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만 보는 사람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고후 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고후 10:7)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흔히 그의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여기서 외모라고 함은 그 사람의 생김새뿐 아니라 그의 외적 조건--인물, 학벌, 집안, 배경, 연령, 성별, 인종 등--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외모가 괜찮으면 그의 속과는 상관없이 후한 점수를 주고, 외모가 미달되면 박한 점수를 줍니다. 여기에서 편견이 생기고 따라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중국 제나라에 안자(晏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키가 매우 작고 인물도 매우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자의 슬기로움과 당당함을 잘 알고 있던 제나라 왕은 그에게 초나라의 사신으로 갈 것을 당부합니다. 이에 안자는 초나라로 떠납니다. 안자가 초나라의 왕궁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지키고 있던 군졸들과 왕실 관리들은 그의 볼품없는 모습을 보고 조롱을 해댑니다. “제나라에 인물이 오죽이나 없으면 저렇게 작고 못난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단 말이냐?” 군졸들은 이에 지나쳐서 제나라의 사신인 안자에게 대궐 정문이 아닌 작은 쪽문으로 인도하고는 이곳을 통해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안자는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말합니다. “이 나라는 개나라인가? 아니면 초나라인가? 나는 초나라에 왔지 개나라에 오진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에 여기가 개나라라면 나는 할 수 없이 이 개구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나 나는 초나라에 왔다.” 그의 당당함에 당황한 군졸들과 관리들은 황급히 그를 정문으로 정중하게 안내합니다. 안자는 굿굿하게 대궐 정문을 통하여 들어가 초나라 왕을 만나고 일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안자춘추(晏子春秋)》
공자(孔子)는 그 당시 안자(晏子)보다 삼십 세 가량 나이가 위였으나 그를 높이 평하면서 후생가외(後生可畏)--후생(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젊은이)을 두려워할 만 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논어(論語)》「자한(子罕)편」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그의 군사(軍師)로 얻은 인물이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제갈량 공명이요 다른 한 사람은 방통이라고도 하는 봉추입니다. 이들을 얻기 전에 유비가 만났던 수경선생은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얻어도 가히 천하를 평안케 할 수 있으리라’고 두 사람의 출중한 인물됨을 평하였습니다. 유비는 그 뛰어난 인물 두 사람을 모두 얻었습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면서까지 얻은 재갈공명은 과연 그 외모부터 준수하고 수려하여 그의 수고가 보람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후에 대면(對面)한 방통의 외모는 일찍이 들은 명성과는 걸맞지 않게 매우 못생기고 꾀죄죄하게 보여서 첫눈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는 수경선생의 인물평을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방통을 홀대하여 뇌양현이라고 하는 작은 고을의 현령으로 삼습니다. 그것도 크게 호의를 베푼 것처럼 그렇게 임명합니다. 그러나 당시 부재중이던 재갈량의 강력한 추천으로 그를 부군사(副軍師)로 불러들입니다. 유비의 방통에 대한 편견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고 그의 제안은 어쩐지 재갈량의 제안보다 못한 것 같고 미덥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에 봉추는 이러한 편견 속에 자기의 역량을 십분발휘하지 못하다가 그의 운명을 낙봉파라고 하는 한 고개에서 마감합니다. 그의 명이 거기에서 다할 것임을 그가 알았지만 오기(傲氣)로 낙봉파를 넘다가 죽는 신세가 됩니다.
유비가 덕이 많은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방통을 외모로 평가한 그의 오류가 재갈량과 방통을 양손에 얻고도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는 결과에 한 요인이 됩니다. 방통의 실수는 자기를 인정하고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호기를 부렸기에 종국에 그의 능력의 결실을 제대로 얻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불순종하는 사울에게서 떠났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불러서 사울을 이을 이스라엘의 한 왕을 예비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으로 보내십니다(삼상 16:1-13).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이르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신 대로 그곳 장로들과 함께 암송아지를 잡고 제사를 베풀고 그 자리에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청합니다. 그가 이새의 첫 번째 아들 아비나답을 보니 그 용모가 수려하여 속으로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기름 부으라고 하시는구나’고 짐작합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 이새의 아들이 일곱 명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이스라엘 왕을 택하지 않으시고, 양을 지키느라고 그 자리에 없었던 여덟째 아들 다윗을 불러오게 하시고 아직 소년이던 그에게 기름부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십니다.
영화나 그림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얼굴은 빼어난 용모를 갖고 계시나 그 또한 외모를 중시여기는 우리 인간들의 편견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고난 당하실 예수님을 예표하는 이사야서 53장의 서술은 우리들의 예감에 반합니다. 2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3-5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외모가 변변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외경 바울행전(Acts of Paul, 3)에 의하면 그는 키가 작고, 대머리이며, 두 눈썹은 일자이고, 코는 갈고리 모양으로 휘었고, 두 다리는 안장다리입니다. 게다가 눈에서는 눈물이 나고 눈꼽이 자주 낍니다. 말은 많이 하는 편이지만(행전 17:18 참조) 그렇게 설득력이 강하다거나 힘이 있지는 못한 듯 합니다(고후 11:8 참조). 바울을 뒤이어 웅변가였던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를 얼마동안 사역하였던 터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 대조는 더욱 뚜렸합니다. 바울의 당시 나이가 예순을 전후한 때이라 육체적으로도 쇠약합니다. 그의 외적 조건은 반대자들이 선동하는 대로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도삼으신 것은 외모를 보신 까닭이 아니라 그의 중심에 주님을 향한 열정과 순종함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사도의 권위는 반대자들의 부추김대로 외적인 모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도로 세우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되어진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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