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19, 2012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전서3:13-22)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전서3: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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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트 키스(Kent M. Keith, 1949-)라고 하는 시인의 “Paradoxical Commandments(역설적 명령)”라고 하는 시의 일부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네가 친절하면 이기적이고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은 너를 속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네가 오랫동안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루밤새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도 무언가 이룩하라.
    네가 평화와 행복을 누리면 그들은 질투할지 모른다.
    그래도 행복하라.

    네가 오늘 행한 선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내줘도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도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바르고 선한 삶을 살면 세상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수룩한 사람이라거나 단순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은 성경 속에서 뿐 아니라 대부분 성인들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노자와 부처의 가르침에도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노자는 그의 도덕경(道德經) 8장에서 가장 으뜸의 선(上善)을 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선(善) 가운데 가장 으뜸의 선(善)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하여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힘을 다한 섬김,
    때를 가린 움직임.

    다투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 받을 일도 없습니다.

불교의 가름침에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基意) 시제불교(是諸佛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악한 일은 짓지 말고/선한 일은 받들어 실천하라/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는 뜻입니다.
「경덕전등록」이 전하는 이 일화는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와 도림선사(道林禪師)의 대화에서 유래한 칠불통계(七佛通戒)입니다. 칠불통계란 석가모니 이전 과거 칠불(비바시불■시기불■비사부불■구류손불■구나함모니불■가섭불■석가모니불)이 한결같이 당부한 훈계로, 곧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말합니다.
시인 백거이가 “어떤 것이 불법(佛法)입니까?”라고 묻자, 도림선사가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은 받들어 행하라”고 대답했습니다. 백거이가 그것은 세 살 짜리 아이도 알겠다고 빈정대듯 말하자, 도림선사가 “세 살 짜리 아이도 말할 수 있으나, 팔십 된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합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1703-1791)는 선을 행하는 삶에 대하여,
“Do all the good you can, By all the means you can, In all the ways you can, In all the places you can,
At all the times you can, To all the people you can, As long as ever you can.“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가능한 모든 때에,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순간까지“)라고 권고했습니다.
선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시편기자를 위시한 성경기자들이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고 찬양한 것같이 우리 믿는 사람의 선의 기준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善)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께서 본래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마음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던 이 선한 양심이 그들의 타락함으로 인하여 상실되어지고 다만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순자(芛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고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는데,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타락하기 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가 말하는 양선(良善)은 사람이 갖고 있는 본래 선한 마음은 배우지 않고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한 양심이란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들을 지으실 때 그분의 형상을 따라 주신 모습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 최초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21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선한 양심을 갖고 선을 행하기를 힘씀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아담의 칠 대 손 에녹이 선한 양심으로 선을 행할 때 그와 동행하시고 하늘로 들림 받게 하시고, 카인 대신에 선인(善人) 아벨을 택하시고, 악한 세대에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와 그의 가족을 물 가운데 구원하시고, 패역한 세대 중에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와 그의 자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선하신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선한 양심을 가지며 선을 행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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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특별히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그의 원래 이름 시몬은 히브리어 샤마아(שׁמע)에서 유래된 단어로 “들었다” 라는 뜻인데, 예수님은 그에게 아람어로는 게바, 헬라어로는 베드로--“반석”이란 뜻의 이름을 주십니다. 즉, 이는 예언적 축복이신데 “반석과도 같이 든든한 그의 믿음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신앙고백(信仰告白)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믿는 이들의 믿음 위에 세워질 것이라는 예언이십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까지 베드로의 삶은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 다니기는 하였지만 “의를 위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감당할만한 담대함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으로 거듭나매, 주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난받고 순교 당할 당시의 로마 황제는 역사상 최악의 폭군 네로(Nero: 54-68)였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 악독한 네로를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더욱 더 믿음 위에 견고히 서게 하심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고난은 믿는 이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애매한 고난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20절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가끔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선한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한다고 행하는데도 오해를 받고 욕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도 베드로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을 기억하고” 참고 선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오?” 합니다. 여기에서 선(善)이라 하면 인간의 윤리적인 “선”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선을 말합니다. 이러한 선을 행할 때,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의 육체에 고통을 가할 수는 있으나, 혹은 죽일 수도 있으나, 우리의 속사람--영(靈)은 해(害)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 이하에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患難)이나 곤고(困苦)나 핍박(逼迫)이나 기근(饑饉)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確信)하노니 사망(死亡)이나 생명(生命)이나 천사(天使)들이나 권세자(權勢者)들이나 현재(現在) 일이나 장래(將來) 일이나 능력(能力)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했습니다.

14절에서 베드로는 “의(義)를 위하여 고난(苦難)을 받으면 복(福)있는 자니”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신 말씀과 상통(相通)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도, 두려워하거나 소동치 말고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나 주위 사람이 “너는 어찌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낙망하지않고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물어볼 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현재에 고난(苦難)을 받으시면서도 소망(所望)을 갖고 있는 이유(理由)를 무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대답할 때,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苦難)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榮光)과 족히 비교(比較)할 수 없기에 소망(所望)을 가지고 장차의 영광(榮光)을 기다리며 인내(忍耐)한다”고 합니다.
아주 바른 대답(對答)입니다.

그는 “우리가 고난 당할 때도 소망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삶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불의(不義)한 자들에 의하여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천사(天使)들과 권세(權勢)들과 능력(能力)들을 순복(順服)시키시는 승리(勝利)하는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도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서 고난당할 때에도 소망 중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게까지 선행으로 대할 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우리는 목자장(牧者長)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榮光)의 면류관(冕旒冠)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삼일동안 음부에 머무셨었으나 그의 부활(復活)하심을 통하여서 살아있는 자나 죽어서 옥(獄)에 갇혀있는 모든 자의 영들에게 그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선포(宣布)하셨습니다. 그는 고난 당하신 것 같으나 부활하심으로, 참으로 승리하심을 모든 자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체(肉體)로는 고난 당하고 죽으나, 영(靈)으로 영원(永遠)히 사는 길은 세례(洗禮)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에게 구원방주(救援方舟)를 예비하셔서 물세례를 통하여서 살게 하시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물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시는 세례를 통하여 구원하신 것처럼, 세례를 통하여 우리 영(靈)이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례(洗禮)를 통하여 우리는 죄(罪)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됩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된 우리는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당하신 그 고난 당함을 두려워하거나 원망치 않고 핍박하는 자를 용서하고 선행으로 대할 때, 그들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16절).
바울도 로마서 12장 20절에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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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信仰生活)은 종종 너무 근시안적(近視眼的)이고 피상적(皮相的)이며 얄팍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의를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주위 사람들의 시선(視線)을 더 의식(意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 6:3)고 하셨는데, 나의 선행(善行)을 선전(宣傳)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의를 위하여 고난 당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세상의 이(利)를 위하여 고난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怨望)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늘에서의 축복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여러 가지 복을 누리기 원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피해가기를 원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의 한 식민지 총독(總督)이었던 플리니(Pliny)의 황제(皇帝)에게 드리는 보고서에 의하면, “초대교회 어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다 잡혀 십자가 상에 순교(殉敎)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십자가의 형틀에 내어주어 순교당할 것을 자청(自請)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생각할 때 “십자가에 순교 당함이 천국행 보증수표”라는 생각에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당하는 고난을 인내하고 소망을 갖고 선한 양심을 갖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일부러 가난에 처하고, 세상에서 실패(失敗)하고, 일부러 고난을 자청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할 때도, 세상에서 실패할 때도, 핍박받고 고난 당할 때도 소망을 갖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주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귀히 여기십니다.

예배드릴 때 심령이 새롭게 되어 영에 속한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의 모든 종류의 고난--특히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 가운데도 승리(勝利)하는 크리스천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祝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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