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February 4, 2012

"타협하지 않는 믿음" (다니엘서 3:13-30)

                                         "타협하지 않는 믿음" (다니엘서 3: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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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국과 한국에서 여자가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자가 한 나라의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설교하는 목회자로서 저는 여전히 성경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는 말씀대로 설교하기를 원하며, "아내 된 자는 남편 된 자에게 순복하라"(엡 5:22-24; 골 4:18; 벧전 3:1)는 말씀대로 가르치기를 원합니다. 해서, 요즘 대부분의 교회가 그러하듯이 여성 교우들이 남성 교우들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곳에서는 때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목회자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때로 고리타분하게 보여지더라도 말씀에 충실하게 해석하며 삶에 적용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안전한 믿음의 생활이라고 말씀드립니다.
 
현대의 많은 교단과 교회들이 진보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위험에 처하여 있음을 봅니다. 이것은 이래서 이렇게 해석할 수 있고, 저것은 저래서 저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하다보면,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 기준이 흔들리고 우리의 삶의 기준도 흔들리게 됩니다. 해서, 성경을 포함한 모든 기준이 상대적이요 시대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현재의 위험한 사조(思潮)인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 빠져들게 됩니다.

동성연애를 옹호하며 동성연애자들--동성연애의 사실혼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목사나 장로의 안수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경학자들이나 목사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동성연애의 죄는 그 당시에는 죄로 규정되었을지 모르지만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성향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동성연애성향을 가진 사람이 동성연애를 하고 그들의 혼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장로나 목사의 안수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해서, 미국 특정 교단에 속한 어떤 교회들, 성공회에 속한 어떤 교회들, 캐나다 장로교회에 속한 어떤 교회들에서는 이미 동성연애자임을 밝힌 사람들에게 목사나 교회 중직의 안수를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일본인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의 『침묵』(沈默, Silence)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17세기 일본이 무대인데 신앙심이 돈독하고 덕망이 높다는 명성으로 젊은 사제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페레이라 신부가 혹독한 고문 끝에 배교를 했다는 소식이 일본으로부터 포르투갈에 전해집니다. 이 변절의 소식을 들은 젊은 사제 세 명이 그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일본 땅을 찾습니다. 그중 한 사람 마르타 신부는 병으로 중도탈락하고 가르페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가 일본인 신자들이 모여 사는 도모기라고 하는 작은 마을로 잠입합니다. 가르페 신부는 일본관리들에 붙잡혀 바닷가에서 장대에 매여 밀려드는 바닷물에 수장을 당하고,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요세페 캘러라고 하는 실존인물을 소설화한 것이라고 함)도 붙잡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강요받습니다. 일본관리는 그를 고문하고 죽이는 대신에 일본인 신자들을 고문하며 그 처절한 절규를 로드리고 신부로 듣게 합니다. 그리곤, 그에게 속삭입니다: "저 연약한 믿음의 일본인 신자들이 불쌍하지 않냐? 네가 그저 한번 예수의 성상을 발로 밟기만 하면 저들을 놓아줄 것이다. 그저 한 번 성상을 밟아라."
로드리고 신부는 갈등합니다. '그래 나는 이미 주님께 내 생명 전부를 드리기로 작정했으니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저 일본인 신자들은 나 때문에 너무 심한 고문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나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저들을 위해서 배교(背敎)해야 하지 않을까?'
로드리고 신부는 예수님의 성상을 발로 밟으면서 다시 자기에게 말합니다: '내가 비록 나의 발로 예수님의 성상을 밟지만 예수님도 내 마음을 이해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야. 그저 이번 한 번 뿐이야.'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그러나, 이 음성은 기실은 그 자신과 타협하기 위한 그의 마음의 음성일 따름입니다.
일본인 관리들은 로드리고 신부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가 다시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게 놔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의 관리들에 이용당하며 약한 신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배교에 배교를 거듭한 것 같이 그도 약한 신자와 새로 잠입해 들어오는 외국신부들의 색출과 설득의 명분으로 이용당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사단은 주님의 이름을 팔아서까지 우리를 그 발아래 굴복시키고자 합니다. 사단은 또한 합리적이요 논리적이요 다수의 의사라는 미명으로 우리를 설득하고자 합니다.
2
다니엘과 함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궁에서 환관장 아스부나스에 의하여 교육되어진 세 친구가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하나야와 미사엘과 아사랴였습니다. 후에 그들의 이름은 바벨론식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데, 해서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칭하고, 하나야는 사드락이라, 미사엘은 메삭이라, 아사랴는 아벳느고라고 칭하게 됩니다.       
그들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궁에서 교육되어진 것은 다름아니라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히스기야 왕에게 예언케 하신 대로 유다의 왕족 또는 귀족으로 바벨론 왕의 궁에 환관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응한 것입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다가 나았을 때, 당시에는 작은 나라였던 바벨론의 사신이 문병(問病)차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를 얕잡아보고 자랑삼아 보물고와 내탕고와 군기고의 모든 것을 그에게 보여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열왕기하 20장 17-18절과 이사야서 39장 6-7절에서 이사야를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말씀하실 때,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150년 가량 흘렸을 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어김없이 이행되었습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잘 해석하여 준 까닭에 다니엘을 높여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하며 또 다니엘의 요청에 따라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육십 규빗(=약 27미터)이고 넓이가 여섯 규빗(=약 2.7미터)나 되었습니다.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다고 했습니다(3:1).
그리고는 그 나라에 사는 모든 백성들과 이방인들에게 금 신상에게 절을 하라고 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으리라고 경고합니다.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다니엘의 세 친구를 고소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12절).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그의 앞에 끌어오게 하고 그들에게 묻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짐짓 절하지 아니하였느냐?" (14절).
"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금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15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대답합니다: "왕이 만일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으시면 우리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우리를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우리를 그저 격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그대로 죽게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17-18절).
2세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이 붙잡혀 그 지방의 총독 앞에 섰을 때, 총독은 폴리캅으로 그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케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회유합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대답할 때 "나의 주님이 팔십육년 동안 나를 사랑하시며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내가 주님을 배반할 수 없노라"고 말합니다.
총독은 불을 준비하여 폴리캅을 살라 죽이고자 했지만 불이 그의 몸을 사르지 못합니다. 결국에 옆구리를 찔러 죽이지만 죽음의 위협 앞에 떳떳하였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굴복하거나 자신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대답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풀무를 평일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여 그들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고 명합니다.
그 풀무의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 속으로 던지기 위하여 그들을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풀무 속에서 벌어졌습니다. 분명히 결박하여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은 사람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극렬한 불 가운데 타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결박이 풀려있고 또 한 사람이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네 번째 사람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보내시어 그들의 용기를 북돋우신 것이며 그들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이 '신들의 아들과 같은 사람'을 어떤 성경학자들은 성자 하나님의 구약에서의 나타나심이라고 믿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에 서서 그들을 불러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28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의 자고한 왕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함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타협하지 않는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들이 만일 느부갓네살의 위협과 회유 앞에 굴하였다면 그들은 믿음을 배반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며, 느부갓네살이 입술로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부름도 없었을 것입니다.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袴衣)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시편 121편 5-6절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 울은 로마서 8장 31-34절에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입으로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찬양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28절).
그리고 조서를 내려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대하여 망령되이 말하는 자는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를 삼을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였다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 당하기를 즐겨하는 자녀들을 보호하시며 모든 위험에서 건지시며 그들을 높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배반치 아니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이름과 그 의를 위해서 고난 당하며 핍박 받는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0-12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평안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평안의 시대와 평안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바른 믿음, 타협하지 않는 믿음을 지키기가 핍박과 환난의 시대를 사는 성도들보다 더 어렵습니다. 평안의 시대에는 주변에 비성경적인 것이 많지만 그저 눈을 감고 지나쳐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할수록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할 것이며”(벧전 4:7) 무엇이 바른 믿음,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믿음인지 늘 살피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남들이 많이 가는 넓은 길이 편하고 안전한 길 같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가기를 원치 않으시는 길일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의 길은 무엇인가 늘 생각하고 기도하며 그 진리의 길, 좁은 길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인도함 받는 교우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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