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에서 생명으로" (요한복음 5: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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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어릴 때였습니다. 어느 해 여름 날 학교수업을 마치고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때마침 폭우가 내리고 천둥이 치더니 별안간 벼락이 떨어져 함께 가던 친구가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너무나 놀라고 슬퍼서 친구를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그는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한 순간이 아닌가? 육체는 한 조각의 종이 부스러기와 같지 않은가? 영원히 사라져 자취가 없으니 도대체 지상에 있는 명예가 무엇인가?”
커서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고 후에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만년에 루터는 자신이 죽을 때가 됨을 알고는 한참 명상에 잠겼다가 눈을 뜨고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사망을 면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저도 어릴 적에 가까이에서 죽음을 목격하였습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진해(鎭海)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한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함께 길을 건너는데 해군트럭이 그 아이를 치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한 순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어머니도 쓰러지고 아이도 쓰러졌는데, 그 아이는 피바다를 이룬 상태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습니다. 해군트럭은 아이를 치고 쏜살같이 어디로 뺑소니쳐버렸습니다.
그 어머니는 거의 실성한 상태로 대성통곡을 하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저도 그때 네다섯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저를 엄습하였습니다.
“사람이 과연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죽으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이후에도 한동안 저의 가장 큰 고민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공자님의 가르침에 유익한 것이 많이 있지만 공자님은 죽음의 문제에 만족할만한 답을 주지 못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더 더욱이 없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 자로가 공자님에게 “감히 죽음에 대하여 묻겠습니다”라고 할 때 공자님은 솔직하게 “아직 사는 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고 대답합니다(논어 선진편).
석 가모니도 생노병사의 문제와 윤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보리수나무 아래서 수양하였지만 그가 얻은 답은 열반(涅槃, Nirvana)이라는 것입니다. 열반은 존재의 정지--불꺼진 창과도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인데 수행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또한 죽음과 이 후의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답이 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첫째는 이 세상에서 축복 받기 위함이요 둘째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만일 죽음 뒤에 아무 것도 없다면, 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믿는다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기에, 죽음 후에 심판대에 서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사람의 죽음의 판정은 그 사람의 뇌가 활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활동을 중지하였는가와 그 사람의 심장이 박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박동을 멈추고 있는가로 결정합니다.
심장이 박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뇌의 활동이 중단되어 있으면 뇌사(腦死) 판정을 내리고 뇌가 활동을 정지한 상태에서 심장의 박동만 있는 사람을 식물인간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은 것을 또한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과 죽은 자들은 의학적인 판단이거나 일반 사람들이 죽음을 정의하는 것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를 말씀하고, 죽음이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지구상에 60억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 중에 50억 이상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자들이요 따라서 죽은 자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죽은 자들을 살게 하는 생명을 전하는 일이기에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감당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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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과는 구분된 독자적인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가 행하신 일을 사람들의 더 가까이에서 행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주고 계신 것은 그는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20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보이시고 행하시기를 원하신 일이란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부활의 하나님께 죽은 자들을 살리는 능력과 권세가 있으신 것 같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도 죽은 자들을 살리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은 자들’이란 육체로 죽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누구를 살리는가 하면 ‘자기의 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리시기를 원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에게로 가까이 나아와 그를 바라보고 그의 음성 듣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22-23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세상의 사람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의 권세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다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생을 사셨고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신 까닭입니다.
사람의 성품을 갖고 사셨기에 또한 사람들에 대하여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거 죽어봐야 아는 것 아닙니까?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교만하게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영생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영생을 얻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이는 그만큼 말씀에 관하여 무지한 까닭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해서,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는 다니는데 말씀은 듣지 않고 늘 자기의 생각대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믿음하고는 무관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어봐야 우리에게 영생이 있는지 없는지 아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고 붙잡는 사람에게 이미 영생의 약속이 주어졌는데,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한 번 약속하신 것을 변개함이 없으십니다.
요한복음 6장 47절에서 예수님은 반복하여 말씀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하십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에서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망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된 상태이며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인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8장 51절에서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면”이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지키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내 말을 지키면”은 “내 말을 믿으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지킴으로 죽음-하나님과의 분리를 영원을 보지 않는 성도 되기를 바랍니다.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죽은 자들이란 생명이 있는 것 같지만, 기실은 없는 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자의 삶은 생명이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듣는 자들은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6-27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해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22절 말씀을 반복함입니다. 아들에게 심판의 권세를 주심은 그의 인자(Son of Man) 됨을 인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사람들 가운데 삶을 살아가셨기에 사람들을 심판하는 일을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인자(人子)란 표현은 구약에도 나오는데 에스겔서에는 ‘사람의 아들’의 뜻으로 에스겔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호칭이요 다니엘서에서는 사람의 아들로 오시는 메시야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5장 13-14절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人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28-29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께 생명과 심판의 권세가 있음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기한이 다 차고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분으로 임하실 때입니다.
그 때 모든 인생들에게 심판하시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릴 터인데,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악함과 선함의 기준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나아와 그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믿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에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선한 자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모두 부활될 것인데, 선한 자 곧 믿는 자는 영원히 살기 위하여 부활할 것이며, 악한 자 곧 믿지 않던 자는 심판 영원한 죽음을 위하여 부활할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형벌 가운데 놓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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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얻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고백을 하면 됩니다.
그리할 때 그 사람에게 이미 영생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까?
영생을 얻은 사람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하기에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영생을 얻은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만 영생을 얻은 기쁨으로 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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