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증언” (요한 1:19-34)
1
19세기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이자 에딘버러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제임스 심프슨(James Simpson, 1811-1870)은 수술 중에 환자가 받는 고통에 대하여 매우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그는 환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수술하기 위하여 수술용 마취제의 개발에 노력하였고 마침내는 성공하였습니다. 19세기 후반 마취제의 발견은 수술계의 혁신적인 일이었습니다.
한 번은 한 학생이 그의 강의시간에 심프슨 교수에게 질문합니다: “교수님의 생애에 가장 뜻깊고 소중한 발견 한 가지를 든다면 무엇입니까?”
그 학생은 당연히 ‘마취제의 발견’이란 답을 기대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심프슨 교수는 대답합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로 내몰림을 당한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모습으로(레위기 16장),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물 당시 애굽의 장자들과 구분하여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은 어린양의 모습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시기 위하여 어린 양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산을 오를 때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질문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사랑과 믿음을 보시고, 그의 고백대로 번제할 어린 수양을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해서, 아브라함은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하나님이 예비하시다’라고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위하여 어린 양을 준비하셨듯이, 온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번제로 준비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2
19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세례요한이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베다니의 요단 강의 지류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이한 행적과 복장과 담대한 외침에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요단 강에 도착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다른 위대한 선지자인지 알아보고자 그에게 묻습니다: “네가 누구냐?”
20절: 요한이 드러내어 증거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세례요한은 그들이 묻는 것이 그가 그리스도인지 묻는 것인 줄 알기에 직설적으로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21절: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세례요한이 혹시 그러면 엘리야가 아닌가 질문합니다. 왜 엘리야인가 질문했나 하면 말라기서 4장 5-6절에서 하나님은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두려운 하나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오리라 예언되어진 엘리야가 아닌가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세례요한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대답한 것은 아합왕 시대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재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임의로 대하였다”고 세례요한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들은 또 질문합니다: “그러면, 네가 ‘그 선지자’냐?”
여기서 ‘그 선지자’란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모세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희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말한 “(후에 나타날) 나와 같은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선지자”란 곧 장차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22절: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그런데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가 보통사람이 아닌 알기에 계속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구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절: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군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간명하게 선포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다.”
“외치는 자의 소리”는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의 시작--곧 이스라엘의 회복의 장의 시작인 40장 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세례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예비하고 증거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밝혔습니다.
24-25절: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그들은 이제 따지듯이 묻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또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느냐?”
이에 세례요한은 자신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는지 답하는 대신에 그의 다음에 나타나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26-27절: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증거는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한 것입니다.
주인의 신들메를 푸는 것은 보통 노예 중에 하급의 노예의 일이었는데, 그리스도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신들메 푸는 노예도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한 분인지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요한의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사람과 개미의 관계보다 더욱 큰 것입니다.
28절: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세례요한이 회개의 물 세례를 베풀던 곳은 예루살렘 동남쪽 베다니 지방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물으러 온 곳이 베다니 지방이라는 설명입니다.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두 번째 증거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의 허물과 죄의 짐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30절: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0절에 나오는 증거는 15절에 나온 것의 반복입니다.
태초부터 계시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보다 먼저 계신 것은 자명합니다.
31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1절에서 세례요한은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가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장차 사역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미리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32절: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세 번째 증거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나오시고 그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뭍으로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그에게 비둘기같이 임하시고”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마태 3:16-17).
해서, 세례요한은 그가 예수님께 물 세례를 베풀 때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33-34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네 번째 증거는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셔서 예수님 위에 머물렀기에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다섯 번째 증거는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그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3
보통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 때 사람들은 교만하고 자고하기 쉬우나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매우 잘 안 사람입니다. 그는 겸손하게 그러나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겸손하게 그러나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 되시는 분이십니다. 세례요한의 담대함과 겸손함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축원합니다.
Sunday, January 26, 2014
Sunday, January 19, 2014
“자다가 깰 때라” (로마서 13:11-14)
“자다가 깰 때라” (로마서 13:11-14)
1
시간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것인데 우리는 그 귀중함을 잊고 살다가 뒤늦게 시간이 참으로 속절없이 빨리 흐르고 있음을 깨닫고는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하여야 할지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시간 가는 것이 빠르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제 인생(人生)을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간이 몹시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인생(人生)의 가치(價値)를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생을 알거나 인생의 가치를 알기 시작한 사람은 시간 사용하는 일에 더욱 신중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5-17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혹은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먼 앞날을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만을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이유나 내가 현재 이러한 분야에서 이러한 일을 하는 이유가 단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는 식입니다.
우리 한국사람에게는 유행성 사고방식이나 행함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인교회 안에서도 무분별하게 범람(汎濫)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한인교회나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를 가리지 않고 참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무엇을 하였더니 교회가 부흥·성장하였더라 하면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어떠한 상황가운데 성장하였는지 가리지 않고 그 방식을 도입하여 목회자 자신이 그러한 자질(資質)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적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성장될 리 없습니다. 그러다가, 더러는 나중에 그 성장했다는 교회의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가 나오고 그 내용이 비성경적이라는 비판이 나오지만 그것이 있기 전까지는 그것이 이단성이든 비성경적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하려고 합니다.
"영어 배우는 데 왕도(王道) 혹은 지름길이 있다, 없다"로 설왕설래합니다.
영어 기초를 잘 다지기 위해서 그 기초를 잘 쌓는 요령을 터득할 수는 있겠지만, 영어로 잘 표현하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이왕 믿기로 하였으니까, 신앙생활도 잘 해보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는 남들보다 시간을 덜 투자하면서 그들보다 더 신앙생활 잘한다는 소리듣고 더 축복받는-말하자면 세상적으로 지름길을 가로질러 가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마음을 주님께 덜 드리면서도 세상에서 더 평안한 삶을 사는 신앙생활은 할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이 하나님께서 더 원하시는 믿음의 삶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시간과 마음은 많이 들였는데 주님께서 기뻐 받지 않으시는 신앙생활이 있어 우리가 이것을 피해야 할 것이지만 적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주님의 더 많은 칭찬을 얻는 그런 속성(速成) 믿음의 생활은 없습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미련한 신앙생활이란 시간과 마음은 남들만큼 쏟으면서도 늘 하나님께 불평하고 감사가 없는 삶인데, 우리가 이런 것을 피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삶을 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 무릎꿇는 횟수가 많을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시간이 많을수록, 하나님께 마음의 중심을 드릴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는 것은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시간 가는 것이 빠르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제 인생(人生)을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간이 몹시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인생(人生)의 가치(價値)를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생을 알거나 인생의 가치를 알기 시작한 사람은 시간 사용하는 일에 더욱 신중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5-17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혹은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먼 앞날을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만을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이유나 내가 현재 이러한 분야에서 이러한 일을 하는 이유가 단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는 식입니다.
우리 한국사람에게는 유행성 사고방식이나 행함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인교회 안에서도 무분별하게 범람(汎濫)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한인교회나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를 가리지 않고 참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무엇을 하였더니 교회가 부흥·성장하였더라 하면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어떠한 상황가운데 성장하였는지 가리지 않고 그 방식을 도입하여 목회자 자신이 그러한 자질(資質)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적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성장될 리 없습니다. 그러다가, 더러는 나중에 그 성장했다는 교회의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가 나오고 그 내용이 비성경적이라는 비판이 나오지만 그것이 있기 전까지는 그것이 이단성이든 비성경적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하려고 합니다.
"영어 배우는 데 왕도(王道) 혹은 지름길이 있다, 없다"로 설왕설래합니다.
영어 기초를 잘 다지기 위해서 그 기초를 잘 쌓는 요령을 터득할 수는 있겠지만, 영어로 잘 표현하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이왕 믿기로 하였으니까, 신앙생활도 잘 해보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는 남들보다 시간을 덜 투자하면서 그들보다 더 신앙생활 잘한다는 소리듣고 더 축복받는-말하자면 세상적으로 지름길을 가로질러 가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마음을 주님께 덜 드리면서도 세상에서 더 평안한 삶을 사는 신앙생활은 할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이 하나님께서 더 원하시는 믿음의 삶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시간과 마음은 많이 들였는데 주님께서 기뻐 받지 않으시는 신앙생활이 있어 우리가 이것을 피해야 할 것이지만 적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주님의 더 많은 칭찬을 얻는 그런 속성(速成) 믿음의 생활은 없습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미련한 신앙생활이란 시간과 마음은 남들만큼 쏟으면서도 늘 하나님께 불평하고 감사가 없는 삶인데, 우리가 이런 것을 피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삶을 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 무릎꿇는 횟수가 많을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시간이 많을수록, 하나님께 마음의 중심을 드릴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는 것은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2
11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이 시기”란 믿는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때로는 피곤하여서 잠을 자거나 졸 때가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깨어있을 때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종말론적(eschatological) 혹은 계시론적(apocalyptic)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인데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가 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기름을 잘 준비하고 깨어있으므로 밤늦게 신랑이 오매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미련한 다섯처녀는 등은 가지되 예비기름이 없었고 게다가 더디 오는 신랑을 기다릴 새 졸며 자다가 기름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기름이 떨어진 것을 발견하곤 시장에 사러가지만 그사이 신랑이 왔는데 한번 닫혀진 혼인잔치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태 25:13) 말씀하십니다.
때가 가까운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지 않고있는 사람과, 잠자느냐고 때가 가까이 이른 줄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때가 가까운 것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잠자고 있던 중이라 할지라도, 졸고 있던 중이라 할지라도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아직 캄캄한 어둠--사단의 세력--이 지배하는 밤일지라도 밤이 깊으면 곧 새벽이 가까움을 알고 일어날 준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세월이 빠른줄 느낄 때, 너무 늦은 줄로 생각할 때라도, 늦잠을 자서 도저히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난 때인줄로 낭패감이 들 때라도 영적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구원의 시간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이른” 까닭입니다. 여기서 처음 믿을 때란 우리의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때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오늘 본문을 Baptismal Formula 혹은 Sacramental Formula 라고도 말합니다. 곧, 세례의식을 행할 때나 성찬의식을 행할 때 성도들의 본분에 대해서 깨닫게 하기 위한 글이란 뜻입니다.
시간적으로 분명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구원--하나님의 영광나라에 들어감은 세례로부터 세월이 흐른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이르고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더디 오시는 것같아 그 때를 알지 못하여 자다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잘못을 우리는 범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 주님께서 이르지 않으셨을 때 우리는 깨어야 할 것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전 아직 새벽이 밝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영적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 꿈을 꾸신 적이 있습니까?
어느 날 꿈속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섰는데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 이르시기를, “너는 입으로는 주님을 믿었지만 마음으로는 믿지않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런 두려움이 현실로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과 낮이, 어둠과 빛이 대조(對照)되어있습니다.
밤과 어둠은 사단--곧 악의 권세입니다. 낮과 빛은 그리스도의 권세입니다. 밤이 아직 다 지나지 않았지만, 밤이 깊다고 함은 이제 곧 새벽이 오고 낮이 옴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해서 우리는 낮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준비(準備)는 곧, 우리가 이제까지 몰두해온 어둠의 일--세상에 탐닉하는 일에서 벗어나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용사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로마서 본문에서는 단지 빛의 갑옷이라고 표현했지만, 에베소서 6장 13절이하에서는 구체적으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13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밤과 어둠은 사단--곧 악의 권세입니다. 낮과 빛은 그리스도의 권세입니다. 밤이 아직 다 지나지 않았지만, 밤이 깊다고 함은 이제 곧 새벽이 오고 낮이 옴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해서 우리는 낮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준비(準備)는 곧, 우리가 이제까지 몰두해온 어둠의 일--세상에 탐닉하는 일에서 벗어나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용사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로마서 본문에서는 단지 빛의 갑옷이라고 표현했지만, 에베소서 6장 13절이하에서는 구체적으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13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방탕하고, 술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고, 쟁투와 시기는 성령의 다스리심이 없는 자연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깨어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다스리시는 사람에게서는 이런 일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말씀하십니다. 술은 세상--곧 악에 취한 삶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악의 세력과 싸워야될 믿는 사람은 세상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악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영리하여 카르타고의 대학에서 철학(哲學)과 수사학(修辭學)을 공부하고 20대에 밀라노대학의 교수가 되어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 모니카의 믿음의 기도와는 달리 경건생활을 하기 보다는 술 취하고 성적(性的)으로 방탕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맑은 정신이 들면 자신의 방탕한 생활에 대하여 후회감(後悔感)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는 어느날 잠껼에서인지 어린아이들의 “들고 읽어라, 들고 일어라” 노래하는듯한 음성을 듣고 황급히 성경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말씀이 이 구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로 말미암아 그의 삶이 변하고 히포(Hippo) 지방의 감독의 지위에 까지 오르고 기독교 역사상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14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말씀하십니다. 술은 세상--곧 악에 취한 삶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악의 세력과 싸워야될 믿는 사람은 세상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악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영리하여 카르타고의 대학에서 철학(哲學)과 수사학(修辭學)을 공부하고 20대에 밀라노대학의 교수가 되어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 모니카의 믿음의 기도와는 달리 경건생활을 하기 보다는 술 취하고 성적(性的)으로 방탕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맑은 정신이 들면 자신의 방탕한 생활에 대하여 후회감(後悔感)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는 어느날 잠껼에서인지 어린아이들의 “들고 읽어라, 들고 일어라” 노래하는듯한 음성을 듣고 황급히 성경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말씀이 이 구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로 말미암아 그의 삶이 변하고 히포(Hippo) 지방의 감독의 지위에 까지 오르고 기독교 역사상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14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4절은 12-13절 말씀에 대한 요약입니다. 우리는 세례 받을 때에 이미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새사람의 옷을 입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골로새서 3장 9-10절에,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했고,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새사람의 옷을 입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이를 에베소서 4장 23절에서는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표현했고, 로마서 12장 2절에서도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이미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인데 우리가 영적인 게으름으로 인하여 혹은 영적인 잠에 빠져 그리스도의 새사람의 옷을 벗었든지 더러워져 새롭게 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게으름으로 은혜를 잊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또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으며 육신의 일을 도모함으로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늘 새로운 모습으로 사는 “변화하는 그리스도인(transforming Christian)”의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어떤 영적인 상태에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영적으로 졸고있거나 잠에서 깨어나있지 않은 것인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 여러분은 주님의 작고 세미하지만, 분명하신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영적인 잠에서 깨어있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이 원하시는 새사람의 옷-주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계셔서 어느 때에 주님이 오시더라도, 어느 때에 주님께로 가더라도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졸고있거나 잠에서 깨어나있지 않은 것인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 여러분은 주님의 작고 세미하지만, 분명하신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영적인 잠에서 깨어있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이 원하시는 새사람의 옷-주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계셔서 어느 때에 주님이 오시더라도, 어느 때에 주님께로 가더라도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로마서 13:8-10)
1
“사랑의 기본은 관심과 애정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싫증내지 말고 주십시오. 상처를 받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십시오.”
이것은 10여년 전 (1997년) 87세를 일기로 심장병으로 소천한 테레사 수녀가 한 말입니다.
5척 단신인 테레사 수녀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고 여기며 가난한 자들의 곁을 자기 자리로 고집했고 이 세상에서 몽당연필의 역할을 다마치고 더 나은 본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는 1910년 8월 27일에 알바니아(마게도냐)의 수도 스코피(Skopje)에서 건축가의 삼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본명은 아그네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ejaxhiu)입니다.
18세때(1928년) 집을 떠나 아일랜드 더블린의 로레토 수도회(Loretto Order)에 들어가 수녀가 되기 위한 신앙생활의 첫발을 내디딥니다. 이때 얻은 세례명이 테레사(Teresa)입니다.
19세때(1929년) 인도 캘커타의 세인트 메리 고등학교 교사로 임명받고 현지에 도착합니다.
27세때(1937년) 수녀가 되기로 최종 서원(誓願)합니다.
36세때(1946년) “가난한 사람들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계시를 받고 일생을 그렇게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38세(1948년)부터 캘커타에서 본격적인 구제활동을 시작하며, 40세때(1950년) 사랑의 선교회(The Order of Missionaries of Charity)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그후 50년을 한결같이 가난한 자 가운데 사랑의 천사로서의 생을 보내고 마감합니다.
1974년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모든 인간에게서 신을 봅니다. 나환자의 상처를 씻을 때는 그리스도를 돌보는 느낌입니다. 어찌 아름다운 경험이 아니겠습니까?”란 말을 남긴 테레사 수녀가 평생 봉사를 통하여 세계를 감동시킨 것은 그의 순수성(純粹性)과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에도 “연회를 열지말고 연회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자신의 활동에 대해 “베푸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작은) 구원”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1996년 8월 그의 심장병이 악화되었을 때 병상에서 그리-스의 미카엘공을 만났을 때, 테레사 수녀는 “어느 날 꿈속에서 내가 천국의 문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내게 ‘지상으로 돌아가라. 여기에는 빈민굴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하며 이 세상 삶에서의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일생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성녀(聖女)의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오적조건이 우리보다 특별히 뛰어나서 그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150cm도 되지 않는 단신이요, 교육도 그리 많은 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의 나라가 강국이라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 하나인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활동무대가 spot-light을 받는 세계의 중심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지가 아닌 인도의 빈민촌에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머물러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에 대해 다른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가 세계에 알려진 것은 긴 세월을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께 대하듯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10여년 전 (1997년) 87세를 일기로 심장병으로 소천한 테레사 수녀가 한 말입니다.
5척 단신인 테레사 수녀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고 여기며 가난한 자들의 곁을 자기 자리로 고집했고 이 세상에서 몽당연필의 역할을 다마치고 더 나은 본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는 1910년 8월 27일에 알바니아(마게도냐)의 수도 스코피(Skopje)에서 건축가의 삼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본명은 아그네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ejaxhiu)입니다.
18세때(1928년) 집을 떠나 아일랜드 더블린의 로레토 수도회(Loretto Order)에 들어가 수녀가 되기 위한 신앙생활의 첫발을 내디딥니다. 이때 얻은 세례명이 테레사(Teresa)입니다.
19세때(1929년) 인도 캘커타의 세인트 메리 고등학교 교사로 임명받고 현지에 도착합니다.
27세때(1937년) 수녀가 되기로 최종 서원(誓願)합니다.
36세때(1946년) “가난한 사람들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계시를 받고 일생을 그렇게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38세(1948년)부터 캘커타에서 본격적인 구제활동을 시작하며, 40세때(1950년) 사랑의 선교회(The Order of Missionaries of Charity)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그후 50년을 한결같이 가난한 자 가운데 사랑의 천사로서의 생을 보내고 마감합니다.
1974년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모든 인간에게서 신을 봅니다. 나환자의 상처를 씻을 때는 그리스도를 돌보는 느낌입니다. 어찌 아름다운 경험이 아니겠습니까?”란 말을 남긴 테레사 수녀가 평생 봉사를 통하여 세계를 감동시킨 것은 그의 순수성(純粹性)과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에도 “연회를 열지말고 연회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자신의 활동에 대해 “베푸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작은) 구원”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1996년 8월 그의 심장병이 악화되었을 때 병상에서 그리-스의 미카엘공을 만났을 때, 테레사 수녀는 “어느 날 꿈속에서 내가 천국의 문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내게 ‘지상으로 돌아가라. 여기에는 빈민굴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하며 이 세상 삶에서의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일생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성녀(聖女)의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오적조건이 우리보다 특별히 뛰어나서 그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150cm도 되지 않는 단신이요, 교육도 그리 많은 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의 나라가 강국이라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 하나인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활동무대가 spot-light을 받는 세계의 중심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지가 아닌 인도의 빈민촌에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머물러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에 대해 다른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가 세계에 알려진 것은 긴 세월을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께 대하듯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리부분인 1-8장에서 믿음에 대해서 다루고 실천부분인 12장 이하에서 사랑에 대해서 다룹니다. 12장이하에서 자신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무와 변화에 대해서 언급한 바울은 다시 작은 단위(unit)인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바울은 앞서 로마서 8장 12절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갚을 길 없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탕감해주셨습니다. 해서, 우리도 우리 형제·자매의 잘못을 사랑으로 탕감해주어야 하며 그들이 굶주리고 목말라할 때 이를 공급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들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채워줄 때, 우리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빚을 갚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우리가 또 부지불식(不知不識) 가운데 형제·자매에게 잘못을 할 때 혹은 우리가 궁핍할 때 그들에게 사랑의 빚을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 12절 황금율에 있는 대로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했습니다. 해서, 사랑의 빚을 질 수 있는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빚을 먼저 탕감해주므로 우리가 또 빚을 지게 될 경우에 탕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적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사랑과 용서를 당연시할 때, 이 사람은 주님의 대속의 사랑에 대해서도 감사함이 전혀 없는 삶을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4절 이하에서 (병행구절: 마가복음 12:28-31) 바리새인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신 6:5, 10:12). 둘째는 그와 같으니 (=And a second is like it; 둘째도 첫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레 19:18)” 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에 대한 구약의 언급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에 있는데, 모세는 신명기 5장에서 십계명을 말씀한 다음에 6장에서 하나님사랑을 말씀하고, 또한 레위기 19장에서는 십계명을 비롯한 주요사항을 설명하는 중에 이웃사랑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둘째 계명이 결국은 첫째 계명과 같다”(And a second is like the first one)고 말씀하셨는데 어찌 그렇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눈에 보이는 일을 먼저 할 수 있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데 있는 쉬운 일, 작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먼 데 있는 어려운 일, 큰 일도 감당합니다. 실천 장에서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일들은 눈에 보이는 우리 주변의 일들입니다: 나, 교회, 믿지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사회와 국가, 그리고 다시 이웃. 이러한 주변의 일들에 충실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한결같고 신실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2장 1절 이하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의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 일이 그리스도인의 실천강령(實踐綱領)으로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일들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일부터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또한, 12장 2절에 말씀한 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두 개의 다른 계명이 아니라, 결국은 사랑이란 한 계명안에 포함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둘째 계명이 첫째 계명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둘째 계명 역시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첫째 계명인 하나님 사랑을 잘 이행하고 있다고 입으로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며--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해서, 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말씀한 것은 바로 이와같은 까닭입니다. 눈에 보이는 남--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이로소 율법의 가장 큰 두 계명을 지키는 자이며 이 가장 큰 두 계명안에 모든 율법의 본질이 포함되어있습니다.
9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9절에서 바울은 구체적인 율법의 조항들 가운데 일부를 나열해봅니다: “간음하지 말라” 한 것은 십계명중 제 칠계명이요, “살인하지 말라” 한 것은 제 육계명이요, “도적질하지 말라” 한 것은 제 팔계명이요, “탐내지 말라” 한 것은 제 십계명입니다.
성경에서 율법이라 할 때, 가장 좁은 의미는 십계명이요, 보통의 의미는 흔히 토라(תּוֹרָה)라고 불리우는 모세오경(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이고, 넓은 의미로는 창세기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율법서와 선지서를 다 포함합니다. 또 신약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신·구약 전체를 가리키건, 구약 전체를 가리키건, 모세오경만을 가리키건, 아니면 십계명만을 가리키건 이 율법은 사랑이란 한 마디로 요약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율법의 완성이라 말할 때, 이 그리스도는 사랑의 본체란 뜻입니다.
십계명을 살펴보면,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삼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제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육은 “살인하지 말찌니라”; 제칠은 “간음하지 말찌니라”; 제팔은 “도적질하지 말찌니라”; 제구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제십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입니다.
이중, 제일에서 제오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연관되어있습니다. 제육에서 제십계명까지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관되어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살인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여인을 간음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집을 탐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 소유를 탐하지 않을 것입니다.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성경에서 율법이라 할 때, 가장 좁은 의미는 십계명이요, 보통의 의미는 흔히 토라(תּוֹרָה)라고 불리우는 모세오경(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이고, 넓은 의미로는 창세기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율법서와 선지서를 다 포함합니다. 또 신약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신·구약 전체를 가리키건, 구약 전체를 가리키건, 모세오경만을 가리키건, 아니면 십계명만을 가리키건 이 율법은 사랑이란 한 마디로 요약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율법의 완성이라 말할 때, 이 그리스도는 사랑의 본체란 뜻입니다.
십계명을 살펴보면,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삼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제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육은 “살인하지 말찌니라”; 제칠은 “간음하지 말찌니라”; 제팔은 “도적질하지 말찌니라”; 제구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제십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입니다.
이중, 제일에서 제오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연관되어있습니다. 제육에서 제십계명까지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관되어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살인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여인을 간음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집을 탐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 소유를 탐하지 않을 것입니다.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3-14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말씀합니다.
사랑은 이웃에 대하여 어떤 악도 행하지 않습니다. 살인하지 아니하며, 간음하지 아니하며, 도덕질하지 아니하며, 거짓증거하지 아니하며, 탐내지 아니합니다.
이웃사랑은 이웃에 대하여 하지 말아야 될 악을 행치 아니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12장 17절에서 바울이 말씀한 대로 이웃사랑은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는 삶”입니다.
이웃사랑은 이웃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할 때에 마실 것을 주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우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迎接)하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갇혔을 때에 찾아가보는” 적극적 행동입니다.
이렇게 할 때 이러한 이웃사랑의 마음은 곧 하나님을 잘 대접하는 하나님사랑의 마음이며 해서 우리의 사랑은 주님이 그러셨듯이 율법을 이루는 힘이 있습니다.
3
남극 탐험가로 유명한 사람 가운데 영국인 세클턴이 있습니다.
기자들이 그와 회견하는 중에, 그의 탐험 경험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달라고 요청합니다.그가 탐험대장으로 대원들과 함께 남극을 탐험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조난을 당하여서 생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임시 대피소에 피하기는 하였지만 식량도 다 떨어지고 그날 밤 추위에 어떻게 살아남을지 암담할 따름입니다. 배고품과 추위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마지막 건빵봉지를 나누어줍니다. 오늘방 이 혹한에 누군가 살아남아서 자신들의 조난경위와 운명을 보고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바람뿐입니다.
대원들은 혹심한 추위에도 고단한 나머지 다 곯아 떨어졌는데, 이 세클턴은 대장이라고 하는 책임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대원들 가운데 한명이 조심 조심 일어나더랍니다. 그리고는 자기 전에 나누어준 옆 사람의 건빵 봉지를 슬쩍 합니다. 그 대원은 다름아닌 세클턴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동료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옆에서 자고있는 동료의 생명줄과도 같은 건빵을 훔치다니 가슴이 철렁하고 어이가 없고 배신감으로 분노마저 치밀어 올랐습니다. 당장 일어나서 호통을 쳐주고 싶지만 그렇지 않아도 절망가운데 잠든 대원들을 더 큰 절망과 배신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싶지않아 그대로 누워서 더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대원은 슬쩍한 옆 동료의 건빵봉지를 뜯고나서는 또 자기의 건빵봉지를 뜯더니 자기의 건빵을 한웅큼 꺼내서는 옆 동료의 건빵봉지에 집어넣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을 청하더랍니다. 그때 그는 형제 사랑이 무엇인지 비로소 발견했다고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 위기에 처하여 마지막 생존근거인 건빵을 동료를 위해 몰래 자기 것을 더 덜어줌에서 위대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물론, 그들은 그 조난에서 극적으로 다 구출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믿으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삶을 사심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확증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자들이 그와 회견하는 중에, 그의 탐험 경험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달라고 요청합니다.그가 탐험대장으로 대원들과 함께 남극을 탐험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조난을 당하여서 생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임시 대피소에 피하기는 하였지만 식량도 다 떨어지고 그날 밤 추위에 어떻게 살아남을지 암담할 따름입니다. 배고품과 추위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마지막 건빵봉지를 나누어줍니다. 오늘방 이 혹한에 누군가 살아남아서 자신들의 조난경위와 운명을 보고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바람뿐입니다.
대원들은 혹심한 추위에도 고단한 나머지 다 곯아 떨어졌는데, 이 세클턴은 대장이라고 하는 책임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대원들 가운데 한명이 조심 조심 일어나더랍니다. 그리고는 자기 전에 나누어준 옆 사람의 건빵 봉지를 슬쩍 합니다. 그 대원은 다름아닌 세클턴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동료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옆에서 자고있는 동료의 생명줄과도 같은 건빵을 훔치다니 가슴이 철렁하고 어이가 없고 배신감으로 분노마저 치밀어 올랐습니다. 당장 일어나서 호통을 쳐주고 싶지만 그렇지 않아도 절망가운데 잠든 대원들을 더 큰 절망과 배신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싶지않아 그대로 누워서 더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대원은 슬쩍한 옆 동료의 건빵봉지를 뜯고나서는 또 자기의 건빵봉지를 뜯더니 자기의 건빵을 한웅큼 꺼내서는 옆 동료의 건빵봉지에 집어넣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을 청하더랍니다. 그때 그는 형제 사랑이 무엇인지 비로소 발견했다고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 위기에 처하여 마지막 생존근거인 건빵을 동료를 위해 몰래 자기 것을 더 덜어줌에서 위대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물론, 그들은 그 조난에서 극적으로 다 구출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믿으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삶을 사심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확증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로마서 13:1-7)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로마서 13:1-7)
1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복(福)은 얼마나 평안한 가운데 풍요로운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을 사는가에 달렸습니다.
해서, 평안한 가운데 부자의 삶을 살지만 복이 없는 사람일 수 있고, 환란과 곤고 가운데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지만 복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복있는 죽음은 100세가 넘도록 손자, 증손자, 고손자들과 함께 살았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을 본향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망으로 육신의 죽음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은 삼십여세의 나이로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리는 죽음을, 또 바울은 콜로세움에서 몸의 마디 마디가 끊기는 죽음을 당하였지만 그들의 죽음을 복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망대가 무너져서, 태풍으로, 차사고로, 혹은 비행기 추락등 갑작스런 사고로 사람이 죽을 수 있지만, 그러한 갑작스런 죽음은 그 죽음을 당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중 누구에게나 예고없이 찾아오는 이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가 준비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좋은 왕이나 대통령 혹은 다른 명칭의 위정자 밑에서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고, 아니면 극악무도한 위정자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시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악한 정부 하에 사는 사람들이 선한 정부 하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러한 곤고와 환란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들이 살던 시대는 아마도 다른 시대보다 더 악한 왕이 다스리던 시대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 아합시대의 사람이며, 유다의 예언자들 이사야나 예레미야도 각기 유다의 악한 왕 시대를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고와 예언은 악한 왕들과 제사장들과 방백들과 백성들을 무너뜨려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눈물로 호소함으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기도 하지만 목적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재정립시키고자 함입니다.
해서, 평안한 가운데 부자의 삶을 살지만 복이 없는 사람일 수 있고, 환란과 곤고 가운데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지만 복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복있는 죽음은 100세가 넘도록 손자, 증손자, 고손자들과 함께 살았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을 본향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망으로 육신의 죽음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은 삼십여세의 나이로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리는 죽음을, 또 바울은 콜로세움에서 몸의 마디 마디가 끊기는 죽음을 당하였지만 그들의 죽음을 복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망대가 무너져서, 태풍으로, 차사고로, 혹은 비행기 추락등 갑작스런 사고로 사람이 죽을 수 있지만, 그러한 갑작스런 죽음은 그 죽음을 당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중 누구에게나 예고없이 찾아오는 이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가 준비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좋은 왕이나 대통령 혹은 다른 명칭의 위정자 밑에서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고, 아니면 극악무도한 위정자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시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악한 정부 하에 사는 사람들이 선한 정부 하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러한 곤고와 환란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들이 살던 시대는 아마도 다른 시대보다 더 악한 왕이 다스리던 시대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 아합시대의 사람이며, 유다의 예언자들 이사야나 예레미야도 각기 유다의 악한 왕 시대를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고와 예언은 악한 왕들과 제사장들과 방백들과 백성들을 무너뜨려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눈물로 호소함으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기도 하지만 목적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재정립시키고자 함입니다.
2
바울은 12장이하에서 개인의 변화와 아울러 그의 교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 사회에 대한 의무에 이어 오늘 본문에서는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말씀합니다.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여기서 ‘위에 있는 권세들’이란 하나님의 권세를 의미함이 아니라 국가 권력구조의 상부 곧 국가권력을 말합니다. 권세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은 권세의 구체적 실행기관으로서의 의미입니다.
이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수시아(ἐξουσία)인데 이는 엑스(ἐξ)와 우시아(οὐσία)의 합성어입니다.
엑스(ἐξ)는 ‘...으로부터’란 뜻이고 우시아(οὐσία)는 ‘본질, 본체, 소유’란 뜻입니다. 해서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본질로부터, 본체로부터, 또는 소유로부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권세란 것은 어떠한 권세이든 ‘본질 혹은 본체’로부터 나와서 부여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 이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가 인간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사셨지만 그의 권위 혹은 권세는 로마정부에 의해서 부여된 것도 아니요, 유대의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 만물의 근본되시고 본질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목회자의 권세는 비록 사람들에 의해서 안수를 받더라도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서 비롯된다는 말씀입니다.
장로와 집사의 직분에 대한 권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통하여 안수가 베풀어지나 사람인 목사가 그에게 직분자의 권세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직분의 권세가 위임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맡은 직분을 경홀히 여기지 못할 것은 근본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국가권력의 권세(ἐξουσία)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許諾)하셨기 때문에 ‘위정자가 국가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위정자의 책무가 있습니다. 해서, 위정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한 정치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위정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한 정치를 베풀 때 그 나라의 백성은 이 위정자가 정한 법을 잘 준수하여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과 의의 정치를 하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절: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이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수시아(ἐξουσία)인데 이는 엑스(ἐξ)와 우시아(οὐσία)의 합성어입니다.
엑스(ἐξ)는 ‘...으로부터’란 뜻이고 우시아(οὐσία)는 ‘본질, 본체, 소유’란 뜻입니다. 해서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본질로부터, 본체로부터, 또는 소유로부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권세란 것은 어떠한 권세이든 ‘본질 혹은 본체’로부터 나와서 부여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 이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가 인간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사셨지만 그의 권위 혹은 권세는 로마정부에 의해서 부여된 것도 아니요, 유대의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 만물의 근본되시고 본질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목회자의 권세는 비록 사람들에 의해서 안수를 받더라도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서 비롯된다는 말씀입니다.
장로와 집사의 직분에 대한 권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통하여 안수가 베풀어지나 사람인 목사가 그에게 직분자의 권세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직분의 권세가 위임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맡은 직분을 경홀히 여기지 못할 것은 근본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국가권력의 권세(ἐξουσία)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許諾)하셨기 때문에 ‘위정자가 국가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위정자의 책무가 있습니다. 해서, 위정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한 정치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위정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한 정치를 베풀 때 그 나라의 백성은 이 위정자가 정한 법을 잘 준수하여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과 의의 정치를 하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절: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사람을 거스름이 아니요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대행자를 통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3-6절: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3-6절: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세상의 관원이 하나님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악을 행하는 자를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심판을 베풀 권세가 그에게 있습니다. 해서, 믿는 사람들도 선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자유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율법 아래 놓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놓이지 않는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속박감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계속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인데 이는 율법의 말씀들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시사항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자유함을 받은 백성은 또한 세상 법에서도 자유한데, 율법을 지킴과 같은 이유로 세상의 질서를 위하여 그가 위임한 위정자를 통해 마련해놓은 세상 법규들을 지킴도 주님의 뜻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권세에 굴복하고 선을 행하여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5절에 기록된 대로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양심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7절: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7절: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하나님께서 권한을 위임하신 세상 관원이 국가를 다스리기 위하여 제정한 국세와 공세를 바치는 것이 믿는 사람으로서도 마땅히 행해야할 일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눈에 보이는 우리 주위의 이웃을 사랑함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를 핍박하고 저주하는 원수에게까지 불쌍한 마음이 들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위정자가 정해놓은 법규를 잘 지킬 수 있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명령을 지킬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위정자의 법령은 현세에서 구속하는 힘이 큰데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현세에서 구속하는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법령을 어김은 손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쉽게 할 것입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공세와 국세의 납부를 등한시하거나 속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할 헌물을 속이거나 등한시하지 않겠습니까?
같은 이치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위정자가 정해놓은 법규를 잘 지킬 수 있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명령을 지킬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위정자의 법령은 현세에서 구속하는 힘이 큰데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현세에서 구속하는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법령을 어김은 손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쉽게 할 것입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공세와 국세의 납부를 등한시하거나 속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할 헌물을 속이거나 등한시하지 않겠습니까?
3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하여 권한을 위임받은 정부를 말하되 선한 권세에 대해서만 말씀하였을뿐 악한 정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되 악한 정부인 것이 분명할 때도 그들의 권세에 굴복하여야할 것입니까? 이 문제를 말씀드리기에 앞서서 왜 바울이 로마서에서 ‘권세에 대한 복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권세에 복종하라고 권면함은 바울 당시 일부 믿는 사람들이 폭력적 방법으로 당시의 로마정부에 대항하여 정부를 전복(顚覆)시키고자 하는 일에 전력(全力)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가장 큰 사명은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인데, 그들은 로마타도의 일에 전념함으로 자신들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증거할 기회는 전혀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정부에 대항할 뿐만 아니라 로마정부가 제정한 모든 법규를 지키지 않음으로 사회의 질서를 파괴(破壞)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한 사회에 속하고 국가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함이 악한 권세를 비호(庇護)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악한 권세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까 그 정부가 어떠한 일을 수행하든 상관없다고 말씀함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만 국가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직무를 수행해야하고, 국민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선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어떠한 시대였습니까?
바울은 로마황제 가운데도 가장 악명이 높은 네로시대에 살고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그가 예루살렘에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을 때에 그는 로마시민권을 소지한 사람으로서 로마황제에게 재판받게 해달라고 청원했고 그는 사악하고 우매한 황제, 네로에게 재판받기 위하여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고 재판의 결과 2-3년의 가택연금상태에 처해집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정부에 아부하거나 이를 비호한 것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기에 이 로마정부까지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한 대행자로 삼으셨다고 믿었던 때문일 것입니다. 혹은 이것은 다만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함이 그에게 가장 급박한 사명이라고 믿은 까닭입니다.
동시대를 산 베드로 역시 베드로전서 2장 17절에서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왕은 로마황제이며 그 또한 네로의 폭정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에 의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지만 “왕을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폭군을 두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간섭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시대도 로마정부에 의한 악정이 베풀어지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로마정부가 유대땅에 시행하고있던 로마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이를 지키셨습니다. 그는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취하게 하여 자신과 베드로 몫으로 세금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하신 말씀은 가이사--로마 황제와 하나님을 양극화(兩極化)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세상의 의무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무엇인지 분별하여서 잘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구약(舊約)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서 앗수르를, 유다를 치시기 위하여 갈대아인의 나라--바벨론을 그의 사자로 세우신 적이 있고 다니엘로 바벨론의 폭군 느부갓네살 밑에서 그의 신하로서 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거치면서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서 명쾌한 해석(解釋)을 내리기를 주저해왔습니다. 과연 여기에서 바울이 말씀하는 권세가 포악을 일삼는 정부까지도 포함하는 것인지 의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해석함에 “크리스챤들은 종교를 빙자하여 권세에게--그것이 악한 것이라 할지라도 복종하는 것을 거부(拒否)해서는 안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마틴 루터의 해석이 후에 히틀러 정권 때에 정권에 빌붙어서 그의 시녀 노릇을 하는 하는 신학자들에 의하여 악용되어 정부에 저항하는 크리스챤들을 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이에 칼 바르트(Karl Barth)를 비롯한 신학자들이 1934년에 5월 29-31일에 Barmen에 모여 독일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바-멘(Barmen) 신학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 골자는 교회가 국가의 시녀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어떠한 국가도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다른 목적으로 대체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국가 전복(顚覆)을 기도(企圖)하기 위한 선언이 아니라, 시대와 국가 상황을 초월한 교회의 사명을 밝히고자 함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USA)는 이 바르멘 선언(Barmen Declaration)을 장로교회 신조 가운데 하나로 택하고 있습니다.
히틀러 자신은 “하나님의 사자”를 자처하여 메시야를 죽게한 책임을 물어 유대인들의 씨를 말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성경해석은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해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은 그가 권한의 최종적인 본체가 아님을 깨닫고 겸손한 자세로서 선하게 이를 수행할 것인데 그 권한밖의 일을 하려할 때 그 권한은 빼앗김을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임되어지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한을 잘못 사용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림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믿음의 분량을 감사하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값없이 선물로 받은 은사들을 잘 경영하여야할 것입니다.
한 사회를 사는 사회인으로서 우리의 책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안으로 우리를 핍박하고 저주하는 원수까지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축복하며 주님의 선으로서 사단의 악이 관영하는 사회를 주님의 평안의 사회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한 국가에 속한 백성으로서 우리의 책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간섭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권한을 위임하신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복음을 증거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그리하여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되 악한 정부인 것이 분명할 때도 그들의 권세에 굴복하여야할 것입니까? 이 문제를 말씀드리기에 앞서서 왜 바울이 로마서에서 ‘권세에 대한 복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권세에 복종하라고 권면함은 바울 당시 일부 믿는 사람들이 폭력적 방법으로 당시의 로마정부에 대항하여 정부를 전복(顚覆)시키고자 하는 일에 전력(全力)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가장 큰 사명은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인데, 그들은 로마타도의 일에 전념함으로 자신들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증거할 기회는 전혀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정부에 대항할 뿐만 아니라 로마정부가 제정한 모든 법규를 지키지 않음으로 사회의 질서를 파괴(破壞)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한 사회에 속하고 국가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함이 악한 권세를 비호(庇護)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악한 권세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까 그 정부가 어떠한 일을 수행하든 상관없다고 말씀함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만 국가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직무를 수행해야하고, 국민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선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어떠한 시대였습니까?
바울은 로마황제 가운데도 가장 악명이 높은 네로시대에 살고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그가 예루살렘에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을 때에 그는 로마시민권을 소지한 사람으로서 로마황제에게 재판받게 해달라고 청원했고 그는 사악하고 우매한 황제, 네로에게 재판받기 위하여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고 재판의 결과 2-3년의 가택연금상태에 처해집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정부에 아부하거나 이를 비호한 것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기에 이 로마정부까지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한 대행자로 삼으셨다고 믿었던 때문일 것입니다. 혹은 이것은 다만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함이 그에게 가장 급박한 사명이라고 믿은 까닭입니다.
동시대를 산 베드로 역시 베드로전서 2장 17절에서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왕은 로마황제이며 그 또한 네로의 폭정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에 의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지만 “왕을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폭군을 두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간섭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시대도 로마정부에 의한 악정이 베풀어지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로마정부가 유대땅에 시행하고있던 로마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이를 지키셨습니다. 그는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취하게 하여 자신과 베드로 몫으로 세금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하신 말씀은 가이사--로마 황제와 하나님을 양극화(兩極化)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세상의 의무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무엇인지 분별하여서 잘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구약(舊約)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서 앗수르를, 유다를 치시기 위하여 갈대아인의 나라--바벨론을 그의 사자로 세우신 적이 있고 다니엘로 바벨론의 폭군 느부갓네살 밑에서 그의 신하로서 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거치면서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서 명쾌한 해석(解釋)을 내리기를 주저해왔습니다. 과연 여기에서 바울이 말씀하는 권세가 포악을 일삼는 정부까지도 포함하는 것인지 의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해석함에 “크리스챤들은 종교를 빙자하여 권세에게--그것이 악한 것이라 할지라도 복종하는 것을 거부(拒否)해서는 안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마틴 루터의 해석이 후에 히틀러 정권 때에 정권에 빌붙어서 그의 시녀 노릇을 하는 하는 신학자들에 의하여 악용되어 정부에 저항하는 크리스챤들을 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이에 칼 바르트(Karl Barth)를 비롯한 신학자들이 1934년에 5월 29-31일에 Barmen에 모여 독일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바-멘(Barmen) 신학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 골자는 교회가 국가의 시녀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어떠한 국가도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다른 목적으로 대체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국가 전복(顚覆)을 기도(企圖)하기 위한 선언이 아니라, 시대와 국가 상황을 초월한 교회의 사명을 밝히고자 함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USA)는 이 바르멘 선언(Barmen Declaration)을 장로교회 신조 가운데 하나로 택하고 있습니다.
히틀러 자신은 “하나님의 사자”를 자처하여 메시야를 죽게한 책임을 물어 유대인들의 씨를 말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성경해석은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해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은 그가 권한의 최종적인 본체가 아님을 깨닫고 겸손한 자세로서 선하게 이를 수행할 것인데 그 권한밖의 일을 하려할 때 그 권한은 빼앗김을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임되어지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한을 잘못 사용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림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믿음의 분량을 감사하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값없이 선물로 받은 은사들을 잘 경영하여야할 것입니다.
한 사회를 사는 사회인으로서 우리의 책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안으로 우리를 핍박하고 저주하는 원수까지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축복하며 주님의 선으로서 사단의 악이 관영하는 사회를 주님의 평안의 사회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한 국가에 속한 백성으로서 우리의 책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간섭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권한을 위임하신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복음을 증거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그리하여야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이사야 43:1-7)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이사야 43:1-7)
1
사람의 이름은 중요합니다. 특히 First Name을 부르기를 즐겨하는 미국에서 주변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면, 발음하기 쉬운 First Name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미국사람들은 First Name을 쉽게 부르지 못하면 또한 친해지기도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해서, 미국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가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친구들을 잘 사귀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부르기 편한 한국어이름을 지어주든지 아니면 크리스천이름 또는 영어이름을 마련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저의 네 명의 아이들에게 한국이름과 크리스천 이름이 있는데, 학교에서 미국친구들은 Paul, Priscilla, Peter, Philip 등 크리스천 이름을 부르지만, 제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는 영어이름보다는 한국어이름이 더 정감 있게 느껴집니다. 커서 미국에 온 사람은 미국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한국적 사고나 문화에 더 익숙하여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부를 때, “야,” “어이,” “거기”라는 말보다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정겹고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이름이 주는 매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담아”라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창 3: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어린 사무엘을 이름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실 때 “야곱아,” “이스라엘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은 그의 자녀들과의 친밀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문 상담가로 유명한 앤 랜더스(Ann Landers)가 그에게 보내온 상담편지들을 그 주제별로 구분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두려움에 관한 상담편지들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상담을 요청하여 오는 가장 많은 이유가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갖가지 두려움과 걱정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기의 장래 또는 자녀들의 장래에 관한 두려움, 먹고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관한 두려움, 사고에 관한 두려움, 병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관한 두려움 등등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들 중에 90% 이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닌 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이러한 두려움과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두려움이 만병의 원인이 됩니다. 우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라비아 사람이 바그다드로 가다가 전염병을 만났습니다. "전염병아, 너는 어디를 가는 중이냐?" 아라비아인이 물었습니다. "나는 바그다드로 가는데 거기서 오천 명을 죽일 것이오." 전염병이 대답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바그다드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고, 그로 인해 오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 후 아라비아인은 다시 그 전염병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의했습니다. "너는 지난번에 오천 명을 죽이러 간다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오만 명을 죽였느냐?" 그러자 전염병이 대답합니다. "그렇지가 않소. 나는 오천 명만 죽였을 뿐이요. 나머지는 모두 공포로 죽어갔던 것이요." 두려움이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2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야곱아”라고 하심은 야곱의 후예 이스라엘과 유다 민족을 부르심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어 바벨론에 70년동안 포로의 삶을 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70년 동안 포로로 살게 하심도 하나님의 그들을 사랑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되, “야곱아”라고 그들의 근원이 되는 야곱의 이름으로 부르심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며 그들을 지키시는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그의 열악하고 불확실한 환경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만일 그가 거친 세상에서 혼자라고 생각하면 그는 불안과 근심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는데 마침 옆에 한 청년이 앉았습니다. 그와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다가 보니 청년이 교회를 다니기는 한데 장래 일에 대하여 근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청년에게 한 가지 문제를 내주었습니다. 성경책을 그 앞에 놓고 만년필을 성경책 위에 놓고 그 청년에게 세워보라고 말합니다. 성경책 위에 만년필을 세움이 당연히 불가능해 보이므로 청년은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목사님은 청년에게 ‘나는 세울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청년은 그 목사님이 약간 이상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만년필을 성경책 위에 세울 수 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목사님은 성경책 위에 만년필을 놓고 그 끝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에게 만년필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청년은 그게 어디 만년필을 세운 것이냐고 묻습니다.
목사님은 대답합니다: “만년필 스스로는 흔들리고 달려가는 기차 안에서, 아니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홀로 설 능력이 없지만 손이 그것을 붙잡고 있을 때 설 수 있는 것 같이, 우리 사람도 그 스스로는 여러 가지 변동하는 환경 가운데 서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신 팔로서 붙들고 계시매 서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1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약속 주시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속하였다”란 말은 ‘값을 주고 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또한 영적 이스라엘 된 우리를 위하여 값을 지불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되신 하나님께서 나를 이름으로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심은 참으로 대단한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젊은 남녀들은 열렬히 연애하는 동안에는 ‘너는 내 것’이라 찜해 놓기도 하고 커플링(couple ring)을 하나씩 나눠 끼기도 하고 커플 셔츠(couple shirts)를 하나씩 나눠 입기도 하면서 서로 상대방에 대한 소유를 다짐하기도 하지만, 더 매력적인 이성(異性)이 나타나면 그렇게 열렬히 사랑한다, ‘너는 내 것’이라 주장하던 사람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런데, 신실하시고 한결같으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병들고 추해지고 세상에서 실패한 것 같은 삶을 살더라도 여전히 나를 부르시며, 붙드시며,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물”(deep waters) 또는 “강”(rivers)은 감당하기에 벅찬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러한 어려운 순간들을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통의 연속인 그 때에 나는 견딜 수 없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데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하시니 그 어려움이 나를 아주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불”은 우리를 짓누르는 압박이요 또한 위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그 위험과 압박 가운데서도 나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3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재천명하십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유다가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것인데, 결국에 포로생활에서 구원함을 얻게 해주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다민족의 귀환을 허락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대가-속량물-로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s)에게 그 주변국가들인 애굽과 구스(=에티오피아)와 스바(아라비아반도 남쪽, 현재의 예멘) 등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4절: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페르시아가 주변국가들을 점령하여 유다에 대한 관심에서 이들 나라들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속량물로 내어주시고 유다를 구원하여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요 자녀인 이스라엘과 유다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 까닭이요,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연고입니다. 그들이 현재에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여 장차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의 삶을 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매 종국에는 놓임을 받을 것이란 약속입니다.
5-6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 북방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침공을 당하여 멸망하고 앗수르의 자국민 이주정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인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짐을 당하게 됩니다.
남방왕국 유다 역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120년 뒤로 시작하여 바벨론에 의하여 세 차례에 침공을 당하여 얼마간의 무리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또 상당수는 이곳저곳으로 흩어짐을 당합니다.
이와 같이 흩어짐을 당한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하는데,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와 메데, 그리고 시리아, 키프로스, 아르메니아, 애굽 등 사방에 흩어져 있게 됩니다.
이들 사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동서남북에서 모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예수님 이후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멸망당한 유대인들이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거의 2,000년 뒤인 1948년에 그들을 또다시 시온으로 모으시므로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이셨습니다.
7절: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우리가 어느 곳에서 어느 상황 가운데 처하여 있든지 항상 기억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바 된 자녀요, 그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심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매,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강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가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3
아프리카에 사는 새들 가운데 비서새가 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하늘을 곧잘 날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벌레를 잡기도 하고 또 노래를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위기를 만나게 되면 날개가 꽁꽁 얼어붙고 온몸이 마비가 되어 다른 짐승들의 밥이 된다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비서새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찬양도 하고, 감사도 하고 예배에도 잘 참석합니다. 그러나 삶의 어려움이나 위기상황을 만나게 되면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선원이 노련한 사람인지는 잠잠한 바다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일어나 물결이 흉흉할 때 우왕좌왕하느냐, 아니면 차분하게 풍랑에 대처하는가를 보면 그가 얼마나 노련한 선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 앞에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하고 생의 위기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이 전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시며,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시며,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놀라지 아니하며, 강하고 담대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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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이름은 중요합니다. 특히 First Name을 부르기를 즐겨하는 미국에서 주변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면, 발음하기 쉬운 First Name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미국사람들은 First Name을 쉽게 부르지 못하면 또한 친해지기도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해서, 미국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가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친구들을 잘 사귀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부르기 편한 한국어이름을 지어주든지 아니면 크리스천이름 또는 영어이름을 마련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저의 네 명의 아이들에게 한국이름과 크리스천 이름이 있는데, 학교에서 미국친구들은 Paul, Priscilla, Peter, Philip 등 크리스천 이름을 부르지만, 제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는 영어이름보다는 한국어이름이 더 정감 있게 느껴집니다. 커서 미국에 온 사람은 미국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한국적 사고나 문화에 더 익숙하여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부를 때, “야,” “어이,” “거기”라는 말보다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정겹고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이름이 주는 매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담아”라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창 3: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어린 사무엘을 이름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실 때 “야곱아,” “이스라엘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은 그의 자녀들과의 친밀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문 상담가로 유명한 앤 랜더스(Ann Landers)가 그에게 보내온 상담편지들을 그 주제별로 구분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두려움에 관한 상담편지들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상담을 요청하여 오는 가장 많은 이유가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갖가지 두려움과 걱정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기의 장래 또는 자녀들의 장래에 관한 두려움, 먹고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관한 두려움, 사고에 관한 두려움, 병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관한 두려움 등등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들 중에 90% 이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닌 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이러한 두려움과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두려움이 만병의 원인이 됩니다. 우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라비아 사람이 바그다드로 가다가 전염병을 만났습니다. "전염병아, 너는 어디를 가는 중이냐?" 아라비아인이 물었습니다. "나는 바그다드로 가는데 거기서 오천 명을 죽일 것이오." 전염병이 대답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바그다드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고, 그로 인해 오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 후 아라비아인은 다시 그 전염병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의했습니다. "너는 지난번에 오천 명을 죽이러 간다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오만 명을 죽였느냐?" 그러자 전염병이 대답합니다. "그렇지가 않소. 나는 오천 명만 죽였을 뿐이요. 나머지는 모두 공포로 죽어갔던 것이요." 두려움이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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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야곱아”라고 하심은 야곱의 후예 이스라엘과 유다 민족을 부르심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어 바벨론에 70년동안 포로의 삶을 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70년 동안 포로로 살게 하심도 하나님의 그들을 사랑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되, “야곱아”라고 그들의 근원이 되는 야곱의 이름으로 부르심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며 그들을 지키시는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그의 열악하고 불확실한 환경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만일 그가 거친 세상에서 혼자라고 생각하면 그는 불안과 근심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는데 마침 옆에 한 청년이 앉았습니다. 그와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다가 보니 청년이 교회를 다니기는 한데 장래 일에 대하여 근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청년에게 한 가지 문제를 내주었습니다. 성경책을 그 앞에 놓고 만년필을 성경책 위에 놓고 그 청년에게 세워보라고 말합니다. 성경책 위에 만년필을 세움이 당연히 불가능해 보이므로 청년은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목사님은 청년에게 ‘나는 세울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청년은 그 목사님이 약간 이상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만년필을 성경책 위에 세울 수 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목사님은 성경책 위에 만년필을 놓고 그 끝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에게 만년필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청년은 그게 어디 만년필을 세운 것이냐고 묻습니다.
목사님은 대답합니다: “만년필 스스로는 흔들리고 달려가는 기차 안에서, 아니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홀로 설 능력이 없지만 손이 그것을 붙잡고 있을 때 설 수 있는 것 같이, 우리 사람도 그 스스로는 여러 가지 변동하는 환경 가운데 서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신 팔로서 붙들고 계시매 서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1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약속 주시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속하였다”란 말은 ‘값을 주고 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또한 영적 이스라엘 된 우리를 위하여 값을 지불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되신 하나님께서 나를 이름으로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심은 참으로 대단한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젊은 남녀들은 열렬히 연애하는 동안에는 ‘너는 내 것’이라 찜해 놓기도 하고 커플링(couple ring)을 하나씩 나눠 끼기도 하고 커플 셔츠(couple shirts)를 하나씩 나눠 입기도 하면서 서로 상대방에 대한 소유를 다짐하기도 하지만, 더 매력적인 이성(異性)이 나타나면 그렇게 열렬히 사랑한다, ‘너는 내 것’이라 주장하던 사람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런데, 신실하시고 한결같으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병들고 추해지고 세상에서 실패한 것 같은 삶을 살더라도 여전히 나를 부르시며, 붙드시며,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물”(deep waters) 또는 “강”(rivers)은 감당하기에 벅찬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러한 어려운 순간들을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통의 연속인 그 때에 나는 견딜 수 없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데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하시니 그 어려움이 나를 아주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불”은 우리를 짓누르는 압박이요 또한 위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그 위험과 압박 가운데서도 나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3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재천명하십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유다가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것인데, 결국에 포로생활에서 구원함을 얻게 해주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다민족의 귀환을 허락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대가-속량물-로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s)에게 그 주변국가들인 애굽과 구스(=에티오피아)와 스바(아라비아반도 남쪽, 현재의 예멘) 등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4절: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페르시아가 주변국가들을 점령하여 유다에 대한 관심에서 이들 나라들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속량물로 내어주시고 유다를 구원하여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요 자녀인 이스라엘과 유다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 까닭이요,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연고입니다. 그들이 현재에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여 장차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의 삶을 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매 종국에는 놓임을 받을 것이란 약속입니다.
5-6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 북방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침공을 당하여 멸망하고 앗수르의 자국민 이주정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인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짐을 당하게 됩니다.
남방왕국 유다 역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120년 뒤로 시작하여 바벨론에 의하여 세 차례에 침공을 당하여 얼마간의 무리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또 상당수는 이곳저곳으로 흩어짐을 당합니다.
이와 같이 흩어짐을 당한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하는데,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와 메데, 그리고 시리아, 키프로스, 아르메니아, 애굽 등 사방에 흩어져 있게 됩니다.
이들 사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동서남북에서 모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예수님 이후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멸망당한 유대인들이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거의 2,000년 뒤인 1948년에 그들을 또다시 시온으로 모으시므로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이셨습니다.
7절: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우리가 어느 곳에서 어느 상황 가운데 처하여 있든지 항상 기억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바 된 자녀요, 그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심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매,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강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가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3
아프리카에 사는 새들 가운데 비서새가 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하늘을 곧잘 날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벌레를 잡기도 하고 또 노래를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위기를 만나게 되면 날개가 꽁꽁 얼어붙고 온몸이 마비가 되어 다른 짐승들의 밥이 된다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비서새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찬양도 하고, 감사도 하고 예배에도 잘 참석합니다. 그러나 삶의 어려움이나 위기상황을 만나게 되면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선원이 노련한 사람인지는 잠잠한 바다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일어나 물결이 흉흉할 때 우왕좌왕하느냐, 아니면 차분하게 풍랑에 대처하는가를 보면 그가 얼마나 노련한 선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 앞에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하고 생의 위기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이 전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시며,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시며,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놀라지 아니하며, 강하고 담대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이사야 40:1-11)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이사야 40:1-11)
1
어떤 글을 쓸 때나, 서론-본론-결론이 있는 작품을 만들 때 서론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을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의 가치가 결정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음악 작품들 중 가장 위대한 곡 다섯 개를 꼽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헨델(George Frederic Handel, 1685-1759)의 ‘메시아’ 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헨델은 1741년 여름 24일만에 ‘메시아’의 작곡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메시아’는 3부로 구성된 작품인데, 제 1부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강림-탄생에 대한 예언, 제 2부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제 3부는 부활과 영생입니다.
‘메시아’의 첫 번째 공연은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Ireland)의 수도 더블린(Dublin)에서 자선사업을 위한 연주회로 열렸는데 헨델이 직접 지휘하였습니다. ‘메시아’가 1743년 런던(London)에서 연주되었을 때, 청중석의 영국 왕 조지 2세는 ‘메시아’ 중 ‘할렐루야’가 연주될 때 작곡가인 헨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일어났는데 이를 본 다른 청중들도 왕을 따라 함께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관례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할렐루야’를 연주하거나 합창할 때는 청중들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제 1부 주제인 “메시아의 강림-탄생의 예언”을 위해서 헨델은 서곡 신포니아(Sinfonia)에 이어서 오늘 본문인 이사야 40장에서 소주제를 따옵니다. -Comfort ye my people(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은 이사야서 40장 1-3절,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골짜기마다 돋우어지리라)는 40장 4절, -And the glory of the LORD(주의 영광)는 40장 5절, -O thou that tellest good tidings to Zion(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은 40장 9절을 주제로 작곡한 것입니다.
또 제 2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중 상당부분은 이사야서 53장을 그 소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He was despised(그는 멸시 당하셨네)는 53장 3절, -Surely He hath borne our griefs(진실로 그는 우리 슬픔을 담당하셨네)는 53장 4절, -And with His strifes we are healed(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53장 5절, -All we like sheep have gone astray(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도다)는 53장 6절, -He was cut off out the land of the living(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셨도다)는 53장 8절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제 3부 “부활과 영생”은 고린도전서 15장과 요한계시록 5장의 천상에 계신 어린 양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헨델이 ‘메시아’의 서론 부분인 제 1부 “메시야의 강림-탄생에 대한 예언”을 이사야 40장을 갖고 시작하였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서는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전체와 이사야서를 대조해보면 참으로 신기한 많은 것들을 발견합니다. 성경이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갖고 있듯이, 이사야서는 전반부 39장과 후반부 27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약(舊約)의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책망과 징계를 다루고 있듯이, 이사야서 전반부 39장 중에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책망과 징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新約)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예고하는 세례요한의 광야에서의 외침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과 같이(마태 3:1-2; 마가 1:1-8; 누가 3:2-6), 이사야서 후반부의 시작인 40장도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라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시작합니다.
이사야는 주전 740년부터 690년까지(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 약 50년간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악한 왕 므낫세에 의하여 톱으로 몸이 반동강으로 썰리는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히 11:37 참고). 그가 활동을 시작한 때는 북방왕국 이스라엘이 아직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기 전(주전 722년)입니다. 남방왕국 유다의 멸망이 주전 586년이니까 유다의 멸망은 아직 먼 것처럼 보일 때였습니다.
그가 100여년 뒤에 일어날 멸망의 사건을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예언케 하십니다.
또 유다가 아직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케 하십니다. 아직 나라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인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하여 유다를 돌려보내어 예루살렘을, 그리고 성전을 중건케 할 것을 예언케 하십니다(사 48:28).
2
1절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유다가 아직 바벨론에 끌려가기도 전에 포로상태에서 그들이 해방되어 돌아오리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유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케 하신 것처럼, 유다 백성이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애굽에서 430년간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모세를 통하여 인도해내셨던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감옥과 같은 그곳에서의 복역에 종지부를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위로의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왜 헨델의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의 주제가 되었습니까?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홍해를 건너 광야로 건져내시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유다 백성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때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를 준비해 주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영적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인간들을 그곳에서 해방시키시고 새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실 메시아를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인간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창세기 1장 26-2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이브의 범죄한 이후 모든 인간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음녀 바벨론과 같이 죄된 세상에서 포로의 생활을 하던 인간들을 그 옥에서 해방시키시고 새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1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로는 바벨론의 포로상태에서 돌아올 유다에 대한 위로일뿐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포로 상태에서 놓임을 받는 우리를 향하신 위로이기도 합니다.
2절에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복역의 때’--곧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의 종료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직, 죄악에서 돌이킴이 없고 그에 대한 징계도 없는데, 하나님은 징계 이후의 용서를 약속하여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함에 대한 징계를 하시는데, 우리가 회개할 때 그의 용서는 갑절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기억지 아니하시며, 회개한 자에게 크신 축복을 주시고 그 상한 심령을 위로하십니다.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외치는 자”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계시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외치는 자”이신 하나님의 “소리”, 곧 선지자로서 유다 백성들에게 고합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어떻게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대로를 평탄케 할 수 있습니까?
4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4절에서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골짜기”라고 함은 죄로 움푹 파인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함을 통하여 우리의 죄의 골이 메꾸어지고 돋아질 것입니다. “산”이라고 함은 우리의 자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산같이 자고한 마음이 주님 앞에 겸손하고 낮아져서 평탄케 됩니다. 곧, 죄의 골도 메꾸어지고 교만의 산도 낮아져서 평평하게 됩니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맞이할 준비된 마음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앞서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면서,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돌아선 사람들에게 요단강에서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5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다백성들이 포로에서 풀리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그들 가운데 두기 위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므로 솔로몬의 성전에 머물던 여호와의 영광을 그들이 보기를 원합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되 오직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의로와진 사람들만이 그 영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도가 들어갈 최종적인 영광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6-8절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가로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불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장미 꽃이 아름답지만 만개(滿開)하면 그 다음은 시들어짐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은 절정을 지난 다음에는 곧 시들어갑니다.
이것이 낙원을 상실한 땅에서 사는 인생과 피조물을 향하신 여호와의 기운--운행의 법칙입니다.
세상사의 쉬 변하는 모습에 관하여 야고보는 1장 9-11절에서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임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영영히 불변하며 시들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로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확실하고 불변합니다.
이 불변하며 영원히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요한 12:34),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벧전 1:25)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25절에서 베드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9절에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름다운 소식--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오를 것인데, 여기서 높은 산은 복되고 아름다운 소식을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전파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목청을 돋우어서 크게 외쳐야 할 것입니다. 부끄럽고 수줍음으로 입술을 닫고 있든지 낮고 불분명한 소리로 전할 것이 아닙니다.
10-11절에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고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때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의지하고 행한대로 우리에게 상급을 주실 것이며, 목자가 양무리를 대함과 같이 부드러움으로 하실 것이며 그의 양떼인 우리를 먹이시고, 품에 안으시고, 인도하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위로를 그 백성에게 선포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3절), 말하는 자의 소리(6절)가 된 것같이, 또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된 것같이 우리 모두가 세상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알리고, 주님의 길을 평탄케 예비하라고 선포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 하되, 높은 산에 올라가 크고 분명한 소리로 아름답고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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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을 쓸 때나, 서론-본론-결론이 있는 작품을 만들 때 서론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을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의 가치가 결정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음악 작품들 중 가장 위대한 곡 다섯 개를 꼽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헨델(George Frederic Handel, 1685-1759)의 ‘메시아’ 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헨델은 1741년 여름 24일만에 ‘메시아’의 작곡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메시아’는 3부로 구성된 작품인데, 제 1부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강림-탄생에 대한 예언, 제 2부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제 3부는 부활과 영생입니다.
‘메시아’의 첫 번째 공연은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Ireland)의 수도 더블린(Dublin)에서 자선사업을 위한 연주회로 열렸는데 헨델이 직접 지휘하였습니다. ‘메시아’가 1743년 런던(London)에서 연주되었을 때, 청중석의 영국 왕 조지 2세는 ‘메시아’ 중 ‘할렐루야’가 연주될 때 작곡가인 헨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일어났는데 이를 본 다른 청중들도 왕을 따라 함께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관례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할렐루야’를 연주하거나 합창할 때는 청중들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제 1부 주제인 “메시아의 강림-탄생의 예언”을 위해서 헨델은 서곡 신포니아(Sinfonia)에 이어서 오늘 본문인 이사야 40장에서 소주제를 따옵니다. -Comfort ye my people(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은 이사야서 40장 1-3절,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골짜기마다 돋우어지리라)는 40장 4절, -And the glory of the LORD(주의 영광)는 40장 5절, -O thou that tellest good tidings to Zion(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은 40장 9절을 주제로 작곡한 것입니다.
또 제 2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중 상당부분은 이사야서 53장을 그 소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He was despised(그는 멸시 당하셨네)는 53장 3절, -Surely He hath borne our griefs(진실로 그는 우리 슬픔을 담당하셨네)는 53장 4절, -And with His strifes we are healed(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53장 5절, -All we like sheep have gone astray(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도다)는 53장 6절, -He was cut off out the land of the living(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셨도다)는 53장 8절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제 3부 “부활과 영생”은 고린도전서 15장과 요한계시록 5장의 천상에 계신 어린 양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헨델이 ‘메시아’의 서론 부분인 제 1부 “메시야의 강림-탄생에 대한 예언”을 이사야 40장을 갖고 시작하였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서는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전체와 이사야서를 대조해보면 참으로 신기한 많은 것들을 발견합니다. 성경이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갖고 있듯이, 이사야서는 전반부 39장과 후반부 27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약(舊約)의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책망과 징계를 다루고 있듯이, 이사야서 전반부 39장 중에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책망과 징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新約)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예고하는 세례요한의 광야에서의 외침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과 같이(마태 3:1-2; 마가 1:1-8; 누가 3:2-6), 이사야서 후반부의 시작인 40장도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라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시작합니다.
이사야는 주전 740년부터 690년까지(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 약 50년간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악한 왕 므낫세에 의하여 톱으로 몸이 반동강으로 썰리는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히 11:37 참고). 그가 활동을 시작한 때는 북방왕국 이스라엘이 아직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기 전(주전 722년)입니다. 남방왕국 유다의 멸망이 주전 586년이니까 유다의 멸망은 아직 먼 것처럼 보일 때였습니다.
그가 100여년 뒤에 일어날 멸망의 사건을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예언케 하십니다.
또 유다가 아직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케 하십니다. 아직 나라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인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하여 유다를 돌려보내어 예루살렘을, 그리고 성전을 중건케 할 것을 예언케 하십니다(사 48:28).
2
1절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유다가 아직 바벨론에 끌려가기도 전에 포로상태에서 그들이 해방되어 돌아오리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유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케 하신 것처럼, 유다 백성이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애굽에서 430년간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모세를 통하여 인도해내셨던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감옥과 같은 그곳에서의 복역에 종지부를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위로의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왜 헨델의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의 주제가 되었습니까?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홍해를 건너 광야로 건져내시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유다 백성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때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를 준비해 주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영적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인간들을 그곳에서 해방시키시고 새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실 메시아를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인간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창세기 1장 26-2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이브의 범죄한 이후 모든 인간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음녀 바벨론과 같이 죄된 세상에서 포로의 생활을 하던 인간들을 그 옥에서 해방시키시고 새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1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로는 바벨론의 포로상태에서 돌아올 유다에 대한 위로일뿐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포로 상태에서 놓임을 받는 우리를 향하신 위로이기도 합니다.
2절에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복역의 때’--곧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의 종료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직, 죄악에서 돌이킴이 없고 그에 대한 징계도 없는데, 하나님은 징계 이후의 용서를 약속하여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함에 대한 징계를 하시는데, 우리가 회개할 때 그의 용서는 갑절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기억지 아니하시며, 회개한 자에게 크신 축복을 주시고 그 상한 심령을 위로하십니다.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외치는 자”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계시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외치는 자”이신 하나님의 “소리”, 곧 선지자로서 유다 백성들에게 고합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어떻게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대로를 평탄케 할 수 있습니까?
4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4절에서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골짜기”라고 함은 죄로 움푹 파인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함을 통하여 우리의 죄의 골이 메꾸어지고 돋아질 것입니다. “산”이라고 함은 우리의 자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산같이 자고한 마음이 주님 앞에 겸손하고 낮아져서 평탄케 됩니다. 곧, 죄의 골도 메꾸어지고 교만의 산도 낮아져서 평평하게 됩니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맞이할 준비된 마음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앞서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면서,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돌아선 사람들에게 요단강에서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5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다백성들이 포로에서 풀리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그들 가운데 두기 위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므로 솔로몬의 성전에 머물던 여호와의 영광을 그들이 보기를 원합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되 오직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의로와진 사람들만이 그 영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도가 들어갈 최종적인 영광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6-8절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가로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불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장미 꽃이 아름답지만 만개(滿開)하면 그 다음은 시들어짐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은 절정을 지난 다음에는 곧 시들어갑니다.
이것이 낙원을 상실한 땅에서 사는 인생과 피조물을 향하신 여호와의 기운--운행의 법칙입니다.
세상사의 쉬 변하는 모습에 관하여 야고보는 1장 9-11절에서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임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영영히 불변하며 시들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로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확실하고 불변합니다.
이 불변하며 영원히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요한 12:34),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벧전 1:25)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25절에서 베드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9절에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름다운 소식--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오를 것인데, 여기서 높은 산은 복되고 아름다운 소식을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전파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목청을 돋우어서 크게 외쳐야 할 것입니다. 부끄럽고 수줍음으로 입술을 닫고 있든지 낮고 불분명한 소리로 전할 것이 아닙니다.
10-11절에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고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때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의지하고 행한대로 우리에게 상급을 주실 것이며, 목자가 양무리를 대함과 같이 부드러움으로 하실 것이며 그의 양떼인 우리를 먹이시고, 품에 안으시고, 인도하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위로를 그 백성에게 선포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3절), 말하는 자의 소리(6절)가 된 것같이, 또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된 것같이 우리 모두가 세상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알리고, 주님의 길을 평탄케 예비하라고 선포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 하되, 높은 산에 올라가 크고 분명한 소리로 아름답고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Sunday, January 12, 2014
“네 원수가 주리거든” (로마서 12:14-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로마서 12:14-21)
1
음악을 듣는 것이 우리 정서생활에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음악을 좀 더 세분화시켜 말하면, 대중 유행가는 육적인 감각을 만족시키고, 명곡 (클래식)은 정신적인 면을 만족시키는 것이지만, 찬송가는 인간의 영혼을 어루만져주어 영혼의 상처를 치료하여준다고 합니다. 유능한 음악치료사(Music Therapist)는 찬송가의 심령 치료효과가 높음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찬송가를 치료에 도입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예배와 교회교육을 받고 찬송가를 부르며 자란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안정되어있다는 연구결과도 이를 뒷바침하여줍니다.
우리 교회 교우님들도 예배중에 혹은 가정에서 마음 깊숙히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많이 부르심으로서 육신의 병을 예방하시고, 혹 육신의 질병이 있으신 성도님들은 병치료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예배와 교회교육을 받고 찬송가를 부르며 자란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안정되어있다는 연구결과도 이를 뒷바침하여줍니다.
우리 교회 교우님들도 예배중에 혹은 가정에서 마음 깊숙히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많이 부르심으로서 육신의 병을 예방하시고, 혹 육신의 질병이 있으신 성도님들은 병치료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오늘은 교회 밖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살펴보시면 많이 느끼시겠지만, 믿는 사람의 삶이 믿지않는 사람의 삶과 다르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드리고 거룩한 찬송을 부르지만 돌아가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생활하다 보면, 나의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이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생활 속의 거룩함과 경건의 삶은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세끼 밥먹고, 옷입고, 아이키우고, 이웃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되 하나님의 의와 선하심에 따라 믿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말만 앞세우고 약속을 식은죽 먹듯이 깨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님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옆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 배만 채우고 두드리고있는 삶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삶이 아님을 압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열 가지로 사회를 살아가는 믿는 사람이 할 일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살펴보시면 많이 느끼시겠지만, 믿는 사람의 삶이 믿지않는 사람의 삶과 다르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드리고 거룩한 찬송을 부르지만 돌아가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생활하다 보면, 나의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이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생활 속의 거룩함과 경건의 삶은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세끼 밥먹고, 옷입고, 아이키우고, 이웃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되 하나님의 의와 선하심에 따라 믿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말만 앞세우고 약속을 식은죽 먹듯이 깨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님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옆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 배만 채우고 두드리고있는 삶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삶이 아님을 압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열 가지로 사회를 살아가는 믿는 사람이 할 일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14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첫째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만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한걸믐 더 나아간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행동과 삶이 아무래도 좋다고 말씀합니까?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대로의 삶을,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고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옆사람을 도와주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님은 그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와 원수된 모든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은 예수님을 증거하다 그를 핍박하여 돌로 치는 군중들을 저주하는 대신에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일제 시대를 사신 최 봉석(일명 최 권능)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신 까닭으로 감옥에 갇힘을 당하고, 모진 고문을 당하였는데 고문을 당할 때마다 비명을 지르거나 그를 고문하는 일본형사를 저주하는 대신에 “예수 천당” 하면서 그 고문을 이겨내셨다고 합니다. “예수 천당”이라고 함은 고문을 하는 일본형사라도 “예수님 믿고 천당 가라”는 축복의 말씀일 것입니다.
15절: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만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한걸믐 더 나아간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행동과 삶이 아무래도 좋다고 말씀합니까?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대로의 삶을,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고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옆사람을 도와주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님은 그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와 원수된 모든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은 예수님을 증거하다 그를 핍박하여 돌로 치는 군중들을 저주하는 대신에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일제 시대를 사신 최 봉석(일명 최 권능)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신 까닭으로 감옥에 갇힘을 당하고, 모진 고문을 당하였는데 고문을 당할 때마다 비명을 지르거나 그를 고문하는 일본형사를 저주하는 대신에 “예수 천당” 하면서 그 고문을 이겨내셨다고 합니다. “예수 천당”이라고 함은 고문을 하는 일본형사라도 “예수님 믿고 천당 가라”는 축복의 말씀일 것입니다.
15절: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둘째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과 슬픔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있는 이 다른 사람은 교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인데, 이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의 형편에도 동참하여 기쁨과 고통을 나누어 갖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이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우리의 하는 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과 슬픔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있는 이 다른 사람은 교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인데, 이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의 형편에도 동참하여 기쁨과 고통을 나누어 갖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이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우리의 하는 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셋째는,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 말씀합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캠패인을 벌인 적이 있지만, 믿는 사람들이 믿지않는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실제 삶에 있어서도 그들과 조화(調和)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함께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네째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낮은 데 처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같은 본체이신데 종의 형상으로 낮아지셔서 우리에게 섬기는 자의 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행동을 할 때 그 사람들을 변화(變化)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욕하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의 행동을 우리가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지 않는 이웃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해하다(understand)"는 우리가 상대방보다 “낮은 곳에” “아래에” “서야지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다섯째는, “스스로 지혜(智慧) 있는 체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낫거나 완벽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친구로 삼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친한 친구들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부족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인데도 나의 친구가 된 사람은 그의 장점을, 지혜 있음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을 대하거나 사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별로 인간적인 지혜도 없으면서 지혜있는 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십대 후반 청년 때에 아직 그리스도의 도가 잘 깨달아지지 않아서 기독학생 모임에서 저보다 두세 살 위인 저보다 먼저 믿은 사람과 대화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자기의 성경지식과 믿음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자기에게는 전혀 의심이 없고 삶 자체도 완전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이 당시 저에게는 상당히 거부반응으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같은 12장 3절에서 바울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智慧)롭게 생각하라” 말씀했는데,
우리의 인간적인 지혜도, 믿는 사람으로서의 지혜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없습니다. 해서, 우리는 다만 성령의 능력과 그 지혜로서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17절: 아무에게도 악으로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캠패인을 벌인 적이 있지만, 믿는 사람들이 믿지않는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실제 삶에 있어서도 그들과 조화(調和)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함께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네째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낮은 데 처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같은 본체이신데 종의 형상으로 낮아지셔서 우리에게 섬기는 자의 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행동을 할 때 그 사람들을 변화(變化)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욕하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의 행동을 우리가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지 않는 이웃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해하다(understand)"는 우리가 상대방보다 “낮은 곳에” “아래에” “서야지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다섯째는, “스스로 지혜(智慧) 있는 체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낫거나 완벽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친구로 삼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친한 친구들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부족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인데도 나의 친구가 된 사람은 그의 장점을, 지혜 있음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을 대하거나 사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별로 인간적인 지혜도 없으면서 지혜있는 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십대 후반 청년 때에 아직 그리스도의 도가 잘 깨달아지지 않아서 기독학생 모임에서 저보다 두세 살 위인 저보다 먼저 믿은 사람과 대화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자기의 성경지식과 믿음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자기에게는 전혀 의심이 없고 삶 자체도 완전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이 당시 저에게는 상당히 거부반응으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같은 12장 3절에서 바울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智慧)롭게 생각하라” 말씀했는데,
우리의 인간적인 지혜도, 믿는 사람으로서의 지혜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없습니다. 해서, 우리는 다만 성령의 능력과 그 지혜로서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17절: 아무에게도 악으로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여섯째는, “아무에게도 악으로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합니다.
“선(善)을 악(惡)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일이요, 악(惡)을 악(惡)으로 갚는 것은 세상사람들의 방법이요, 악(惡)을 선(善)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마땅히 할 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으로 창조된 첫 사람 아담을 악의 모습으로 타락시킨 사단은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선(善)을 방해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사역 처음에 그를 세 가지 것으로 시험하였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도 군중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타락한 이후 아담과 그의 후손된 인류는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갚는 보응(報應)의 법칙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고하신 선이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악이 넘쳐나는 이 세상을 살지라도 “선한 일을 도모(圖謀)하라”고 말씀합니다. 도모(圖謀)하라는 뜻은 소극적(消極的)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하고 모색하는” 적극적(積極的)인 자세입니다. 하나님 앞에 악은 하나님의 형상에 역행하는 것이요, 선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닮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
“선(善)을 악(惡)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일이요, 악(惡)을 악(惡)으로 갚는 것은 세상사람들의 방법이요, 악(惡)을 선(善)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마땅히 할 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으로 창조된 첫 사람 아담을 악의 모습으로 타락시킨 사단은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선(善)을 방해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사역 처음에 그를 세 가지 것으로 시험하였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도 군중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타락한 이후 아담과 그의 후손된 인류는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갚는 보응(報應)의 법칙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고하신 선이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악이 넘쳐나는 이 세상을 살지라도 “선한 일을 도모(圖謀)하라”고 말씀합니다. 도모(圖謀)하라는 뜻은 소극적(消極的)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하고 모색하는” 적극적(積極的)인 자세입니다. 하나님 앞에 악은 하나님의 형상에 역행하는 것이요, 선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닮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
일곱째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평화는 세상과 타협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일시적인 평화가 아닙니다.
세상의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근원적인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말씀하실 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화목할 뿐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치료해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기도한 것 처럼, 우리는 분쟁이 있는 곳에 화평을,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치료를 공급해주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로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이 평화는 세상과 타협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일시적인 평화가 아닙니다.
세상의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근원적인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말씀하실 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화목할 뿐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치료해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기도한 것 처럼, 우리는 분쟁이 있는 곳에 화평을,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치료를 공급해주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로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여덟째는,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원한(怨恨)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하다보면 분냄과 증오의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잘 통제가 되지않고 폭발하여 겉잡을 수 없이 되어버립니다.
그 사람은 나의 다리 하나를 분지러 놓았는데 나의 분냄으로 그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말씀하신 것은 원수 갚는 것을 권장하신 것이 아니라, 원한관계를 해소하되, 당한 것 이상으로 가해하지 말라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가해하되 당한 것 이상으로 하였습니다. 이 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아시는 예수님은 해서 마태복음 5장 39절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냄으로 더 큰 화와 복수를 자초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홉째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지혜서인 잠언 25장 21-22절에서 따온 말씀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원수를 사랑함에서 그 극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눈에 보이는 형제, 나에게 잘해주는 이웃뿐 아니라, 나를 핍박하고 못살게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수 있게 됩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장 큰 두 계명이 첫째는 하나님 사람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장 45-47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원수된 자까지도 포용하는 마음입니다.
“그리함으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했는데, 활활 핀 숯불을 머리에 두는 것은 고대 근동의 형벌 가운데 하나로서, 이로서 죄인이 고통을 당하고 그 얼굴이 뜨거움으로 붉게 변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을 함은 선한 행동으로 악인(惡人)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고, 후에 그 마음에 깨달음을 갖게 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열째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백성에게 바라시는 긍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이 사단의 지배로 악이 관영(貫盈)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서 나타나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원한(怨恨)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하다보면 분냄과 증오의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잘 통제가 되지않고 폭발하여 겉잡을 수 없이 되어버립니다.
그 사람은 나의 다리 하나를 분지러 놓았는데 나의 분냄으로 그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말씀하신 것은 원수 갚는 것을 권장하신 것이 아니라, 원한관계를 해소하되, 당한 것 이상으로 가해하지 말라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가해하되 당한 것 이상으로 하였습니다. 이 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아시는 예수님은 해서 마태복음 5장 39절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냄으로 더 큰 화와 복수를 자초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0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원수를 사랑함에서 그 극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눈에 보이는 형제, 나에게 잘해주는 이웃뿐 아니라, 나를 핍박하고 못살게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수 있게 됩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장 큰 두 계명이 첫째는 하나님 사람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장 45-47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원수된 자까지도 포용하는 마음입니다.
“그리함으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했는데, 활활 핀 숯불을 머리에 두는 것은 고대 근동의 형벌 가운데 하나로서, 이로서 죄인이 고통을 당하고 그 얼굴이 뜨거움으로 붉게 변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을 함은 선한 행동으로 악인(惡人)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고, 후에 그 마음에 깨달음을 갖게 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21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
하나님께서 믿는 백성에게 바라시는 긍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이 사단의 지배로 악이 관영(貫盈)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서 나타나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3
로마서 8장과 12장은 우리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에게 참으로 중요한 장들입니다. 8장은 로마서 교리부분의 마지막 장으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믿는 사람들이 왜 그러한 삶을 계속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말씀하였는데,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항상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2장은 성화의 삶의 구체적인 지시사항입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변화입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결단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교회의 변화인데, 이는 우리 자신의 변화로서 가능한데, 교회에 속한 각자가 자신에게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어진 은사를 잘 경영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로서 자신이 할 일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지 9-13절에서 열두 가지로 권면했습니다.
셋째는 사회의 변화인데,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교회의 모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서 수동적이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 확장하는 작업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장차 우리에게 임하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질 것이며, 그 나라에서 주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는 자랑스런 천국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2장은 성화의 삶의 구체적인 지시사항입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변화입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결단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교회의 변화인데, 이는 우리 자신의 변화로서 가능한데, 교회에 속한 각자가 자신에게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어진 은사를 잘 경영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로서 자신이 할 일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지 9-13절에서 열두 가지로 권면했습니다.
셋째는 사회의 변화인데,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교회의 모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서 수동적이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 확장하는 작업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장차 우리에게 임하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질 것이며, 그 나라에서 주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는 자랑스런 천국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 (로마서 12:9-13)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 (로마서 12:9-13)
1
폴란드에서 출생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루빈슈타인(Arthur Rubinstein, 1887-1982)은, “하루 연습을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을 쉬면 내 친구가 알고, 사흘 연습을 쉬면 온 청중이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에 비유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주 신앙생활을 쉬면 내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두 주 신앙생활을 쉬면 가까이 지내는 교우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세 주 신앙생활을 쉬면 온 교회 교우들이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안다.“
신앙생활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요 훈련이라고 바울은 디모데전서(4: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연습을 게을리했을 때 경기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낼 수 없듯이, 믿는 사람이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하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그 길을 달려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의 연습을 하고 훈련을 쌓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하루를 시작함에 기도로 시작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서 그치면 이는 연습과 훈련의 몸풀기에서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다음 교회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예를 들면 집사는 집사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성가대원은 성가대원으로서 연습과 본분을 잘 감당하고, 교사는 교사로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힘 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나의 도움이 필요한 교우가 있나 돌아봄이 필요합니다.
나아가서, 교회 밖에 내가 전도할 대상자가 있나 살펴야 할 것이며, 내가 선교를 직접 감당하지 못할 때 선교를 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님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생각하고 그들 돕는 일을 실천에 옮김이 필요합니다. 작은 교회에 속하였다고 내게 할 일이 없습니까? 오히려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말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에 비유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주 신앙생활을 쉬면 내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두 주 신앙생활을 쉬면 가까이 지내는 교우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세 주 신앙생활을 쉬면 온 교회 교우들이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안다.“
신앙생활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요 훈련이라고 바울은 디모데전서(4: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연습을 게을리했을 때 경기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낼 수 없듯이, 믿는 사람이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하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그 길을 달려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의 연습을 하고 훈련을 쌓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하루를 시작함에 기도로 시작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서 그치면 이는 연습과 훈련의 몸풀기에서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다음 교회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예를 들면 집사는 집사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성가대원은 성가대원으로서 연습과 본분을 잘 감당하고, 교사는 교사로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힘 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나의 도움이 필요한 교우가 있나 돌아봄이 필요합니다.
나아가서, 교회 밖에 내가 전도할 대상자가 있나 살펴야 할 것이며, 내가 선교를 직접 감당하지 못할 때 선교를 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님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생각하고 그들 돕는 일을 실천에 옮김이 필요합니다. 작은 교회에 속하였다고 내게 할 일이 없습니까? 오히려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2
지난 주 로마서 12장 3-8절에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교회의 변화에 참여하되 주님께서 은혜(恩惠)로서 우리의 믿음의 분량(分量)에 따라 허락(許諾)하신 은혜의 선물인 은사를 지혜롭게 잘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지나친 과욕을 내지말고 마땅히 생각할 것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인 이 은사를 잘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은사를 사용함은 우리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서 서로를 위하고 유익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이 은사에는 사람의 재능과 성격 등에 따라 주님께서 각기 다른 선물들을 주셨는데 이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 받은 은사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한 은사의 활용이라기 보다는, 우리 교인들이 교회와 가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 제시하여주고 있습니다.
이 은사에는 사람의 재능과 성격 등에 따라 주님께서 각기 다른 선물들을 주셨는데 이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 받은 은사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한 은사의 활용이라기 보다는, 우리 교인들이 교회와 가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 제시하여주고 있습니다.
9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우리의 삶에 대한 지침(指針)을 12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첫째로 한글성경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라고 되어있는데, 명령적인 의미로서 영어성경의 번역이 원래의 뜻에 가깝습니다: “Let love be genuine!"(RSV) “성도의 사랑이 거짓없는 순수한 사랑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반대급부(反對給付)를 바라는 사랑이어서도 안되고,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잘해주는 것이어서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22에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말씀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뜨겁게 사랑함이--체면때문도 아니요 무엇을 바래서도 아닌--거짓없는 사랑입니다.
둘째로 “악을 미워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은 악과 결별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하는 대로 죄와 악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내가 죄짓더라도, 허물이 많은 삶을 살더라도 주님께서 내 미래죄도 용서하여 주셨으니 상관없어” 하는 사람은 여전히 악을 미워하지 않는--악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은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로 “선(善)에 속하라”고 말씀합니다. 악(惡)이 어둠이요 사단의 권세(權勢)라고 한다면, 선(善)은 빛이요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영역이니까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속하여야 할 것이요, 추구하여야 할 일입니다.
10절: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네째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love one another with brotherly affection)"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어느 사람의 집에서 무리에게 말씀을 하고 계신중이었는데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여러분의 형제요 자매입니까? 우리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원하는 우리는 영적(靈的)인 새 가족입니다. 우리는 교우들을 사랑할 때 형제사랑(brotherly love)으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부족한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받은 대접만큼만 그 사람을 대합니다. 그가 나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으면 나도 그를 위해서 별로 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우들이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먼저 다른 지체인 교우를 사랑하고 존경할 때, 그와 같이 아름다운 일들이 교회내에서 계속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12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선지자요 율법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절을 황금율(Golden Rule)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그를 원수로 대하는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제물(代贖祭物)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할 때도 우리가 “존경하기를 먼저 할 때” 그러한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로 바뀔 것입니다.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 믿는 사람에게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믿지않는 사람이 칠일을 갖고 생활하는데 우리는 육일을 갖고 살면서 그들과 같은 혹은 더 나은 삶을 감당하여야 하므로 부지런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일을 말함이 아니요 교회 안에서의 일입니다. 교회의 일은 나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 아니니까 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로 “열심(熱心)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당부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忠誠)이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길 때 열심을 내기가 어려우나 이렇게 함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확증(確證)함입니다.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 소망이 없고 낙담과 좌절만 있다면 이는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소망 중에도 즐거워하므로” 믿음이 연약한 다른 교우들에게도 소망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아홉째로 “환난(患難) 중에도 참으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서 자주 반복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의 환난과 곤고가 임하지만 이를 끝까지 잘 감당할 때 우리에게는 주님의 상급이 마련되어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4에,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逼迫)과 환난(患難)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열번째로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당부합니다.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의 영적(靈的) 호흡(呼吸)입니다.
사람이 호흡을 중단하면 죽듯이 믿는 사람이 기도를 중단함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狀態)에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쉬지말고 항상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님, 기도할 것이 별로 없는데요.” 기도할 것이 왜 없겠습니까? 다만, 무엇을 기도할지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이지요.
13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형제를 거짓없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성도 가운데 누가 무슨 어려움이 있음을 압니다.
다만 우리가 교회에서 누가 무슨 어려움이 있는줄 모르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어려움에 대해서 별로 듣고싶어 하지않고 보고싶어 하지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어려움을 알기는 알지만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에 더딘 것은, 듣기는 듣고 보기는 보아도 수다꺼리의 대상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14에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너희 가운데 있는 소자(=작은 자)에게 잘 한 것이 곧 나에게 잘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소자가 누구입니까?
다름아닌, 우리중에 어려움을 당하고있는, 고통을 당하고있는 성도입니다. 이들을 돌보고 필요한 것을 공급(供給)함이 우리 믿는 사람이 마땅히 행할 바 입니다.
열두번째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전에 한국의 시골 인심은 나그네에게 음식도 대접하고 잠자리도 제공해주는 아름다운 풍속이었습니다.
누구나 이러한 인심이 좋은 줄 압니다만, 막상 낯선 사람을 대접할 엄두가 잘 안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해치지나 않을까? 무엇을 훔쳐가지나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혹은 나와 별로 상관없는 사람에게 왜 잘해주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그네 대접하기에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 그랬고, 그의 조카 롯이 그랬습니다. 특별히 롯은 천사들을 잘 대접함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운데 딸 둘과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구분에서 양의 반열에 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영접(迎接)하였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형제·자매 가운데 쉴 고이 없는 사람에게 잘 대접하는 것이, 혹은 낯선 사람이 우리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할 때에 그들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 주님을 잘 대접해준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말로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앵부새처럼 되뇌이기 보다는 실제로 고통당하고있는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잘 대해주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에게 성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근본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이 모든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세상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앞서 교회 안에서 성도에 대한 사랑을 먼저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를 사랑하고 돌보되 그들에게 대접을 받은 답례로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그 일들을 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이며 우리 교회가 속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세상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앞서 교회 안에서 성도에 대한 사랑을 먼저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를 사랑하고 돌보되 그들에게 대접을 받은 답례로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그 일들을 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이며 우리 교회가 속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과 은사(恩賜)” (로마서 12:3-8)
“믿음의 분량과 은사(恩賜)” (로마서 12:3-8)
1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다,” “우리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가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坐礁)되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섬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파선(破船)된 배에서 몇 가지 물건을 건져낼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약품상자였습니다. 크루소는 그 약품상자 속에 있는 약 가운데서 가장 좋은 약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구약’ 곧 성경이라는 약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합니다. 그는 시편 50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과 도우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50:15)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나?” 하는 측량(測量)의 기준은 내가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나의 연봉이 얼마나 올랐나? 얼마나 부자가 되었나? 얼마나 높은 지위를 얻었나? 세상을 살 때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잘된 횟수가 얼마나 많았나?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셨나? 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가름될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그것은 나의 입술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횟수가 얼마나 많아졌나로 판가름됩니다.
“아-멘”을 잘하는 신자를 보면 목사님이 실수로 틀린 말씀을 하는데도 습관적으로 “아멘”을 하여 웃음을 자아냅니다. 저는 이것이 처음에는 잘못된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더 생각해보니 그리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무엇이나 옳은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입술에 항상 “주님 감사합니다”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사람의 기준으로는 “감사합니다”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 감사합니다” 하시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씀하시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때, 감사할 수 없는 조건에도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우리의 고백과 증거대로 “감사할 조건들”을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가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坐礁)되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섬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파선(破船)된 배에서 몇 가지 물건을 건져낼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약품상자였습니다. 크루소는 그 약품상자 속에 있는 약 가운데서 가장 좋은 약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구약’ 곧 성경이라는 약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합니다. 그는 시편 50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과 도우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50:15)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나?” 하는 측량(測量)의 기준은 내가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나의 연봉이 얼마나 올랐나? 얼마나 부자가 되었나? 얼마나 높은 지위를 얻었나? 세상을 살 때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잘된 횟수가 얼마나 많았나?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셨나? 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가름될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그것은 나의 입술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횟수가 얼마나 많아졌나로 판가름됩니다.
“아-멘”을 잘하는 신자를 보면 목사님이 실수로 틀린 말씀을 하는데도 습관적으로 “아멘”을 하여 웃음을 자아냅니다. 저는 이것이 처음에는 잘못된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더 생각해보니 그리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무엇이나 옳은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입술에 항상 “주님 감사합니다”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사람의 기준으로는 “감사합니다”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 감사합니다” 하시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씀하시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때, 감사할 수 없는 조건에도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우리의 고백과 증거대로 “감사할 조건들”을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2
지난 주에는 로마서 12장의 첫 부분으로서 우리 자신의 변화(transformation)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는 교회의 변화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오늘과 다음 주는 교회의 변화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여기 카리스(χάρις) ‘은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카리스(χάρις)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 가운데 카라(χαρά)가 있습니다.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할 때에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무덤을 방문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그에게 “평안하뇨?” 물으실 때, 이 평안하뇨란 인사말의 다른 뜻이 “기뻐하라(χαίρετε)” 였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에게 기쁨이 넘쳐나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욕심이 우리로 불만의 마음을 갖게 하며 불만의 마음이 우리로 일하지 않게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가 2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돈을 맡았는데도 다른 종들에게는 그보다 더 많은 달란트가 맡겨진 것에 불만을 품었을 떄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야고보는 1장 15절에서, “욕심(慾心)이 잉태(孕胎)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長成)한즉 사망(死亡)을 낳느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自足)하기를 배웠노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헤아려 아는 것도 나 자신의 모습으로 헤아려 알아야 합니다. 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하면 부족하고 흠이 많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의 모양으로도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 주님을 깨닫고자 할 때,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부족한 중에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4-5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여기 카리스(χάρις) ‘은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카리스(χάρις)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 가운데 카라(χαρά)가 있습니다.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할 때에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무덤을 방문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그에게 “평안하뇨?” 물으실 때, 이 평안하뇨란 인사말의 다른 뜻이 “기뻐하라(χαίρετε)” 였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에게 기쁨이 넘쳐나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욕심이 우리로 불만의 마음을 갖게 하며 불만의 마음이 우리로 일하지 않게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가 2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돈을 맡았는데도 다른 종들에게는 그보다 더 많은 달란트가 맡겨진 것에 불만을 품었을 떄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야고보는 1장 15절에서, “욕심(慾心)이 잉태(孕胎)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長成)한즉 사망(死亡)을 낳느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自足)하기를 배웠노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헤아려 아는 것도 나 자신의 모습으로 헤아려 알아야 합니다. 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하면 부족하고 흠이 많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의 모양으로도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 주님을 깨닫고자 할 때,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부족한 중에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4-5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 몸에 눈, 코, 귀, 입, 손, 발, 기타 여러 다른 기관들이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쓸데없이 그냥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몸인 교회의 지체는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사람 몸의 각 지체가 중요하듯이 교회를 구성하는 각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몸을 구성하고있는 지체인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교우를 비난하고 판단할 때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지체의 각 부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이신 교회에 속한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 몸의 지극히 미약한 부분--혹 평소에는 필요없는 것같이 보이는 지체의 일부분 맹장이 잘못되었다든지, 혹은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다든지 할 때에 우리는 그 부분을 치료하기에 전 신경을 다 씁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미약한 것 같이 보이는, 별로 필요없는 것같이 보이는 작은 자의 아픔과 고통에도 동참하여야 합니다. 그의 잘못됨을 뒤에서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하기 보다는 그 지체의 치료를 위해서 힘쓰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5-26절에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말씀합니다.
6-8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χάρις)대로 받은 은사(χάρισμα)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것이니라.
여기서 은사(恩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신 성령의 선물(膳物)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 고린도전서 12장 28절(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하는 것, 사랑), 에베소서 4장 11절(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에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능력에 따라, 소질에 따라, 혹은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른 은사들을 주셨는데,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6-8절에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성령의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은사들은 고린도전서 12장이나 다른 성경구절에 나오는 은사들에 비해서 비교적 생색이 덜 나고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라기 보다는 속에 숨겨진 은사들이 많습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믿음의 분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로서 예언(豫言)은 점쟁이가 점을 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선지자(先知者)를 예언자(豫言者)라고도 하며 선지서를 예언서라고도 하는데, 선지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점을 치거나 예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 어떻게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인가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혹은 장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던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사로이 사람의 운세를 점치면서 은사를 받았다고 함은 잘못입니다.
섬기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섬기는 일을 잘 감당함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라 하여 일을 감당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면 이 사람은 일을 하면서도 은사를 제대로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하고, 권위(勸慰)하는 자는 권위(勸慰)하는 일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권위(勸慰)한다고 함은 권면하고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또, 구제하는 자에게는 성실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다스리는 자는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부지런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긍휼(矜恤)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교회에 속한 각 사람이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함에 자기에게 허락되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잘 경영할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3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은 어떠한 은사들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저마다의 각기 다른 은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어떠한 은사들이 있나 한 번 찾아보시고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남들에게 있는 그럴듯한 은사가 없고 별로 생색나지 않는 은사가 있다고 하여 불만스런 마음으로 자신의 은사를 천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개발하시고 잘 경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겸손하고 감사하는 삶의 모습으로 인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몸이신 교회를 건강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저마다의 각기 다른 은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어떠한 은사들이 있나 한 번 찾아보시고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남들에게 있는 그럴듯한 은사가 없고 별로 생색나지 않는 은사가 있다고 하여 불만스런 마음으로 자신의 은사를 천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개발하시고 잘 경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겸손하고 감사하는 삶의 모습으로 인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몸이신 교회를 건강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산 제사” (로마서 12:1-2)
“거룩한 산 제사” (로마서 12:1-2)
1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복권의 윤리성문제를 떠나서, “만일 5백만불 짜리 복권이 당첨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질문하면 아마 80-90%는 “그중 백만불은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사용하고, 또 얼마는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돕고.....” 하며 지키지 못할 사항들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을 매우 사랑한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는 친구와 이야기하는 중에 “나는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바칠 수 있다. 주님을 위해서는 어떤 충성도 다 할 것이다” 라고 장담하였습니다. 친구는 그에게 묻습니다: “그럼 자네에게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두 필은 하나님께 바치겠는가?” “아무렴 십일조를 못 바치겠는가?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당연히 두 필은 주님께 바쳐야지. 그런데, 나에게는 말이 없다네.” “그럼, 소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아니, 십일조를 안 바칠 수 있겠는가? 두 마리라도 바치지. 그런데 나에게는 소가 한 마리도 없지 않은가?” 그럼, 돼지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이때 그 사람은 버럭 역정을 내며 “나에게 돼지 열 마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하며 벌떡 일어나 가더랍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지 않고는 주님을 믿을 수 없었던 환난과 역경가운데서도 좋은 믿음을 지녔던 초대교회의 성도들만큼만 신앙생활하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못될 사람이 없습니다.
로마에 살던 성도들은 많은 숫자가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catacomb)에 몰려 살았습니다. 로마정부의 눈을 피해서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지하묘지에 숨어들어서 그곳에서 단체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찬송하고 주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로운 찬송의 노래도 아직 없었고 성경의 말씀도 아직 없었지만 예수님의 인간구원과 부활을 찬송하고 이를 증거함이 그들의 예배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귀하고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로마의 좋은 가정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를 찬송하고 증거함이 귀한 삶인 까닭에 그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카타콤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카타콤에서 발견된 벽화들을 봅니다. 최후의 만찬의 벽화가 있고 또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그린 벽화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사모하며 오늘의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소아시아 터어키의 갑바도기아라고 하는 곳에는 평지에 작은 언덕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각 언덕들에 굴이 파져 있습니다. 멀리 서 보면 언덕들이요 가까이 가보면 동굴들입니다. 어떤 동굴은 8층짜리도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 주님께로 향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를 원하던 사람들이 몰려 살았습니다. 한 굴에 보통 2만 명씩 해서, 많은 때에는 이 갑바도기아의 언덕 동굴들에 200만 명까지 몰려 산 적이 있다고 합니다. 조금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정부의 박해의 눈을 피해 살아가던 것을 짐작케 합니다. 그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생활을 유지해가기 위하여 평지에 씨를 뿌리고 가꿉니다. 그러다가 로마정부에서 이곳에 그리스도인들이 집단생활을 한다는 정보를 제공받고 군대를 보내면 밭을 가꾸던 사람들은 재빨리 양떼 속으로 몸을 굽히고 숨어듭니다. 그리하면, 멀리서 보기에 감쪽같이 사람은 없고 양떼로만 보이게되어 그냥 돌아간 예가 많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을 매우 사랑한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는 친구와 이야기하는 중에 “나는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바칠 수 있다. 주님을 위해서는 어떤 충성도 다 할 것이다” 라고 장담하였습니다. 친구는 그에게 묻습니다: “그럼 자네에게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두 필은 하나님께 바치겠는가?” “아무렴 십일조를 못 바치겠는가?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당연히 두 필은 주님께 바쳐야지. 그런데, 나에게는 말이 없다네.” “그럼, 소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아니, 십일조를 안 바칠 수 있겠는가? 두 마리라도 바치지. 그런데 나에게는 소가 한 마리도 없지 않은가?” 그럼, 돼지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이때 그 사람은 버럭 역정을 내며 “나에게 돼지 열 마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하며 벌떡 일어나 가더랍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지 않고는 주님을 믿을 수 없었던 환난과 역경가운데서도 좋은 믿음을 지녔던 초대교회의 성도들만큼만 신앙생활하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못될 사람이 없습니다.
로마에 살던 성도들은 많은 숫자가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catacomb)에 몰려 살았습니다. 로마정부의 눈을 피해서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지하묘지에 숨어들어서 그곳에서 단체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찬송하고 주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로운 찬송의 노래도 아직 없었고 성경의 말씀도 아직 없었지만 예수님의 인간구원과 부활을 찬송하고 이를 증거함이 그들의 예배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귀하고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로마의 좋은 가정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를 찬송하고 증거함이 귀한 삶인 까닭에 그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카타콤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카타콤에서 발견된 벽화들을 봅니다. 최후의 만찬의 벽화가 있고 또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그린 벽화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사모하며 오늘의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소아시아 터어키의 갑바도기아라고 하는 곳에는 평지에 작은 언덕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각 언덕들에 굴이 파져 있습니다. 멀리 서 보면 언덕들이요 가까이 가보면 동굴들입니다. 어떤 동굴은 8층짜리도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 주님께로 향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를 원하던 사람들이 몰려 살았습니다. 한 굴에 보통 2만 명씩 해서, 많은 때에는 이 갑바도기아의 언덕 동굴들에 200만 명까지 몰려 산 적이 있다고 합니다. 조금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정부의 박해의 눈을 피해 살아가던 것을 짐작케 합니다. 그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생활을 유지해가기 위하여 평지에 씨를 뿌리고 가꿉니다. 그러다가 로마정부에서 이곳에 그리스도인들이 집단생활을 한다는 정보를 제공받고 군대를 보내면 밭을 가꾸던 사람들은 재빨리 양떼 속으로 몸을 굽히고 숨어듭니다. 그리하면, 멀리서 보기에 감쪽같이 사람은 없고 양떼로만 보이게되어 그냥 돌아간 예가 많다고 합니다.
2
로마서 12장으로 시작하여 바울은 믿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2장에서 바울은 우리의 삶을 통한 제사를 셋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변화(transformation)입니다(1-2절). 둘째는, 우리의 변화로 인한 우리가 지체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변화입니다(3-13절).
셋째는, 교회의 변화로 인한 사회의 변화입니다(9-21절).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신 공자님의 가르침과도 일치가 됩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없이 교회가 변화되지 않고, 교회의 변화없이 사회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12장에서 바울은 우리의 삶을 통한 제사를 셋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변화(transformation)입니다(1-2절). 둘째는, 우리의 변화로 인한 우리가 지체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변화입니다(3-13절).
셋째는, 교회의 변화로 인한 사회의 변화입니다(9-21절).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신 공자님의 가르침과도 일치가 됩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없이 교회가 변화되지 않고, 교회의 변화없이 사회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1절은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가 받는 앞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8장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9-11장은 특별히 이스라엘에 대한 장들이므로 괄호안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교리의 마지막 부분인 8장 31-39절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被造物)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히 큰 것을 알 때 우리의 결단이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여전히 자기만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지고(至高)함을 깨달아 안 사람입니까?
‘그러므로’는 또한 9-11장의 전체를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비밀의 경륜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여전히 세상 가운데 세상과 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12장의 첫부분을 시작하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하고있습니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함은 나 바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부하는 것입니다’는 뜻입니다.
"너희 몸"에서 몸(σώμα)은 우리의 바깥사람인 육체가 아닙니다. 이 몸은 우리의 자아와 인격--곧 전인체(全人體)를 의미합니다. 곧, 우리의 삶(life)입니다.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산 제사“(living sacrifice)라고 함은 우리의 전인격체로서 드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구분되고 귀한 마음의 중심을 드리는 제사를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첫 소산과 온전한 짐승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구분되지 않고 불완전한 짐승으로 제사드렸을 때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중심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오직 외형의 제사만 드렸을 때, 하나님은 호세아 6장 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때를 따라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사를 계속드려야 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때를 따라 제사의 종류별로 제물을 준비하여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희생제물로 드린 바 되어서 우리의 과거죄뿐아니라 현재죄와 미래죄까지 다 사하여 주신 까닭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회개하는 마음과 입술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죽은 짐승으로 드렸던 것이라면, 신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고자 하여, 우리 자신의 살아있는 몸으로, 마음으로, 인격과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첫째 계명, 곧,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마음을 당하여, 혼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靈性)은 세상에서 떨어진 수도원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데 있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평상의 세상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모습이 영적예배입니다.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被造物)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히 큰 것을 알 때 우리의 결단이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여전히 자기만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지고(至高)함을 깨달아 안 사람입니까?
‘그러므로’는 또한 9-11장의 전체를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비밀의 경륜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여전히 세상 가운데 세상과 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12장의 첫부분을 시작하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하고있습니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함은 나 바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부하는 것입니다’는 뜻입니다.
"너희 몸"에서 몸(σώμα)은 우리의 바깥사람인 육체가 아닙니다. 이 몸은 우리의 자아와 인격--곧 전인체(全人體)를 의미합니다. 곧, 우리의 삶(life)입니다.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산 제사“(living sacrifice)라고 함은 우리의 전인격체로서 드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구분되고 귀한 마음의 중심을 드리는 제사를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첫 소산과 온전한 짐승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구분되지 않고 불완전한 짐승으로 제사드렸을 때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중심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오직 외형의 제사만 드렸을 때, 하나님은 호세아 6장 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때를 따라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사를 계속드려야 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때를 따라 제사의 종류별로 제물을 준비하여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희생제물로 드린 바 되어서 우리의 과거죄뿐아니라 현재죄와 미래죄까지 다 사하여 주신 까닭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회개하는 마음과 입술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죽은 짐승으로 드렸던 것이라면, 신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고자 하여, 우리 자신의 살아있는 몸으로, 마음으로, 인격과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첫째 계명, 곧,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마음을 당하여, 혼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靈性)은 세상에서 떨어진 수도원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데 있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평상의 세상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모습이 영적예배입니다.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절은 1절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산 제사의 삶--영적 예배의 삶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1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2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3변화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나의 사는 모습이 세상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내가 속한 교회는 변하지 않고 세상의 다른 모임과 다를 바 없고, 내가 속한 교회가 다른 모임과 다를 바 없다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강물을 따라 헤엄쳐 내려가는 다수의 물고기들과 구별되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흐르는 강물을 헤치고 올라가는 소수의 물고기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확실한 일에 관심을 갖고 살며 불확실한 하늘나라의 일에는 등한시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확실하게 되어지는 일은 좀 모르고 어리석어도 하늘나라의 일은 믿음의 눈으로 확실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며, 둘째, 마음을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하여야 할 것이며, 셋째, 해서 변화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4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생활을 통하여 자기의 주장(主張)과 의(義)와 만족(滿足)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해서,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인정해줄 때는 신이 나서 교회생활을 하고 믿음이 좋은 것 처럼 보이다가도, 그렇지 않을 때는 믿음이 뚝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한 경배(敬拜)와 찬양(讚揚)의 제사는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의 사는 모습이 세상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내가 속한 교회는 변하지 않고 세상의 다른 모임과 다를 바 없고, 내가 속한 교회가 다른 모임과 다를 바 없다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강물을 따라 헤엄쳐 내려가는 다수의 물고기들과 구별되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흐르는 강물을 헤치고 올라가는 소수의 물고기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확실한 일에 관심을 갖고 살며 불확실한 하늘나라의 일에는 등한시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확실하게 되어지는 일은 좀 모르고 어리석어도 하늘나라의 일은 믿음의 눈으로 확실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며, 둘째, 마음을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하여야 할 것이며, 셋째, 해서 변화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4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생활을 통하여 자기의 주장(主張)과 의(義)와 만족(滿足)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해서,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인정해줄 때는 신이 나서 교회생활을 하고 믿음이 좋은 것 처럼 보이다가도, 그렇지 않을 때는 믿음이 뚝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한 경배(敬拜)와 찬양(讚揚)의 제사는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3
우리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지켜가기 위한 노력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야기꺼리가 됩니다.
미국의 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James Garfield)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얼마 안 있어 그의 비서실장이 그에게 말합니다: “각하, 이번 일요일 오전 10시에 첫 번째 각료회의가 있습니다. 의제는 국가 비상사태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다른 개인적인 스케쥴을 마련하지 마십시오.”
가필드대통령은 점잖게 대답합니다: “비서실장,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날에 어떤 분과 만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어떤 새로운 약속을 할 수 없습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에게 반문합니다: “아니 각하, 국가 비상사태를 의논하기 위한 각료회의보다 더 중대한 약속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 약속을 다른 날로 돌리시면 되지 않습니까?”
대통령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매 주일 오전 10시 30분에 하나님을 만나뵈러 가는데, 하나님과 한 이 약속을 지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내게는 없습니다.”
결국 국가 비상사태를 의논하기 위한 각료회의는 다른 날로 옮겨졌고, 가필드 재임시에는 주일 날 다른 모임 스케쥴을 잡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매우 귀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영적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시작은 작은 일을 지킴에서 비롯됩니다. 주일예배 참석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한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우리는 더 크고 어려운 약속은 아주 쉽게 쉽게 어길 수 있고, 어기면서도 양심의 가책(呵責)을 느끼지 않습니다.
미국의 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James Garfield)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얼마 안 있어 그의 비서실장이 그에게 말합니다: “각하, 이번 일요일 오전 10시에 첫 번째 각료회의가 있습니다. 의제는 국가 비상사태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다른 개인적인 스케쥴을 마련하지 마십시오.”
가필드대통령은 점잖게 대답합니다: “비서실장,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날에 어떤 분과 만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어떤 새로운 약속을 할 수 없습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에게 반문합니다: “아니 각하, 국가 비상사태를 의논하기 위한 각료회의보다 더 중대한 약속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 약속을 다른 날로 돌리시면 되지 않습니까?”
대통령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매 주일 오전 10시 30분에 하나님을 만나뵈러 가는데, 하나님과 한 이 약속을 지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내게는 없습니다.”
결국 국가 비상사태를 의논하기 위한 각료회의는 다른 날로 옮겨졌고, 가필드 재임시에는 주일 날 다른 모임 스케쥴을 잡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매우 귀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영적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시작은 작은 일을 지킴에서 비롯됩니다. 주일예배 참석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한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우리는 더 크고 어려운 약속은 아주 쉽게 쉽게 어길 수 있고, 어기면서도 양심의 가책(呵責)을 느끼지 않습니다.
휴가를 맞이하여 여행하거나 또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도, 타지에서 교회를 찾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거룩한 산 제사, 영적예배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출발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삶의 과정에서 믿음의 성도로서 미담(美談)들을 만들어가시기 바랍니다.
Sunday, December 29, 2013
“온 이스라엘의 구원(救援)” (로마서 11:25-36)
“온 이스라엘의 구원(救援)” (로마서 11:25-36)
1
유대인들과 한국인들간에는 비슷한 점들이 많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외세의 영향과 지배를 많이 당하면서 살아온 것,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이 강하고, 족보를 중요시 여기고, 자녀들의 교육에 정열을 많이 쏫는 것, 미국 땅에서의 삶에서 그들의 직업변천과정-가게 종업원에서 출발하여, 가게 주인이 되고, 자녀들을 의사나 변호사를 시키는 것 등-종교에 열심을 내는 것도 비슷한데, 유대인들이 옛언약인 유대교에 머물러있는 반면, 한국인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새언약에서 두드러짐을 보면 현재시점에서는 한국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축복받은 백성이라 할 것입니다.
어떤 학문이나 분야에서건 콧대높은 미국인이 한국에 관한 것을 연구하는 경우가 없는데, 신학교에 가면 신학교에서는 한국 신학과 한국교회 성장의 연구에 관한 과목이 있고, 관심있는 미국신학생들이 과목을 택하고 공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민족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임을 깨닫게 되고, 이들의 이제까지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이란 분이 과연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유프라데스강 하류--지금의 지도로는 이란에 해당하는 곳이겠죠--의 갈대아·우르땅에 아브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있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십니다: “아브람아, 아브람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고, 땅과 민족을 주리라.”
아브람은 유프라데스강을 건너 북서쪽으로 진행하여 하란에 이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강을 건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르(רבע)에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하(ה)를 덧붙여서 된 단어인데 해서, “강을 건넌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강을 건너옴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약속을 지키심에 조금도 오차가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인도하시어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시고 아브라함은 여행자로서 그 땅에 머물고 있지만 약속하신 대로 그 후손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는 하나님의 시간과 날을 짐작할 수 없어 초조한 적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조금도 착오없이 약속하신 바를 지켜가십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시고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해주시겠다던 약속의 기초를 다지십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으로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씨름하다” 혹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란 축복의 이름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대로 약속의 땅--가나안을 얻기까지 430년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게 하시는데 먼저 요셉을 그곳 땅에 끌려가게 하시고 가나안땅에 가뭄이 들매 야곱의 자손 70인을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십니다.
약속하신 430년의 기한이 차매 모세로 장정 60만을 포함하여 250만 혹은 300만의 이스라엘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대로 그들의 믿음을 보시며 그들을 축복하시는 생활을 하시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이방 우상에게로 기울어진 마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기를 원하셨던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솔로몬이 젊어서는 지혜와 명철의 왕이었지만, 아무리 지혜자요 하나님께 신앙이 있던 사람도 세상과 짝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왕이기도 합니다. 천명이나 되는 이방의 처첩들로 인하여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고, 치명적으로 북방왕국 이스라엘과 남방왕국 유다로 갈리는 계기(契機)가 됩니다.
갈린 다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유다왕국과 이스라엘왕국에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말씀하시지만 듣는 귀가 둔한 왕과 방백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징계를 당합니다.
북방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피섞임을 당하여 혼혈민족이 되어 결국은 사마리아인이라 불리며 예수님 때에는 혈통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의 조롱(嘲弄)꺼리가 됩니다.
남방왕국 유다왕국의 왕과 방백과 백성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안듣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의 외침에 귀기울이지 않은 결과 이스라엘이 망한지 140년 뒤인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70년의 포로생활을 감수하여야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처음 돌아왔을 때에는 예루살렘 성벽도 재건하고 성전도 개축하여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의지를 보였지만, 결국은 또 다시 옛모습의 삶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은 그들을 헬라인, 시리아인과 로마인의 손에 부치십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께서 “길과 진리와 부활과 생명되심”을 말씀하셨지만 복음의 말씀을 듣기 보다는 그를 로마인의 손에 내어주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또한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되고 흩어짐을 당합니다. 로마정부에 대항하여 두 차례에 거쳐 죽을 힘을 당하여 투쟁해보지만 역부족입니다.
132-135년 2차 투쟁을 벌였던 바-코흐바(Bar Kokhba) 혁명에서 패하고는, 유대인은 법으로 예루살렘 근처에도 얼씬할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렀다가는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의 방황이 2,000년 가까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2차 대전이후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다시 건설됩니다. 이것이 경이(驚異)가 아닐 수 있습니까? 세계 역사상 어느 나라와 민족이 그렇게 오랜동안 흩어짐을 당한 다음에 다시 나라로서 존재한 적이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족속을 일시적으로는 징계하시고 버리신 것같이 보이지만,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사도 바울의 믿음의 말씀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어떤 학문이나 분야에서건 콧대높은 미국인이 한국에 관한 것을 연구하는 경우가 없는데, 신학교에 가면 신학교에서는 한국 신학과 한국교회 성장의 연구에 관한 과목이 있고, 관심있는 미국신학생들이 과목을 택하고 공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민족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임을 깨닫게 되고, 이들의 이제까지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이란 분이 과연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유프라데스강 하류--지금의 지도로는 이란에 해당하는 곳이겠죠--의 갈대아·우르땅에 아브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있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십니다: “아브람아, 아브람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고, 땅과 민족을 주리라.”
아브람은 유프라데스강을 건너 북서쪽으로 진행하여 하란에 이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강을 건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르(רבע)에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하(ה)를 덧붙여서 된 단어인데 해서, “강을 건넌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강을 건너옴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약속을 지키심에 조금도 오차가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인도하시어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시고 아브라함은 여행자로서 그 땅에 머물고 있지만 약속하신 대로 그 후손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는 하나님의 시간과 날을 짐작할 수 없어 초조한 적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조금도 착오없이 약속하신 바를 지켜가십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시고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해주시겠다던 약속의 기초를 다지십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으로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씨름하다” 혹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란 축복의 이름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대로 약속의 땅--가나안을 얻기까지 430년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게 하시는데 먼저 요셉을 그곳 땅에 끌려가게 하시고 가나안땅에 가뭄이 들매 야곱의 자손 70인을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십니다.
약속하신 430년의 기한이 차매 모세로 장정 60만을 포함하여 250만 혹은 300만의 이스라엘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대로 그들의 믿음을 보시며 그들을 축복하시는 생활을 하시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이방 우상에게로 기울어진 마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기를 원하셨던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솔로몬이 젊어서는 지혜와 명철의 왕이었지만, 아무리 지혜자요 하나님께 신앙이 있던 사람도 세상과 짝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왕이기도 합니다. 천명이나 되는 이방의 처첩들로 인하여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고, 치명적으로 북방왕국 이스라엘과 남방왕국 유다로 갈리는 계기(契機)가 됩니다.
갈린 다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유다왕국과 이스라엘왕국에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말씀하시지만 듣는 귀가 둔한 왕과 방백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징계를 당합니다.
북방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피섞임을 당하여 혼혈민족이 되어 결국은 사마리아인이라 불리며 예수님 때에는 혈통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의 조롱(嘲弄)꺼리가 됩니다.
남방왕국 유다왕국의 왕과 방백과 백성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안듣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의 외침에 귀기울이지 않은 결과 이스라엘이 망한지 140년 뒤인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70년의 포로생활을 감수하여야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처음 돌아왔을 때에는 예루살렘 성벽도 재건하고 성전도 개축하여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의지를 보였지만, 결국은 또 다시 옛모습의 삶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은 그들을 헬라인, 시리아인과 로마인의 손에 부치십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께서 “길과 진리와 부활과 생명되심”을 말씀하셨지만 복음의 말씀을 듣기 보다는 그를 로마인의 손에 내어주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또한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되고 흩어짐을 당합니다. 로마정부에 대항하여 두 차례에 거쳐 죽을 힘을 당하여 투쟁해보지만 역부족입니다.
132-135년 2차 투쟁을 벌였던 바-코흐바(Bar Kokhba) 혁명에서 패하고는, 유대인은 법으로 예루살렘 근처에도 얼씬할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렀다가는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의 방황이 2,000년 가까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2차 대전이후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다시 건설됩니다. 이것이 경이(驚異)가 아닐 수 있습니까? 세계 역사상 어느 나라와 민족이 그렇게 오랜동안 흩어짐을 당한 다음에 다시 나라로서 존재한 적이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족속을 일시적으로는 징계하시고 버리신 것같이 보이지만,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사도 바울의 믿음의 말씀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2
11장을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부분인 1-12절에서는 남은 자의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13-24절은 이스라엘과 이방인 역사의 과거와 현재입니다. 이스라엘중 얼마가 현재에는 원 참감람나무에서 꺾이움을 당하고 부러진 상태로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고 종국에는 다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옴으로 구원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소망을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25-36절은 1-12절과 대조적으로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13-24절이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미래입니다.
25절: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첫번째 부분인 1-12절에서는 남은 자의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13-24절은 이스라엘과 이방인 역사의 과거와 현재입니다. 이스라엘중 얼마가 현재에는 원 참감람나무에서 꺾이움을 당하고 부러진 상태로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고 종국에는 다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옴으로 구원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소망을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25-36절은 1-12절과 대조적으로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13-24절이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미래입니다.
25절: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여기서 비밀(秘密)이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은밀(隱密)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을 향한 경륜(經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구원의 오묘한 섭리를 말함입니다.
에베소서 1:9-10에서 바울은 “그 뜻의 비밀(秘密)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사람들의 비밀은 보통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비밀은 알리지 아니하셔서 비밀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고자 아니하여서 비밀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비밀을 모든 이방종족에게까지 알리기를 원하십니다.
해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그리스도의 피로서 담력을 얻어 하나님 앞에 나오고, 이로서 이스라엘도 시기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26-27절: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11장 첫부분에서 “남은 자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할 때, 남은 자란 뉴앙스가 적다는 느낌을 주지만 숫적으로 소수라기 보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을 가리킨다 말씀드렸습니다.
대조적으로, 온 이스라엘은 많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뜻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하나님의 예정의 경륜에 따라 믿음을 지킨 이스라엘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될 것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28절: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복음으로 하면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인하여 원수된 자”라 함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스라엘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방인 가운데는 받아들여지므로 이스라엘 중 얼마는 꺾이움을 당하고 하나님의 일시적 버림의 대상이 된 반면, 원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택하심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뿌리--아브라함과 야곱과 다윗을 조상으로 둔 까닭에 여전히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29-32절: 하나님의 은사(恩賜)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하므로 이제 긍휼을 입었느니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29-32절: 하나님의 은사(恩賜)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하므로 이제 긍휼을 입었느니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사람들의 하는 일에는 홧김에 혹은 다른 일시적 감정으로 저지르는 일이 많습니다.
해서, 일을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라 식언(食言)치 아니하시고 후회함이 없으십니다.
바울이 후회하심이 없는 하나님을 말씀함은 “원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을 내 백성이라 부르신 뜻”이 사람의 경우와 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고 불순종한 것이 화가 나서 그들을 버리시고 이방인을 그의 백성 삼으신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깊은 경륜 가운데는 때가 이를 때에 이방인에게도 아들의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고, 그들도 구원할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의 복음이 전해진 것이 이스라엘의 순종치 않음으로 된 것이지만, 이는 그 경륜의 때가 이름을 말씀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일시적 감정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마련되었던 구원을 이방인에게 돌리신 것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33-34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判斷)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謀士)가 되었느뇨?
하나의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백의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을 헤아려 알고자 하고, 그를 나름대로 평가하고자 하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그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을 판단하여 평가할 수 없으며 그의 마음과 생각을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또, 그가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자기의 능력의 한정된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비밀의 경륜과 그 섭리를 다 알 수 있으면 오죽 좋겠습니까만, 우리의 부족함으로 불완전함으로, 죄와 허물의 속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헤아려 알 수 없으며, 그분의 계획을 다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5:8-9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말씀합니다.
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감사함으로 순종함으로 나아감이 필요합니다.
35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우리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비밀의 경륜과 그 섭리를 다 알 수 있으면 오죽 좋겠습니까만, 우리의 부족함으로 불완전함으로, 죄와 허물의 속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헤아려 알 수 없으며, 그분의 계획을 다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5:8-9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말씀합니다.
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감사함으로 순종함으로 나아감이 필요합니다.
35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것을 먼저 드리는 의를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갚으심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값없는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바 인간이었지만 첫 사람 아담과 이브의 예를 따라 타락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났던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때가 찬 비밀의 경륜이 때를 따라 이루어져 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만주의 주되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구원의 그 어느 한 가지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 “아멘”으로 그 분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지구상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삼분지 이가 아직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땅끝까지 복음이 들려지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즉,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 완악하였던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소망하는 예수니의 재림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그때까지,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선한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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