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 위에 달린 놋뱀” (민수기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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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뱀은 악령 또는 사단과 교통하므로 교활과 저주의 상징으로 뿐 아니라 치병(治病)과 예언(豫言), 축사(逐邪), 그리고 액운(厄運)을 막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해로운 동물을 쫓는 데는 보다 치명적인 독을 지닌 동물이 이용되는데, 이집트에서는 뱀 부적을 부치면 뱀을 쫓는다고 여겼습니다. 실제 그리스, 로마, 아랍, 미국 인디언, 아비폰(Abipones), 통가 등지에서는 뱀에 물린 상처를 뱀살을 발라 치료한다고 합니다.
아테네(Athen)에서는 갓난아이 이마에 뱀 부적을 붙여서 뱀 악마의 농간을 막는다고 합니다.
뱀이 치병의 능력이 있다고 믿은 증거로 미국 인디언들과 난디(nandi)에서는 의사가 들고 다니는 주머니를 뱀가죽으로 만들고 치병의 권능을 뱀으로부터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멜라네시아의 만스르(Mansren) 족에서는 뱀 제의가 있는데 여기서 뱀은 만병통치의 능력을 지닙니다.
그리스 신화의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어스 역시 뱀이고 셈족, 마다가스카르의 의신 역시 뱀이어서 의사는 늘 뱀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요한계시록에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지방의 교회들에 편지하는데 그 중에 버가모 지방은 그리스 신화의 치료의 신, 의술의 신인 뱀 형상을 한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를 숭배하던 곳이었습니다.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있는 곳이라 버가모에는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은 폭이 20미터 길이가 800미터나 되는 웅장한 길이었다고 합니다. 그 길가로 대리석 기둥들이 웅장하게 서 있었습니다.
이 신전에는 병원과 의과대학과 사제들이 있어 당시에 유명한 병원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아스클레피오스 신의 상징은 뱀이었습니다.
뱀이 껍질을 벗듯이 병자가 고통의 껍질을 벗고 치료됨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딸이 들고 다니는 지팡이에는 언제나 한 마리의 뱀이 둘둘 말려 있었습니다. 이 뱀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성한 하인이었고, 해마다 다시 소생하여 탈피함으로서 새로운 정력을 소생시킨다는 스태미너의 심벌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이에서 유래하여 지금도 군의관의 뺏지는 지팡이에 뱀 두 마리가 감긴 도안이고, 앰뷸런스 차에 표시된 그림, 유럽의 병원과 약국의 문장은 치료의 신, 의술의 신을 상징하는 뱀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 뱀은 원죄(原罪), 간교의 상징, 재탄생, 생명, 영생의 상징 등으로 분석된다고 합니다.
꿈에 뱀이 나타남을 태몽(胎夢)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뱀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와 관련하여 아기를 갖기를 원하는 불임 여성은 그의 신전을 찾아가고 거기서 꿈에 뱀을 보면 임신을 하였다고 합니다.
뱀은 겨울잠을 자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성장할 때 허물을 벗습니다. 이것이 죽음으로부터 매번 재생(再生)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불사(不死)→재생(再生)→영생(永生)의 상징으로 무덤의 수호신, 지신(地神), 죽은 이의 새로운 재생과 영생을 돕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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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애굽에서 나와 시내 산에서 일년 가까이 머물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들이 들어갈 땅 가나안에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었으나 그들이 돌아와서 하는 보고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보고에 따르면, 가나안 거민들은 장대하여 그들이 감히 싸워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을 발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없음으로 정탐꾼들이 탐지한 날 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삶을 살게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에 둔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발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에 대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무리가 당을 지어 모세에게 대항할 때 하나님께서는 땅을 갈라지게 하시어 그들을 삼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사르는 불로, 때로는 염병(染病)으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시지만 그들은 어리석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가데스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할 때 에돔 땅을 지나 지름길로 가고자 에돔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땅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에돔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해서 그들은 가데스에서 호르산에 이르고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에돔 땅을 둘러 동편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백성들의 불평이 드러나지기 시작합니다.
5절: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사람들은 흔히 현재의 조그마한 고통은 잘 견디지 못하면서 과거의 어려움은 별 것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존재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던 애굽 땅은 그들에게 풍요와 자유의 땅이 아니라 빈곤과 억압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신음하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까닭에 모세로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길을 우회한다고 하여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발하는 그들은 참으로 우매한 백성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었더니 왜 물에 빠져죽게 놔두지 건져내었느냐?” “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항의한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발함은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생활할 때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닌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싫다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들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숨쉬는 공기에 대하여도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 광야의 행진에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에 감사하기는커녕 왜 이런 고생을 하게 하셨느냐고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6절: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으로 따진다면 골백번도 멸망당해 마땅한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가벼운 징계로 끝나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들의 불평이 하늘까지 치솟을 때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십니다. 해서,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7절: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뱀들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 중에 무는 일을 계속합니다. 이러다간 살아남는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으로 다급해진 백성 중에 얼마가 모세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발한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뱀에게 물려 죽게 된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물리지 않은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기 위하여 뱀들을 그들에게서 떠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약간은 다혈질적인 사람으로 백성들의 불평을 참지 못하여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적도 있지만,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향하여 원망을 발하는 백성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백성들이 그들을 위하여 뱀들이 떠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자 두 말 없이 하나님께 중보기도합니다.
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그저 치료하여 주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신 징계의 저주를 저주의 상징인 뱀을 통하여 치료하심입니다. 저주를 저주로 제하는 치료방법입니다.
뱀에게 물린 상처를 뱀살을 발라 치료하는 민간요법도 있다고 했는데, 비슷한 이치이기도 합니다.
히스기야가 악성종기의 죽을 병에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의 병이 낫겠다고 선포하셨지만, 그 당시의 민간요법에 따라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종처(腫處)에 놓게도 하십니다(왕하 20:7).
9절: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순종하여 놋으로 뱀을 만들고 장대 위에 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장대 위에 달린 뱀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치의 틀림도 없습니다. 겧갭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궛 했습니다.
“놋뱀을 쳐다봄”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놋뱀을 바라봄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사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림”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14-15절에서 모세의 놋뱀 사건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의 사건에서 장대는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요,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사람들을 위하여 저주거리가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인하여 죽음의 저주 아래 놓인 사람들을 저주에서 풀어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저주거리가 되신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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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은 바 되셨습니까?
우리를 죽음의 저주, 율법의 저주, 사단의 저주에서 살리시기 위함이심입니다.
어떻게 저주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 위에 놋뱀을 바라봄으로 죽음의 저주에서 구원받았던 것같이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믿음입니다.
생명이요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저주가 되시사 우리를 저주에서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십니까?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해서 여전히 저주 아래 놓인 자의 삶이 아니라 축복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의 기쁜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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