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치드케누의 하나님” (예레미야 23:1-8)
1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건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예수님의 11제자들 가운데 순교하지 않고 노년을 보낸 사람은 오직 사도 요한밖에 없을 정도로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들을 의롭게 하는 믿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1세기 클라우디우스(Claudius), 네로(Nero)와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 때만 박해와 순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2세기에 들어서도 박해는 계속되고 철학을 사랑한 황제라고 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때도 박해와 순교는 계속되었습니다.
2세기의 순교자들 가운데는 안디옥 교회의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와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Polycarp)이 잘 알려진 사람들이지만 무수한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그들을 하나님 앞에 의롭게 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사나운 짐승에 의하여, 불에 의하여, 또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중국에 삼자교회(三自敎會)라고 하는 정부의 공인교회가 있지만 많은 중국의 크리스천들은 삼자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참 믿음의 삶이 아니라 하여서 정부의 단속이 심한 가정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 해서, 가정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다가 붙잡혀 매를 맞고 감옥에 보내지기도 하고 심하면 죽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정교회에서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왜 그들이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고자 하며 순전한 믿음을 지키고자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을 의롭다 칭하시며 하나님께 가까이 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북한 평양 만경대구역에 북한 당국이 인정하는 공식교회인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있지만 이 둘이 참된 의미의 교회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북한에 지하교회가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갑론을박이 된 적도 있지만 탈북한 사람들의 증언들과 북한을 왕래하며 비밀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보고를 보면 그곳에 지하교회들이 존재하며, 미국의 한 종교단체의 증언에 의하면 4만 명 이상의 지하교회 신자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예배드리는 것이 발각되거나 성경책이나 찬송가를 소지한 것이 발견되면 그들은 심한 고문, 감옥생활 또는 처형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들은 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하신 까닭입니다.
2
거룩함(holiness, sanctification: 성화)을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process)이라고 한다면, 의로움(righteousness, justification: 칭의)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리(right)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의로운’ 백성이라 부르시고 그들에게 ‘내게 가까이 나오라’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그 축복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기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형식적인 제사와 예배가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전혀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내게로 가까이오라,’ ‘내 말을 청종하라’고 부르시지만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며 말씀을 듣든지 읽고 묵상하든지 합니까?
나를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며 얼마나 자주 읽기를 원하십니까?
구약시대와 예수님의 때와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이 오해하는 부분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난지 팔일만에 육신의 할례를 받고 그 자녀들에게도 난지 팔일만에 육신의 할례를 받게 하는 그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습니까?
그들은 율법을 의무조항으로 지켰기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율법 지킴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의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말씀대로 살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에녹을, 노아를, 아브라함을 축복하셨습니까?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6절에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賞)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11장 7절에서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方舟)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11장 8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 또는 세례로서가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키거나 선한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우리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두려워서 두 차례나 자기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며 다른 남자--애굽왕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양보하였습니다.
로마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 이후 600여 년 뒤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의 일인데,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은 그가 아직 사라의 여종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갖기 전이므로 아마도 85세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창세기 16장 16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가질 때 그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얼마만한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여기셨습니까?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로 고백하고 바라보는 믿음이 얼마나 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십니까?
사실 우리의 믿음의 있고 없음, 많고 적음은 주관적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있으면 의롭다 하심과 구원을 얻고, 생명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내’가 생각할 때에는 김집사나 이집사나 박권사 보다 ‘내 믿음’이 백 번 낫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도 동일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의이신 여호와,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여호와--‘여호와 치드케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의로와질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의’ 되신 하나님께서 ‘너는 의롭다’고 칭하실 때 또는 여기실 때 의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고 의인이 된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인한 나의 의’는 나 한 사람밖에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나 한 사람밖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에스겔서 14장 14, 16, 18, 20절에서 하나님은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칼이나 기근이나 사나운 짐승이나 온역으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고자 하실 때 노아, 다니엘, 욥과 같은 의인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오직 자기 생명만 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의인 노아, 다니엘, 욥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다른 사람을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을 향하여 의롭다 하시며 해서 인생을 구원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 찌드케누’ 되시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의롭다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서 45장 25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50장 8절에서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라고 반문합니다.
바울도 로마서 8장 33-34절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반문합니다.
의롭다고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아무도 우리와 다투어 승리할 수 없고, 우리를 하나님께 송사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양들인 이스라엘과 유다의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오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며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게 한 지도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의 잘못된 인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징계하시되, 북방왕국 이스라엘을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하게 하시며 남방왕국 유다의 거민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을 그곳에 머물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곳에 고아와 같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아주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새로운 목자들을 세워서 그들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하실 것입니다.
3-4절에서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縮)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목자들은 바벨론 포로귀환 당시의 지도자들인 에스라와 느헤미야, 스룹바벨과 예수아 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범적인 목자들의 예로서 궁극적이고 선한 목자 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5-6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여호와 치드케누)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가계에서 오실 것인데 그가 왕이 되어 지혜와 공평과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실 것을 예언하시며, 그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여호와’라 칭함을 얻을 것을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우리에게 오심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시기 위함이며, 또한 그 스스로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며 해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특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히 5:6, 5:10, 6:20, 7:17).
히브리서 7장 1-3절에서 이 멜기세덱에 관하여 설명하는데,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신약성도들과의 관계의 모형인데, 멜기세덱이란 이름 자체는 ‘의의 왕’이란 뜻으로 ‘우리의 의되신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칭하심을 얻은 아브라함은 신약백성을 대표합니다.
멜기세덱이 살렘 지방의 왕이었기에 그를 평강의 왕이라고도 했는데, 이 또한 ‘여호와 살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름입니다.
‘여호와 치드케누’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구약시대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롭다고 하신 것같이, 신약시대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성도들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19-20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라고 함은 우리가 ‘우리의 의(義)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심을 믿을 때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성소에 들어갈 권한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감’은 의로와진 자의 권리-곧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3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만한 무슨 자격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무슨 대단한 믿음이 됩니까?
우리가 판단할 때는 별 것 없는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실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으나 찬양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싶으나 그러한 환경 가운데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환경 가운데 우리를 의롭다 하시며 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축복하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Saturday, March 31, 2012
“거룩케 하시는 여호와” (레위기 20:6-9)
“거룩케 하시는 여호와” (레위기 20:6-9)
1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말인데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돈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돈을 지나치게 또는 매우 사랑하든지 아니면 돈에 지극히 찌들린 사람일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늘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속일 것인가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사기꾼이든지 사기꾼의 성향이 농후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떤 남자친구의 얼굴을 혹은 여자친구의 얼굴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대상을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나님을, 예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삶은 혹 조금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무엇을 생각하느냐,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땅에 속한 사람일 수도 있고, 하늘에 속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2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거룩함은 얼핏 듣기에는 따분하거나 고리타분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룩함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로워지고 신선하여지는 것입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천국의 삶이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삶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천국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거룩함의 장소인 천국에서의 날들은 성도들이 매일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맞이하는 날들입니다.
거룩함은 땅에 속한 것들과 우리의 옛모습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인데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믿지 않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술집을 다니던 것, 노름을 하던 것, 다방이나 기타의 장소에 몰려 앉아 노닥거리며 다른 사람들의 흉을 보던 재미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아직 거룩하여지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5-6절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은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함은 우리가 예전에 살던 어두움에서 나와 빛이신 하나님께로 매일매일 가까이 나아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8-9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의로움(righteousness, justification: 칭의)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리(right)라고 한다면, 거룩함(holiness, sanctification: 성화)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과정(process)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자 함으로써 전에 상실하였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함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그들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곧, 그의 선하심, 신실하심, 의로우심과 인자하심과 자비하심 등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인하여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거룩하여지기 위하여 수도원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수도승들이 하는 성가를 하루종일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거룩하여지기 위하여 수도승이 되거나 목사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매일 매일 평범한 삶을 살면서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며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함이 거룩함입니다.
왜 거룩하여져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11장 44절, 45절, 19장 2절과 20장 26절에서 반복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20장 26절에서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4-16절에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하던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로서 우리의 옛날 사적 욕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것이 거룩한 자가 되는 길입니다.
거룩함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거룩하여질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하고,
또한 4장 7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여지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우리는 거룩하여져야 할 것입니다.
설교가 J. 스토튼은 “거룩함이 없다면 신약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은 천국은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아름다운 경치가 존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천국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궁전과 신전으로 가득 찬 수도가 존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천국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대리석과 보석으로 지은 건물들이 존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천국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건강과 안락함과 사치와 축제가 존재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런 것들이 천국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또한 교육과, 철학, 문학과 예술 등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그런 것들이 천국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이 없으면 천국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의 요건으로 성도들의 거룩함은 필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14절에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여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거룩하여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여호와 므카디슈 하나님께 가까이 나와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함으로 거룩하여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얼마나 말씀을 따라 살면 거룩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거룩하게 하였으니 너는 거룩하다 선포하실 때 우리는 거룩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6-7절에서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신접한 자나 박수를 추종하지 않음으로, 9절에 나오는 바대로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지 않음으로 우리는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일을 성수하며 아비나 어미를 공경함으로 우리는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에 의지하여 우리와 죄와 허물을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우리는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20장 8절, 21장 8절, 15절과 23절에서 반복적으로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8절에서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I am Jehovah-M'Kaddishkem.)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31장 13절에서 모세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신약성도가 주일을 구분하여 지킴이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 되신 것과 같이 신약백성들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 여호와-므카디슈 되십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곧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도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말씀하고,
또한 1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피 흘리시고 고난 당하심으로 신약의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26장 17-18절에 나오는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언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거룩케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봄으로 거룩하여질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매 거룩하기를 원합니까?
거룩하기 위하여 산 꼭대기에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거룩하기 위하여 광야로 가서 자신을 수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룩하기 위하여 하루종일 기도하거나 수도승과 같이 성가를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거룩하기 위하여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금욕주의자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거룩하기 위하여는 그저 주일을 성수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와 그를 예배드리면 됩니다.
거룩하기 위하여 평상의 삶 가운데 그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자 힘쓰면 됩니다.
거룩하기 위하여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를 삶 가운데 신뢰하면 됩니다.
거룩하기 위하여 날마다의 삶 가운데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예수님을 믿으며 그를 전파하면 족합니다.
거룩하여 지는 것이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또한 예수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거룩하여지기를 축원합니다.
1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말인데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돈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돈을 지나치게 또는 매우 사랑하든지 아니면 돈에 지극히 찌들린 사람일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늘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속일 것인가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사기꾼이든지 사기꾼의 성향이 농후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떤 남자친구의 얼굴을 혹은 여자친구의 얼굴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대상을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나님을, 예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삶은 혹 조금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무엇을 생각하느냐,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땅에 속한 사람일 수도 있고, 하늘에 속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2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거룩함은 얼핏 듣기에는 따분하거나 고리타분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룩함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로워지고 신선하여지는 것입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천국의 삶이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삶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천국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거룩함의 장소인 천국에서의 날들은 성도들이 매일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맞이하는 날들입니다.
거룩함은 땅에 속한 것들과 우리의 옛모습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인데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믿지 않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술집을 다니던 것, 노름을 하던 것, 다방이나 기타의 장소에 몰려 앉아 노닥거리며 다른 사람들의 흉을 보던 재미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아직 거룩하여지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5-6절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은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함은 우리가 예전에 살던 어두움에서 나와 빛이신 하나님께로 매일매일 가까이 나아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8-9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의로움(righteousness, justification: 칭의)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리(right)라고 한다면, 거룩함(holiness, sanctification: 성화)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과정(process)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자 함으로써 전에 상실하였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함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그들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곧, 그의 선하심, 신실하심, 의로우심과 인자하심과 자비하심 등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인하여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거룩하여지기 위하여 수도원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수도승들이 하는 성가를 하루종일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거룩하여지기 위하여 수도승이 되거나 목사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매일 매일 평범한 삶을 살면서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며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함이 거룩함입니다.
왜 거룩하여져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11장 44절, 45절, 19장 2절과 20장 26절에서 반복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20장 26절에서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4-16절에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하던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로서 우리의 옛날 사적 욕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것이 거룩한 자가 되는 길입니다.
거룩함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거룩하여질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하고,
또한 4장 7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여지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우리는 거룩하여져야 할 것입니다.
설교가 J. 스토튼은 “거룩함이 없다면 신약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은 천국은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아름다운 경치가 존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천국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궁전과 신전으로 가득 찬 수도가 존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천국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대리석과 보석으로 지은 건물들이 존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천국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건강과 안락함과 사치와 축제가 존재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런 것들이 천국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또한 교육과, 철학, 문학과 예술 등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그런 것들이 천국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이 없으면 천국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의 요건으로 성도들의 거룩함은 필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14절에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여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거룩하여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여호와 므카디슈 하나님께 가까이 나와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함으로 거룩하여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얼마나 말씀을 따라 살면 거룩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거룩하게 하였으니 너는 거룩하다 선포하실 때 우리는 거룩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6-7절에서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신접한 자나 박수를 추종하지 않음으로, 9절에 나오는 바대로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지 않음으로 우리는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일을 성수하며 아비나 어미를 공경함으로 우리는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에 의지하여 우리와 죄와 허물을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우리는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20장 8절, 21장 8절, 15절과 23절에서 반복적으로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8절에서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I am Jehovah-M'Kaddishkem.)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31장 13절에서 모세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신약성도가 주일을 구분하여 지킴이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 되신 것과 같이 신약백성들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 여호와-므카디슈 되십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곧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도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말씀하고,
또한 1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피 흘리시고 고난 당하심으로 신약의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26장 17-18절에 나오는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언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거룩케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봄으로 거룩하여질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매 거룩하기를 원합니까?
거룩하기 위하여 산 꼭대기에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거룩하기 위하여 광야로 가서 자신을 수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룩하기 위하여 하루종일 기도하거나 수도승과 같이 성가를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거룩하기 위하여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금욕주의자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거룩하기 위하여는 그저 주일을 성수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와 그를 예배드리면 됩니다.
거룩하기 위하여 평상의 삶 가운데 그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자 힘쓰면 됩니다.
거룩하기 위하여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를 삶 가운데 신뢰하면 됩니다.
거룩하기 위하여 날마다의 삶 가운데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예수님을 믿으며 그를 전파하면 족합니다.
거룩하여 지는 것이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또한 예수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거룩하여지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2): 빌라델비아 교회” (계시록 3:7-13)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2): 빌라델비아 교회” (계시록 3:7-13)
1
언제인가 한국에 투신자살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습니다. 성적을 비관한 학생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아들이 뛰어내린 그 자리에서 아들의 죽음을 슬피 여긴 아버지가 뛰어내리고, 성적을 비관하고 실연한 여고생 두 명이 아파트에서 함께 투신하고, 남편의 주식투자 손실을 비관한 30대 주부가 두 자녀에게 독약을 먹인 후 자신은 아파트에서 투신하는가 하면, 생활고를 비관하고 카드 빚에 몰림을 당한 역시 30대 주부가 14층 고층 아파트에서 두 딸을 먼저 던지고 자신은 어린 아들과 함께 투신한 사건 등 투신에 관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투신자살을 한 당사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그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평하는 잘못입니다만 성경은 자신을 죽이는 것도 돌이킬 수 없는 죄인 것을 가룟 유다의 예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늘 기도하고 간구할 것은 우리가 어떤 처지나 환경에 있든지 주님께서 늘 우리를 든든히 지켜주시고 위로하심으로 우리가 지나치게 낙담하거나 좌절하여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일을 스스로 행하지 않게 해달라고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허탄하고 막연하게 보이던 그 믿음을 지키고 믿음을 붙잡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우리에게 변함이 없는 주님의 축복과 은혜를 보장받는 일인지 날마다 믿음을 쌓아 가면 갈수록 더욱 더 확실해집니다.
2
3장 7-13절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밧모 섬 앞 소아시아 서편 가까이에 흩어져있던 일곱 교회에 편지하였는데, 이 일곱 교회를 어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세상에 존재할 교회들의 유형이라고 말합니다. 일곱 교회들을 살펴보면, 에베소 교회는 정통적 교회로 시대적으로 가장 먼저 등장한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궁핍하나 부요한 교회요, 버가모 교회는 주위 환경이 나쁜 교회이고, 두아디라 교회는 악한 여선지자가 활동한 교회이며, 사데 교회는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죽은 교회로 중세 카톨릭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연약하나 충성된 교회이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한 것처럼 보이나 가난한 교회로서 현대의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적 구분에 따르면, 서머나 교회가 1세기 말에서 2세기까지 박해가 극에 달하는 순교하는 시대에 살고 있던 교회--곧 믿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부패한 중세의 교회에서 루터와 칼빙에 의하여 새혁이 벌어지던 종교개혁 이후의 참신해진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라고 서술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열쇠”는 어떤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열쇠”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는 이사야서 22장 22절에 나옵니다: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이사야서 22장 22절에 나오는 “다윗의 열쇠”는 히스기야 왕이 유다의 보물이 들어있는 국고(國庫)의 열쇠를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에게 맡기면서 예언되어진 말로서 그 다윗의 열쇠는 국고를 여는 열쇠였습니다.
오늘 계시록 본문 7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신 다윗의 열쇠는 천국 문의 열쇠입니다. 엘리아김에게만이 히스기야 왕의 나라 보물이 들어있는 국고를 열고 닫을 권한이 주어졌던 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이 하늘 문을 열고 닫으실 권한이 주어져있습니다.
8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8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와 교인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인들 앞에 열린 천국 문을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다 들어갈 때까지 그 열린 천국 문이 닫혀지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그 천국 문을 닫을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 모두에게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이 이와 같기를 원합니다.
찰스 가브리엘(Charles H. Gabriel, 1856-1932) 작사한 찬송가 544장을 보면,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1절)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여러분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천국 문을 소망 중에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와 성도들에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우리의 생각하고 마음에 품은 것들을 살피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칭찬이 그 다음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첫 번째 칭찬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능력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과부의 두 렙돈--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정성으로 삶의 중심을 드리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도 칭찬하셨지만,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두 달란트 남긴 것도 칭찬하셨습니다.
어느 구역 모임에서 달란트를 맡은 종이 주인을 위해서 사업을 열심히 했는데 손해를 보았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토론하였다고 하는데,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이 때에도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경영한 것을 아시기에 그의 충성은 칭찬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삶에 대한 변명으로 ‘나는 시간이 없어서, 나는 물질이 없어서, 나는 현재 매우 바쁜 일을 하고 있어서,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내가 전혀 주님의 일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게 시간에 여유가 생길 때, 내게 물질에 풍족함이 생길 때, 내가 이 바쁜 일을 처리하고 나면,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바쁘고, 부족하고, 가난한 가운데 주님의 일을 감당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의 일을 감당할 여유 있는 시간과 재물이나 한가한 때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능력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요, 시간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요, 재물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요, 내가 현재 다른 일로 매우 바쁜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요, 나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세상을 향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그들이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인 것입니다.
두 번째 칭찬은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입술로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부인하지 않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할 때 전혀 하나님의 개입하실 여지가 없고, 어떤 일에 실패하였을 때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처럼 크게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은 입술로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주님을 인정하고 시인하며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 앞에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 때마다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므로 온전히 이기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9절: 보라 사단의 회(會)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서머나 교회와 성도들의 환난과 궁핍”이 무엇입니까?
1세기 말 예수님을 믿는 일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 믿는 일은 만사형통,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환난과 고난이 따르고, 예수 믿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없고, 예수 믿기 때문에 출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의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예수 믿는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함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이 두려워서 그들의 그리스도인 됨을 숨긴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지상명령인 전도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심할 때에는 외딴 곳으로 피하여 그곳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도 유대인들에 의한 핍박과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실상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이 아니요 다만 사단의 조정을 받는 ‘사단의 회’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중에 얼마를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주어 그들 앞에 절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빌라델비아 교회를 반대하던 사단의 회에 속한 유대인들 중에 얼마를 회개시키시고 개종시키시사 그들로 빌라델비아 교회에 사과케 하고 그들에게 더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 알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교회를 핍박하거나 비난하던 사람이 회개하고 그가 비난하던 교회에 다니며 겸손한 심령으로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기쁨이며 이로써 주님께서 그 교회를 사랑하심을 알게 하십니다.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빌라델비아 교회와 성도들이 적은 능력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켰을 때, 주님은 그들을 칭찬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키시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험의 때는 언제인가 하면 “장차 온 세상에 (환난이)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재림하실 때 이 지상에서 잘 믿는 성도들과 성도들의 연합인 참된 교회들은 들림을 받을 것이며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의 시험의 때를 면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변변치 못한 믿음의 삶을 살던 사람들과 교회답지 못한 교회들만이 지상에 남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의 기록을 보면, 환난의 때의 기록에서 교회라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은 이미 들림 받았기에 대 환난 기간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11절: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와 그 성도들,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속히 임하리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분명한 약속을 주시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 중에 늘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신앙의 삶에서 실족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권고하시며 경계하십니다. “네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믿음을 굳게 잡아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빼앗기는 일이 없게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할 것인데 이러할 때 우리는 면류관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14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집에)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고 축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이기는 자”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은 하나님의 성전이 그 사람이 영원히 거할 장소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기둥은 쉽게 쉽게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오게 된 사람은 결코 그 성전에서 내몰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더하실 축복은 빌라델비아 교인들과 그들의 신앙을 본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세 가지의 이름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의 기록입니다. 성도 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밝힘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성 즉, 새 예루살렘의 이름”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이로써, 성도는 천국백성임을 증명 받습니다.
세 번째는 “나의 새 이름”의 기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의 기록이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과 우리 성도들에게 몇 가지 이름이 있습니까?
세 가지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또는 자녀, 천국백성,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기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3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의 귀가 성령을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말씀을 들을 귀 있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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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어떤 능력이 있으십니까?
많은 능력입니까? 적은 능력입니까? 우리의 능력의 많고 적음, 혹은 크고 작음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으로 향하여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크거나 작은 능력으로, 혹은 많거나 적은 능력으로, 많거나 적은 시간으로, 풍족하거나 빈궁한 재물을 가지고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끝까지 지키고 주님을 입술로나 삶으로 배반하지 않으시기 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열어놓으신 천국 문을 통하여 천국에 이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라, 천국백성이라, 참 그리스도인이라 칭하여 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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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 한국에 투신자살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습니다. 성적을 비관한 학생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아들이 뛰어내린 그 자리에서 아들의 죽음을 슬피 여긴 아버지가 뛰어내리고, 성적을 비관하고 실연한 여고생 두 명이 아파트에서 함께 투신하고, 남편의 주식투자 손실을 비관한 30대 주부가 두 자녀에게 독약을 먹인 후 자신은 아파트에서 투신하는가 하면, 생활고를 비관하고 카드 빚에 몰림을 당한 역시 30대 주부가 14층 고층 아파트에서 두 딸을 먼저 던지고 자신은 어린 아들과 함께 투신한 사건 등 투신에 관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투신자살을 한 당사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그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평하는 잘못입니다만 성경은 자신을 죽이는 것도 돌이킬 수 없는 죄인 것을 가룟 유다의 예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늘 기도하고 간구할 것은 우리가 어떤 처지나 환경에 있든지 주님께서 늘 우리를 든든히 지켜주시고 위로하심으로 우리가 지나치게 낙담하거나 좌절하여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일을 스스로 행하지 않게 해달라고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허탄하고 막연하게 보이던 그 믿음을 지키고 믿음을 붙잡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우리에게 변함이 없는 주님의 축복과 은혜를 보장받는 일인지 날마다 믿음을 쌓아 가면 갈수록 더욱 더 확실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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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7-13절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밧모 섬 앞 소아시아 서편 가까이에 흩어져있던 일곱 교회에 편지하였는데, 이 일곱 교회를 어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세상에 존재할 교회들의 유형이라고 말합니다. 일곱 교회들을 살펴보면, 에베소 교회는 정통적 교회로 시대적으로 가장 먼저 등장한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궁핍하나 부요한 교회요, 버가모 교회는 주위 환경이 나쁜 교회이고, 두아디라 교회는 악한 여선지자가 활동한 교회이며, 사데 교회는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죽은 교회로 중세 카톨릭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연약하나 충성된 교회이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한 것처럼 보이나 가난한 교회로서 현대의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적 구분에 따르면, 서머나 교회가 1세기 말에서 2세기까지 박해가 극에 달하는 순교하는 시대에 살고 있던 교회--곧 믿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부패한 중세의 교회에서 루터와 칼빙에 의하여 새혁이 벌어지던 종교개혁 이후의 참신해진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라고 서술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열쇠”는 어떤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열쇠”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는 이사야서 22장 22절에 나옵니다: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이사야서 22장 22절에 나오는 “다윗의 열쇠”는 히스기야 왕이 유다의 보물이 들어있는 국고(國庫)의 열쇠를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에게 맡기면서 예언되어진 말로서 그 다윗의 열쇠는 국고를 여는 열쇠였습니다.
오늘 계시록 본문 7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신 다윗의 열쇠는 천국 문의 열쇠입니다. 엘리아김에게만이 히스기야 왕의 나라 보물이 들어있는 국고를 열고 닫을 권한이 주어졌던 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이 하늘 문을 열고 닫으실 권한이 주어져있습니다.
8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8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와 교인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인들 앞에 열린 천국 문을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다 들어갈 때까지 그 열린 천국 문이 닫혀지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그 천국 문을 닫을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 모두에게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이 이와 같기를 원합니다.
찰스 가브리엘(Charles H. Gabriel, 1856-1932) 작사한 찬송가 544장을 보면,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1절)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여러분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천국 문을 소망 중에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와 성도들에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우리의 생각하고 마음에 품은 것들을 살피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칭찬이 그 다음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첫 번째 칭찬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능력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과부의 두 렙돈--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정성으로 삶의 중심을 드리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도 칭찬하셨지만,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두 달란트 남긴 것도 칭찬하셨습니다.
어느 구역 모임에서 달란트를 맡은 종이 주인을 위해서 사업을 열심히 했는데 손해를 보았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토론하였다고 하는데,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이 때에도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경영한 것을 아시기에 그의 충성은 칭찬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삶에 대한 변명으로 ‘나는 시간이 없어서, 나는 물질이 없어서, 나는 현재 매우 바쁜 일을 하고 있어서,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내가 전혀 주님의 일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게 시간에 여유가 생길 때, 내게 물질에 풍족함이 생길 때, 내가 이 바쁜 일을 처리하고 나면,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바쁘고, 부족하고, 가난한 가운데 주님의 일을 감당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의 일을 감당할 여유 있는 시간과 재물이나 한가한 때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능력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요, 시간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요, 재물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요, 내가 현재 다른 일로 매우 바쁜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요, 나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세상을 향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그들이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인 것입니다.
두 번째 칭찬은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입술로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부인하지 않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할 때 전혀 하나님의 개입하실 여지가 없고, 어떤 일에 실패하였을 때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처럼 크게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은 입술로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주님을 인정하고 시인하며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 앞에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 때마다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므로 온전히 이기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9절: 보라 사단의 회(會)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서머나 교회와 성도들의 환난과 궁핍”이 무엇입니까?
1세기 말 예수님을 믿는 일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 믿는 일은 만사형통,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환난과 고난이 따르고, 예수 믿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없고, 예수 믿기 때문에 출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의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예수 믿는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함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이 두려워서 그들의 그리스도인 됨을 숨긴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지상명령인 전도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심할 때에는 외딴 곳으로 피하여 그곳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도 유대인들에 의한 핍박과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실상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이 아니요 다만 사단의 조정을 받는 ‘사단의 회’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중에 얼마를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주어 그들 앞에 절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빌라델비아 교회를 반대하던 사단의 회에 속한 유대인들 중에 얼마를 회개시키시고 개종시키시사 그들로 빌라델비아 교회에 사과케 하고 그들에게 더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 알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교회를 핍박하거나 비난하던 사람이 회개하고 그가 비난하던 교회에 다니며 겸손한 심령으로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기쁨이며 이로써 주님께서 그 교회를 사랑하심을 알게 하십니다.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빌라델비아 교회와 성도들이 적은 능력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켰을 때, 주님은 그들을 칭찬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키시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험의 때는 언제인가 하면 “장차 온 세상에 (환난이)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재림하실 때 이 지상에서 잘 믿는 성도들과 성도들의 연합인 참된 교회들은 들림을 받을 것이며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의 시험의 때를 면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변변치 못한 믿음의 삶을 살던 사람들과 교회답지 못한 교회들만이 지상에 남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의 기록을 보면, 환난의 때의 기록에서 교회라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은 이미 들림 받았기에 대 환난 기간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11절: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와 그 성도들,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속히 임하리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분명한 약속을 주시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 중에 늘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신앙의 삶에서 실족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권고하시며 경계하십니다. “네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믿음을 굳게 잡아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빼앗기는 일이 없게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할 것인데 이러할 때 우리는 면류관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14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집에)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고 축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이기는 자”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은 하나님의 성전이 그 사람이 영원히 거할 장소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기둥은 쉽게 쉽게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오게 된 사람은 결코 그 성전에서 내몰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더하실 축복은 빌라델비아 교인들과 그들의 신앙을 본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세 가지의 이름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의 기록입니다. 성도 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밝힘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성 즉, 새 예루살렘의 이름”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이로써, 성도는 천국백성임을 증명 받습니다.
세 번째는 “나의 새 이름”의 기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의 기록이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과 우리 성도들에게 몇 가지 이름이 있습니까?
세 가지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또는 자녀, 천국백성,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기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3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의 귀가 성령을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말씀을 들을 귀 있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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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어떤 능력이 있으십니까?
많은 능력입니까? 적은 능력입니까? 우리의 능력의 많고 적음, 혹은 크고 작음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으로 향하여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크거나 작은 능력으로, 혹은 많거나 적은 능력으로, 많거나 적은 시간으로, 풍족하거나 빈궁한 재물을 가지고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끝까지 지키고 주님을 입술로나 삶으로 배반하지 않으시기 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열어놓으신 천국 문을 통하여 천국에 이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라, 천국백성이라, 참 그리스도인이라 칭하여 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1): 서머나 교회” (계시록 2:8-11)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1): 서머나 교회” (계시록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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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사꾸 엔도의 「Silence(침묵)」에 나오는 포루투갈인 신부, 프란시스코 가르페(Francisco Garrpe)의 죽음이 감동적입니다. 배교를 하면 살려주겠다는 일본일 관리의 권유를 거부하고 그는 바닷물이 밀려오는 해안 가에 기둥을 세우고 묶이는 신세가 되지만, 바닷물이 그의 입술을 잠글 때까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그곳에서 추위와 바닷물이 그를 삼킬 때까지 그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며 그의 믿음을 지킵니다. 믿음이 약하고 겁이 많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로 보이지만,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매 이러한 일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의 삶이 참으로 환난과 핍박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세상에서 유명하여지기 위하여, 평안한 삶을 얻기 위하여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서 적어도 외형상의 평안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때로는 순교 당하면서까지 충성스럽게 믿음을 지켰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가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봄이었습니다.
팔십이 넘은 나이에 소아시아 지방 에베소 앞 바다 밧모라고 하는 조그만 섬에 유배된 몸으로 노년을 살아가는 사도 요한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히 아무 소망도 없는 절망적인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펜을 들어 박해를 당하고 있는 형제 크리스천들에게 그가 경험하고 그에게 계시(啓示)로 보여주신 주님의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편지로 전합니다. 그가 소아시아 지방의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 것은 1장 10절에서,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신” 까닭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1세기 말 90년경에 실제로 밧모 섬 앞, 소아시아 서편에 가까이에 흩어져있던 교회였습니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이 일곱 교회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세상에 존재할 교회들의 유형이라고 말합니다.
일곱 교회들을 살펴보면, 에베소 교회는 정통적 교회입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가장 먼저 등장한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궁핍하나 부요한 교회요, 버가모 교회는 주위 환경이 나쁜 교회이고, 두아디라 교회는 악한 여선지자가 활동한 교회이며, 사데 교회는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죽은 교회로 중세 카톨릭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연약하나 충성된 교회이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한 것처럼 보이나 가난한 교회로서 현대의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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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8-11절에서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시대적 구분으로는 1세기 말에서 2세기까지 박해가 극에 달하는 순교하는 시대에 살고 있던 교회--곧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핍박 가운데서 인내하며 영적 풍요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편지하는 이는 요한이지만, 그의 편지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이는 누구인가 하면,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서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21장 6-7절에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각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이가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영--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이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서머나 교회와 성도들의 환난과 궁핍”이 무엇입니까?
1세기 말 예수님을 믿는 일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 믿는 일은 만사형통,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환난과 고난이 따르고, 예수 믿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없고, 예수 믿기 때문에 출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의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예수 믿는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함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이 두려워서 그들의 그리스도인 됨을 숨긴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지상명령인 전도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심할 때에는 외딴 곳으로 피하여 그곳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이 겪는 “궁핍”은 극한적인 것으로서 생계의 위협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구제에 대상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정상적인 직업을 갖는데도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들은 크리스천으로 남아 있기를 고집하였습니까? 그것은 그 안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했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에게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실상은 부요한 자입니까?”
그날 그날 끼니를 겨우 이어가고, 정상적인 직업을 얻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약속으로 천국과 그 나라에서의 기업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천지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실상은 부요한 자“입니다.
세금을 책정하는 세무국(IRS)의 직원이 하루는 가난한 목사의 집에 와서 세금을 매기기 위하여 그의 재산을 평가하고자 합니다. 목사가 그 세무국 직원에게 앉기를 권하자 그 직원은 책을 꺼내 들고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재산이 얼마나 되십니까?”
“예, 저는 부자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저에게는 영생을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저 영원한 나라에 우리의 있을 곳을 예비하시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건강과 순종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저에게 능력을 주셔서 이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게 하는 기쁜 마음이 있습니다.”
“또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뿐입니다.”
목사님의 대답이 끝난 후 세무직원은 책을 덮고 일어나서 모자를 들고 나가면서 말합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부자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재산은 세금을 매길 수 없는 재산입니다.”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인데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고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로마정부에 고발하여 죽으시게 한 것도 유대인이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 바울을 로마총독에게 넘겨주고, 또 그를 나중에 참수 당하게 한 것도 유대인들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순교의 거의 대부분은 유대인들이 고소와 훼방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유대인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요 다만 사단의 미혹과 조정을 받고 있는 무리일 따름입니다.
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모든 고난과 시험이 하나님께 대적하였다가 이미 패한 마귀가 그 복수로 하나님의 자녀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세기 중엽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있던 폴리캅(Polycarp)이 로마군인들에게 붙잡혀서 그 지방의 로마총독(Proconsul) 앞에 끌려왔습니다. 총독이 보니 기독교 무리의 괴수라고 하여 극악무도하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임에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노인, 내가 당신에게 은총을 베풀기를 원하는데, 만일 당신이 이 자리에서 ‘가이사(=황제)는 주라’고 말하기만 하면 당신을 놓아주겠소.”
폴리캅이 대답합니다.
“내가 팔십 육 년을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나를 한번도 부인한 적이 없는데 내가 조금 힘들다고 나의 주님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이 말합니다.
“당신은 저 포효하는 맹수가 두렵지도 않은가?”
폴리캅이 대답합니다.
“맹수가 내 육체는 물어 뜯을지 모르나 내 영혼은 맹수의 이빨이라도 조금도 상처를 낼 수 없습니다.”
총독은 말합니다.
“짐승이 무섭지 않다면 당신을 화형에 처하겠소.” 하고는 “장작을 마당에 쌓으라.”고 명합니다.
폴리캅은 말합니다.
“잠시 타다 꺼질 불꽃 때문에 영원히 타오르는 불을 잊을 수 있겠소? 총독은 영원히 타는 불을 기억하시오.”
그리고 장작더미에 올라서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당신의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고난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불이 폴리캅을 사르지 못하자, 칼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 죽게 한 다음 그의 시신을 불에 태웁니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십일”은 짧은 기간을 말하는데,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상급과 축복에 비교할 때 이 세상의 환난과 핍박은 잠시 잠간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짧은 생의 기간동안, 또 어떤 사람은 일생 중 일정한 기간동안 환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믿는 사람에게 임하는 환난이 생의 일정한 기간이든지 아니면 그의 전 생애이든지 이것은 하늘의 영원한 삶에 비하면 그저 “십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불과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기우누 피스토스 아크리 사나투(γίΰνου πιστὸς ἄχρι θανάτου)-고 했습니다. “충성하라”는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은 “충성스럽게 되라”인데, “충성스럽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πιστὸς)는 “믿음이 가득하다(faithful)"는 의미입니다.
한글성경은 이 단어를,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할 때는 “신실하시다,” “미쁘시다”라고 번역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자세를 표현할 때는 “충성하다”라고 번역합니다.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을 가지되, “죽을 때까지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서이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충성” 또한 피스토스(πιστὸς)입니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충성”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성도가 일생동안 신실하신(faithful)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신뢰할 때, 그 사람의 충성되게 (faithful) 믿음을 지킴으로 인하여서 주님께서는 반드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이를 그의 충성스런 믿음의 고백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이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삶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은 성령--곧,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입니다.
“첫째 사망”--곧 육신의 죽음이 두렵거나 실망스러워서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둘째 사망”이 이를 것이나, “첫째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망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믿음으로 선한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육신의 죽음인 첫째 사망을 경험하지만, 둘째 사망 곧 백보좌 심판이후의 영원한 고통을 경험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에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3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시고 축복하심을 봅니다. 그들이 환난과 궁핍 가운데도 부요한 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며, 죽도록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대단한 일들을 통하여서만 죽도록 충성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매, 일상의 생활 중에 주님의 말씀으 붙잡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제직 안수식에 참석하였더니, 그 교회의 임직하는 제직들은 “죽기까지 충성하겠다는 서약식”을 가졌는데, 그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말로만 서약하는 것이 아니라 서약서에 서명함으로써 더욱 그들의 주님에 대한 충성--믿음 지킴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들이 서약한 것을 파기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법적 구속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약 의식이 그들의 각오를 견고히 함은 사실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님께 죽기까지 충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슈사꾸 엔도의 「Silence(침묵)」에 나오는 포루투갈인 신부, 프란시스코 가르페(Francisco Garrpe)의 죽음이 감동적입니다. 배교를 하면 살려주겠다는 일본일 관리의 권유를 거부하고 그는 바닷물이 밀려오는 해안 가에 기둥을 세우고 묶이는 신세가 되지만, 바닷물이 그의 입술을 잠글 때까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그곳에서 추위와 바닷물이 그를 삼킬 때까지 그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며 그의 믿음을 지킵니다. 믿음이 약하고 겁이 많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로 보이지만,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매 이러한 일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의 삶이 참으로 환난과 핍박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세상에서 유명하여지기 위하여, 평안한 삶을 얻기 위하여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서 적어도 외형상의 평안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때로는 순교 당하면서까지 충성스럽게 믿음을 지켰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가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봄이었습니다.
팔십이 넘은 나이에 소아시아 지방 에베소 앞 바다 밧모라고 하는 조그만 섬에 유배된 몸으로 노년을 살아가는 사도 요한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히 아무 소망도 없는 절망적인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펜을 들어 박해를 당하고 있는 형제 크리스천들에게 그가 경험하고 그에게 계시(啓示)로 보여주신 주님의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편지로 전합니다. 그가 소아시아 지방의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 것은 1장 10절에서,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신” 까닭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1세기 말 90년경에 실제로 밧모 섬 앞, 소아시아 서편에 가까이에 흩어져있던 교회였습니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이 일곱 교회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세상에 존재할 교회들의 유형이라고 말합니다.
일곱 교회들을 살펴보면, 에베소 교회는 정통적 교회입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가장 먼저 등장한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궁핍하나 부요한 교회요, 버가모 교회는 주위 환경이 나쁜 교회이고, 두아디라 교회는 악한 여선지자가 활동한 교회이며, 사데 교회는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죽은 교회로 중세 카톨릭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연약하나 충성된 교회이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한 것처럼 보이나 가난한 교회로서 현대의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2
2장 8-11절에서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시대적 구분으로는 1세기 말에서 2세기까지 박해가 극에 달하는 순교하는 시대에 살고 있던 교회--곧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핍박 가운데서 인내하며 영적 풍요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편지하는 이는 요한이지만, 그의 편지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이는 누구인가 하면,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서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21장 6-7절에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각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이가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영--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이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서머나 교회와 성도들의 환난과 궁핍”이 무엇입니까?
1세기 말 예수님을 믿는 일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 믿는 일은 만사형통,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환난과 고난이 따르고, 예수 믿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없고, 예수 믿기 때문에 출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의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예수 믿는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함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이 두려워서 그들의 그리스도인 됨을 숨긴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지상명령인 전도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심할 때에는 외딴 곳으로 피하여 그곳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이 겪는 “궁핍”은 극한적인 것으로서 생계의 위협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구제에 대상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정상적인 직업을 갖는데도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들은 크리스천으로 남아 있기를 고집하였습니까? 그것은 그 안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했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에게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실상은 부요한 자입니까?”
그날 그날 끼니를 겨우 이어가고, 정상적인 직업을 얻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약속으로 천국과 그 나라에서의 기업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천지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실상은 부요한 자“입니다.
세금을 책정하는 세무국(IRS)의 직원이 하루는 가난한 목사의 집에 와서 세금을 매기기 위하여 그의 재산을 평가하고자 합니다. 목사가 그 세무국 직원에게 앉기를 권하자 그 직원은 책을 꺼내 들고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재산이 얼마나 되십니까?”
“예, 저는 부자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저에게는 영생을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저 영원한 나라에 우리의 있을 곳을 예비하시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건강과 순종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저에게 능력을 주셔서 이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게 하는 기쁜 마음이 있습니다.”
“또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뿐입니다.”
목사님의 대답이 끝난 후 세무직원은 책을 덮고 일어나서 모자를 들고 나가면서 말합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부자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재산은 세금을 매길 수 없는 재산입니다.”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인데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고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로마정부에 고발하여 죽으시게 한 것도 유대인이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 바울을 로마총독에게 넘겨주고, 또 그를 나중에 참수 당하게 한 것도 유대인들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순교의 거의 대부분은 유대인들이 고소와 훼방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유대인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요 다만 사단의 미혹과 조정을 받고 있는 무리일 따름입니다.
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모든 고난과 시험이 하나님께 대적하였다가 이미 패한 마귀가 그 복수로 하나님의 자녀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세기 중엽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있던 폴리캅(Polycarp)이 로마군인들에게 붙잡혀서 그 지방의 로마총독(Proconsul) 앞에 끌려왔습니다. 총독이 보니 기독교 무리의 괴수라고 하여 극악무도하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임에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노인, 내가 당신에게 은총을 베풀기를 원하는데, 만일 당신이 이 자리에서 ‘가이사(=황제)는 주라’고 말하기만 하면 당신을 놓아주겠소.”
폴리캅이 대답합니다.
“내가 팔십 육 년을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나를 한번도 부인한 적이 없는데 내가 조금 힘들다고 나의 주님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이 말합니다.
“당신은 저 포효하는 맹수가 두렵지도 않은가?”
폴리캅이 대답합니다.
“맹수가 내 육체는 물어 뜯을지 모르나 내 영혼은 맹수의 이빨이라도 조금도 상처를 낼 수 없습니다.”
총독은 말합니다.
“짐승이 무섭지 않다면 당신을 화형에 처하겠소.” 하고는 “장작을 마당에 쌓으라.”고 명합니다.
폴리캅은 말합니다.
“잠시 타다 꺼질 불꽃 때문에 영원히 타오르는 불을 잊을 수 있겠소? 총독은 영원히 타는 불을 기억하시오.”
그리고 장작더미에 올라서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당신의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고난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불이 폴리캅을 사르지 못하자, 칼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 죽게 한 다음 그의 시신을 불에 태웁니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십일”은 짧은 기간을 말하는데,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상급과 축복에 비교할 때 이 세상의 환난과 핍박은 잠시 잠간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짧은 생의 기간동안, 또 어떤 사람은 일생 중 일정한 기간동안 환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믿는 사람에게 임하는 환난이 생의 일정한 기간이든지 아니면 그의 전 생애이든지 이것은 하늘의 영원한 삶에 비하면 그저 “십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불과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기우누 피스토스 아크리 사나투(γίΰνου πιστὸς ἄχρι θανάτου)-고 했습니다. “충성하라”는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은 “충성스럽게 되라”인데, “충성스럽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πιστὸς)는 “믿음이 가득하다(faithful)"는 의미입니다.
한글성경은 이 단어를,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할 때는 “신실하시다,” “미쁘시다”라고 번역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자세를 표현할 때는 “충성하다”라고 번역합니다.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을 가지되, “죽을 때까지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서이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충성” 또한 피스토스(πιστὸς)입니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충성”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성도가 일생동안 신실하신(faithful)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신뢰할 때, 그 사람의 충성되게 (faithful) 믿음을 지킴으로 인하여서 주님께서는 반드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이를 그의 충성스런 믿음의 고백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이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삶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은 성령--곧,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입니다.
“첫째 사망”--곧 육신의 죽음이 두렵거나 실망스러워서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둘째 사망”이 이를 것이나, “첫째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망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믿음으로 선한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육신의 죽음인 첫째 사망을 경험하지만, 둘째 사망 곧 백보좌 심판이후의 영원한 고통을 경험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에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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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시고 축복하심을 봅니다. 그들이 환난과 궁핍 가운데도 부요한 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며, 죽도록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대단한 일들을 통하여서만 죽도록 충성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매, 일상의 생활 중에 주님의 말씀으 붙잡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제직 안수식에 참석하였더니, 그 교회의 임직하는 제직들은 “죽기까지 충성하겠다는 서약식”을 가졌는데, 그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말로만 서약하는 것이 아니라 서약서에 서명함으로써 더욱 그들의 주님에 대한 충성--믿음 지킴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들이 서약한 것을 파기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법적 구속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약 의식이 그들의 각오를 견고히 함은 사실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님께 죽기까지 충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의인의 간구를 드리자!” (야고보 5:13-18)
“의인의 간구를 드리자!” (야고보 5:13-18)
1
어느 시골에 절친하게 지내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사람이 논의를 했습니다. 우리 둘 다 시골에 있으면 아무도 성공할 수 없으니 한 사람은 도시로 나가서 공부를 하자. 그리고 한 사람은 시골에서 경제적으로 도와주자.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는 그림에 소질이 있으니까 네가 먼저 도시로 떠나라." 서로 먼저 하라고 말하다가 그중 '둘러'라는 친구가 먼저 그림을 공부하러 떠납니다.
남은 친구는 둘러의 공부를 위해 열심히 식당에서 일합니다. 둘러는 친구의 도움으로 파리에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 후 10년이 흘러 둘러는 마침내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만나고자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친구가 일하는 식당으로 갑니다. 둘러는 거기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친구가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전 이미 그림 그리기에는 손이 굳어졌습니다. 제가 아니라 저의 친구가 성공해서 돌아오게 하옵소서." 그는 기도만 한 것이 아니고 친구의 성공을 위해 그림 대신 식당 일을 하는 노력을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이 모습을 목격하고 감동을 받아 그린 그림이 바로 "기도하는 손" 란 알버트 둘러의 명화입니다.
노인이 식탁 위에 빵 한 조각을 놓고 두 손을 모두어 기도하고 있는 그림의 주인공 죠지 뮬러(George Mueller) 목사님은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영국의 브리스톨(Bristol)에 있는 그의 고아원의 많은 고아들을 위한 정규적인 후원자가 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는 고아들을 한끼도 굶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후원자를 자원해 오는 사람들을 오히려 사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이 고아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 고아들을 먹이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뮬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하셔서 고아들의 양식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은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눅 18:9ff.).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아주 당당하게 십계명을 다 지키며 자신이 의인임을 드러냈지만, 세리는 얼굴을 감히 들지 못하고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것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고 세리의 기도는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삶으로는 바리새인이 더 의로운 듯 보이지만, 그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드러냄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지 못하고 세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2
13절: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고난 당하는 자는 기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회입니다. 해서, 고난당할 때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소망 중에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을 찬송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 즐거움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즐거운 일을 허락하시매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14절: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뼝든 자는 장로들을 청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장로들은 현재 교회의 목회자를 위시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렇게 함은 그 병자의 믿음으로는 아직 병 고침을 받을 수 없기에 믿음이 더 좋은 사람의 기도를 받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병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데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구약시대에 행하여지던 것인데, 안수를 할 때 흔히 동반하던 것이었습니다.
“기름을 바르는” 경우는 첫째는 왕이나 선지자나 다른 직분자를 세울 때입니다. 직분자 중에 직분자인 메시아(=그리스도)를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합니다.
둘째는 “병자를 치료할 때 그의 이마에 기름을 발라서 준비시켰습니다.
셋째는 귀한 손님이 방문하였을 때 그에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거나 부어서 그를 귀하게 여김을 나타냈습니다. 시편 23편 5절에서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병든 자를 위하여 기름을 바름은 하나님께 믿음의 기도를 드리기 위한 정성을 보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것입니다.
15절: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병자를 위한 기도가 응답 받기 위하여 요구되어지는 것이 있는데, 첫째는 병자에게 그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병자에게 이런 믿음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기도 하는데 병자를 위하여 중보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실 때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 상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올라가시고 안 계실 때에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하였지만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고 결국에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마태 17:19)라고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느니라.”고 대답하십니다.
16절: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본은 ‘죄(罪)’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본문은 복수형, τὰς ἁματίας)’ 대신에 ‘허물’에 해당하는 ‘파랖토마(복수형, τα παραπτωματα)’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죄나 허물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데, 또한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죄나 허물을 시인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 허물을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나 자매가 병들었을 때 그를 위하여 기도해줌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는 이기적이기 쉬우나 타인을 위한 기도는 이타적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응답하시기를 즐겨 하십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시편 기자의 말(시편 14:1-4, 53:2-4)을 인용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시편기자가 말하는 의인은 “선을 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함으로 의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의인”은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인이 드리는 간구(δέησις, earnest prayer or supplication)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주시는 강력한 약속입니다.
시편 34편 15절과 17절에서 시편기자는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 17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라고 했고,
잠언 15장 8절에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여호와)가 기뻐하시느니라”고 했고, 잠언 15장 29절에서는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고 했고,
예레미야서 33장 3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21장 22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시고,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세 그대로 되리라.”고 약속하시고,
요한일서 5장 14-15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17-18절: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기 않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야고보는 하나님의 응답 받은 의인의 간구의 대표적 예로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우리 보통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나타난 일은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한 까닭입니다.
열왕기상 17장 1절 이하에 나오는 엘리야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을 주심으로 시작됩니다. 그 수 년의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그릿 시냇가에 머물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공급하시고, 이제 그릿 시냇가의 물이 마를 때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가게 하시고 거기서 떡 반죽 그릇이 마르지 아니하는 축복으로 엘리야를 먹이십니다.
삼 년 반이 지난 다음에 엘리야로 하여금 갈멜 산에서 450인의 바알 선지자와 400인의 아세라 선지자를 물리치게 하신 다음에는 그로 산꼭대기에서 비를 위한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하늘이 아직 청명한데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비를 위한 기도를 계속합니다. 그렇게 일곱 번을 기도할 때에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고 조금 후에는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왕상 18:44-45).
무엇이 하나님의 커다란 역사를 보게 합니까?
의인의 믿음과 믿음으로 드리는 간절한 구함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의 신앙과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고 또한 교회를 위하여 이러한 간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믿음으로 의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일과 형편, 환경 가운데 항상 하나님께 먼저 우리의 사정이나 고통을 아뢰는 성도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들으시고 응답 주신다는 믿음의 확신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합심하여서 교회를 위하여서, 교우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나지기를 축원합니다.
1
어느 시골에 절친하게 지내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사람이 논의를 했습니다. 우리 둘 다 시골에 있으면 아무도 성공할 수 없으니 한 사람은 도시로 나가서 공부를 하자. 그리고 한 사람은 시골에서 경제적으로 도와주자.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는 그림에 소질이 있으니까 네가 먼저 도시로 떠나라." 서로 먼저 하라고 말하다가 그중 '둘러'라는 친구가 먼저 그림을 공부하러 떠납니다.
남은 친구는 둘러의 공부를 위해 열심히 식당에서 일합니다. 둘러는 친구의 도움으로 파리에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 후 10년이 흘러 둘러는 마침내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만나고자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친구가 일하는 식당으로 갑니다. 둘러는 거기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친구가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전 이미 그림 그리기에는 손이 굳어졌습니다. 제가 아니라 저의 친구가 성공해서 돌아오게 하옵소서." 그는 기도만 한 것이 아니고 친구의 성공을 위해 그림 대신 식당 일을 하는 노력을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이 모습을 목격하고 감동을 받아 그린 그림이 바로 "기도하는 손" 란 알버트 둘러의 명화입니다.
노인이 식탁 위에 빵 한 조각을 놓고 두 손을 모두어 기도하고 있는 그림의 주인공 죠지 뮬러(George Mueller) 목사님은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영국의 브리스톨(Bristol)에 있는 그의 고아원의 많은 고아들을 위한 정규적인 후원자가 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는 고아들을 한끼도 굶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후원자를 자원해 오는 사람들을 오히려 사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이 고아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 고아들을 먹이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뮬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하셔서 고아들의 양식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은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눅 18:9ff.).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아주 당당하게 십계명을 다 지키며 자신이 의인임을 드러냈지만, 세리는 얼굴을 감히 들지 못하고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것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고 세리의 기도는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삶으로는 바리새인이 더 의로운 듯 보이지만, 그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드러냄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지 못하고 세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2
13절: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고난 당하는 자는 기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회입니다. 해서, 고난당할 때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소망 중에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을 찬송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 즐거움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즐거운 일을 허락하시매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14절: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뼝든 자는 장로들을 청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장로들은 현재 교회의 목회자를 위시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렇게 함은 그 병자의 믿음으로는 아직 병 고침을 받을 수 없기에 믿음이 더 좋은 사람의 기도를 받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병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데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구약시대에 행하여지던 것인데, 안수를 할 때 흔히 동반하던 것이었습니다.
“기름을 바르는” 경우는 첫째는 왕이나 선지자나 다른 직분자를 세울 때입니다. 직분자 중에 직분자인 메시아(=그리스도)를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합니다.
둘째는 “병자를 치료할 때 그의 이마에 기름을 발라서 준비시켰습니다.
셋째는 귀한 손님이 방문하였을 때 그에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거나 부어서 그를 귀하게 여김을 나타냈습니다. 시편 23편 5절에서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병든 자를 위하여 기름을 바름은 하나님께 믿음의 기도를 드리기 위한 정성을 보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것입니다.
15절: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병자를 위한 기도가 응답 받기 위하여 요구되어지는 것이 있는데, 첫째는 병자에게 그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병자에게 이런 믿음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기도 하는데 병자를 위하여 중보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실 때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 상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올라가시고 안 계실 때에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하였지만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고 결국에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마태 17:19)라고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느니라.”고 대답하십니다.
16절: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본은 ‘죄(罪)’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본문은 복수형, τὰς ἁματίας)’ 대신에 ‘허물’에 해당하는 ‘파랖토마(복수형, τα παραπτωματα)’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죄나 허물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데, 또한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죄나 허물을 시인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 허물을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나 자매가 병들었을 때 그를 위하여 기도해줌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는 이기적이기 쉬우나 타인을 위한 기도는 이타적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응답하시기를 즐겨 하십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시편 기자의 말(시편 14:1-4, 53:2-4)을 인용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시편기자가 말하는 의인은 “선을 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함으로 의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의인”은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인이 드리는 간구(δέησις, earnest prayer or supplication)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주시는 강력한 약속입니다.
시편 34편 15절과 17절에서 시편기자는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 17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라고 했고,
잠언 15장 8절에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여호와)가 기뻐하시느니라”고 했고, 잠언 15장 29절에서는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고 했고,
예레미야서 33장 3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21장 22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시고,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세 그대로 되리라.”고 약속하시고,
요한일서 5장 14-15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17-18절: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기 않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야고보는 하나님의 응답 받은 의인의 간구의 대표적 예로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우리 보통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나타난 일은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한 까닭입니다.
열왕기상 17장 1절 이하에 나오는 엘리야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을 주심으로 시작됩니다. 그 수 년의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그릿 시냇가에 머물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공급하시고, 이제 그릿 시냇가의 물이 마를 때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가게 하시고 거기서 떡 반죽 그릇이 마르지 아니하는 축복으로 엘리야를 먹이십니다.
삼 년 반이 지난 다음에 엘리야로 하여금 갈멜 산에서 450인의 바알 선지자와 400인의 아세라 선지자를 물리치게 하신 다음에는 그로 산꼭대기에서 비를 위한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하늘이 아직 청명한데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비를 위한 기도를 계속합니다. 그렇게 일곱 번을 기도할 때에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고 조금 후에는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왕상 18:44-45).
무엇이 하나님의 커다란 역사를 보게 합니까?
의인의 믿음과 믿음으로 드리는 간절한 구함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의 신앙과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고 또한 교회를 위하여 이러한 간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믿음으로 의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일과 형편, 환경 가운데 항상 하나님께 먼저 우리의 사정이나 고통을 아뢰는 성도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들으시고 응답 주신다는 믿음의 확신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합심하여서 교회를 위하여서, 교우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나지기를 축원합니다.
“서로 돌아보자” (히브리서 10:22-25)
“서로 돌아보자” (히브리서 10:22-25)
1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에 안 드는 일도 더러 있고 때로는 다투기도 합니다. 차라리 혼자 신앙생활을 하면 더 잘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 18:20)고 말씀하심으로 모일 것을 권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성도끼리 함께 하는 삶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권면하고 있는데,
로마서 12장 10절에서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라고 했고, 로마서 12장 16절과 15장 5절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라고 했고, 로마서 14장 19절에서는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고 말씀하고, 로마서 15장 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아주라”고 권면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는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고 권고하고,
에베소서 4장 2절에서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권고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8절에서는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에서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서는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베드로전서 4장 9절에서는 “서로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언제나 함께 다니는 얼룩소, 검은소, 붉은소 세 마리가 있었습니다. 사자는 그 소들을 잡아먹고 싶어서 매일같이 기회를 엿보지만 세 마리의 소는 언제나 같이 다니며 사자가 덤벼들면 세 마리가 한꺼번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사자가 약간 떨어져 있는 얼룩소에게 다가가서 “세 마리의 소 중에서 가장 힘 센 것은 자기라고 붉은소가 뽐내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얼룩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셋이 똑같이 힘을 합하여 적과 대항해 싸워왔고 무슨 일이든지 함께 도와왔는데 붉은소가 모두 제 힘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을 했다니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룩소에게 거짓말을 한 사자는 붉은소와 검은소에게 가서는 “너희 세 마리 중에 얼룩소가 제일 힘이 세고, 다른 짐승에게지지 않는 것도 얼룩소 때문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두 마리 소는 얼룩소가 건방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붉은소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얼룩소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얼룩소도 붉은소가 자기가 제일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있는 힘을 다하여 덤볐습니다. 검은소가 말렸지만 두 마리의 소는 뿔이 빠지도록 싸웠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의 소 중에 어는 편이 센지는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로 세 마리의 소는 따로 따로 다니게 되었고, 사자는 좋아라 하며 소들을 차례로 잡아먹을 수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눈 덮힌 산길을 오르는데 한 사람이 눈에 파묻혀 기진하여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혼자서 눈길을 걷는 것이 힘드는데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 그냥 갑니다. 다른 한 사람은 아직 호흡이 있는 사람을 그냥 두고 가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아 그를 등에 들쳐업고 힘들게 산길을 걸어갑니다. 그렇게 힘들게 얼마쯤 갔는데, 앞에서 먼저 가던 두 사람이 눈 속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하의 혹독한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얼어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 죽게 된 사람을 들쳐업고 눈이 덮히고 혹한의 길을 가던 사람은 두 사람의 체온이 마주하고 힘들게 걷기에 땀을 흘린 까닭에 혹한에도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협력하고 공동 보조를 맞추어 가는 것이 정말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2
고린도전서 12:22-27
우리 몸에서 밖에 드러나 있는 지체가 더 소중하고 속에 감추어진 지체 중에 우리가 이름조차 모르는 지체는 없어도 그만일 것 같지만, 어떤 작은 지체는 그것이 병들 때 몸 전체의 기능이 마비되어 죽은목숨과도 같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에 속한 지체들인데 눈에 드러난 일을 감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덜 중요한 지체가 아닙니다.
차의 예를 들면, 차의 옆이 크게 찌그러져 볼품이 없다고 하더라도 달리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가스를 공급해 주는 조그만 연료분사장치(fuel injector)가 막혀버리면 차는 달릴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부족한 것이 별로 없음에도 요구사항이 많은 것을 봅니다. 그 사람이 교회 재정이나 행정에 중요한 사람일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 사람의 요구를 맞추기 위하여 움직여 나가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교회 안에서 부족한 것이 많고 아름다움이 덜한 지체들을 돌보는 일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움직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병든 사람을 찾아가고, 굶는 사람을 돌아보고, 상심한 사람을 위로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먼저 생각하고 감당할 일입니다.
사람의 몸에 눈, 귀, 코, 손과 발, 내부의 각 기관이 상호 조화하고 협력하여 건강한 몸을 이루듯이, 교회 안의 각 지체들도 서로 충돌하여 병든 몸을 만들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그의 하는 일을 존중하여 서로 조화하고 협력하여 건전하고 활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몸의 한 지체가 상처가 있을 때 몸 전체가 아픔을 느끼듯이 교회를 구성하는 우리들은 한 교우의 아픔에 동일한 아픔이 느껴져야 할 것이며, 한 지체가 상쾌함을 느낄 때 몸 전체가 시원함을 느끼듯이 한 교우의 즐거움이 전체 교우들에게 전달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감당하는 일이 몸을 구성하는 각 지체가 감당하는 기능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존귀하게 보이는 지체들과 덜 귀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존귀한 자와 덜 존귀한 자가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교회 안에서 각 직분자들은 서로를 질시하는 자세를 버리고 성도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따라서 만일 어떤 형제가 보기에 작은 일을 맡고 있거나 믿음이 약할 경우, 온 성도들은 몸의 약한 부분을 더욱 귀히 여겨 사랑하는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서로를 돌아보며 격려하는 넉넉한 마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0:22-25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생활을 같이 하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22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자(Let us draw near to God)라고 권고합니다.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신 것입니다. 19-20절에 보는 바대로 새롭고 산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소에 들어가는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하여 서로 권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23절에서 믿는 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자(Let us hold fast the confession of hope)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주신 약속들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우리의 소망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24절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Let us consider how to stir up one another to love and good works)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여 사랑과 선행이 그들 안에 나타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힘쓸 것은,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우심으로 원수까지도 불쌍하게 여겨지게 하시며, 성도들의 기도가 우리에게 사랑과 선행을 하게 합니다.
넷째는, 25절에서 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자(Let us meet together all the more as you see the Day drawing near)라고 권고합니다.
혼자 하는 신앙생활은 때로는 힘들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고 격려하므로 모이기에 힘쓴다면 이 일은 쉽고 또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3
여러분의 모임을 확장해 나가기 바랍니다. 주님의 날이 언제 임할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살던 때보다는 2000년이 단축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살았다면 우리는 더욱 더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에 안 드는 일도 더러 있고 때로는 다투기도 합니다. 차라리 혼자 신앙생활을 하면 더 잘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 18:20)고 말씀하심으로 모일 것을 권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성도끼리 함께 하는 삶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권면하고 있는데,
로마서 12장 10절에서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라고 했고, 로마서 12장 16절과 15장 5절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라고 했고, 로마서 14장 19절에서는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고 말씀하고, 로마서 15장 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아주라”고 권면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는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고 권고하고,
에베소서 4장 2절에서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권고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8절에서는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에서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서는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베드로전서 4장 9절에서는 “서로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언제나 함께 다니는 얼룩소, 검은소, 붉은소 세 마리가 있었습니다. 사자는 그 소들을 잡아먹고 싶어서 매일같이 기회를 엿보지만 세 마리의 소는 언제나 같이 다니며 사자가 덤벼들면 세 마리가 한꺼번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사자가 약간 떨어져 있는 얼룩소에게 다가가서 “세 마리의 소 중에서 가장 힘 센 것은 자기라고 붉은소가 뽐내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얼룩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셋이 똑같이 힘을 합하여 적과 대항해 싸워왔고 무슨 일이든지 함께 도와왔는데 붉은소가 모두 제 힘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을 했다니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룩소에게 거짓말을 한 사자는 붉은소와 검은소에게 가서는 “너희 세 마리 중에 얼룩소가 제일 힘이 세고, 다른 짐승에게지지 않는 것도 얼룩소 때문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두 마리 소는 얼룩소가 건방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붉은소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얼룩소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얼룩소도 붉은소가 자기가 제일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있는 힘을 다하여 덤볐습니다. 검은소가 말렸지만 두 마리의 소는 뿔이 빠지도록 싸웠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의 소 중에 어는 편이 센지는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로 세 마리의 소는 따로 따로 다니게 되었고, 사자는 좋아라 하며 소들을 차례로 잡아먹을 수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눈 덮힌 산길을 오르는데 한 사람이 눈에 파묻혀 기진하여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혼자서 눈길을 걷는 것이 힘드는데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 그냥 갑니다. 다른 한 사람은 아직 호흡이 있는 사람을 그냥 두고 가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아 그를 등에 들쳐업고 힘들게 산길을 걸어갑니다. 그렇게 힘들게 얼마쯤 갔는데, 앞에서 먼저 가던 두 사람이 눈 속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하의 혹독한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얼어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 죽게 된 사람을 들쳐업고 눈이 덮히고 혹한의 길을 가던 사람은 두 사람의 체온이 마주하고 힘들게 걷기에 땀을 흘린 까닭에 혹한에도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협력하고 공동 보조를 맞추어 가는 것이 정말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2
고린도전서 12:22-27
우리 몸에서 밖에 드러나 있는 지체가 더 소중하고 속에 감추어진 지체 중에 우리가 이름조차 모르는 지체는 없어도 그만일 것 같지만, 어떤 작은 지체는 그것이 병들 때 몸 전체의 기능이 마비되어 죽은목숨과도 같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에 속한 지체들인데 눈에 드러난 일을 감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덜 중요한 지체가 아닙니다.
차의 예를 들면, 차의 옆이 크게 찌그러져 볼품이 없다고 하더라도 달리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가스를 공급해 주는 조그만 연료분사장치(fuel injector)가 막혀버리면 차는 달릴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부족한 것이 별로 없음에도 요구사항이 많은 것을 봅니다. 그 사람이 교회 재정이나 행정에 중요한 사람일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 사람의 요구를 맞추기 위하여 움직여 나가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교회 안에서 부족한 것이 많고 아름다움이 덜한 지체들을 돌보는 일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움직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병든 사람을 찾아가고, 굶는 사람을 돌아보고, 상심한 사람을 위로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먼저 생각하고 감당할 일입니다.
사람의 몸에 눈, 귀, 코, 손과 발, 내부의 각 기관이 상호 조화하고 협력하여 건강한 몸을 이루듯이, 교회 안의 각 지체들도 서로 충돌하여 병든 몸을 만들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그의 하는 일을 존중하여 서로 조화하고 협력하여 건전하고 활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몸의 한 지체가 상처가 있을 때 몸 전체가 아픔을 느끼듯이 교회를 구성하는 우리들은 한 교우의 아픔에 동일한 아픔이 느껴져야 할 것이며, 한 지체가 상쾌함을 느낄 때 몸 전체가 시원함을 느끼듯이 한 교우의 즐거움이 전체 교우들에게 전달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감당하는 일이 몸을 구성하는 각 지체가 감당하는 기능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존귀하게 보이는 지체들과 덜 귀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존귀한 자와 덜 존귀한 자가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교회 안에서 각 직분자들은 서로를 질시하는 자세를 버리고 성도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따라서 만일 어떤 형제가 보기에 작은 일을 맡고 있거나 믿음이 약할 경우, 온 성도들은 몸의 약한 부분을 더욱 귀히 여겨 사랑하는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서로를 돌아보며 격려하는 넉넉한 마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0:22-25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생활을 같이 하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22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자(Let us draw near to God)라고 권고합니다.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신 것입니다. 19-20절에 보는 바대로 새롭고 산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소에 들어가는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하여 서로 권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23절에서 믿는 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자(Let us hold fast the confession of hope)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주신 약속들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우리의 소망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24절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Let us consider how to stir up one another to love and good works)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여 사랑과 선행이 그들 안에 나타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힘쓸 것은,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우심으로 원수까지도 불쌍하게 여겨지게 하시며, 성도들의 기도가 우리에게 사랑과 선행을 하게 합니다.
넷째는, 25절에서 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자(Let us meet together all the more as you see the Day drawing near)라고 권고합니다.
혼자 하는 신앙생활은 때로는 힘들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고 격려하므로 모이기에 힘쓴다면 이 일은 쉽고 또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3
여러분의 모임을 확장해 나가기 바랍니다. 주님의 날이 언제 임할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살던 때보다는 2000년이 단축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살았다면 우리는 더욱 더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린도후서 4:7-15)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린도후서 4:7-15)
1
어느 미국인 선교사님이 일본에 가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자기 나름으로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40년 동안 그를 통하여 예수 믿기로 결신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를 파송했던 선교단체를 비롯하여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실패자라고 비웃었습니다. 그 자신도 자신의 성과가 부끄러웠습니다. 그에게 세례를 받은 단 한 명의 사람도 그가 일본에 머물면서 집안 일을 돌보게 했던 일본인 가정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임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그 가정부의 아들이 일본신학교의 학장이 수많은 목사후보생들을 길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를 보고 실패했다고 비웃던 사람들은 이제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냅니다.
사람의 눈에는 실패같이 여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하나님의 계획 완성의 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을 쉽게 쉽게 판단 내릴 것이 아닙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의지하던 장로님이 등을 돌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권사님이 뒤에서 그를 비방하고, 열심히 도와주던 집사님이 멀어지면, 그의 목회가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고, 그 교회는 그로서는 어찌해볼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가 의지하던 줄이 하나 둘 끊어질 때에도 끊어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줄’입니다. 장로님은, 권사님은, 집사님은 목회자에게서 멀어질 수 있지만 그를 사랑하사 외아들을 십자가상에서 대속물(代贖物)로 주시고 그를 목회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항상 변함이 없으십니다. 목회자가 이를 깨닫고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 다시 전적으로 매달릴 때 그는 그가 감당하는 목회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고자 할 때 그에게 철저한 실망과 배반을 경험케 하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십니다. 이러할 때, 이 목회자가 경험하는 철저한 실망과 배반은 그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쓴 약’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전적으로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할 분은 담임목사님이 아니라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목회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때로 실망하고 때로 부담을 느낄 수 있지만, 목회자가 증거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전혀 실망함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온전하시고, 홀로 기쁨과 소망의 근원(根源) 되시기에 그렇습니다.
2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ἐν ὀστρακίνοις σκεύεσιν, in earthen or clay vessels)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보배”란 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또는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볼 수 있는데, 또 다른 해석은 우리가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원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비추이고 드러나니까 어떤 것으로 해석하여도 좋습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this precious treasure--this light and power that now shine within us(이 귀중한 보배--즉, 지금 우리 안에서 비취고 있는 빛과 능력)”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은 우리 인간의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육체입니다.
우리의 부서지기 싶고 나약한 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귀중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고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고 생명을 주는 복음을 증거할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은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생명의 복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춰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사사기 7장에 나오는 기드온의 사건을 잘 압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괴롭히던 미디안과 싸움을 하고자 할 때 기드온에게 모여든 백성의 수가 3만 2천 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명하시어 이중 2만 2천 명을 돌려보내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사사기 7장 2절은,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려 자긍(自矜)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일만 명을 물가로 내려가게 하시고 그들이 물을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서 두 그룹으로 구분케 하십니다. 즉, 물을 마시되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과 물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개의 핥는 것같이 핥아먹는 자들로 나누게 하십니다. 물을 핥아먹은 사람의 수가 삼백 명이었는데 이 삼백 명만으로 십여만 명의 미디안 군대와 대적케 하십니다. 이 삼백 명으로 미디안 군대 진중에 들어가서 그들을 치는데,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합니다. 세 대로 나뉘어서 미디안 군대의 진중에 숨어 들어간 삼백 명의 용사가 일제히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할 때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적군들끼리 서로 칼로 죽이는 역사를 이루시어 기드온과 삼백 용사로 큰 승리를 거두게 만드십니다.
삼백 용사가 든 항아리의 영적 의미는 사람의 육체요,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횃불은 성령의 불--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빈 항아리와도 같은 우리를 사용하시되 성령(복음)의 능력으로 채우셔서 ‘이 세상 임금’인 사단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복음의 능력과 빛이 어두움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비춰지기를 원하십니다.
연약함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심은 이 세상 임금을 물리치고 구원의 놀라운 사역이 이루어짐이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음을 우리로 알게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에서 바울은 이를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8-9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느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할 수만 있으면 만사형통(萬事亨通)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평안하고 유복한 삶을 바람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항상 그렇게 평안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험산준령(險山峻嶺)이 놓여있고 연속적인 파도가 몰려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믿지 않는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원치 않는 환경과 형편 가운데 놓여질 때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그의 자세와 내면의 상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바라보지 않는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어려움 가운데도 소망을 잃지 않고 기쁨이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샘솟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그의 심령을 가득 채워서 찬송이 나옵니다.
바울의 삶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만이 바울을 욕하고 중상한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이 바울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확신하기에 싸이지 아니합니다.
그가 복음을 증거하고 사역한 교회의 교인들이 복음의 진리에서 떠난 삶을 살아갑니다. 해서, 목회자로서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지만,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내게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따름입니다. 낙심하지 않음은 사단의 기뻐하는 일을 하지 않고자 함입니다.
그에게 수많은 핍박과 환난이 몰려옵니다.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를 수도 없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가 감당하는 사역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같이하시고, 말씀하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버려진 자가 아니라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심을 더욱 견고하게 느낍니다.
바울이 당하는 환난이 극에 달하여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가혹한 태형을 받고, 돌팔매질을 당하고, 배가 풍랑에 파선하여 그의 목숨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에도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회의(懷疑)하고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에게 영생의 확신을 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습니다.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죽인 것(τὴν νέκρωσιν τού Ἰησού)”이란 바울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the death of Jesus, RSV, NIV; the dying of the Lord Jesus, KJV)입니다. 따라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늘 삶 가운데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삶 가운데 늘 생각하여 깨달아 안 사람에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의 놀라우신 은혜가 그 가운데 나타납니다. 성령이 이의 보증(保證)이 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4-5절에서 바울은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탄식할 것이 없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는 그 순간에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우리를 살리시는 이의 영이신(롬 8:11 참조) 성령께서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이를 우리 마음에 증거해 주십니다.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의 효력)을 바라봄으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자입니다(요한 5:24 참조). 육체적 죽음의 위험에 처해짐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이 (그가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서 다른 이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고자 함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빛(=생명)을 우리 마음에만 간직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어두움(=사망)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도 빛(=생명)을 비추기 위하여 육체적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자 함입니다.
어차피 육체는 죽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12절: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안에서 역사하는 사망’이란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직면하게 되는 죽음의 위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육체적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증거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북한에 숨어 들어가서 선교를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그 중에 한 사람이 증언하는 북한에서 행해진 공개처형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반동으로 몰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 사람의 크리스천이 처형되었는데 그들은 공개처형장에 끌려오기 전에 이미 두들겨 맞아서 온 몸이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 사람들을 개를 끌 듯 질질 끌어오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의 속주머니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작은 성경책이 땅에 떨어져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반동으로 몰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침내 총살형을 당하였는데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태연하고 평안하여 보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육체적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부인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을 강건케 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보증(保證)을 그들에게 보이신 까닭입니다.
13절: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여기서 인용한 기록이란 시편 116편 10절을 가리킵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그의 믿음의 고백은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7-8절)라고 함입니다. 구원과 생명의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고로 증거하겠다고 서원합니다.
바울도 이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구원을 베푸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에 대하여 말하겠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증거해야 할 것인데, 그리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되며 우리의 입술을 주장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길가에 늘어선 무리들과 함께 제자들은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누가 19:38)고 소리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누가 19:40). 우리가 우리의 믿는 바에 대하여 잠잠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케 하십니다.
14절: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믿는 자들을 다시 살리시고 그 앞에 세우실 것입니다. 이를 요한계시록 20장 5절은 ‘첫째 부활’이라고 했는데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복이 있고 거룩한 것은(계시록 20:6)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며 면류관과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 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자랑과 상급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데 이는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하여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로 인하여는 우리에게 자랑과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항상 그의 기쁨과 면류관으로 여겼는데, 이는 그들이 바울의 복음 증거함을 듣고 받아들여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까닭입니다.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그들을 권면할 때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고 말씀합니다.
15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육체적 죽음의 위험--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에 처해지기를 자청하고 그의 믿는 바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기에 힘씀은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은혜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져서 더욱 더 넘치는 감사를 하나님께 발하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더욱 더 커다란 영광을 돌리고자 함입니다.
3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처해집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비방은 우리 자신들 때문에 야기된 것들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세상을 편하게 살고자 하다가 겪는 나 자신을 위한 고난보다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한 고난 당함을 자원하는 사람들이 되고자 작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을 위한 고난은 참으로 값진 것이며 이를 잘 감당할 때 그만큼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도 클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의 복음 증거함을 통하여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접할 수 있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더 많은 입술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1
어느 미국인 선교사님이 일본에 가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자기 나름으로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40년 동안 그를 통하여 예수 믿기로 결신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를 파송했던 선교단체를 비롯하여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실패자라고 비웃었습니다. 그 자신도 자신의 성과가 부끄러웠습니다. 그에게 세례를 받은 단 한 명의 사람도 그가 일본에 머물면서 집안 일을 돌보게 했던 일본인 가정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임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그 가정부의 아들이 일본신학교의 학장이 수많은 목사후보생들을 길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를 보고 실패했다고 비웃던 사람들은 이제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냅니다.
사람의 눈에는 실패같이 여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하나님의 계획 완성의 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을 쉽게 쉽게 판단 내릴 것이 아닙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의지하던 장로님이 등을 돌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권사님이 뒤에서 그를 비방하고, 열심히 도와주던 집사님이 멀어지면, 그의 목회가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고, 그 교회는 그로서는 어찌해볼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가 의지하던 줄이 하나 둘 끊어질 때에도 끊어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줄’입니다. 장로님은, 권사님은, 집사님은 목회자에게서 멀어질 수 있지만 그를 사랑하사 외아들을 십자가상에서 대속물(代贖物)로 주시고 그를 목회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항상 변함이 없으십니다. 목회자가 이를 깨닫고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 다시 전적으로 매달릴 때 그는 그가 감당하는 목회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고자 할 때 그에게 철저한 실망과 배반을 경험케 하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십니다. 이러할 때, 이 목회자가 경험하는 철저한 실망과 배반은 그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쓴 약’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전적으로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할 분은 담임목사님이 아니라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목회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때로 실망하고 때로 부담을 느낄 수 있지만, 목회자가 증거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전혀 실망함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온전하시고, 홀로 기쁨과 소망의 근원(根源) 되시기에 그렇습니다.
2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ἐν ὀστρακίνοις σκεύεσιν, in earthen or clay vessels)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보배”란 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또는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볼 수 있는데, 또 다른 해석은 우리가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원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비추이고 드러나니까 어떤 것으로 해석하여도 좋습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this precious treasure--this light and power that now shine within us(이 귀중한 보배--즉, 지금 우리 안에서 비취고 있는 빛과 능력)”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은 우리 인간의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육체입니다.
우리의 부서지기 싶고 나약한 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귀중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고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고 생명을 주는 복음을 증거할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은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생명의 복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춰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사사기 7장에 나오는 기드온의 사건을 잘 압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괴롭히던 미디안과 싸움을 하고자 할 때 기드온에게 모여든 백성의 수가 3만 2천 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명하시어 이중 2만 2천 명을 돌려보내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사사기 7장 2절은,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려 자긍(自矜)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일만 명을 물가로 내려가게 하시고 그들이 물을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서 두 그룹으로 구분케 하십니다. 즉, 물을 마시되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과 물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개의 핥는 것같이 핥아먹는 자들로 나누게 하십니다. 물을 핥아먹은 사람의 수가 삼백 명이었는데 이 삼백 명만으로 십여만 명의 미디안 군대와 대적케 하십니다. 이 삼백 명으로 미디안 군대 진중에 들어가서 그들을 치는데,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합니다. 세 대로 나뉘어서 미디안 군대의 진중에 숨어 들어간 삼백 명의 용사가 일제히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할 때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적군들끼리 서로 칼로 죽이는 역사를 이루시어 기드온과 삼백 용사로 큰 승리를 거두게 만드십니다.
삼백 용사가 든 항아리의 영적 의미는 사람의 육체요,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횃불은 성령의 불--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빈 항아리와도 같은 우리를 사용하시되 성령(복음)의 능력으로 채우셔서 ‘이 세상 임금’인 사단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복음의 능력과 빛이 어두움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비춰지기를 원하십니다.
연약함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심은 이 세상 임금을 물리치고 구원의 놀라운 사역이 이루어짐이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음을 우리로 알게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에서 바울은 이를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8-9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느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할 수만 있으면 만사형통(萬事亨通)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평안하고 유복한 삶을 바람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항상 그렇게 평안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험산준령(險山峻嶺)이 놓여있고 연속적인 파도가 몰려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믿지 않는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원치 않는 환경과 형편 가운데 놓여질 때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그의 자세와 내면의 상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바라보지 않는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어려움 가운데도 소망을 잃지 않고 기쁨이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샘솟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그의 심령을 가득 채워서 찬송이 나옵니다.
바울의 삶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만이 바울을 욕하고 중상한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이 바울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확신하기에 싸이지 아니합니다.
그가 복음을 증거하고 사역한 교회의 교인들이 복음의 진리에서 떠난 삶을 살아갑니다. 해서, 목회자로서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지만,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내게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따름입니다. 낙심하지 않음은 사단의 기뻐하는 일을 하지 않고자 함입니다.
그에게 수많은 핍박과 환난이 몰려옵니다.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를 수도 없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가 감당하는 사역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같이하시고, 말씀하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버려진 자가 아니라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심을 더욱 견고하게 느낍니다.
바울이 당하는 환난이 극에 달하여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가혹한 태형을 받고, 돌팔매질을 당하고, 배가 풍랑에 파선하여 그의 목숨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에도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회의(懷疑)하고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에게 영생의 확신을 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습니다.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죽인 것(τὴν νέκρωσιν τού Ἰησού)”이란 바울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the death of Jesus, RSV, NIV; the dying of the Lord Jesus, KJV)입니다. 따라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늘 삶 가운데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삶 가운데 늘 생각하여 깨달아 안 사람에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의 놀라우신 은혜가 그 가운데 나타납니다. 성령이 이의 보증(保證)이 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4-5절에서 바울은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탄식할 것이 없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는 그 순간에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우리를 살리시는 이의 영이신(롬 8:11 참조) 성령께서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이를 우리 마음에 증거해 주십니다.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의 효력)을 바라봄으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자입니다(요한 5:24 참조). 육체적 죽음의 위험에 처해짐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이 (그가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서 다른 이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고자 함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빛(=생명)을 우리 마음에만 간직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어두움(=사망)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도 빛(=생명)을 비추기 위하여 육체적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자 함입니다.
어차피 육체는 죽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12절: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안에서 역사하는 사망’이란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직면하게 되는 죽음의 위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육체적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증거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북한에 숨어 들어가서 선교를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그 중에 한 사람이 증언하는 북한에서 행해진 공개처형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반동으로 몰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 사람의 크리스천이 처형되었는데 그들은 공개처형장에 끌려오기 전에 이미 두들겨 맞아서 온 몸이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 사람들을 개를 끌 듯 질질 끌어오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의 속주머니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작은 성경책이 땅에 떨어져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반동으로 몰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침내 총살형을 당하였는데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태연하고 평안하여 보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육체적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부인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을 강건케 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보증(保證)을 그들에게 보이신 까닭입니다.
13절: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여기서 인용한 기록이란 시편 116편 10절을 가리킵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그의 믿음의 고백은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7-8절)라고 함입니다. 구원과 생명의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고로 증거하겠다고 서원합니다.
바울도 이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구원을 베푸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에 대하여 말하겠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증거해야 할 것인데, 그리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되며 우리의 입술을 주장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길가에 늘어선 무리들과 함께 제자들은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누가 19:38)고 소리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누가 19:40). 우리가 우리의 믿는 바에 대하여 잠잠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케 하십니다.
14절: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믿는 자들을 다시 살리시고 그 앞에 세우실 것입니다. 이를 요한계시록 20장 5절은 ‘첫째 부활’이라고 했는데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복이 있고 거룩한 것은(계시록 20:6)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며 면류관과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 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자랑과 상급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데 이는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하여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로 인하여는 우리에게 자랑과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항상 그의 기쁨과 면류관으로 여겼는데, 이는 그들이 바울의 복음 증거함을 듣고 받아들여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까닭입니다.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그들을 권면할 때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고 말씀합니다.
15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육체적 죽음의 위험--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에 처해지기를 자청하고 그의 믿는 바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기에 힘씀은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은혜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져서 더욱 더 넘치는 감사를 하나님께 발하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더욱 더 커다란 영광을 돌리고자 함입니다.
3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처해집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비방은 우리 자신들 때문에 야기된 것들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세상을 편하게 살고자 하다가 겪는 나 자신을 위한 고난보다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한 고난 당함을 자원하는 사람들이 되고자 작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을 위한 고난은 참으로 값진 것이며 이를 잘 감당할 때 그만큼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도 클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의 복음 증거함을 통하여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접할 수 있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더 많은 입술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새 언약의 영광” (고린도후서 3:6-18)
“새 언약의 영광” (고린도후서 3:6-18)
1
언젠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남자 기계체조에서 채점이 잘못되어서, 금메달을 받아야 할 한국선수가 동메달을 받고 은메달을 받아야 할 미국선수가 금메달을 수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대한 반응이 미국사람들과 한국사람들 간에 천지차이처럼 컸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채점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선수(Paul Ham)가 금메달을 수상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채점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금메달을 양보하지 않고 모른 체하는 것은 양심불량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체조위원회는 미국선수로 하여금 금메달을 양보하게 하든지 적어도 공동 금메달을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이와 같이 다른 의견들이 각각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까?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다른 의견들이며 말하자면 다른 편견들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에 편견이나 아집이 없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이 세상에는 참으로 공평 정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하나님 말씀대로 되어지지 않음을 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각각 다른 환경이나 처지가 우리의 눈에 베일을 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부한 사람은 부함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높은 지위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낮은 지위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남자는 남자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여자는 여자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백인은 백인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흑인은 흑인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습니다.
우리의 색안경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우리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는 항상 굴절된 시각이거나 채색된 이해일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멜 깁슨(Mel Gibson)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영화를 만들되 이제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원어 사용이란 획기적인 방법으로 만들었습니다. 해서, 배우들이 아람어로 말하고, 또한 라틴어로 말하였습니다. 의상도 역사적 고증을 받아 최대한 당시의 사람들이 입었음직한 의상들을 갖추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역을 맡은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백인 미국인 배우가 맡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 속에 연상할 때 흔히 갈색 또는 금발의 긴 머리를 가진 백색의 미남을 그리는 것은 우리가 보았던 영화 속의 예수님이, 혹은 영화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러할 것이라고 여기는 나의 상상이 편견으로 덮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백인들은 백인 우월주의에서 백색 그리스도를 만들고, 다른 유색인들 역시 백인이 우월하거나 아름답다는 생각에서 백색 그리스도를 연상하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여기에 도전한 것이 “흑인 신학(Black Theology)"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흑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인 예수님이 편견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 예수님도 편견인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2,000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이셨겠습니까?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태어나시고 그의 조상 아브라함이 지금 이란-이락 부근인 갈대아-우르 사람이었기에 얼굴은 다소 검은 색을 띠고 머리카락은 약간은 곱슬거렸을 것입니다. 2,000년 동안 세상을 유리하다가 피가 타인종과 많이 섞여버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모습과도 많이 다르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각 다른 수건을 쓴 얼굴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세축복(現世祝福)이라는 수건'을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대신에 말씀 속에서 현세축복만을 찾고자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고 말씀하지만, 이 말씀이 이 부류에 속한 사람의 눈에 보일 리가 없고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은 그저 그가 명령하고 강청하는 대로 순종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하나님은 그가 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셔야 하고, 병이 낫게 해달라고 하면 병을 반드시 고쳐 주셔야 하고, 높은 지위를 달라고 강청하면 반드시 높은 지위를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시면 그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해서,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될 때 하나님은 피곤하시고 고달프십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많고 ‘이런 사람들을 위한 수건’으로 가려진 가짜 복음(false gospel)이 참으로 인기가 좋습니다.
2
모세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오릅니다. 40일을 밤낮으로 시내산에 거하다가 내려와보니 백성들과 자기 형 아론이 그새를 못 참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낸 여호와라고 칭하며 그것에 절하고 춤추고 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모세는 두 돌판을 내어던져 깨버리고, 금송아지는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합니다(출 32:19-20).
두 번째 산에 오를 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이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19-23).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얼굴로 대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태양도 너무 밝아 바로 쳐다보면 눈이 멀어버리는데, 하물며 태양을 지으신 하나님이야 더욱 광채가 찬란하여 그 존귀하신 얼굴을 감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영광(榮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보드”(דבכ)는 영광의 본체(本體)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광채(光彩)입니다. 햇빛의 따사로움을 받으며 태양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광채를 받으며 하나님의 계심을 경험하고 사랑과 은총에 감사해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얼굴에 난 광채로 인하여 그를 주목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해서, 모세는 백성들 앞에 설 때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여호와의 영광의 광채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있는 광채는 근원적인 광채가 아니었기에 차츰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건으로 덮은 모세의 얼굴의 가려진 광채를 주목하며, 새 언약의 그림자요 모형인 불완전한 율법을 마치 영광의 본체인양 착각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여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9-11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는데,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께서 본체의 영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모세의 수건으로 가리워진 영광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은 더 큰 영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지 아니하였습니다.
6절에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천거서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확신을 주시고 그로 인하여서 만족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바울과 그 일행을 새 언약의 일군으로 삼으신 일을 만족케(충분케, 잘 감당하게) 하십니다.
“만족케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카노오”(ἱκανόω)는 ‘잘 감당하게 하다’ 또는 ‘충분케 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을 잘 감당케 함이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문(儀文)은 율법을 말하는데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한 것은 바울이 율법의 역할을 부인하거나 부정적으로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세와 그 이후의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제사장들이 의문의 일군들--구 언약의 일군들이었는데 그들의 역할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의문 곧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 새 언약이신 그리스도께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데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입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사람에게 오매 그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율법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죄의 결과가 죽음입니다. 의문--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을 초래하는 죄’를 깨닫게 되었는데 율법은 우리를 살릴 힘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다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가 되어 생명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한 율법은 또한 우리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맡기신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은 죄를 생각나게 하는 일을 위한 것이 아니요 사람을 살리는 일을 감당케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은 그와 같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영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일군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그가 먼저 영으로 살아남을 경험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이 죽는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하나님)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이제 의문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됩니다.
성령으로 살리심을 얻은 새 언약의 일군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의 생의 가치관과 우선순위가 바뀌고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전에는 나를 위하여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그전에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 없는 사람 같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이 즐겁고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음을 느낍니다.
7-8절에 “돌로 써서 새긴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의문의 직분의 영광은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과 사십 일을 함께 거하며 말씀한 까닭에 얻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에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일시적이요 따라서 없어질 것인데도 감히 주목하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일군에게 허락하신 영광은 근원적이요 지속적인 것이기에 모세가 맡았던 의문--구 언약의 직분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은 모세가 감당했던 의문의 직분, 정죄의 직분과는 달리, 복의 근원, 영광의 근원, 광채의 근원인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말미암는 귀한 것입니다.
모세의 영광은 결국 없어지고 대체될 모형적인 것이었지만, 새 언약의 영광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광이요 광채이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항상 계시기 때문입니다.
9절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했습니다.
의문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문의 직분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죄인인 것을 선포하게 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일꾼된 신약 백성들에게 맡기신 의의 직분은 죄를 깨달은 사람--사망에 이르게 된 사람을 살리는 일을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롬 1:17) 의의 복음, 생명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선포케 합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직분도 영광스러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는 생명의 직분, 의의 직분을 감당함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이 일 감당함을 뒤로 미루어야 하겠습니까?
이 일을 감당할 때 그저 침묵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10-11절에 “영광 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과거 모세를 비롯한 구 언약의 일군들이 맡았던 의문의 직분도 영광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영광은 일시적인 것이요 한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더 큰 영광이 이르매 이제 사라진 것입니다. 그 영광은 사람을 살리는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영광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 있을 영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직분을 영광스럽고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이같은 소망”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새 언약의 일군이 되는 것이요, 의문의 직분보다 더 영광스러운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그가 맡기신 직분에 대하여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과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합니다.
13절에서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광채는 그 끝이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덮은 까닭은 백성들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광채가 점차 사라질 것이기에 그 결국을 드러내지 않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원함은 덮여지고 가리워진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고자 함이 아니요, 그의 증거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그러나 저희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그 얼굴에 수건을 쓴 까닭에 이스라엘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 모세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신 것과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그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 한 것은 모세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 때문도 아니며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요 편견과 강퍅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서, 모세의 얼굴에만 수건이 덮여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도 수건이 덮여져 있어서 약속의 말씀이신 구약을 읽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15절에서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 했습니다.
14절의 부연 설명입니다.
“오늘까지”라고 한 것은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는데’(갈 3:24), 그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현재까지란 뜻입니다. 구약에 예언되어진 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인 것이 그의 생을 통하여 밝히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오늘까지” 전혀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얼굴을 덮은 수건 외에 또 다른 ‘편견과 완고의 수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덮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수건에 덮여진 모세의 얼굴--‘가리워진 모세의 광채’ 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를 바라보는 것도 두려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더더욱 두려워서 피하고자 했습니다.
‘두려움의 수건’이 그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안일과 편견과 고집의 수건들’이 그들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했지만, 그들의 경배의 대상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를 통한 ‘모세의 하나님’이었으며, 그것도 잘못 이해되고 왜곡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도자로 삼으심으로써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을 찾으며 그들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모세의 등뒤로 숨어서 모세의 그늘에 가려진 채로 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16절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34-35절에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대함으로 보기를 원하였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는 그 얼굴의 수건을 벗고 영광의 광채를 바라보았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하신 논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글(토라, 하나님의 지시사항들)을 잘못 해석한 그들의 잘못된 마음의 눈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편견과 안일함의 수건’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수건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간구하고 주의 영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으로 우리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만날 때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쇠사슬에서 놓임을 받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 일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번번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참 자유자가 아니며 여전히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종의 멍에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과 하나님(혹은 교회)의 일을 하는 데 상충함(conflict)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물론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당연히’ 세상의 일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보통사람(크리스천이라고 할지라도)의 세상을 사는 지혜라고 여깁니다. 이는 아직도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일은 무시(無視)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을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노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6:33)”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 말씀을 믿고, 이 말씀을 의지하고, 이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변명(excuse)의 수건’으로 그 마음을 덮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그 일은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는 대신에 자기가 하지 않는 일마다 이래서 저래서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고 자기 주장을 전개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허락하신 일을 무시(無視)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의 일 다음에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영육(靈肉) 간에 강건(剛健)함을 허락하십니다. 적은 수면을 취하고도 피곤치 않게 만드십니다. 시간의 상충을 피하는 지혜를 또한 허락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진리의 말씀에 의지해서 행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분이시며 신실한 분이시며 진정으로 우리로 자유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신 것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방법이요 지혜입니다.
18절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담대함과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야 합니까?
여기서 성소는 “지성소”를 의미하는데 곧 하나님의 찬란하고 밝은 영광이 머물러 계신 곳입니다. 전에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때를 얻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신을 씻기시매 휘장이 찢어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길을 통하여서 담력을 얻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는데 왜 어떤 사람은 아직도 영광 가까이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온전히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특권과 효력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본체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 아니요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을 바라보며 나아오는 자마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요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9절)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11절)”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하는데, 예수님을 3년 가까이 따라다닌 빌립은 어째서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제자들이 아직 그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받기 전이어서 그들 마음을 덮고 있던 ‘욕망과 편견의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던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던 수건을 벗겨주시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영광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고, 영광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행하되 죽음도 사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고집과 편협과 교만과 왜곡과 안일함의 수건’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어떠한 방법과 모양으로 습관적으로 주님을 믿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여러분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지 못해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지 못하여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아니 하였다면, 그리스도 안에 참 자유자의 기쁨과 평안이 여러분 가운데 아직 없다면, 잘못된 믿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참 기쁨과 참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카보드: כבד)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모세의 얼굴에 덮인 여호와의 영광의 뒷면의 광채가 아닌,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앞면의 광채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의의 직분, 영광의 직분이 참으로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질 것이며, 이 직분을 위하여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려고 할 것입니다.
1
언젠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남자 기계체조에서 채점이 잘못되어서, 금메달을 받아야 할 한국선수가 동메달을 받고 은메달을 받아야 할 미국선수가 금메달을 수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대한 반응이 미국사람들과 한국사람들 간에 천지차이처럼 컸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채점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선수(Paul Ham)가 금메달을 수상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채점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금메달을 양보하지 않고 모른 체하는 것은 양심불량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체조위원회는 미국선수로 하여금 금메달을 양보하게 하든지 적어도 공동 금메달을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이와 같이 다른 의견들이 각각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까?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다른 의견들이며 말하자면 다른 편견들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에 편견이나 아집이 없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이 세상에는 참으로 공평 정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하나님 말씀대로 되어지지 않음을 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각각 다른 환경이나 처지가 우리의 눈에 베일을 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부한 사람은 부함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높은 지위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낮은 지위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남자는 남자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여자는 여자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백인은 백인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흑인은 흑인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습니다.
우리의 색안경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우리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는 항상 굴절된 시각이거나 채색된 이해일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멜 깁슨(Mel Gibson)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영화를 만들되 이제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원어 사용이란 획기적인 방법으로 만들었습니다. 해서, 배우들이 아람어로 말하고, 또한 라틴어로 말하였습니다. 의상도 역사적 고증을 받아 최대한 당시의 사람들이 입었음직한 의상들을 갖추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역을 맡은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백인 미국인 배우가 맡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 속에 연상할 때 흔히 갈색 또는 금발의 긴 머리를 가진 백색의 미남을 그리는 것은 우리가 보았던 영화 속의 예수님이, 혹은 영화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러할 것이라고 여기는 나의 상상이 편견으로 덮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백인들은 백인 우월주의에서 백색 그리스도를 만들고, 다른 유색인들 역시 백인이 우월하거나 아름답다는 생각에서 백색 그리스도를 연상하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여기에 도전한 것이 “흑인 신학(Black Theology)"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흑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인 예수님이 편견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 예수님도 편견인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2,000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이셨겠습니까?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태어나시고 그의 조상 아브라함이 지금 이란-이락 부근인 갈대아-우르 사람이었기에 얼굴은 다소 검은 색을 띠고 머리카락은 약간은 곱슬거렸을 것입니다. 2,000년 동안 세상을 유리하다가 피가 타인종과 많이 섞여버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모습과도 많이 다르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각 다른 수건을 쓴 얼굴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세축복(現世祝福)이라는 수건'을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대신에 말씀 속에서 현세축복만을 찾고자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고 말씀하지만, 이 말씀이 이 부류에 속한 사람의 눈에 보일 리가 없고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은 그저 그가 명령하고 강청하는 대로 순종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하나님은 그가 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셔야 하고, 병이 낫게 해달라고 하면 병을 반드시 고쳐 주셔야 하고, 높은 지위를 달라고 강청하면 반드시 높은 지위를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시면 그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해서,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될 때 하나님은 피곤하시고 고달프십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많고 ‘이런 사람들을 위한 수건’으로 가려진 가짜 복음(false gospel)이 참으로 인기가 좋습니다.
2
모세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오릅니다. 40일을 밤낮으로 시내산에 거하다가 내려와보니 백성들과 자기 형 아론이 그새를 못 참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낸 여호와라고 칭하며 그것에 절하고 춤추고 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모세는 두 돌판을 내어던져 깨버리고, 금송아지는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합니다(출 32:19-20).
두 번째 산에 오를 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이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19-23).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얼굴로 대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태양도 너무 밝아 바로 쳐다보면 눈이 멀어버리는데, 하물며 태양을 지으신 하나님이야 더욱 광채가 찬란하여 그 존귀하신 얼굴을 감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영광(榮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보드”(דבכ)는 영광의 본체(本體)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광채(光彩)입니다. 햇빛의 따사로움을 받으며 태양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광채를 받으며 하나님의 계심을 경험하고 사랑과 은총에 감사해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얼굴에 난 광채로 인하여 그를 주목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해서, 모세는 백성들 앞에 설 때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여호와의 영광의 광채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있는 광채는 근원적인 광채가 아니었기에 차츰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건으로 덮은 모세의 얼굴의 가려진 광채를 주목하며, 새 언약의 그림자요 모형인 불완전한 율법을 마치 영광의 본체인양 착각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여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9-11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는데,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께서 본체의 영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모세의 수건으로 가리워진 영광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은 더 큰 영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지 아니하였습니다.
6절에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천거서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확신을 주시고 그로 인하여서 만족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바울과 그 일행을 새 언약의 일군으로 삼으신 일을 만족케(충분케, 잘 감당하게) 하십니다.
“만족케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카노오”(ἱκανόω)는 ‘잘 감당하게 하다’ 또는 ‘충분케 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을 잘 감당케 함이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문(儀文)은 율법을 말하는데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한 것은 바울이 율법의 역할을 부인하거나 부정적으로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세와 그 이후의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제사장들이 의문의 일군들--구 언약의 일군들이었는데 그들의 역할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의문 곧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 새 언약이신 그리스도께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데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입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사람에게 오매 그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율법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죄의 결과가 죽음입니다. 의문--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을 초래하는 죄’를 깨닫게 되었는데 율법은 우리를 살릴 힘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다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가 되어 생명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한 율법은 또한 우리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맡기신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은 죄를 생각나게 하는 일을 위한 것이 아니요 사람을 살리는 일을 감당케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은 그와 같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영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일군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그가 먼저 영으로 살아남을 경험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이 죽는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하나님)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이제 의문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됩니다.
성령으로 살리심을 얻은 새 언약의 일군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의 생의 가치관과 우선순위가 바뀌고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전에는 나를 위하여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그전에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 없는 사람 같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이 즐겁고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음을 느낍니다.
7-8절에 “돌로 써서 새긴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의문의 직분의 영광은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과 사십 일을 함께 거하며 말씀한 까닭에 얻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에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일시적이요 따라서 없어질 것인데도 감히 주목하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일군에게 허락하신 영광은 근원적이요 지속적인 것이기에 모세가 맡았던 의문--구 언약의 직분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은 모세가 감당했던 의문의 직분, 정죄의 직분과는 달리, 복의 근원, 영광의 근원, 광채의 근원인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말미암는 귀한 것입니다.
모세의 영광은 결국 없어지고 대체될 모형적인 것이었지만, 새 언약의 영광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광이요 광채이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항상 계시기 때문입니다.
9절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했습니다.
의문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문의 직분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죄인인 것을 선포하게 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일꾼된 신약 백성들에게 맡기신 의의 직분은 죄를 깨달은 사람--사망에 이르게 된 사람을 살리는 일을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롬 1:17) 의의 복음, 생명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선포케 합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직분도 영광스러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는 생명의 직분, 의의 직분을 감당함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이 일 감당함을 뒤로 미루어야 하겠습니까?
이 일을 감당할 때 그저 침묵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10-11절에 “영광 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과거 모세를 비롯한 구 언약의 일군들이 맡았던 의문의 직분도 영광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영광은 일시적인 것이요 한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더 큰 영광이 이르매 이제 사라진 것입니다. 그 영광은 사람을 살리는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영광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 있을 영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직분을 영광스럽고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이같은 소망”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새 언약의 일군이 되는 것이요, 의문의 직분보다 더 영광스러운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그가 맡기신 직분에 대하여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과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합니다.
13절에서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광채는 그 끝이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덮은 까닭은 백성들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광채가 점차 사라질 것이기에 그 결국을 드러내지 않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원함은 덮여지고 가리워진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고자 함이 아니요, 그의 증거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그러나 저희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그 얼굴에 수건을 쓴 까닭에 이스라엘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 모세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신 것과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그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 한 것은 모세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 때문도 아니며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요 편견과 강퍅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서, 모세의 얼굴에만 수건이 덮여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도 수건이 덮여져 있어서 약속의 말씀이신 구약을 읽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15절에서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 했습니다.
14절의 부연 설명입니다.
“오늘까지”라고 한 것은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는데’(갈 3:24), 그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현재까지란 뜻입니다. 구약에 예언되어진 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인 것이 그의 생을 통하여 밝히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오늘까지” 전혀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얼굴을 덮은 수건 외에 또 다른 ‘편견과 완고의 수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덮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수건에 덮여진 모세의 얼굴--‘가리워진 모세의 광채’ 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를 바라보는 것도 두려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더더욱 두려워서 피하고자 했습니다.
‘두려움의 수건’이 그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안일과 편견과 고집의 수건들’이 그들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했지만, 그들의 경배의 대상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를 통한 ‘모세의 하나님’이었으며, 그것도 잘못 이해되고 왜곡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도자로 삼으심으로써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을 찾으며 그들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모세의 등뒤로 숨어서 모세의 그늘에 가려진 채로 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16절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34-35절에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대함으로 보기를 원하였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는 그 얼굴의 수건을 벗고 영광의 광채를 바라보았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하신 논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글(토라, 하나님의 지시사항들)을 잘못 해석한 그들의 잘못된 마음의 눈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편견과 안일함의 수건’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수건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간구하고 주의 영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으로 우리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만날 때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쇠사슬에서 놓임을 받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 일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번번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참 자유자가 아니며 여전히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종의 멍에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과 하나님(혹은 교회)의 일을 하는 데 상충함(conflict)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물론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당연히’ 세상의 일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보통사람(크리스천이라고 할지라도)의 세상을 사는 지혜라고 여깁니다. 이는 아직도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일은 무시(無視)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을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노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6:33)”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 말씀을 믿고, 이 말씀을 의지하고, 이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변명(excuse)의 수건’으로 그 마음을 덮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그 일은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는 대신에 자기가 하지 않는 일마다 이래서 저래서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고 자기 주장을 전개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허락하신 일을 무시(無視)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의 일 다음에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영육(靈肉) 간에 강건(剛健)함을 허락하십니다. 적은 수면을 취하고도 피곤치 않게 만드십니다. 시간의 상충을 피하는 지혜를 또한 허락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진리의 말씀에 의지해서 행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분이시며 신실한 분이시며 진정으로 우리로 자유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신 것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방법이요 지혜입니다.
18절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담대함과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야 합니까?
여기서 성소는 “지성소”를 의미하는데 곧 하나님의 찬란하고 밝은 영광이 머물러 계신 곳입니다. 전에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때를 얻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신을 씻기시매 휘장이 찢어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길을 통하여서 담력을 얻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는데 왜 어떤 사람은 아직도 영광 가까이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온전히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특권과 효력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본체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 아니요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을 바라보며 나아오는 자마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요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9절)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11절)”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하는데, 예수님을 3년 가까이 따라다닌 빌립은 어째서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제자들이 아직 그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받기 전이어서 그들 마음을 덮고 있던 ‘욕망과 편견의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던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던 수건을 벗겨주시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영광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고, 영광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행하되 죽음도 사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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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고집과 편협과 교만과 왜곡과 안일함의 수건’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어떠한 방법과 모양으로 습관적으로 주님을 믿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여러분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지 못해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지 못하여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아니 하였다면, 그리스도 안에 참 자유자의 기쁨과 평안이 여러분 가운데 아직 없다면, 잘못된 믿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참 기쁨과 참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카보드: כבד)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모세의 얼굴에 덮인 여호와의 영광의 뒷면의 광채가 아닌,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앞면의 광채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의의 직분, 영광의 직분이 참으로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질 것이며, 이 직분을 위하여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려고 할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로마서 12:3-13)
“믿음의 분량대로” (로마서 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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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서 출생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 1887-1982)은, “하루 연습을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을 쉬면 내 친구가 알고, 사흘 연습을 쉬면 온 청중이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연습 또는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 말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에 적용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주 신앙생활을 쉬면 내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두 주 신앙생활을 쉬면 가까이 지내는 교우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세 주 신앙생활을 쉬면 온 교회 교우들이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안다.“
신앙생활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요 훈련이라고 바울은 디모데전서(4: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연습을 게을리했을 때 경기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낼 수 없듯이, 믿는 사람이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하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그 길을 달려나갈 수 없습니다.
일전에 강아지를 사기 위하여 인터넷 여러 사이트(sites)를 살피고 강아지에 대해서 약간의 공부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같은 종의 강아지라고 하더라도 훈련되지 않은 강아지와 유명한 사육사에 의하여 훈련되어진 강아지는, 식견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 강아지가 그 강아지 같은데, 그 가격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좋은 종자의 강아지라고 하더라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강아지는 잡견(雜犬)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가치도 이와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훈련되어진 그리스도인과 훈련되어지지 않은 교인 사이에는 그 가치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잡견이나 훈련되어지지 않은 종자견이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거나 주인을 물거나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이 훈련되어지지 않은 교인들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말하거나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반면에 훈련되어진 개는 절제 있는 행동을 하고 함부로 사람을 물지 않지만 주인이 위험한 순간에 처하면 그 목숨까지 내거는 것 같이, 훈련되어진 그리스도인들은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절제가 있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그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고자 합니다.
일전에 커네티컷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시행한 목회자를 위한 제자훈련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에 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 말씀에 미국 이민교회는 어중이떠중이 신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교회 교인들을 보고는 그 생각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 교회의 훈련된 신자들의
목회자들을 대하는 예절을 기본 신앙인의 모습이나 또한 평신도 사역자들로서 구역인도를 하는 모습들에서 참으로 잘 훈련받으면 평신도들도 전문 목회자들 못지 않게 훌륭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구나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때를 정하여 일년에 한두 번 각 구역별, 각 기관별 헌신예배를 하는 것은 그저 일년에 한 두 번 마지못하여 헌신예배에 참석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 더 많이 쓰임 받고 그분을 더욱 닮아가기 위하여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경건을 연습하고 훈련을 쌓아가기 위한 결단을 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더 여선교회 회원들은 인생의 경력에서 앞선 사람들로서 어머니, 큰언니 또는 누님과도 같은 분들이십니다. 해서, 인생 자체만으로 보더라도 인생의 후배들에게 권면하거나 가르칠 것이 많습니다. 신앙의 경륜에서도 많은 분들이 젊은 사람들보다는 먼저 믿으신 분들이요 교회생활에서도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경험하셔서 신앙의 지혜도 있는 분들입니다. 그 위에 열심과 경건의 훈련까지 그 삶의 연륜만큼이나 오래 쌓아오셨다면 이는 분명 나중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기에 충분한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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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욕심이 우리로 불만의 마음을 갖게 하며 불만의 마음이 우리로 일하지 않게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가 2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을 맡았는데도 다른 종들에게는 그보다 더 많은 달란트가 맡겨진 것에 불만을 품었을 때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참새가 황새를 따라가고자 한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합니다. 아직 믿음으로는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교회에서 큰 일을 감당하려고 하다보면 때로는 자기의 믿음이 그 직분이나 직임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믿음이 어떠한 줄 늘 헤아려서 자기가 기쁨과 감사로 봉사할 수 있는 일을 맡되 믿음이 자람에 따라 그 분량이나 직책의 중함을 늘려가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49장 28절에 야곱이 그 자식들에게 축복하되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 7절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시고 직임을 맡기시는데, 우리의 재능을 따라, 우리의 능력을 따라, 또는 믿음의 분량을 따라 맡기십니다.
4-5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 몸에 눈, 코, 귀, 입, 손, 발, 기타 여러 다른 기관들이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쓸데없이 그냥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몸인 교회의 지체는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사람 몸의 각 지체가 중요하듯이 교회를 구성하는 각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몸을 구성하고있는 지체인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교우를 비난하고 판단할 때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지체의 각 부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이신 교회에 속한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 몸의 지극히 미약한 부분--혹 평소에는 필요 없는 것같이 보이는 지체의 일부분 맹장이 잘못되었다든지, 혹은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다든지 할 때에 우리는 그 부분을 치료하기에 전 신경을 다 씁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미약한 것 같이 보이는, 별로 필요 없는 것같이 보이는 작은 자의 아픔과 고통에도 동참하여야 합니다. 그의 잘못됨을 뒤에서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하기보다는 그 지체의 치료를 위해서 힘쓰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5-26절에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말씀합니다.
6-8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χάρις)대로 받은 은사(χάρισμα)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여기서 은사(恩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신 성령의 선물(膳物)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2:8-10(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 고린도전서 12:28(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하는 것, 사랑), 에베소서 4:11(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에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능력에 따라, 소질에 따라, 혹은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른 은사들을 주셨는데,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성령의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은사들은 고린도전서 12장이나 다른 성경구절에 나오는 은사들에 비해서 비교적 생색이 덜 나고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라기보다는 뒤에 숨겨진 은사들이 많습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믿음의 분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로서 예언(豫言)은 점쟁이가 점을 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선지자(先知者)를 예언자(豫言者)라고도 하며 선지서를 예언서라고도 하는데, 선지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점을 치거나 예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 어떻게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인가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혹은 장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던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사로이 사람의 운세를 점치면서 은사를 받았다고 함은 잘못입니다.
섬기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섬기는 일을 잘 감당함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라 하여 일을 감당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면 이 사람은 일을 하면서도 은사를 제대로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하고, 권위(勸慰)하는 자는 권위(勸慰)하는 일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권위(勸慰)한다고 함은 권면하고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또, 구제하는 자에게는 성실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다스리는 자는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부지런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긍휼(矜恤)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교회에 속한 각 사람이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함에 자기에게 허락되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잘 경영할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9-12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의 삶에 대한 지침(指針)을 12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첫째로 한글성경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되어있는데, 헬라어 원어는 명령적인 의미로서 영어성경의 번역이 원래의 뜻에 가깝습니다: “Let love be genuine!"(RSV) ”성도의 사랑이 거짓 없는 순수한 사랑이 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반대급부(反對給付)를 바라는 사랑이어서도 안되고,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잘해주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22에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말씀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뜨겁게 사랑함이--체면 때문도 아니요 무엇을 바래서도 아닌--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둘째로 “악을 미워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은 악과 결별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하는 대로 죄와 악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내가 죄짓더라도, 허물이 많은 삶을 살더라도 주님께서 내 미래죄도 용서하여 주셨으니 상관없어” 하는 사람은 여전히 악을 미워하지 않는--악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은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로 “선(善)에 속하라”고 말씀합니다. 악(惡)이 어둠이요 사단의 권세(權勢)라고 한다면, 선(善)은 빛이요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영역이니까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속하여야 할 것이요, 추구하여야 할 일입니다.
넷째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love one another with brotherly affection)"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어느 사람의 집에서 무리에게 말씀을 하고 계신 중이었는데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여러분의 형제요 자매입니까? 우리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원하는 우리는 영적(靈的)인 새 가족입니다. 우리는 교우들을 사랑할 때 형제사랑(brotherly love)으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부족한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받은 대접만큼만 그 사람을 대합니다. 그가 나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으면 나도 그를 위해서 별로 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우들이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먼저 다른 지체인 교우를 사랑하고 존경할 때, 그와 같이 아름다운 일들이 교회 내에서 계속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선지자요 율법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절을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그를 원수로 대하는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제물(代贖祭物)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할 때도 우리가 “존경하기를 먼저 할 때” 그러한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로 바뀔 것입니다.
여섯째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믿지않는 사람이 칠일을 갖고 생활하는데 우리는 육일을 갖고 살면서 그들과 같은 혹은 더 나은 삶을 감당하여야 하므로 부지런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일을 말함이 아니요 교회 안에서의 일입니다. 교회의 일은 나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 아니니까 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로 “열심(熱心)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당부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忠誠)이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길 때 열심을 내기가 어려우나 이렇게 함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확증(確證)함입니다.
여덟째로 “소망(所望) 중에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 소망이 없고 낙담과 좌절만 있다면 이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했습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소망 중에도 즐거워하므로” 믿음이 연약한 다른 교우들에게도 소망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아홉째로 “환난(患難) 중에 참으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서 자주 반복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의 환난과 곤고가 임하지만 이를 끝까지 잘 감당할 때 우리에게는 주님의 상급이 마련되어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에,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逼迫)과 환난(患難)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열 번째로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당부합니다.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의 영적(靈的) 호흡(呼吸)입니다.
사람이 호흡을 중단하면 죽듯이 믿는 사람이 기도를 중단함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狀態)에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쉬지말고 항상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님, 기도할 것이 별로 없는데요.” 기도할 것이 왜 없겠습니까? 다만, 무엇을 기도할지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이지요.
열한 번째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말씀합니다.
형제를 거짓없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성도 가운데 누가 무슨 어려움이 있음을 압니다.
다만 우리가 교회에서 누가 무슨 어려움이 있는 줄 모르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어려움에 대해서 별로 듣고싶어 하지 않고 보고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어려움을 알기는 알지만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에 더딘 것은, 듣기는 듣고 보기는 보아도 수다꺼리의 대상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4절에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너희 가운데 있는 소자(=작은 자)에게 잘 한 것이 곧 나에게 잘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소자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우리 중에 어려움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고있는 성도입니다. 이들을 돌보고 필요한 것을 공급(供給)함이 우리 믿는 사람이 마땅히 행할 바입니다.
열두 번째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전에 한국의 시골 인심은 나그네에게 음식도 대접하고 잠자리도 제공해주는 아름다운 풍속이었습니다.
누구나 이러한 인심이 좋은 줄 압니다만, 막상 낯선 사람을 대접할 엄두가 잘 안 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해치지나 않을까? 무엇을 훔쳐 가지나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혹은 나와 별로 상관없는 사람에게 왜 잘해주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그네 대접하기에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3:2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말씀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 그랬고, 그의 조카 롯이 그랬습니다. 특별히 롯은 천사들을 잘 대접함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운데 딸 둘과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구분에서 양의 반열에 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영접(迎接)하였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형제·자매 가운데 쉴 고이 없는 사람에게 잘 대접하는 것이, 혹은 낯선 사람이 우리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할 때에 그들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 주님을 잘 대접해준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말로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앵무새처럼 반복하기보다는 실제로 고통 당하고있는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잘 대해주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람 되기 위하여 우리는 신앙을 연습하고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열거된 은사들과 그 활용, 생활지침들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무엇에 훈련되어질 것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은 어떠한 은사들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저마다의 각기 다른 은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어떠한 은사들이 있나 한 번 찾아보시고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남들에게 있는 그럴듯한 은사가 없고 별로 생색나지 않는 은사가 있다고 하여 불만스런 마음으로 자신의 은사를 천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개발하시고 잘 경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겸손하고 감사하는 삶의 모습으로 인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몸이신 교회를 건강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근본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이 모든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세상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앞서 교회 안에서 성도에 대한 사랑을 먼저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를 사랑하고 돌보되 그들에게 대접을 받은 답례로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그 일들을 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이며 우리 교회가 속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1
폴란드에서 출생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 1887-1982)은, “하루 연습을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을 쉬면 내 친구가 알고, 사흘 연습을 쉬면 온 청중이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연습 또는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 말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에 적용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주 신앙생활을 쉬면 내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두 주 신앙생활을 쉬면 가까이 지내는 교우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세 주 신앙생활을 쉬면 온 교회 교우들이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안다.“
신앙생활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요 훈련이라고 바울은 디모데전서(4: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연습을 게을리했을 때 경기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낼 수 없듯이, 믿는 사람이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하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그 길을 달려나갈 수 없습니다.
일전에 강아지를 사기 위하여 인터넷 여러 사이트(sites)를 살피고 강아지에 대해서 약간의 공부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같은 종의 강아지라고 하더라도 훈련되지 않은 강아지와 유명한 사육사에 의하여 훈련되어진 강아지는, 식견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 강아지가 그 강아지 같은데, 그 가격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좋은 종자의 강아지라고 하더라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강아지는 잡견(雜犬)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가치도 이와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훈련되어진 그리스도인과 훈련되어지지 않은 교인 사이에는 그 가치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잡견이나 훈련되어지지 않은 종자견이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거나 주인을 물거나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이 훈련되어지지 않은 교인들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말하거나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반면에 훈련되어진 개는 절제 있는 행동을 하고 함부로 사람을 물지 않지만 주인이 위험한 순간에 처하면 그 목숨까지 내거는 것 같이, 훈련되어진 그리스도인들은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절제가 있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그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고자 합니다.
일전에 커네티컷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시행한 목회자를 위한 제자훈련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에 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 말씀에 미국 이민교회는 어중이떠중이 신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교회 교인들을 보고는 그 생각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 교회의 훈련된 신자들의
목회자들을 대하는 예절을 기본 신앙인의 모습이나 또한 평신도 사역자들로서 구역인도를 하는 모습들에서 참으로 잘 훈련받으면 평신도들도 전문 목회자들 못지 않게 훌륭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구나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때를 정하여 일년에 한두 번 각 구역별, 각 기관별 헌신예배를 하는 것은 그저 일년에 한 두 번 마지못하여 헌신예배에 참석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 더 많이 쓰임 받고 그분을 더욱 닮아가기 위하여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경건을 연습하고 훈련을 쌓아가기 위한 결단을 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더 여선교회 회원들은 인생의 경력에서 앞선 사람들로서 어머니, 큰언니 또는 누님과도 같은 분들이십니다. 해서, 인생 자체만으로 보더라도 인생의 후배들에게 권면하거나 가르칠 것이 많습니다. 신앙의 경륜에서도 많은 분들이 젊은 사람들보다는 먼저 믿으신 분들이요 교회생활에서도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경험하셔서 신앙의 지혜도 있는 분들입니다. 그 위에 열심과 경건의 훈련까지 그 삶의 연륜만큼이나 오래 쌓아오셨다면 이는 분명 나중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기에 충분한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2
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욕심이 우리로 불만의 마음을 갖게 하며 불만의 마음이 우리로 일하지 않게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가 2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을 맡았는데도 다른 종들에게는 그보다 더 많은 달란트가 맡겨진 것에 불만을 품었을 때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참새가 황새를 따라가고자 한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합니다. 아직 믿음으로는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교회에서 큰 일을 감당하려고 하다보면 때로는 자기의 믿음이 그 직분이나 직임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믿음이 어떠한 줄 늘 헤아려서 자기가 기쁨과 감사로 봉사할 수 있는 일을 맡되 믿음이 자람에 따라 그 분량이나 직책의 중함을 늘려가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49장 28절에 야곱이 그 자식들에게 축복하되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 7절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시고 직임을 맡기시는데, 우리의 재능을 따라, 우리의 능력을 따라, 또는 믿음의 분량을 따라 맡기십니다.
4-5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 몸에 눈, 코, 귀, 입, 손, 발, 기타 여러 다른 기관들이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쓸데없이 그냥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몸인 교회의 지체는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사람 몸의 각 지체가 중요하듯이 교회를 구성하는 각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몸을 구성하고있는 지체인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교우를 비난하고 판단할 때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지체의 각 부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이신 교회에 속한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 몸의 지극히 미약한 부분--혹 평소에는 필요 없는 것같이 보이는 지체의 일부분 맹장이 잘못되었다든지, 혹은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다든지 할 때에 우리는 그 부분을 치료하기에 전 신경을 다 씁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미약한 것 같이 보이는, 별로 필요 없는 것같이 보이는 작은 자의 아픔과 고통에도 동참하여야 합니다. 그의 잘못됨을 뒤에서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하기보다는 그 지체의 치료를 위해서 힘쓰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5-26절에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말씀합니다.
6-8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χάρις)대로 받은 은사(χάρισμα)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여기서 은사(恩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신 성령의 선물(膳物)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2:8-10(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 고린도전서 12:28(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하는 것, 사랑), 에베소서 4:11(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에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능력에 따라, 소질에 따라, 혹은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른 은사들을 주셨는데,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성령의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은사들은 고린도전서 12장이나 다른 성경구절에 나오는 은사들에 비해서 비교적 생색이 덜 나고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라기보다는 뒤에 숨겨진 은사들이 많습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믿음의 분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로서 예언(豫言)은 점쟁이가 점을 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선지자(先知者)를 예언자(豫言者)라고도 하며 선지서를 예언서라고도 하는데, 선지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점을 치거나 예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 어떻게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인가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혹은 장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던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사로이 사람의 운세를 점치면서 은사를 받았다고 함은 잘못입니다.
섬기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섬기는 일을 잘 감당함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라 하여 일을 감당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면 이 사람은 일을 하면서도 은사를 제대로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하고, 권위(勸慰)하는 자는 권위(勸慰)하는 일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권위(勸慰)한다고 함은 권면하고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또, 구제하는 자에게는 성실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다스리는 자는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부지런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긍휼(矜恤)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교회에 속한 각 사람이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함에 자기에게 허락되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잘 경영할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9-12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의 삶에 대한 지침(指針)을 12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첫째로 한글성경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되어있는데, 헬라어 원어는 명령적인 의미로서 영어성경의 번역이 원래의 뜻에 가깝습니다: “Let love be genuine!"(RSV) ”성도의 사랑이 거짓 없는 순수한 사랑이 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반대급부(反對給付)를 바라는 사랑이어서도 안되고,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잘해주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22에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말씀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뜨겁게 사랑함이--체면 때문도 아니요 무엇을 바래서도 아닌--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둘째로 “악을 미워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은 악과 결별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하는 대로 죄와 악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내가 죄짓더라도, 허물이 많은 삶을 살더라도 주님께서 내 미래죄도 용서하여 주셨으니 상관없어” 하는 사람은 여전히 악을 미워하지 않는--악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은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로 “선(善)에 속하라”고 말씀합니다. 악(惡)이 어둠이요 사단의 권세(權勢)라고 한다면, 선(善)은 빛이요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영역이니까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속하여야 할 것이요, 추구하여야 할 일입니다.
넷째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love one another with brotherly affection)"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어느 사람의 집에서 무리에게 말씀을 하고 계신 중이었는데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여러분의 형제요 자매입니까? 우리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원하는 우리는 영적(靈的)인 새 가족입니다. 우리는 교우들을 사랑할 때 형제사랑(brotherly love)으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부족한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받은 대접만큼만 그 사람을 대합니다. 그가 나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으면 나도 그를 위해서 별로 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우들이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먼저 다른 지체인 교우를 사랑하고 존경할 때, 그와 같이 아름다운 일들이 교회 내에서 계속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선지자요 율법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절을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그를 원수로 대하는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제물(代贖祭物)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할 때도 우리가 “존경하기를 먼저 할 때” 그러한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로 바뀔 것입니다.
여섯째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믿지않는 사람이 칠일을 갖고 생활하는데 우리는 육일을 갖고 살면서 그들과 같은 혹은 더 나은 삶을 감당하여야 하므로 부지런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일을 말함이 아니요 교회 안에서의 일입니다. 교회의 일은 나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 아니니까 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로 “열심(熱心)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당부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忠誠)이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길 때 열심을 내기가 어려우나 이렇게 함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확증(確證)함입니다.
여덟째로 “소망(所望) 중에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 소망이 없고 낙담과 좌절만 있다면 이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했습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소망 중에도 즐거워하므로” 믿음이 연약한 다른 교우들에게도 소망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아홉째로 “환난(患難) 중에 참으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서 자주 반복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의 환난과 곤고가 임하지만 이를 끝까지 잘 감당할 때 우리에게는 주님의 상급이 마련되어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에,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逼迫)과 환난(患難)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열 번째로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당부합니다.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의 영적(靈的) 호흡(呼吸)입니다.
사람이 호흡을 중단하면 죽듯이 믿는 사람이 기도를 중단함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狀態)에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쉬지말고 항상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님, 기도할 것이 별로 없는데요.” 기도할 것이 왜 없겠습니까? 다만, 무엇을 기도할지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이지요.
열한 번째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말씀합니다.
형제를 거짓없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성도 가운데 누가 무슨 어려움이 있음을 압니다.
다만 우리가 교회에서 누가 무슨 어려움이 있는 줄 모르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어려움에 대해서 별로 듣고싶어 하지 않고 보고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어려움을 알기는 알지만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에 더딘 것은, 듣기는 듣고 보기는 보아도 수다꺼리의 대상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4절에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너희 가운데 있는 소자(=작은 자)에게 잘 한 것이 곧 나에게 잘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소자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우리 중에 어려움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고있는 성도입니다. 이들을 돌보고 필요한 것을 공급(供給)함이 우리 믿는 사람이 마땅히 행할 바입니다.
열두 번째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전에 한국의 시골 인심은 나그네에게 음식도 대접하고 잠자리도 제공해주는 아름다운 풍속이었습니다.
누구나 이러한 인심이 좋은 줄 압니다만, 막상 낯선 사람을 대접할 엄두가 잘 안 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해치지나 않을까? 무엇을 훔쳐 가지나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혹은 나와 별로 상관없는 사람에게 왜 잘해주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그네 대접하기에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3:2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말씀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 그랬고, 그의 조카 롯이 그랬습니다. 특별히 롯은 천사들을 잘 대접함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운데 딸 둘과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구분에서 양의 반열에 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영접(迎接)하였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형제·자매 가운데 쉴 고이 없는 사람에게 잘 대접하는 것이, 혹은 낯선 사람이 우리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할 때에 그들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 주님을 잘 대접해준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말로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앵무새처럼 반복하기보다는 실제로 고통 당하고있는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잘 대해주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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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 되기 위하여 우리는 신앙을 연습하고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열거된 은사들과 그 활용, 생활지침들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무엇에 훈련되어질 것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은 어떠한 은사들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저마다의 각기 다른 은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어떠한 은사들이 있나 한 번 찾아보시고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남들에게 있는 그럴듯한 은사가 없고 별로 생색나지 않는 은사가 있다고 하여 불만스런 마음으로 자신의 은사를 천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개발하시고 잘 경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겸손하고 감사하는 삶의 모습으로 인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몸이신 교회를 건강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근본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이 모든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세상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앞서 교회 안에서 성도에 대한 사랑을 먼저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를 사랑하고 돌보되 그들에게 대접을 받은 답례로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그 일들을 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이며 우리 교회가 속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를 변화시키는 여성: 루디아와 브리스길라” (행전 16:11-15; 18:1-4, 24-28)
“교회를 변화시키는 여성: 루디아와 브리스길라” (행전 16:11-15; 18:1-4, 24-28)
1
흔히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말이 많다고 합니다. 여자들의 뇌 구조는 남자들보다 말을 많이 하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이 많은 것이 반드시 단점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쓸 데 없는 것에 말이 많은 것은 장점이 될 수 없지만, 복음 증거에 말이 많은 것은 반드시 단점이라고 할 수 없고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사 복음서에 공히 여자 혹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목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만일 남자들이 부활을 목도했다면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잠잠했을 터인데, 여자인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기에 나가서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속히 전파했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가르치는 일과 남자를 주관하는 일을 허락지 아니한다’(딤전 2:12)고 하여 여자들이 집단적으로 교회를 기피함으로 교회에 남자들만 나온다고 하면 교회는 삭막할 것입니다.
봉사하는 일, 음식 만드는 일, 설거지하는 일, 성가대의 찬양 등 모든 일들을 남자가 한다면 남녀가 조화하여 봉사하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찬양도 남녀가 어우러져 부르는 것이 음역이 넓으므로 남자들만의 중창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교회에 남-여 선교회가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을 보아도 남선교회보다는 여선교회가 활발합니다. 교회가 남성을 위한 교회와 여성을 위한 교회로 분리된다면, 장담하건대 여성들이 모인 교회들은 문제가 있는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지만, 남성들로 구성된 교회는 문제가 적은 대신에 모이기도 적게 모일 것입니다.
발자크는 말하기를, "여자는 훌륭한 남편을 만드는 천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훌륭한 아내가 훌륭한 남편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유대인 랍비 마빈 토케어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착한 부부가 어쩌다 이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곧 재혼하였습니다. 그는 불운하게도 악한 여자를 만나 악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여자도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 여자도 악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악한 새 남편은 곧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에 의하여 조종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더욱 그러합니다. 좋은 신앙의 부인이 좋은 남편을 만듭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많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는 착한 여인들과 믿음이 없는 악한 여인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을 숨겨준 여리고의 여인 라합,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나오미와 룻, 엘리사를 곁에서 잘 도와주고 죽은 아들을 다시 얻은 수넴 여인, 그리고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하던 이방 수로보니게의 여인 등은 믿음과 행실이 아름다운 여인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악한 여성의 대명사인 아합왕의 처 이세벨, 자신의 남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했던 욥의 아내, 딸을 시켜 세례요한의 목을 쳐서 소반에 담아오게 했던 헤로디아, 남편과 공모하여 성령을 속이려고 했던 삽비라 등의 어리석고 악한 여인들도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8장 2-3절에는 예수님을 도운 여러 여인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밖에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 곁에 교회를 함께 섬기던 좋은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루디아, 브리스길라, 루디아, 뵈뵈,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율리아 등 참 좋은 여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이런 여인들이 없었으면 사역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2
오늘 여선교회 헌신예배를 통하여 루디아와 브리스길라의 전적인 헌신이 교회에 어떤 유익을 가져왔는지 살펴보기로 합니다.
루디아가 믿음으로 인해 그의 가족이 믿게 된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세계 선교에 크게 이바지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실 사도행전 16장은 세계 선교적으로 중요한 장입니다. 바울은 이전에 환상을 보게 됨으로 인해 이곳에 오게 된 것인데 기독교인이지만 유대인인 바울은 기도할 곳, 즉 회당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무리의 여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자주장사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루디아가 바울의 입술을 통하여 전해진 복음을 들었을 때 그와 온 집이 다 세례를 받고 그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 설립의 근간이 마련된 것입니다.
40절에 보면 "두 사람(=바울과 실라)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처럼 감옥에서 나왔을 때에도 바울과 실라는 루디아의 집에 먼저 찾아갔습니다.
만약 루디아가 없었다면 빌립보 교회는 그렇게 칭찬이 있는 교회가 되지 못하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교회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루디아는 돈을 버는 만큼 제대로 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질 때도 루디아가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한 여성으로 인해 그의 가정이 예수를 믿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선교의 토대가 다져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약한 것 같고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기회나 권한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것 같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고자 하면 굉장한 일을 이룰 수 있는 줄 압니다.
또 한 명의 여성 브리스길라는 사도행전 18장에 등장합니다. 그의 남편의 이름은 아굴라인데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부부가 같이 신약성경에 5번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금실이 매우 좋았던 것같이 보이고 두 사람이 마음이 일치하여 주님을 위하여 그 자신들을 드리는데 열정이 있었습니다. 아굴라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경우는 한 번이고(고전 16:19), 나머지 네 번은 모두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행전 18:18, 26; 롬 16:3; 딤후 4:19).
브리스길라가 어떤 여인인가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브리스길라는 가정과 일에 충성한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브리스길라는 가정과 일에 충실한 굉장히 가정적인 여인으로 나타납니다. 좋은 아내이며 가정에 충실한 주부였을 것입니다.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더라면 교회 일도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같이 나온 5번에서 4번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것으로 미루어 브리스길라의 믿음이 아굴라의 믿음을 이끌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봐서 아굴라는 브리스길라에게 좋은 협력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굴라의 관용적인 외조와 협력 없이 브리스길라가 좋은 성도가 되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브리스길라가 가정적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의 눈에 벗어났다면 교회의 좋은 일꾼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여성 직분자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모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일만 아니라 가정의 일, 직장의 일 등 이 모든 일을 잘 하는 자가 좋은 일꾼이란 말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장막 깁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바울과 함께 이 일을 하여 돈을 벌어 전도에 쓸 만큼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 전도하였습니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이 최고의 성도입니다. 자기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동시에 자기 일만 하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라고 합니다.
둘째, 브리스길라는 교회를 잘 섬기는 여인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 교회 설립 당시 바울을 협조한 부부입니다(행전 18:1-4). 본도(Pontus)에서 나고 로마에서 살던 유대인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41-54년)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에 동행하여 에베소로 갔습니다(행 18:18). 그리고 글라우디오가 죽음으로 다시 로마로 갔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편지를 보낼 때에 로마에 있었던 흔적이 로마서에 나타납니다. 로마서 16장 3절에는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로마서 16장 4절에서는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한 것으로 봐서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바울을 전심으로 도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목회서신 저작 당시에는 에베소에 거주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는 말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에는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 집은 교회였습니다. 그 집은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셋째, 브리스길라는 잘 가르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26절에 기록된 대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성경에 능하였던 아볼로를 데려다가 더 자세히 가르쳤습니다.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앞에 나온 것으로 봐서 브리스길라가 주로 가르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볼로는 당대에 최고의 목회자입니다. 당시에 가장 인텔리이고 가장 박식한 목회자였습니다. 당시에 고린도 교회에는 아볼로 파가 있을 만큼 그는 힘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2절에는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에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이만큼 아볼로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2에는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고 합니다. 당시에 가장 헬라문화가 번성하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인 고린도의 교회가 아볼로를 청빙하였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가 청빙할만큼 유능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당시의 최고의 목회자를 브리스길라가 데려다가 가르쳤습니다. 그는 학식은 많았지만 영적 지식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은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모자랐던 것입니다. 이것을 브리스길라가 보충해 준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서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또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시의 고린도 지방의 환경은 젊은 여성들이 지나치게 나서면 오해를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신전에는 젊은 여 사제들이 음란하고 부도덕한 일을 많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받지 않게 하려고 잠잠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디도서 2장 3절에는 "늙은 여자로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라고 합니다. 늙은 여자는 가르치고 젊은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브리스길라는 당대 최고의 목회자를 가르쳤습니다. 브리스길라는 영적 지식이 있었습니다. 훌륭한 교회의 여성은 영적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풍성함이 있어야 합니다.
3
나는 약한 여자라, 나는 어린아이라, 나는 노인이라, 나는 병든 자라 할 수 없다고 할 것이 아닙니다. 루디아를 통하여 아름답고 칭찬이 있는 빌립보 교회가 시작된 것 같이, 브리스길라를 통하여 에베소 교회가 시작되고, 로마에 가정교회를 이룬 것 같이, 또한 아볼로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가 배출된 것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할 때 큰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본 교회에 속한 여선교회 회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또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충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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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말이 많다고 합니다. 여자들의 뇌 구조는 남자들보다 말을 많이 하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이 많은 것이 반드시 단점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쓸 데 없는 것에 말이 많은 것은 장점이 될 수 없지만, 복음 증거에 말이 많은 것은 반드시 단점이라고 할 수 없고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사 복음서에 공히 여자 혹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목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만일 남자들이 부활을 목도했다면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잠잠했을 터인데, 여자인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기에 나가서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속히 전파했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가르치는 일과 남자를 주관하는 일을 허락지 아니한다’(딤전 2:12)고 하여 여자들이 집단적으로 교회를 기피함으로 교회에 남자들만 나온다고 하면 교회는 삭막할 것입니다.
봉사하는 일, 음식 만드는 일, 설거지하는 일, 성가대의 찬양 등 모든 일들을 남자가 한다면 남녀가 조화하여 봉사하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찬양도 남녀가 어우러져 부르는 것이 음역이 넓으므로 남자들만의 중창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교회에 남-여 선교회가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을 보아도 남선교회보다는 여선교회가 활발합니다. 교회가 남성을 위한 교회와 여성을 위한 교회로 분리된다면, 장담하건대 여성들이 모인 교회들은 문제가 있는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지만, 남성들로 구성된 교회는 문제가 적은 대신에 모이기도 적게 모일 것입니다.
발자크는 말하기를, "여자는 훌륭한 남편을 만드는 천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훌륭한 아내가 훌륭한 남편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유대인 랍비 마빈 토케어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착한 부부가 어쩌다 이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곧 재혼하였습니다. 그는 불운하게도 악한 여자를 만나 악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여자도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 여자도 악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악한 새 남편은 곧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에 의하여 조종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더욱 그러합니다. 좋은 신앙의 부인이 좋은 남편을 만듭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많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는 착한 여인들과 믿음이 없는 악한 여인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을 숨겨준 여리고의 여인 라합,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나오미와 룻, 엘리사를 곁에서 잘 도와주고 죽은 아들을 다시 얻은 수넴 여인, 그리고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하던 이방 수로보니게의 여인 등은 믿음과 행실이 아름다운 여인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악한 여성의 대명사인 아합왕의 처 이세벨, 자신의 남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했던 욥의 아내, 딸을 시켜 세례요한의 목을 쳐서 소반에 담아오게 했던 헤로디아, 남편과 공모하여 성령을 속이려고 했던 삽비라 등의 어리석고 악한 여인들도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8장 2-3절에는 예수님을 도운 여러 여인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밖에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 곁에 교회를 함께 섬기던 좋은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루디아, 브리스길라, 루디아, 뵈뵈,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율리아 등 참 좋은 여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이런 여인들이 없었으면 사역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2
오늘 여선교회 헌신예배를 통하여 루디아와 브리스길라의 전적인 헌신이 교회에 어떤 유익을 가져왔는지 살펴보기로 합니다.
루디아가 믿음으로 인해 그의 가족이 믿게 된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세계 선교에 크게 이바지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실 사도행전 16장은 세계 선교적으로 중요한 장입니다. 바울은 이전에 환상을 보게 됨으로 인해 이곳에 오게 된 것인데 기독교인이지만 유대인인 바울은 기도할 곳, 즉 회당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무리의 여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자주장사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루디아가 바울의 입술을 통하여 전해진 복음을 들었을 때 그와 온 집이 다 세례를 받고 그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 설립의 근간이 마련된 것입니다.
40절에 보면 "두 사람(=바울과 실라)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처럼 감옥에서 나왔을 때에도 바울과 실라는 루디아의 집에 먼저 찾아갔습니다.
만약 루디아가 없었다면 빌립보 교회는 그렇게 칭찬이 있는 교회가 되지 못하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교회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루디아는 돈을 버는 만큼 제대로 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질 때도 루디아가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한 여성으로 인해 그의 가정이 예수를 믿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선교의 토대가 다져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약한 것 같고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기회나 권한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것 같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고자 하면 굉장한 일을 이룰 수 있는 줄 압니다.
또 한 명의 여성 브리스길라는 사도행전 18장에 등장합니다. 그의 남편의 이름은 아굴라인데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부부가 같이 신약성경에 5번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금실이 매우 좋았던 것같이 보이고 두 사람이 마음이 일치하여 주님을 위하여 그 자신들을 드리는데 열정이 있었습니다. 아굴라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경우는 한 번이고(고전 16:19), 나머지 네 번은 모두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행전 18:18, 26; 롬 16:3; 딤후 4:19).
브리스길라가 어떤 여인인가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브리스길라는 가정과 일에 충성한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브리스길라는 가정과 일에 충실한 굉장히 가정적인 여인으로 나타납니다. 좋은 아내이며 가정에 충실한 주부였을 것입니다.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더라면 교회 일도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같이 나온 5번에서 4번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것으로 미루어 브리스길라의 믿음이 아굴라의 믿음을 이끌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봐서 아굴라는 브리스길라에게 좋은 협력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굴라의 관용적인 외조와 협력 없이 브리스길라가 좋은 성도가 되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브리스길라가 가정적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의 눈에 벗어났다면 교회의 좋은 일꾼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여성 직분자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모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일만 아니라 가정의 일, 직장의 일 등 이 모든 일을 잘 하는 자가 좋은 일꾼이란 말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장막 깁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바울과 함께 이 일을 하여 돈을 벌어 전도에 쓸 만큼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 전도하였습니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이 최고의 성도입니다. 자기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동시에 자기 일만 하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라고 합니다.
둘째, 브리스길라는 교회를 잘 섬기는 여인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 교회 설립 당시 바울을 협조한 부부입니다(행전 18:1-4). 본도(Pontus)에서 나고 로마에서 살던 유대인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41-54년)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에 동행하여 에베소로 갔습니다(행 18:18). 그리고 글라우디오가 죽음으로 다시 로마로 갔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편지를 보낼 때에 로마에 있었던 흔적이 로마서에 나타납니다. 로마서 16장 3절에는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로마서 16장 4절에서는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한 것으로 봐서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바울을 전심으로 도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목회서신 저작 당시에는 에베소에 거주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는 말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에는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 집은 교회였습니다. 그 집은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셋째, 브리스길라는 잘 가르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26절에 기록된 대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성경에 능하였던 아볼로를 데려다가 더 자세히 가르쳤습니다.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앞에 나온 것으로 봐서 브리스길라가 주로 가르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볼로는 당대에 최고의 목회자입니다. 당시에 가장 인텔리이고 가장 박식한 목회자였습니다. 당시에 고린도 교회에는 아볼로 파가 있을 만큼 그는 힘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2절에는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에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이만큼 아볼로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2에는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고 합니다. 당시에 가장 헬라문화가 번성하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인 고린도의 교회가 아볼로를 청빙하였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가 청빙할만큼 유능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당시의 최고의 목회자를 브리스길라가 데려다가 가르쳤습니다. 그는 학식은 많았지만 영적 지식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은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모자랐던 것입니다. 이것을 브리스길라가 보충해 준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서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또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시의 고린도 지방의 환경은 젊은 여성들이 지나치게 나서면 오해를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신전에는 젊은 여 사제들이 음란하고 부도덕한 일을 많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받지 않게 하려고 잠잠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디도서 2장 3절에는 "늙은 여자로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라고 합니다. 늙은 여자는 가르치고 젊은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브리스길라는 당대 최고의 목회자를 가르쳤습니다. 브리스길라는 영적 지식이 있었습니다. 훌륭한 교회의 여성은 영적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풍성함이 있어야 합니다.
3
나는 약한 여자라, 나는 어린아이라, 나는 노인이라, 나는 병든 자라 할 수 없다고 할 것이 아닙니다. 루디아를 통하여 아름답고 칭찬이 있는 빌립보 교회가 시작된 것 같이, 브리스길라를 통하여 에베소 교회가 시작되고, 로마에 가정교회를 이룬 것 같이, 또한 아볼로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가 배출된 것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할 때 큰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본 교회에 속한 여선교회 회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또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충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직의 소명과 헌신” (누가복음 5:1-11)
“제직의 소명과 헌신” (누가복음 5:1-11)
1
소명(召命, call)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어떤 특별한 일로 부르심을 말합니다.
넬슨(John Oliver Nelson)이라고 하는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목회자로 부르십니다.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들을 목회자로 삼으십니다. 교회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청년들을 부르실 때 부르시는 그런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거듭난 청년들을 부르시고, 설교하시고, 계획을 세우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든 가릴 것 없이 누구든지 자기 전공 직업이 있는 동시에 성별된 주교와 사제가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회자이든 장로이든, 권사나 집사이든, 아니면 평신도이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소명을 받은 사람이므로 소명의 귀중함을 생각하며 신실함과 열성으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 신학자인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그의 저서 “소명(The Call)"에서 ”소명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삶 전체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종종 이같은 총체적인 소명이 왜곡되어 세상의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은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종교적이고 영적인 것만이 성직이라고 격상시키는 일종의 이원론이 문제가 되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소명이란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만이 소명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의 달란트와 능력에 따라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그(=하나님)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성도들을 각각 다른 직임으로 부르셨지만, 그의 부르심의 뜻은 각각 자기의 달란트와 재능에 따라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꾼을 부르심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사람이 예상하는 것과는 다른 때에 부르시는 분이신 것을 알게 합니다.
인생의 삼분지 이를 산 모세를 하나님은 그의 나이 80세에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일로 부르십니다. 그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을 때 그는 자신의 삶이 아무 것도 아니고 그저 실패한 인생으로 여기고 있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그는 아직 인생의 미숙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성년이라고 하기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유약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 예레미야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부르실 때 그는 남방왕국 유다의 한 시골 드고아의 목자요 농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선지자 그것도 적대관계에 있던 북방왕국 이스라엘에서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증오하던 이스라엘의 국수주의자 요나를 적국 니느웨에서 말씀을 외치게 하는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모세, 예레미야, 요나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난색을 표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기도 하였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이 일군을 원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자원하였습니다.
소명이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시는 일이라고 한다면, 헌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서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에게 구원의 확신을 경험케 한 모라비안 교회의 창설자 진젠도르프(Nikolaus Zinzendorf, 1700-1760)는 청년 때에 각 지방으로 유람을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미술관에 들어가서 그림들을 구경하다가 “에케호모”--“이 사람을 보라”란 제목의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 그림 밑에는 “나는 너를 위해 몸을 버려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느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 글귀에 크게 감명을 받아 뜨거운 눈물을 쏟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울다가 일어나 이후로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께 몸바쳐 일할 것을 결심하고 돌아와서 모라비안 교회를 세웠습니다. 진제도르프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게 한 그 글귀는 찬송가 185절의 주요 가사내용이기도 합니다:
1.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2.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3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4. 한 없는 용서와 참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하느냐?
이 찬송가의 작사자 프란시스 리들리 해버갈(F. R. Havergal, 1836-1879)도 소녀 시절에 친구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그 집에 걸려있던 이 “에케호모”란 그림 속에서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피 흘리고 계심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즉시 이 찬송가를 작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2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에는 첫째, 부르심의 장소(場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는 특별한 곳이 아닙니다. 저 숲 속의 현자의 은둔처가 아니요,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 살고 있는 궁전이나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어부의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두 번째는, 부르심의 대상(對象)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시되 세상의 학문이 많은 자나, 종교 지도자나, 부자나 다른 특권 계층의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아니 오히려 스스로 평범 이하의 우둔한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門閥)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되 일상적인 삶의 터전에서 스스로 평범하다고 혹은 지혜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세 번째는, 부르심의 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되 그들이 생업에 분주하게 종사하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모두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든지(마태 4:18; 마가 1:16) 또는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누가 5:2).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마태 4:21; 마가 1:19).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고 있을 때 ‘너희들 정 할 일이 없으면 나를 따라 오지 않을래? 내가 너희에게 할 일도 주고 또 먹을 것도 줄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거절하거나 사양합니다. 그들의 이유는 너무나 바쁘다는 것입니다. 생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냐고, 자녀들 학교 따라다니랴, 음악레슨 시키랴, 운동시키랴, 또 차 태워주랴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일은 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의 때를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때, 농부가 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붙잡고 있는 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때,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종용하십니다. ‘나를 택하든지 세상을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마태복음 8장 21-22절(누가 9:59-60 참고)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61-62절에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쑴하십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드릴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드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1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무리가 몰려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눅 4:43), 때로 한적한 시간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시고 힘을 재충전받으셨습니다. 그가 갈릴리 호수(또는 바다) 북서쪽에 위치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신 때에도 많은 무리가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2절: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두 배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배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부의 배입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와 피곤한 육신과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시몬이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도록 허락하였는지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그의 말씀은 감히 거절할 수 없는 권세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시몬아, 내가 네 배에 올라타야 되겠다.”라고 말씀하시매, 시몬은 “선생님, 그리 하옵소서.”라고 순순히 대답했을 것입니다.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몰려든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몰려든 무리들의 관심사는 병 낫기와 귀신들림에서 벗어남과 세상에서의 양식을 구하는 것과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구경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전파하기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몬에게로 그의 관심을 옮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배에 오르신 것은 그에게 몰려드는 인파로부터 떨어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장차 그의 사역에 동역할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성경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명령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물을 내릴 장소까지 지정하여 주셨습니다.
5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은 어려서부터 갈릴리 바닷가에 살아왔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고향은 갈릴리호수 북쪽의 가버나움입니다. 지금도, 가버나움을 방문하면 베드로의 집이라고 명명된 곳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입니다. 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 그 앞에 누가 아는 척이라도 할라치면, 가만히 있지 못할 그인데, 오늘 이 낯선 사내가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매, 그는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 행하심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말씀하시는 이분이 능력이 많다고 하길래 그의 말씀에 따르기로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병 고치고 귀신 쫓는 일에는 능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고기 잡는 일에서까지는 그보다 낫다고 생각할 리 없는 시몬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절망감과 허탈함에서 온 것이었을 것입니다. 고기 잡는 일에 이력이 난 그였는데,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을 때 그는 참으로 지치고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그에게 권세로 말씀하십니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낯선 남자의 권세 앞에 순종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은, 그렇게 할 때 고기를 많이 잡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앞에 계신 예수님의 권위가 그로 순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과 기대에 앞선 순종과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약속들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데, 당장은 그것이 믿어지지 않고 그것이 과연 그러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습니다. 그러하더라도, 그 약속과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붙잡고자 하고 순종하고자 함이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람은 그가 붙잡고자 한 것을, 믿으려고 한 그것을 얻게 됩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의 지정하신 곳에 그물을 내렸더니, 심히 많은 고기가 잡혀서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시몬의 배와 함께 나간 다른 배를 불러 함께 고기를 담았는데, 그물에 걸린 고기는 두 배를 가득 채워 배가 잠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내릴 때 이것을 기대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지정하신 곳에 그물을 내리면 고기가 많이 잡힐 것이라고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8-10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얻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시몬은 고기를 많이 잡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내게 말씀하신 이분은 과연 누구인가? 이분이 누구시길래, 나의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것 같고, 자연의 모든 현상까지도 아신 단 말인가? 놀라고 두려워한 것은 시몬뿐 아니라 이 광경을 목도한 주위의 어부 모두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두 배 중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어부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다른 어부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두 배를 가득 채운 큰 물고기를 싣고 두 배가 호숫가로 나오면서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고 놀라매 달려와서 함께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마태 4:21; 마가 1:19 참조).
시몬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에 대한 시몬의 호칭이 “선생”(ἐπιστάτα)에서 “주님”(κύριε)으로 바뀌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처음 본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른 것은 가르침을 배운 제자로서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경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시는 이분은 그저 “선생”이라고 불러서는 안될 분 같이 여겨졌습니다. 해서, “주여”(κύριε)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께서 시몬을 위시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것은 그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안에 속한 사람의 수를 늘려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심도 동일한 이유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 삼으시기 위함이요,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기 위함입니다.
11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만선(滿船)의 배를 저어 육지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에게 더 이상 고기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까닭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생명이요 구원되신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릴(=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그물을 깁던 아버지까지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물은 어부의 생업의 중요한 수단이며, 배는 어부에게 가장 중요하고 큰 재산이요, 부친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들을 포기함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생업도구, 재산과 사람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좇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세오”(ἀκολουθέω)는 ‘따라가다’(follow), ‘동행하다’(accompany)의 의미와 함께 ‘제자가 되다’(be a disciple)는 뜻도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생업을 모두 포기하고 다 목회자가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목사로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세상 기업을 경영하는 가운데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놀랍고 은혜스러운 것은 우리가 어떤 주의 일꾼이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과 재물과 몸을 하나님을 위해서 지혜롭게 사용하게 하시며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아간 베드로는 후에 마가복음 10장 28절에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지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사람은 바른 목적을 위하여 그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나를 따르기에 합당치 않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3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를 좇아간 첫 번째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의 마지막이 어떠했습니까? 전승(傳乘)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하고, 안드레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하고,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 기록된 대로 아직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헤롯 왕(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하여 칼로 죽임을 당하는데 이로써 복음이 세계로 전파됨에 밑거름이 되고, 요한은 소아시아 서해안의 한 섬 밧모섬에 귀향당하고 그후에는 에베소에서 그의 마지막을 보냅니다.
이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이들이 보통 사람들임을--아니 보통 사람들보다도 부족한 사람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들의 앞뒤를 재지 않는 단순한 마음(simplicity)과 주님을 위해서 그들을 헌신하고 희생하기를 원하는 가슴입니다. 그리할 때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을 좇아갔으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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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召命, call)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어떤 특별한 일로 부르심을 말합니다.
넬슨(John Oliver Nelson)이라고 하는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목회자로 부르십니다.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들을 목회자로 삼으십니다. 교회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청년들을 부르실 때 부르시는 그런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거듭난 청년들을 부르시고, 설교하시고, 계획을 세우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든 가릴 것 없이 누구든지 자기 전공 직업이 있는 동시에 성별된 주교와 사제가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회자이든 장로이든, 권사나 집사이든, 아니면 평신도이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소명을 받은 사람이므로 소명의 귀중함을 생각하며 신실함과 열성으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 신학자인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그의 저서 “소명(The Call)"에서 ”소명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삶 전체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종종 이같은 총체적인 소명이 왜곡되어 세상의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은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종교적이고 영적인 것만이 성직이라고 격상시키는 일종의 이원론이 문제가 되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소명이란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만이 소명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의 달란트와 능력에 따라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그(=하나님)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성도들을 각각 다른 직임으로 부르셨지만, 그의 부르심의 뜻은 각각 자기의 달란트와 재능에 따라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꾼을 부르심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사람이 예상하는 것과는 다른 때에 부르시는 분이신 것을 알게 합니다.
인생의 삼분지 이를 산 모세를 하나님은 그의 나이 80세에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일로 부르십니다. 그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을 때 그는 자신의 삶이 아무 것도 아니고 그저 실패한 인생으로 여기고 있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그는 아직 인생의 미숙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성년이라고 하기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유약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 예레미야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부르실 때 그는 남방왕국 유다의 한 시골 드고아의 목자요 농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선지자 그것도 적대관계에 있던 북방왕국 이스라엘에서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증오하던 이스라엘의 국수주의자 요나를 적국 니느웨에서 말씀을 외치게 하는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모세, 예레미야, 요나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난색을 표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기도 하였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이 일군을 원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자원하였습니다.
소명이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시는 일이라고 한다면, 헌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서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에게 구원의 확신을 경험케 한 모라비안 교회의 창설자 진젠도르프(Nikolaus Zinzendorf, 1700-1760)는 청년 때에 각 지방으로 유람을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미술관에 들어가서 그림들을 구경하다가 “에케호모”--“이 사람을 보라”란 제목의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 그림 밑에는 “나는 너를 위해 몸을 버려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느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 글귀에 크게 감명을 받아 뜨거운 눈물을 쏟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울다가 일어나 이후로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께 몸바쳐 일할 것을 결심하고 돌아와서 모라비안 교회를 세웠습니다. 진제도르프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게 한 그 글귀는 찬송가 185절의 주요 가사내용이기도 합니다:
1.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2.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3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4. 한 없는 용서와 참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하느냐?
이 찬송가의 작사자 프란시스 리들리 해버갈(F. R. Havergal, 1836-1879)도 소녀 시절에 친구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그 집에 걸려있던 이 “에케호모”란 그림 속에서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피 흘리고 계심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즉시 이 찬송가를 작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2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에는 첫째, 부르심의 장소(場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는 특별한 곳이 아닙니다. 저 숲 속의 현자의 은둔처가 아니요,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 살고 있는 궁전이나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어부의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두 번째는, 부르심의 대상(對象)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시되 세상의 학문이 많은 자나, 종교 지도자나, 부자나 다른 특권 계층의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아니 오히려 스스로 평범 이하의 우둔한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門閥)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되 일상적인 삶의 터전에서 스스로 평범하다고 혹은 지혜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세 번째는, 부르심의 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되 그들이 생업에 분주하게 종사하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모두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든지(마태 4:18; 마가 1:16) 또는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누가 5:2).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마태 4:21; 마가 1:19).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고 있을 때 ‘너희들 정 할 일이 없으면 나를 따라 오지 않을래? 내가 너희에게 할 일도 주고 또 먹을 것도 줄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거절하거나 사양합니다. 그들의 이유는 너무나 바쁘다는 것입니다. 생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냐고, 자녀들 학교 따라다니랴, 음악레슨 시키랴, 운동시키랴, 또 차 태워주랴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일은 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의 때를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때, 농부가 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붙잡고 있는 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때,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종용하십니다. ‘나를 택하든지 세상을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마태복음 8장 21-22절(누가 9:59-60 참고)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61-62절에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쑴하십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드릴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드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1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무리가 몰려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눅 4:43), 때로 한적한 시간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시고 힘을 재충전받으셨습니다. 그가 갈릴리 호수(또는 바다) 북서쪽에 위치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신 때에도 많은 무리가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2절: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두 배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배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부의 배입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와 피곤한 육신과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시몬이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도록 허락하였는지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그의 말씀은 감히 거절할 수 없는 권세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시몬아, 내가 네 배에 올라타야 되겠다.”라고 말씀하시매, 시몬은 “선생님, 그리 하옵소서.”라고 순순히 대답했을 것입니다.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몰려든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몰려든 무리들의 관심사는 병 낫기와 귀신들림에서 벗어남과 세상에서의 양식을 구하는 것과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구경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전파하기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몬에게로 그의 관심을 옮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배에 오르신 것은 그에게 몰려드는 인파로부터 떨어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장차 그의 사역에 동역할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성경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명령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물을 내릴 장소까지 지정하여 주셨습니다.
5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은 어려서부터 갈릴리 바닷가에 살아왔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고향은 갈릴리호수 북쪽의 가버나움입니다. 지금도, 가버나움을 방문하면 베드로의 집이라고 명명된 곳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입니다. 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 그 앞에 누가 아는 척이라도 할라치면, 가만히 있지 못할 그인데, 오늘 이 낯선 사내가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매, 그는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 행하심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말씀하시는 이분이 능력이 많다고 하길래 그의 말씀에 따르기로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병 고치고 귀신 쫓는 일에는 능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고기 잡는 일에서까지는 그보다 낫다고 생각할 리 없는 시몬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절망감과 허탈함에서 온 것이었을 것입니다. 고기 잡는 일에 이력이 난 그였는데,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을 때 그는 참으로 지치고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그에게 권세로 말씀하십니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낯선 남자의 권세 앞에 순종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은, 그렇게 할 때 고기를 많이 잡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앞에 계신 예수님의 권위가 그로 순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과 기대에 앞선 순종과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약속들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데, 당장은 그것이 믿어지지 않고 그것이 과연 그러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습니다. 그러하더라도, 그 약속과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붙잡고자 하고 순종하고자 함이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람은 그가 붙잡고자 한 것을, 믿으려고 한 그것을 얻게 됩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의 지정하신 곳에 그물을 내렸더니, 심히 많은 고기가 잡혀서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시몬의 배와 함께 나간 다른 배를 불러 함께 고기를 담았는데, 그물에 걸린 고기는 두 배를 가득 채워 배가 잠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내릴 때 이것을 기대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지정하신 곳에 그물을 내리면 고기가 많이 잡힐 것이라고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8-10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얻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시몬은 고기를 많이 잡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내게 말씀하신 이분은 과연 누구인가? 이분이 누구시길래, 나의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것 같고, 자연의 모든 현상까지도 아신 단 말인가? 놀라고 두려워한 것은 시몬뿐 아니라 이 광경을 목도한 주위의 어부 모두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두 배 중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어부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다른 어부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두 배를 가득 채운 큰 물고기를 싣고 두 배가 호숫가로 나오면서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고 놀라매 달려와서 함께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마태 4:21; 마가 1:19 참조).
시몬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에 대한 시몬의 호칭이 “선생”(ἐπιστάτα)에서 “주님”(κύριε)으로 바뀌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처음 본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른 것은 가르침을 배운 제자로서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경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시는 이분은 그저 “선생”이라고 불러서는 안될 분 같이 여겨졌습니다. 해서, “주여”(κύριε)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께서 시몬을 위시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것은 그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안에 속한 사람의 수를 늘려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심도 동일한 이유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 삼으시기 위함이요,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기 위함입니다.
11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만선(滿船)의 배를 저어 육지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에게 더 이상 고기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까닭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생명이요 구원되신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릴(=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그물을 깁던 아버지까지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물은 어부의 생업의 중요한 수단이며, 배는 어부에게 가장 중요하고 큰 재산이요, 부친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들을 포기함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생업도구, 재산과 사람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좇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세오”(ἀκολουθέω)는 ‘따라가다’(follow), ‘동행하다’(accompany)의 의미와 함께 ‘제자가 되다’(be a disciple)는 뜻도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생업을 모두 포기하고 다 목회자가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목사로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세상 기업을 경영하는 가운데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놀랍고 은혜스러운 것은 우리가 어떤 주의 일꾼이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과 재물과 몸을 하나님을 위해서 지혜롭게 사용하게 하시며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아간 베드로는 후에 마가복음 10장 28절에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지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사람은 바른 목적을 위하여 그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나를 따르기에 합당치 않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3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를 좇아간 첫 번째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의 마지막이 어떠했습니까? 전승(傳乘)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하고, 안드레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하고,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 기록된 대로 아직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헤롯 왕(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하여 칼로 죽임을 당하는데 이로써 복음이 세계로 전파됨에 밑거름이 되고, 요한은 소아시아 서해안의 한 섬 밧모섬에 귀향당하고 그후에는 에베소에서 그의 마지막을 보냅니다.
이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이들이 보통 사람들임을--아니 보통 사람들보다도 부족한 사람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들의 앞뒤를 재지 않는 단순한 마음(simplicity)과 주님을 위해서 그들을 헌신하고 희생하기를 원하는 가슴입니다. 그리할 때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을 좇아갔으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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