니라, 나를 핍박하고 못살게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수 있게 됩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장 큰 두 계명이 첫째는 하나님 사람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장 45-47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원수된 자까지도 포용하는 마음입니다.

그리함으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했는데, 활활 핀 숯불을 머리에 두는 것은 고대 근동의 형벌 가운데 하나로서, 이로서 죄인이 고통을 당하고 그 얼굴이 뜨거움으로 붉게 변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을 함은 선한 행동으로 악인(惡人)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고, 후에 그 마음에 깨달음을 갖게 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열째는, 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백성에게 바라시는 긍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이 사단의 지배로 악이 관영(貫盈)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서 나타나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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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과 12장은 우리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에게 참으로 중요한 장들입니다. 8장은 로마서 교리부분의 마지막 장으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믿는 사람들이 왜 그러한 삶을 계속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말씀하였는데,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항상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2장은 성화의 삶의 구체적인 지시사항입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변화입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결단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교회의 변화인데, 이는 우리 자신의 변화로서 가능한데, 교회에 속한 각자가 자신에게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어진 은사를 잘 경영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로서 자신이 할 일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지 9-13절에서 열두 가지로 권면했습니다.
셋째는 사회의 변화인데,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교회의 모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서 수동적이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 확장하는 작업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장차 우리에게 임하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질 것이며, 그 나라에서 주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는 자랑스런 천국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 (로마서 12:9-13)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 (로마서 1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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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서 출생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루빈슈타인(Arthur Rubinstein, 1887-1982)은, “하루 연습을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을 쉬면 내 친구가 알고, 사흘 연습을 쉬면 온 청중이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에 비유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주 신앙생활을 쉬면 내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두 주 신앙생활을 쉬면 가까이 지내는 교우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세 주 신앙생활을 쉬면 온 교회 교우들이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안다.“

신앙생활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요 훈련이라고 바울은 디모데전서(4: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연습을 게을리했을 때 경기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낼 수 없듯이, 믿는 사람이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하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그 길을 달려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의 연습을 하고 훈련을 쌓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하루를 시작함에 기도로 시작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서 그치면 이는 연습과 훈련의 몸풀기에서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다음 교회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예를 들면 집사는 집사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성가대원은 성가대원으로서 연습과 본분을 잘 감당하고, 교사는 교사로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힘 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나의 도움이 필요한 교우가 있나 돌아봄이 필요합니다.
나아가서, 교회 밖에 내가 전도할 대상자가 있나 살펴야 할 것이며, 내가 선교를 직접 감당하지 못할 때 선교를 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님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생각하고 그들 돕는 일을 실천에 옮김이 필요합니다. 작은 교회에 속하였다고 내게 할 일이 없습니까? 오히려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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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로마서 12장 3-8절에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교회의 변화에 참여하되 주님께서 은혜(恩惠)로서 우리의 믿음의 분량(分量)에 따라 허락(許諾)하신 은혜의 선물인 은사를 지혜롭게 잘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지나친 과욕을 내지말고 마땅히 생각할 것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인 이 은사를 잘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은사를 사용함은 우리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서 서로를 위하고 유익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이 은사에는 사람의 재능과 성격 등에 따라 주님께서 각기 다른 선물들을 주셨는데 이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 받은 은사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한 은사의 활용이라기 보다는, 우리 교인들이 교회와 가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 제시하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지침(指針)을 12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첫째로 한글성경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라고 되어있는데, 명령적인 의미로서 영어성경의 번역이 원래의 뜻에 가깝습니다: “Let love be genuine!"(RSV) “성도의 사랑이 거짓없는 순수한 사랑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반대급부(反對給付)를 바라는 사랑이어서도 안되고,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잘해주는 것이어서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22에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말씀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뜨겁게 사랑함이--체면때문도 아니요 무엇을 바래서도 아닌--거짓없는 사랑입니다.

둘째로 “악을 미워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은 악과 결별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하는 대로 죄와 악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내가 죄짓더라도, 허물이 많은 삶을 살더라도 주님께서 내 미래죄도 용서하여 주셨으니 상관없어” 하는 사람은 여전히 악을 미워하지 않는--악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은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로 “선(善)에 속하라”고 말씀합니다. 악(惡)이 어둠이요 사단의 권세(權勢)라고 한다면, 선(善)은 빛이요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영역이니까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속하여야 할 것이요, 추구하여야 할 일입니다.

네째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love one another with brotherly affection)"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어느 사람의 집에서 무리에게 말씀을 하고 계신중이었는데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여러분의 형제요 자매입니까? 우리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원하는 우리는 영적(靈的)인 새 가족입니다. 우리는 교우들을 사랑할 때 형제사랑(brotherly love)으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부족한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받은 대접만큼만 그 사람을 대합니다. 그가 나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으면 나도 그를 위해서 별로 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우들이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먼저 다른 지체인 교우를 사랑하고 존경할 때, 그와 같이 아름다운 일들이 교회내에서 계속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12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선지자요 율법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절을 황금율(Golden Rule)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그를 원수로 대하는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제물(代贖祭物)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할 때도 우리가 “존경하기를 먼저 할 때” 그러한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로 바뀔 것입니다.

여섯째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믿지않는 사람이 칠일을 갖고 생활하는데 우리는 육일을 갖고 살면서 그들과 같은 혹은 더 나은 삶을 감당하여야 하므로 부지런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일을 말함이 아니요 교회 안에서의 일입니다. 교회의 일은 나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 아니니까 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로 “열심(熱心)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당부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忠誠)이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길 때 열심을 내기가 어려우나 이렇게 함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확증(確證)함입니다.

여덟째로 “소망(所望) 중에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 소망이 없고 낙담과 좌절만 있다면 이는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소망 중에도 즐거워하므로” 믿음이 연약한 다른 교우들에게도 소망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아홉째로 “환난(患難) 중에도 참으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서 자주 반복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의 환난과 곤고가 임하지만 이를 끝까지 잘 감당할 때 우리에게는 주님의 상급이 마련되어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4에,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逼迫)과 환난(患難)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열번째로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당부합니다.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의 영적(靈的) 호흡(呼吸)입니다.
사람이 호흡을 중단하면 죽듯이 믿는 사람이 기도를 중단함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狀態)에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쉬지말고 항상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님, 기도할 것이 별로 없는데요.” 기도할 것이 왜 없겠습니까? 다만, 무엇을 기도할지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이지요.

열한번째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말씀합니다.
형제를 거짓없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성도 가운데 누가 무슨 어려움이 있음을 압니다.
다만 우리가 교회에서 누가 무슨 어려움이 있는줄 모르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어려움에 대해서 별로 듣고싶어 하지않고 보고싶어 하지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어려움을 알기는 알지만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에 더딘 것은, 듣기는 듣고 보기는 보아도  수다꺼리의 대상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14에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너희 가운데 있는 소자(=작은 자)에게 잘 한 것이 곧 나에게 잘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소자가 누구입니까?
다름아닌, 우리중에 어려움을 당하고있는, 고통을 당하고있는 성도입니다. 이들을 돌보고 필요한 것을 공급(供給)함이 우리 믿는 사람이 마땅히 행할 바 입니다.

열두번째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전에 한국의 시골 인심은 나그네에게 음식도 대접하고 잠자리도 제공해주는 아름다운 풍속이었습니다.
누구나 이러한 인심이 좋은 줄 압니다만, 막상 낯선 사람을 대접할 엄두가 잘 안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해치지나 않을까? 무엇을 훔쳐가지나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혹은 나와 별로 상관없는 사람에게 왜 잘해주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그네 대접하기에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 그랬고, 그의 조카 롯이 그랬습니다. 특별히 롯은 천사들을 잘 대접함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운데 딸 둘과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구분에서 양의 반열에 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영접(迎接)하였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형제·자매 가운데 쉴 고이 없는 사람에게 잘 대접하는 것이, 혹은 낯선 사람이 우리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할 때에 그들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 주님을 잘 대접해준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말로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앵부새처럼 되뇌이기 보다는 실제로 고통당하고있는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잘 대해주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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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성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근본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이 모든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세상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앞서 교회 안에서 성도에 대한 사랑을 먼저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를 사랑하고 돌보되 그들에게 대접을 받은 답례로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그 일들을 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이며 우리 교회가 속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과 은사(恩賜)” (로마서 12:3-8)

                                      “믿음의 분량과 은사(恩賜)” (로마서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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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다,” “우리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가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坐礁)되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섬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파선(破船)된 배에서 몇 가지 물건을 건져낼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약품상자였습니다. 크루소는 그 약품상자 속에 있는 약 가운데서 가장 좋은 약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구약’ 곧 성경이라는 약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합니다. 그는 시편 50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과 도우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50:15)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나?” 하는 측량(測量)의 기준은 내가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나의 연봉이 얼마나 올랐나? 얼마나 부자가 되었나? 얼마나 높은 지위를 얻었나? 세상을 살 때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잘된 횟수가 얼마나 많았나?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셨나? 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가름될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그것은 나의 입술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횟수가 얼마나 많아졌나로 판가름됩니다.
“아-멘”을 잘하는 신자를 보면 목사님이 실수로 틀린 말씀을 하는데도 습관적으로 “아멘”을 하여 웃음을 자아냅니다. 저는 이것이 처음에는 잘못된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더 생각해보니 그리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무엇이나 옳은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입술에 항상 “주님 감사합니다”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사람의 기준으로는  “감사합니다”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 감사합니다” 하시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씀하시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때, 감사할 수 없는 조건에도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우리의 고백과 증거대로 “감사할 조건들”을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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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로마서 12장의 첫 부분으로서 우리 자신의 변화(transformation)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는 교회의 변화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3절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말씀합니다.
                                                  
여기 카리스(χάρις) ‘은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카리스(χάρις)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 가운데 카라(χαρά)가 있습니다.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할 때에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무덤을 방문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그에게 “평안하뇨?” 물으실 때, 이 평안하뇨란 인사말의 다른 뜻이 “기뻐하라(χαίρετε)” 였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에게 기쁨이 넘쳐나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욕심이 우리로 불만의 마음을 갖게 하며 불만의 마음이 우리로 일하지 않게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가 2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돈을 맡았는데도 다른 종들에게는 그보다 더 많은 달란트가 맡겨진 것에 불만을 품었을 떄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야고보는 1장 15절에서, “욕심(慾心)이 잉태(孕胎)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長成)한즉 사망(死亡)을 낳느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自足)하기를 배웠노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헤아려 아는 것도 나 자신의 모습으로 헤아려 알아야 합니다. 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하면 부족하고 흠이 많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의 모양으로도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 주님을 깨닫고자 할 때,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부족한 중에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4-5절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에 눈, 코, 귀, 입, 손, 발, 기타 여러 다른 기관들이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쓸데없이 그냥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몸인 교회의 지체는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사람 몸의 각 지체가 중요하듯이 교회를 구성하는 각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몸을 구성하고있는 지체인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교우를 비난하고 판단할 때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지체의 각 부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이신 교회에 속한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 몸의 지극히 미약한 부분--혹 평소에는 필요없는 것같이 보이는 지체의 일부분 맹장이 잘못되었다든지, 혹은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다든지 할 때에 우리는 그 부분을 치료하기에 전 신경을 다 씁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미약한 것 같이 보이는, 별로 필요없는 것같이 보이는 작은 자의 아픔과 고통에도 동참하여야 합니다. 그의 잘못됨을 뒤에서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하기 보다는 그 지체의 치료를 위해서 힘쓰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5-26절에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말씀합니다.
                                                   
6절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χάρις)대로 받은 은사(χάρισμα)가 각각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은사(恩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신 성령의 선물(膳物)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 고린도전서 12장 28절(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하는 것, 사랑), 에베소서 4장 11절(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에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능력에 따라, 소질에 따라, 혹은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른 은사들을 주셨는데,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6-8절에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성령의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 열거된 은사들은 고린도전서 12장이나 다른 성경구절에 나오는 은사들에 비해서 비교적 생색이 들나고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라기 보다는 속에 숨겨진 은사들이 많습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믿음의 분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로서 예언(豫言)은 점쟁이가 점을 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선지자(先知者)를 예언자(豫言者)라고도 하며 선지서를 예언서라고도 하는데, 선지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점을 치거나 예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 어떻게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인가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혹은 장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던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사로이 사람의 운세를 점치면서 은사를 받았다고 함은 잘못입니다.

섬기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섬기는 일을 잘 감당함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라 하여 일을 감당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면 이 사람은 일을 하면서도 은사를 제대로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하고, 권위(勸慰)하는 자는 권위(勸慰)하는 일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권위(勸慰)한다고 함은 권면하고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또, 구제하는 자에게는 성실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다스리는 자는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부지런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긍휼(矜恤)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교회에 속한 각 사람이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함에 자기에게 허락되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잘 경영할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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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은 어떠한 은사들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저마다의 각기 다른 은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어떠한 은사들이 있나 한 번 찾아보시고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남들에게 있는 그럴듯한 은사가 없고 별로 생색나지 않는 은사가 있다고 하여 불만스런 마음으로 자신의 은사를 천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개발하시고 잘 경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겸손하고 감사하는 삶의 모습으로 인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몸이신 교회를 건강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