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연약할 때에" (로마서 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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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H. Kang이라고 하는 중국인 목사님과 Ethel R. Nelson이라고 하는 방콕 선교사 출신의 미국인이 지은 책
『The Discovery of Genesis』(1979)라고 하는 책에 의하면 한자어의 형성이 창세기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로마서와 관련하여 의롭다고 하는 의(義)자를 보면 양(羊) 밑에 나를 뜻하는 아(我)가 있습니다. 곧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밑에 나를 놓을 때 의로와질 수 있다는 해설이 가능한데 4,500년 전 사람이 이것을 생각했을 리는 없고, 이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我)자가 손(手)과 창(戈)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손에 든 창으로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 드림으로 의로와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해당하는 노아의 홍수이전(antedilluvian) 기록으로는 아벨의 제사가 있습니다.
창세기 4장 4절에 보면 아벨은 양(羊)의 첫 새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농산물(農産物)을 제물로 드린 가인이나 양의 새끼를 드린 아벨이나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까닭은 그들의 부모 아담과 이브의 범죄(犯罪)함으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그들의 죄와 허물의 씻음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고 가인의 제사를 열납치 않은 이유에 대해 우리가 흔히 아는 바로는 아벨은 첫 수확물인 양을 정성껏 드렸기 때문이고, 가인은 첫 수확물을 드리긴 드렸지만 구분함이 없이 아무렇게나 드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성경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기뻐하시지 않은 까닭을 달리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후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것같이 이들에게도 죄와 허물이 사함받기 위해서 양(혹은 다른 짐승)으로 제물을 삼아 드리라고 명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명령을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물리치신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제사의 모형을 따라서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인간을 위해 제사를 드리심으로 우리 인간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아벨의 제사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을 좇은 이스라엘의 양을 제물로 삼는 제사가 어린 양 제사의 모형이요 예표가 된 것같이 한자 의(義)는 원래 손에 창을 들고 양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의로와짐을 뜻하지만, 이 글자 안에 예표적으로 우리 각 사람이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 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꿇어 엎드릴 때 의로와지게됨에 예표요 모형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없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나이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한 산에 올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사건일 것입니다.
물 론 하나님의 의도는 간단합니다. 아브라함이 과연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그가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애지중지하는 이삭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번제물로 바칠 수 있을지 보시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시험거리가 되게 합니다.
어떤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믿음을 갖고자 하던 사람은 이 사건을 놓고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성경 속에 나오는 이 이야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을 믿지 않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건은 커다란 도전을 줍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내게 나타나셔서 나의 자녀를, 나의 전 재산을, 나의 전 사업체를, 나의 지위를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하라고 말씀하실 때 나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나?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그렇게 할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신 또 다른 의도는 무엇인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그저 하나님을 얼마나 보시기 위하여서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는 사건은 장차 하나님께서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더 큰 사건의 모형(Type)입니다.
무엇입니까?
아 브라함은 경건하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 한 분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기 위하여 독자 이삭을 모리아의 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연약하고, 죄인이고, 원수이던 모든 인생들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리아의 한 산 곧 예루살렘의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번제로 드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사건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한 예표(豫表)라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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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복음송이 있지만,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은 죽으시기 위한 것입니다.죽으시되 자신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신 인생들을 위한 죽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상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과 죽으심만을 놓고 세상사람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어 머니 마리아와 육적 아버지 요셉이 호적하러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서 멀리 예루살렘 남쪽 베들레헴까지 내려가고 베들레헴에 도착해서는 해산이 임박하여 여관도 구할 수 없어서 마굿간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누으셨습니다.
또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서 나름대로 무언가 해보겠다고 3년 동안 이 사람 저 사람 무식한 사람들을 모아서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하나님을 참람케 하는 자라는 죄명을 쓰고 33세에 저주의 상징이라는 십자가형에 처하여졌으니 얼마나 그 인생이 기구한 것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 나, 그러한 낮은 데서의 탄생과 십자가상에서의 저주받으신 죽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선물을 허락하셨습니까? 그것도 한 친구를 위한 죽음이 아니요 한 세대가 아닌 모든 세대의 모든 인류를 위한 죽음임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태어나시고 사람 가운데 거하시고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시작되고 창세기 3장 15절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원대한 인간구원의 계획과 역사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대강절의 기간을 보내고 있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그의 죽음이 있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부적격자였는지 세 번에 걸쳐서 강조하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6절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라고 했고,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고 했으며, 10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When we were still weak or powerless)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강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권능이 있을 때가 아니라 능력이 없을 때입니다.
우리의 상태가 어떠했나 하면 경건치 않은 자(ungodly)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은 없다 부인하는 자도 있었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경건한 자를 핍박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연약하며 불경건한 모습 가운데서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에 우리를 의로 여기신 것은 우리가 강건하기 때문도 우리가 경건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약하고 불경건하였지만, 그의 은혜로 우리로 주님께로 가까이 나오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을 허락하시고, 그 믿음 때문에 우리를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조차도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7-8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인줄도 모르고 살 때 하나님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을 위해 미리 마련하신 속죄물, 곧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을 위한 죽으심과 우리 인간의 인간을 위한 죽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인간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과 선한 사람을 위하여 죽는 사람이 드물거나 혹 있다고 했습니다.
이 의인이나 선인은 자기의 친한 친구이거나 가까운 친척일 것입니다. 불의한 자나 선하지 않은 사람--친구나 친척이라고 하더라도--을 위해 죽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불의할 때에 경건치 않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선하지 못한 우리의 죄를 위해 미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9-11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9-10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구원함을 얻을 것’입니다: 9절에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했고”; 10절에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짐을 지시고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復活)하심은 우리 인간의 과정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죽으시고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살아나신 것 같이 우리 믿는 사람들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는 삶을 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의로 말미암아 살아나신 것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와진 인간이 살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의로와질 뿐 아니라, 우리의 의로와짐으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영원히 함께 사는 구원함에 이를 것입니다.
구원(救援)은 9-10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를 그 마음 가운데 느끼고 사는 사람은 현재에도 그 구원의 기쁨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 는 바울이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한 대로, 성령의 인치심이 장차 일어날 사건인 구원의 확실한 보증, 약속이라는 말씀입니다.
현재,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역사하심을 느끼십니까? 약속을 변개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해서, 성령의 인치심을 얻은 우리는 구원이 미래의 사건이지만 ‘구원받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11절에서 바울은 다시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서 1-2절의 말씀을 요약·반복합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화목(和睦)은 1절의 화평을 대신한 말로서 그리스도의 화목제사의 결과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즐거워할 이유가 있습니다.
3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의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감싸고 있습니까?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의 삶을 살아갔는데, 하나님 밖에 있을 때는 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갔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우상과 짝할 때에는 연약한 자의 삶을 살아갔는데, 하나님을 알고 그분 안에 거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게 되었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의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감싸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에 들어가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함으로 여러분을 대신하여 속죄제와 화목제가 되신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삶으로서 증거하시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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